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경주병원 소화기내과 서정일(58) 교수가 지난 1일 제20대 병원장으로 취임했다. 신임 서정일 병원장은 영남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소화기내과 전문의를 취득했으며 간염, 지방간, 간경화, 간암, 췌장암, 담도암을 전문분야로 하고 있다.서정일 병원장은 보건복지부장관상을 비롯해 세계 3대 인명사전 중 하나인 국..
경주시가 올해 처음으로 시행하는 교복 구입비 지원 정책이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부모들에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될 전망이다.경주시는 올해 지역 소재 중·고등학교 신입생과 경주에 거주하면서 다른 시·도 소재 중·고교에 입학한 신입생 등 3800명에게 교복 구입비용을 지원한다. 지역 내 중학교..
경주시와 경주시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경주통합 RPC), 미곡류 전문유통기업 광복영농조합법인은 15일 ‘이사금’ 쌀의 안정적인 공급과 판매를 위해 MOU를 체결했다.경주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MOU에는 주낙영 시장, 경주통합 RPC 주관농협인 안강농협 최덕병 조합장, 광복영농조합법인 전병순 대표가 참석해 ‘이사금’..
황룡사 9층 목탑을 형상화한 탐방로가 황룡사 부지 옛터에 들어선다.경주시에 따르면 ‘황룡사 역사문화관’ 인근 북서편 2만2300㎡ 공간에 사업비 9억5600만원을 들여 탐방로를 포함한 잔디광장과 산책로를 조성한다. 신라왕경특별법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이번 사업은 경주시의 중·장기 문화재 정비계획에 따라 추진된다...
경주한수원 남자축구단이 13일 토요일 오후 3시 경주시민운동장에서 평택시티즌FC를 상대로 2021년도 K3리그 홈 개막경기를 치른다.‘사회적 거리두기’ 완화에 따라 개막전은 관중석 30% 이내의 유관중으로 진행된다.21년도 K3리그는 이날 개막전을 시작으로 11월 27일까지 총 15개팀이 정규리그 28경기(홈14경기)와 챔피..
경주시는 경상북도수산자원연구원과 함께 11일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앞 형산강에서 은어 치어 10만 마리를 방류하고 환경정화운동을 실시했다.형산강은 경주에서 시작해 포항을 거쳐 동해로 이어지는 하천으로 시는 지난 2019년까지 각 지역단체와 주민 등 많은 인원과 함께 은어를 형산강에 직접 방류해보는 체험형식으로 ..
경주시가 자체 개발한 물 정화 기술인 ‘급속처리기술(GJ-R공법)’이 우수성과 친환경성을 인정받아 환경부로부터 ‘녹색기술인증’을 획득했다.이에 따라 시는 공공구매 조달심사와 다수공급자계약(MAS) 심사 시 우대를 받는 등 정부로부터 다양한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녹색기술인증’은 에너지 자원의 효율..
경주시 안강읍 두류공업지역 내 폐기물매립장 건립을 추진한 업체가 11일 사업을 포기했다.경주시에 따르면 두류공단 내 폐기물매립장 건설을 신청한 A사가 이날 사업 포기의사를 밝혀 사업심의가 내부 종결처리 됐다.A업체는 지난해 8월 안강읍 두류리 일원 부지 5만9158㎡에 매립용량 226만2976㎥ 규모의 폐기물매립장을 ..
