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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회답부사 강홍중 경주에 머물다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41호 입력 2026/07/30 10:42 수정 2026/07/30 10:44
경주의 조선 스토리(217)

오상욱 시민전문기자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확대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

도촌(道村) 강홍중(姜弘重,1577~1642)은 1624년 8월 20일부터 다음해 3월 26일 사이에 정사 정립(鄭岦,1574~1629), 종사관 신계영(辛啓榮,1577~1669) 등과 통신사 회답부사(回答副使)로 일본을 갔다 오면서 보고 들은 것을 『동사록(東槎錄)』에 남겼다.


당시 통신사는 한양-충주-문경-상주-대구-경주-동래(부산)-부산포-대마도-오사카-에도 일반적 이동경로였고 대부분 경주를 경유하였다. 『동사록』을 보면 1624년 8월 20일 한양–양재참,판교촌-용안역-충주-조령-문경현-함창현-용궁현-예천-안동-영천 신녕을 거쳐 9월 9일 경주에 도착하였고, 1624년 9월 9일부터 13일까지 5일간 경주에 머물며 간략히 여정을 남겼다. 돌아오는 길 1625년 6월 9일에는 경주 판관 안위(安偉)가 연향을 베풀기 위해 밀양으로 가서 통신사의 노고를 함께 하였다. 기록을 보면,


1624년(인조2) 9월 9일(경신)
아침에 흐림. 한욱재(韓勗哉)가 술자리를 베풀어 상사ㆍ종사와 더불어 모두 모였다. 신녕현감이 영천 겸관으로 또한 참석하였는데, 기녀들이 앞에 나열하고 풍악을 울리며 잔을 돌려 권하여 마음껏 마셔 만취하였다. 아불(阿佛)에서 점심 먹었는데, 청도군수 최시량과 하양현감 이의잠(李宜潜,1576~1635)이 지대차(支待次) 나왔다. … 정담(鄭湛)ㆍ박돈(朴墩)이 술을 가지고 찾아왔는데, 모두 지산서원(芝山書院) 지산 조호익에게 수업한 자였다. 저녁에 경주에 다다르니, 부윤 이정신(李廷臣) 영공이 보러 왔다. 청하현감 유사경ㆍ영덕현령 한여흡ㆍ경산현령 민여흠ㆍ흥해군수 홍우보 등이 혹은 지대차, 연수(宴需)의 보조차 왔다. … 일행의 인마(人馬)는 이곳에서 모두 교체하였다.

9월 10일(신유)
저녁에 비. 경주에서 머물렀다. 조반 후에 상사ㆍ종사와 함께 봉황대에 나가 구경하였다. 봉황대는 성밖 5리쯤에 있으니, 곧 산을 인력으로 만들어 대를 세운 것이다. 비록 그리 높지는 않으나 앞에 큰 평야가 있어 시야가 훤하게 멀리 트였으니, 월성ㆍ첨성대ㆍ금장대ㆍ김유신묘가 모두 한눈에 바라보였고, 옛일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워져 또한 그윽한 정서를 펼 수 있다. 봉덕사 종(鐘)이 대 아래에 있는데, 이는 옛 신라의 물건으로 또한 고적(古跡)이다. 나라에 큰 일이 있어 군사를 출동할 때에는 이 종을 쳤다고 한다. … 생원 최동언(崔東彥)이 보러 왔다.

9월 11일(임술)
맑음. 경주에서 머물렀다. 연향을 받았는데, 부윤과 흥해수령도 같이 참석하였다.

9월 12일(계해)
맑음. 경주에서 머물렀다. 조반 후에 종사와 더불어 대청에서 활을 쏘았고 … 일행 군관을 두 패로 나누어 활을 쏘게 하고 승부에 의하여 상벌을 시행하였다.

9월 13일(갑자)
맑음. 해가 돋은 후 일행이 모두 출발하여 동정(東亭)에 당도하니, 옛날 최고운이 살던 구기(舊基)에 부윤과 흥해군수가 먼저 와서 전별연을 베풀고 기악(妓樂)을 울리며 술을 권하여 나도 모르게 만취가 되었다. … 구어참(仇魚站)에서 점심을 먹었다.

강홍중은 1603년 사마시에 합격, 승문원과 삼사(三司)의 여러 벼슬을 지내고 조랑(曹郞)과 통례(通禮)를 역임하였고, 회답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군자감 정(正)이 되었다. 여헌 장현광(1554~1637)의 제자로, 장현광은 경상도 유학의 거두로 경주 옥산서원과 양동마을 그리고 이언적의 학통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동사록』에는 경주의 여러 문인과의 송별 및 교유 기록이 등장하여, 당시 영남사림의 인적 네트워크를 확인하는 사료가 된다.

경주부윤 이정신(李廷臣,재임1623.10~1626. 07)은 성문 밖에서 통신사를 영접하고, 관아에서 공식 접견 그리고 국왕의 명을 받은 사신에 대한 예우를 담당했다. 이는 조선 외교사와 경주 지역사를 연결하는 구체적인 사건이고, 부윤 호칭 대신에 영공(令公)이라 칭한 것을 보면 매우 정중하게 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앞서 1610년 경상도관찰사 때 정유재란에 포로가 되었던 진주인 승려 육혜(六惠)가 일본인과 함께 부산에 도착한 일을 조정에 보고한 적이 있고, 회답부사로서 일본에 다녀와서 군자감 정(正)이 되어 화포술(火砲術)을 전했지만, 말년에 김해부사로 재직 때 언양의 거부 신전(辛荃)의 재산을 노리고 그의 딸을 처로 삼아 협박하여 재산을 차지하였다는 이유로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니 처신이 궁색하였다.

통신사가 경주에 당도할 때 양동의 이의잠과 부윤 이정신 등이 예를 갖추었고, 생원 최동언(崔東彥) 등이 주빈을 담당하였다. 특이점으로 봉황대를 인력으로 만든 산으로 표현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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