케렌시아(Querencia) 월, 화, 수, 목, 금, 금, 금.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가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나에게만 오롯이 집중하는 공간과 시간이 갖고 싶다. 케렌시아는 나만의 공간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바람이자 욕구다. 손영희 작가 010-2837-7616 / syong1244@naver.com 동국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동 대학원 미술학과 석사과정 개인전 2회, 2020 부산국제작가아트페어 부스참여, 경주예총예술제, 경주미술협회정기전, 한·일 교류전 및 단체전 다수, 새하얀미술대전 초대작가 현) 한국미술협회, 경주미술협회, 경주수채화협회 회원
경주신문이 국세통계 홈페이지를 통해 2016년~2020년까지 5년 간 경주지역 사업자현황 및 100개 생활밀접업종을 분석한 결과 사업자는 늘어났고, 업종변화가 두드러졌으며, 일부 업종의 경우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12월말 기준 경주지역 14개 업태별 사업자수는 개인 3만5897명, 법인 5055명 등 총 4만952명이었다. 이는 2016년 12월말 기준 총 사업자수 3만5861명 대비 5년 새 5091명 증가한 수치다. 경주시 인구의 16%에 달하는 시민이 사업자인 셈이다. 특히 지난해는 2019년 말 3만9043명 대비 사업자수 증가율이 4.9%로 최근 5년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앞서 2016년 말을 기점으로 매년 사업자 증가율은 각각 1.8%, 2.8%, 4.0%였다. 이같이 지난 1년 사이에 사업자가 급증한 것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코로나19가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여 진다. 사업자 증감을 살펴보면 14개 업태 중 서비스업, 음식업, 부동산임대업, 소매업, 제조업 등 5개 업종 사업자수가 상위 5위에 들었다. 특히 부동산임대업은 5년 사이 40% 가까이 증가했다. 이는 지난해 1월 연 2000만원 이하 주택임대소득 과세를 위해 사업자등록이 의무화됨에 따른 영향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 최근 1인 가구 증가와 맞물려 원룸신축이 늘어난 것도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시민들의 경제수단인 생활밀접업종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가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해 영세 소상공인들이 큰 타격을 받으면서 업종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다. 간이주점, 옷가게, 식료품가게, 노래방 등의 업종이 줄어들었고 통신판매점, 펜션·게스트하우스, 커피음료점 등의 업종은 크게 증가했다. 지난 5년간 지역 사업자수와 업종 변화를 보면 경주의 인구구조와 및 사업추진 방향과도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3~40대 사업자수가 줄고 60대 이후 사업자가 크게 늘어난 것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경주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이며, 30세 미만 사업자가 매년 꾸준히 증가한 것은 황리단길 활성화와 도심재생사업 등 청년창업정책으로 인한 사업자가 증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경주시 인구에 비해 개인사업자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젊은 층의 경우 만족할 수준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소규모 창업을 택하고 있어 긍정적인 경제 활동구조라고 볼 수만은 없다고 하겠다. 경주시의 인구와 경제 규모에 비해 사업자가 과다하게 많고 업종에 따라 변화가 심하다는 것은 결국 지역에 취업 또는 재취업의 기회가 적고 만족할 만한 업종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한 경주지역 서민경제구조는 지난 10여년 동안의 변화보다 훨씬 컸다. 시민들은 코로나19 상황에서 새로운 업종에 도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됐으며 경주시의 지역경제 활성화 정책도 이에 걸 맞는 다양한 정책이 요구되고 있다. 시민들이 직장을 다니든 창업을 하던 경제활동을 통해 보람을 찾고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경주시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경주대와 서라벌대학 통합 이야기가 나온 지 3년이 지났지만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재단과 두 대학 측의 의지 부족으로 밖에 보여 지지 않는다. 저출산, 학령인구 감소로 전국의 지방대학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같은 재단인 경주대와 서라벌대학은 올해 신입생을 충원하지 못하는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재단과 두 대학 관계자들은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연말 두 대학은 통합을 위한 MOU를 체결하고 상호 동등한 입장에서 통합을 추진하기로 했었다. 무엇보다 지역사회에선 경주지역민단체가 두 대학 관계자들과 함께 간담회를 개최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나섰지만 두 대학의 의견차이로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모양새다. 최근 간담회에서 두 대학의 입장표명을 보면 발 빠른 통합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주민들은 “대학 정상에 도움이 된다면 서명을 받아 교육부에 제출하는 등 적극 나서겠다”는 반면, 서라벌대학 관계자는 “서라벌대는 통폐합논의가 없었다. 교육부에 질의 결과 임시이사회는 의결이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며 대학 간의 논의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했다. 경주대 관계자도 “임시이사회는 학교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정이사 체제에서 통합 논의가 진행된다. 이 자리는 주민 의견을 듣는 자리지 내부 통합 논의는 잘못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두 대학 관계자들의 입장을 보면 아직 통합에 대한 내부 조율도 안 되고 있으며 마치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것으로 비춰지고 있다. 두 대학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다. 그만큼 두 대학의 향배가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두 대학이 통합을 통해 대학을 살리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시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재단이나 두 대학 관계자들이 대학 통합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 일은 없길 바란다.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은 경주를 내륙도시로 알고 있는데 바다와 접해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란다. 경주의 자연해안선은 포항 호미곶을 지난 오류해변부터 시작해 약 25km구간인 연동, 오류, 척사, 감포, 전촌, 나정, 가곡, 대본, 봉길, 나아, 양남, 읍천, 하서, 진리, 지경까지인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2014년 6월 5일에 발표한 해양수산부 국립해양조사원 수로측량과의 통계에 의하면 경주시의 육지부와 도서부 해안선의 총길이는 44.51km이고 자연해안선만 25.53km에 달한다. 경주시청의 조직도를 보면 농림축산해양국 아래 해양수산과는 4번째로 해양수산과 아래에 수산행정, 수산진흥, 연안관리, 해양산업팀으로 구성되어 해양에 대한 경주에서 해양산업에 대한 비중이 매우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리적으로 보면 경주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인 감포로 가려면 토함산이 가로 막고 있다. 왕복 2차선 터널이 뚫리고 한수원이 들어와서 국도4호선이 포장되고 추령터널이 뚫렸지만 경주시내에서 감포로 가는 길은 여전히 멀다. 오히려 동경주IC에서 남포항으로 가는 게 훨씬 빠르다. 65번 고속도로가 경주와 연결되지 않고 포항이나 울산, 부산으로 빨려 들어가게 생겼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번영을 누렸던 것은 바다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나당연합군이 삼국통일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역사책에도 등장한다. 경덕왕 이후 신라 사람들이 당나라에 신라방을 만들어 거주하고 당, 일본과 해상무역활동을 했다. 당시 신라방은 지금의 산둥성 등주와 장쓰성에 걸쳐 존재 했다.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에는 많은 외국인이 등장한다. 처용은 그 한 예로 그가 아랍 사람이고 신라에 와서 지냈다는 사실을 처용가를 통해 배운다. 모두 해양장악력이 충만하고 해상무역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의 일이다. 그 정점에 해상왕 장보고가 있다. 장보고는 신라 흥덕왕 3년에 신라 사람들이 해적들에게 노예로 팔리는 참상을 전한 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더 이상 신라 사람들이 노예로 팔리지 않게 만들었다. 장보고가 해상권을 장악해 해상무역을 독점하면서 신라는 혼란기 마지막 번영을 누리는 듯 보였지만 장보고가 살해되고 청해진이 없어진 후 90년 만에 통일신라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서구열강들도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에 바다를 통해 식민지를 개척하고 활발한 해상무역으로 국력을 키웠다. 그러나 바다에서 벌어진 전쟁의 승자가 결정되면서 명암이 엇갈렸고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마지막 승리자가 되었다. 바다를 중시하며 발전하는 것은 지방자치 단체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수산업도 과학화되어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진화했고 어업가공 기술과 산업도 다양하게 성장하고 있다. 해운과 수산, 이를 기반으로 한 해양관광 등은 같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현격히 다르다. 그런 만큼 훨씬 다각적인 측면에서 바다를 연구하고 성장동력을 키워야 한다. 경주의 정치와 경제 리더들이 해양을 통해 산업을 성장시키겠다는 포부와 정책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 한 예로 코로나19 사태에서 해운업은 최고의 산업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해운항만은 수출입물동량의 99.7%를 차지한다. 이렇다 보니 해외로 나가는 컨테이너 운반비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해운업은 디지털 항만 관련산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일본의 경우 디지털을 매개로한 공항과 항만, 국가산업단지를 복합개발하고 있다. 세계적인 해양물류업체인 Maersk Line과 글로벌 IT기업인 IBM이 합자해 Tradelens라는 회사를 만들었는데 이는 기술적으로 AI를 기반으로 한 자동화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항만물류시스템을 결합한 결과다. 이웃한 포항과 울산, 부산도 신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항만을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런 한편 2019년 2월 21일 황진회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본부장이 NEAR 크루즈관광국제 포럼에서 “포항·경주를 가진 경북은 크루즈 산업을 유치할 자원과 좋은 시기를 맞고 있다. 이를 살리기 위해선 집중 투자와 치밀한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관광이 전멸했지만 백신의 보급과 함께 전염병은 조만간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바다는 다양한 해양산업, 관광산업의 새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바다를 개발해야 미래가 있다. 경주가 바다를 어떻게 이용하고 개발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4월 7일 서울, 부산 시장 보궐선거의 열기가 뜨겁다. 그러나 이는 전초전이다. 내년 3월 9일의 대통령선거가 메인 이벤트이다. 만약에 여권이 서울, 부산 시장 선거에서 모두 진다면, 그것은 여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다. 거꾸로 두 자리를 모두 얻는다면, 여권 그중에서도 친문세력은 지난 국회의원 총선에 이어 다시 한 번 탄력을 받으며 대통령 선거를 자신들의 의중대로 이끌어나갈 힘을 얻는다. 이 때문에 여권은 4월 7일의 선거에 마치 목숨을 걸고라도 해치우려는 듯이 덤벼들었다. 선거법 위반이고 뭐고 없다. 우선은 이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는 절박감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4월 7일 시장보선은 예선에 불과하다. 본선은 어디까지나 내년의 대통령 선거이다. 이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하지만 워낙 변수가 많아 1년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전망의 정확성은 보잘것없을 수 있다. 그런데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 3월 5일 퇴임함으로써 큰 불확실성의 하나가 제거되었다. 그는 유력한 대선주자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거듭 확인되었음에도 공직에 있었다. 또 그의 출마를 막으려고 하거나 그를 음해하는 여권의 공작이 워낙 집요하게 추진되어 와서 그라는 유력한 변수를 대선결과의 예측 산술에 제대로 넣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보다 큰 그림을 한 번 그려보자. 이 그림 속에서 우리는 대선의 전망을 조금은 뚜렷하게 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나 지금의 문재인 정부는 다른 것 같으면서도 아주 비슷하다. 그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문재인 대통령도 청와대에서 거의 ‘혼밥’을 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두 사람의 성향이 어쩌면 대단히 닮았을지 모른다. 그것은 가까운 측근에 휘둘리고, 소수의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외에는 믿지 못하는 폐쇄적 스타일이라 인사를 아주 좁은 영역 내에서 한다는 것이다. 물론 문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더 강한 팬덤을 갖고 있고, 그 팬덤을 적절히 이용하며, 감성정치의 달인이라고 평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박근혜 씨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으나 아무래도 문 대통령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런 성향은 정치의 실종을 낳았다. 무엇인가 제대로 국정이 굴러가지 않는다는 강한 불만이 제기되어왔다. 현실의 문제를 과감하게 정확히 분석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즉각 대처하지 못한 채 국정의 동력이 무척 약하였다. 그 결과 생겨난 유약하고 무능한 리더십이 낳는 여러 부작용이 군데군데 생겨났고, 이런 속에서 국민들은 ‘10년간의 리더십 위기현상’을 타파할 수 있는 강한 지도자를 희구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 현상을 바라보며 일찌감치 예측하였다. 윤석열 총장은 조만간 정계에 진출할 것이고 그와 이재명 지사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투 톱을 이루어 각축을 벌일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내 예측이 맞았던 셈이다. 그러나 권력에 흠뻑 취한 친문세력이 절대, 호락호락 두 사람 중의 하나가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가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여권의 강경파가 중수청의 설립 등으로 ‘검찰의 폐지’를 추진해온 것도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그 실체가 조금 더 뚜렷해진다. 더욱이 이번 4월 보선에서 서울, 부산 시장 선거에서 모두 이긴다면 그들은 막판 뒤집기를 강력하게 시도할 것이다. 그 반전의 시도는 내년 대선을 결정지을 국민의 의사를 왜곡, 변개하여 권력의 장악을 꾀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거처럼 총칼에 의한 것이 아니란 의미에서 현대판 ‘연성쿠데타’라고 할 수 있고, 집권세력 내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는 ‘친위쿠데타’라고 부를 수도 있다. 과연 친문세력이 마지막 벌일 정치투쟁은 성공할 것인가? 친문세력에서 내세울 수 있는 사람 중 이재명이나 윤석열에 필적할 수 있는 강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필사적인 시도는 난관에 부닥칠 수 있다. 또 최근 생긴 ‘LH사태’가 그들의 발목을 끈질기게 잡는 귀신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내년 대선에 관한 내 전망을 독자 여러분들이 가진 전망과 한 번 비교해보면 어떨까 한다. 그리고 여건 야건 강력한 개성을 가진 후보자들이 출현하여 국민을 위한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현상을 바라보며, 그들이 잘해나가도록 응원해주었으면 한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은 1572년(선조5) 자옥산 아래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선생을 모신 공간으로, 경주부윤 서간(西澗) 이제민(李齊閔,1528~1608.재임1571.08~1574.02)과 도내 유림들의 공의로 세워졌다. 1573년 서악의 향현사(鄕賢祠)에 임시 봉안된 위패를 옥산으로 모셔왔고, 사액(賜額)을 받았다. 회재의 삶을 한마디로 일축하기는 어려움이 많지만, 무오사화(1498)·갑자사화(1504)·기묘사화(1519) 그리고 을사사화(1545)·정미사화(1547:양재역벽서사건) 등을 겪으며 정당의 처신과 사상과 학문에 많은 변화를 가졌다. 사실 정미사화의 직접적인 계기는 정언각(鄭彦慤)이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권력을 농단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를 서서 기다릴 것인가?’라는 벽서를 발견하면서, 권벌(權橃)·이언적·정자(鄭滋)·노수신(盧守愼)·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513~1577)·백인걸(白仁傑) 등 20여 명이 유배 당하였다. 그 가운데 유희춘은 하서 김인후 등과 교유하였고, 선조의 신임을 받은 인물로, 『회재집』 발문을 남겼다. 회재선생 사후 그의 행적을 담은 시문학 작품들이 아들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1516~1568)에 의해 수집되고, 1565년 퇴계 이황이 지은 행장(行狀)이 추가된 정고본(定稿本:필사본)이 제작된다. 1574년 잠계의 아들 구암(求庵) 이준(李浚,1540~1623)은 경주에서 부윤 이제민과 경상 감사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의 도움을 받아 회재집을 처음 간행하였고, 이후 옥산서원에서 1600·1624·1631·1641·1794·1864·1926년 등 여러 차례 개간되었다. 《이병훈, 「조선시대 경주 옥산서원의 위상 변화」,『한국서원학회』, 2020》학술논문에 의하면 “옥산서원은 문묘 종사 대현인 이언적을 제향하는 서원으로서 경주부윤과 향인, 후손, 문인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건립되었다.”언급하였고, 실상 후손들 가운데 구암 이준 등이 회재의 서적을 간행하고 서원건립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경주부윤 초당(草堂) 허엽(許曄,1517~1580.재임1564.09~1565.02)은 『회재집』 발문에서 “만력 계유년(1573, 선조6) 12월에 경주 이회재(李晦齋) 선생의 손자 이준이 찾아와서 경주 부윤 이제민의 편지와 선생의 유고집(遺稿集)을 꺼내 보여 주었다. 일찍이 이 문집은 퇴계 선생이 손수 교정하여 돌아가실 무렵에야 끝내셨다 하니, 반드시 정밀함을 다하여 한 글자도 온당하지 않은 부분이 없을 것이다. … 부윤 공이 또 나에게 서문과 발문을 요청하였는데, 내가 비록 글을 잘 못하지만 사양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며 회재집 학문연원의 깊이와 문집편찬의 과정 등을 설명하였다. 당시 경주부윤을 지낸 허엽과 이제민 등은 옥산서원 건립과 문집편찬에 많은 관심과 협조를 하였고, 지역 유림들과 공조해 서원운영에도 일부 동참하였다. 원래 서원은 당색이 분명한 공간으로 때로는 훼철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지만, 옥산서원은 서원훼철의 화살을 비껴나 지금도 온전함을 과시한다. 회재 이언적 선생 문집 발문 - 유희춘 영의정 회재 이언적선생의 도덕과 학문은 퇴계 이황이 자세히 말하였으니, 어찌 후생(後生)의 군더더기 말을 기다리겠는가? 다만 선생의 시문은 근엄하고 정확하여 한 글자도 구차한 것이 없어서 유림 가운데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전체의 문집(全集)을 보기를 원한 지가 오래되었다. 지금 계림 부윤 이제민(李齊閔)이 방백[경상 감사] 노진(盧禛)에게 청하여 목재를 모으고 목공을 모집하여 개판을 마치고 발문을 나[유희춘]에게 부탁하였다. 또 서원의 누(樓)ㆍ재(齋) 등의 이름을 지어주기를 요구하니 내 어찌 감히 담당하겠는가? 하지만 천 리 밖의 요청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삼가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선생의 아름다운 덕을 아는 자는 태산북두(泰山北斗)라 하고, 모르는 자라도 일시제일류(一時第一流)라 합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생은 일생동안 『소학(小學)』에 힘을 쏟아 『대학(大學)』에 나아가신 분으로, 그칠 데를 알아 정함이 있고 고요함을 지키려는 뜻이 많았을 것이니, 누와 재의 이름도 아마 반드시 이러한 뜻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또한 훌륭한 많은 선비들이 높은 산을 우러러보듯이 존경하니 이 재에 거처하고 이 누에 오르는 자는 진실로 인륜을 밝히고 몸을 공경히 하는 근본을 배양하고,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경지에 이름으로서 선생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선생께서 말을 세우고 모범을 드리운 것이 후학들에게 무궁한 은택이 될 것이요, 여러 선비들도 선생을 저버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문집을 간행하는 성대한 뜻입니다. 부윤께서도 어찌 이것으로써 여러 선비들을 격려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만력(萬曆) 갑술년(1574, 선조7) 2월 초, 가선대부 행 홍문관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동지성균관사 유희춘 삼가 발문을 쓰다.
지난해 봄은 악몽이었습니다. 코로나19의 시작이었으니까요. 올해 봄도 그리 사정이 나아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훨씬 희망에 부풀어 있는 것 같습니다. 더디게 꾸물거리며 봄이 다가오고 있어 맘에 들진 않지만 한겨울 시린 기운을 뚫고 피어오르는 이른 봄꽃들을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화들짝 성큼 다가온 봄 마중을 위해 꽃 나들이를 나갔습니다. 꽃마중 가는 내내 봄기운처럼 푸근해지고 느슨해져서일까요? 스프링처럼 쏙쏙 솟아오르는 봄꽃들 속에서 어김없이 약동하는 생명력을 보았습니다. 곧 꽃으로 뒤덮일 경주의 산야에는 봄이 물오르고 있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 곁에 찾아온 경주의 봄은 노랑색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칩이 지난 경주의 들과 산을 수놓는 복수초, 산수유, 영춘화 등은 모두 노랑색이고 봄의 대표적 전령들이죠. 그 중에는 노랑보다는 은은한 매화의 색채들이 경주 곳곳을 수놓기 시작합니다. 율동 두대리 성주암자에선 독특한 동백들과 매화가 이미 개화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기지개를 켜고 있는 봄꽃들의 근황 찾아 성주암에 들렀습니다. 율동 두대리는 서악동 태종무열왕릉에서 ‘소티고개’를 넘어 건천 방면으로 5분여 가다보면 만나는 유서깊은 마을입니다. 마을 주위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벽도산은 작지만 아늑하게 느껴집니다. 간이역이었던 율동역의 무인철도건널목을 지나고 마을회관 쪽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이 마을의 당산목을 만납니다. 거기서 곧장 좁고 구불한 길로 오르다보면 오래돼 보이지만 정갈한 작은 암자가 그윽하게 나타납니다. 암자 입구서부터 은은한 매화향이 전해졌습니다. 자주 찾아가는 암자지만 이 암자를 찾을 때 마다 설렙니다. 그것은 사계절 내내 각기 다른 풍경을 감상하는 즐거움 때문일 것입니다. 이 암자는 일명 ‘성주암’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바로 이 암자 뒤편 너른 바위에는 ‘경주율동마애여래삼존입상’ 석불이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서 있습니다. 8세기 후반의 마애불인 이 입상석불은 볼수록 정감이 가는 마애삼존석불 입상이지요. 암자 주위의 다양한 꽃들과 꽃길은 어느 한 스님의 발자취라고 하는데요, 마을 주민의 말에 의하면 오래전 지어졌던 이 암자에 1980년대 말에 스님 한 분이 오셨고 스님은 무척 꽃을 좋아해서 희귀한 동백 여러 종과 매화, 목련, 수국, 명자나무, 옥잠화, 녹차나무 등을 심고 지극정성으로 가꿔 사계절 꽃으로 둘러싸인 지금의 성주암을 즐길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야흐로 목련은 꽃봉우리가 부풀어있었고 매화향이 진동하는 가운데 흔히 볼 수 없는 분홍과 짓붉은 겹동백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경칩 지난 경주 야생의 들과 산에선 바람꽃, 복수초 등 봄의 전령들 ‘쏙쏙’ 피어나고 있습니다. 깊은 우울의 그림자를 떨치기엔 봄꽃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성주암의 봄을 즐겨보세요. 글=선애경 문화전문기자 그림=김호연 화백
오페라는 16세기 끝에 이탈리아에서 탄생하여 17~18세기에 온 유럽으로 확산되더니 19세기에 낭만주의와 함께 마침내 전성시대로 돌입한다.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는 오페라는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대략 100년 동안의 전성시대 작품들이다. 전성시대는 오페라마저도 잘 쓴 천재 모차르트(W.A.Mozart/1756-1791)가 열었다고 볼 수 있다. 모차르트 이전의 작곡가들이 쓴 오페라 중 지금까지 무대에 오르는 작품은 별로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이탈리아어로 된 다 폰테 3부작(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과 독일국민을 위해 독일어로 쓴 마술피리는 가히 불멸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은 오늘날 오페라 가수라면 누구나 서고 싶은 꿈의 무대다. 바로 이곳에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와 베르디, 이른 바 이탈리아 오페라 4대 천황의 동상이 놓여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극전성기를 이끈 인물들이다. 오페라 종주국 이탈리아는 19세기 중반까지도 오페라 권력의 중심이었다. 로시니(G.A.Rossini/1792-1868)를 수장으로, 그의 제자 도니체티(G.Donizetti/ 1797-1848)와 벨리니(V.Bellini/1801-35)가 서로 경쟁하며 19세기 초중반의 오페라를 이끌었다. 그들은 소위 벨칸토 3총사라 불린다. 특히 도니체티와 벨리니는 광란의 오페라로 프랑스혁명 이후의 혼란한 사회상을 무대에서 극적으로 표현했다. 이어서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왕 베르디(G.Verdi/1813-1901)의 보유국이 된다. 그는 바로크 오페라처럼 성악에 편향된 벨칸토 오페라를 극복하고, 독일의 바그너와 경쟁하며 오페라를 역사상 최고의 경지로 이끄는 저력을 발휘한다. 베르디와 동갑내기인 바그너(R.Wagner/1813-1883년)는 일생을 이탈리아 오페라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이는 음악극의 창시로 이어졌고, 음악극은 극과 음악이 조화를 이루는 종합예술이었다. 바그너의 음악극은 니벨룽의 반지에서 정점을 찍었고, 온 유럽을 풍미했다. 이는 오페라 종주국 이탈리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이때 이탈리아가 전략적으로 내세운 인물이 바로 푸치니(G.Puccini/1858-1924)다. 하지만 푸치니는 베르디를 계승하여 위기에 봉착한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구하는 임무만 수행하진 않았다. 그는 바그너까지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내공을 발휘하게 된다. 또한 푸치니의 상상력은 유럽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일본, 중국,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범세계주의적인 오페라를 만들어 냈다.
자유로운 영혼들이 만든 노래들이 무지한 정권의 칼질로 인해 하루 아침에 금지곡이 되던 시대가 있었다. 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노래들이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금지되었고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정권의 감시 아래 암울한 세월을 살기도 했다. 가수들 중에서는 노래말 자체보다 정권에 영합해 활동하지 않아 눈엣가시가 되어 제재 당한 가수들이 더 많았다. 지금의 중년 세대라면 누구나 어렸을 적 즐겨 부르던 노래가 갑자기 세간에서 사라졌던 황당한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박귀룡 씨가 지난 3월 8일 ‘키덜트 뮤지엄’에서 전시중인 금지곡들을 포스팅해 눈길을 끈다. 포스팅을 중심으로 올라온 금지곡 부른 가수들과 금지된 곡, 이유들을 잠깐 살펴보면 그 시대의 살벌했던 순간이 불현 듯 떠오른다. 1.들국화 : 그것만이 내 세상 / 창법 미숙과 가사전달 불량 2.김추자 : 거짓말이야 / 불신조장의 여지가 있음 3.손인호 : 비내리는 호남선 / 사회를 비판적으로 풍자한다. 4.이애리수 : 황성옛터 / 망해버린 왕조의 옛 성터를 일부러 찾아가 우는 이유가 뭐냐? 5.고복수 : 타향 / 일제에 반하고 애국심을 말살한다 6.김민기 : 늙은 군인의 노래 / 군인들의 사기를 저하한다. 7.신중현 : 아름다운 강산 / 유신정권 찬양을 위한 노래제작을 거부 이 밖에도 송창식의 ‘왜 불러’는 반항적이고 노래 창법이 저속하다. 혜은이의 ‘제3한강교’는 어떻게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할 수 있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는 여자 가슴에 왜 멍이 드느냐? 등의 이유로 된 서리를 맞았다. 특히 금지곡 제조기라 할 수 있었던 이장희는 ‘그건 너’ / 책임을 전가한다. 불꺼진 창 / 불꺼진 창에서 뭐한다고?, 한잔의 추억 / 술 마시는 것을 조장한다는 핑계 등으로 금지곡이 되었다. 무지한 독재자들이 예술을 군화발로 짓밟을 수 있다 여겼고 국민을 세뇌하는 도구로만 알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우리나라 가수들이 한류의 이름을 달고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는 세상이 되었다. 그때 억눌린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들의 노래를 불렀던 가수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그들이 마음껏 기개를 펼 수 있다는 생각에 콧날이 시큰해진다. 마침 키덜트 뮤지엄에서는 그때 금지돼 부르지 못했던 노래들이 LP판을 통해 마음껏 울려 나오는 모양이다. 세대가 공감되는 신개념 박물관에서 아들과 손자 손을 잡고 권력의 횡포와 상관없이 자신만의 감성과 열정으로 노래 불렀던 가수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들을 들어보면 어떨까?
계절 없이 푸른 솔잎들이 꽃샘추위에 실핏줄을 돋운다. 천년을 둘러쳐온 솔향기가 소나무 숲길 따라 봄을 재촉하고 있다. 자취 모를 곳에서 그대가 걸어 나온다. 자취 모를 곳에서 내가 마중을 한다. 한걸음 또 한걸음 디딜 때 마다 흔적 모르게 다가오고 사라지던 천년을 옭아맨다. 홀로 그립고 쓸쓸했던 자국들을 소나무 뿌리 깊은 기억으로 박아둔다. 꽃샘바람에 휘청거리며 능의 품안에 안기는 하루가 천년숨결로 아득하다. 원성왕릉은 원형봉토분으로 봉분의 직경 2183㎝, 능묘의 높이 750㎝, 호석 높이 107㎝, ⌜신라왕릉 전기탐사와 구조해석⌟ 이진락 박사논문 기록이다. 원성왕릉은 신라의 능묘 중 석조물이 완벽한 유적지로 손꼽힌다.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빛바래지 않고 늠름한 소나무의 기백이 우렁차다. 왕릉의 완비된 능묘 모습은 왕위계승 관계가 부자상속 또는 형제상속과 연관이 깊다. 혈족으로 이어지는 안정적인 정치상황일 경우에 한하여 많이 나타나고 있다. 유구한 세월이 흘렀건만 나이 들수록 점잖고 근엄한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과 마주한다. 머리에 쓴 관모엔 곤충형상 장식이 조각되어져 있다. 김태식은 “괘릉 관검석인상은 무인(武人), 관(冠) 장식 곤충은 벌”이라 해석했다. 이진락은 “매미날개(翼蟬) 모양의 소각(小角) 2개가 위쪽을 향해 달려있는 익선관(翼蟬冠⦁翼善冠) 매미장식 관모”라 피력했다. 중국 현지 왕능들을 순회한 심층 있는 답사와, 해박한 지식의 학문적 근거자료를 제시했다. 문인석 또는 신라인으로 알려진 관검석인상은 기존의 주장을 부정하고 중국 북방자치국인 위구르인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제도상의 문무(文武)를 살펴보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702~737)조 ‘원년 9월에 문무관(文武官)에게 관작 한 급씩을 올려 주었다’라는 기록을 읽었다. 관검석인상을 관찰해 보면 전면은 대수장포(大袖長疱) 도포차림새다. 긴 홀(笏)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있다. 통이 넓은 소매 속에 잡은 홀이 양쪽 다리 사이에 나타난다. 대석 앞쪽 신발이 드러나고 뒷면에는 양당개라는 찰갑을 착용하고 있다. 1992년 발표한 권영필 논고에, ‘이 석인상 얼굴 윤곽은 각진 사각형이고 짙은 눈썹을 도드라지게 조각했다. 이마와 눈자위를 턱지게 하였으며 오뚝한 코와 꽉 다문 입 사이에 팔자형의 수염을 얹고 있다는 점, 또 양 귀밑에서부터 턱 전체를 가지런히 빗겨진 턱수염이 상당한 볼륨으로 덮고 있다. 가늘고 긴 눈은 한국적이라 다소 친근감이 있지만 악센트를 주고 있는 터럭들은 이례적인 점. 터럭들이 이란계와 같은 곱슬곱슬한 것이 아니라 직선형인 점 등은 위구르인들의 인상과 직결되는 요소들이다. 아울러 용강동 석실고분 출토의 문관상이 이에 해당된다고 하며 그들은 위구르인이다’라는 것이다. 신라의 능묘에 신라인 신하들을 도열하지 않고, 외국인 모습을 조각하여 배치하였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다양하다. 김원룡은 ‘신라인들은 당의 능묘제도를 숙지하고 있어서 능묘 앞에 문무인석과 객사를 도열시킬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와 당과의 관계가 대등한 관계에 처해 있지 못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제도에 대한 욕구는 당연히 당나라 제도의 축소 또는 자숙의 형태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乙亥: 795)에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 한 달을 머물다 돌아갔다. 하루가 지난 뒤에 두 여자가 대궐에 찾아와 아뢰었다. “저희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에 사는 용(龍)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 우물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마리를,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임금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을 호국용으로 여기에 다시 머무르게 해 주십시오”하니 왕이 직접 하양관까지 말을 타고 달려가서 친히 연회를 베풀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우리나라 호국용을 몰래 잡아 도망쳤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극형에 처할 것이다” 그제야 하서국 사람들이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주니 각각 물속에서 한 길이나 뛰고 기뻐했다. 이에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함에 감복했다’ 【삼국유사】 ‘어느 날 왕이 황룡사의 중 지해(智海)를 대궐 안으로 청하여 화엄경을 50일 동안 외게 했다. 사미 묘정이 매양 금광정(金光井) 우물가에서 바릿대를 씻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에 떴다가는 다시 가라앉곤 하므로 사미는 늘 먹다 남은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희롱했다. 법석(法席)이 끝나려 할 무렵 사미 묘정은 자라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 지가 오랜데 너는 무엇으로 갚으려느냐?” 했다. 그런지 며칠 후에 자라는 조그만 구슬 한 개를 입에서 토하더니 묘정에게 주려는 것같이 하므로 묘정은 그 구슬을 얻어 허리띠 끝에 달아놓았다. 그 후로부터 대왕은 묘정을 보면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대궐에 맞아들여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때 잡간(匝干) 한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그도 묘정을 사랑해 같이 가기를 청하자 왕이 허락했다. 당나라 황제도 묘정을 매우 사랑했다. 승상과 좌우신하들도 존경하고 신뢰했다. 관상 보는 이가 황제께 “사미 관상이 길(吉)한 상이 아닌데,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보배로운 물건을 지녔을 것입니다” 황제가 사람을 시켜 몸을 살펴보니 허리띠 끝에 작은 구슬이 달려있었다. 황제가 말하기를 “여의주 네 개가 있던 것을 지난해 한 개를 잃어버렸는데 내 구슬이라고 했다” 묘정은 구슬을 갖게 된 연유를 말했다. 황제가 구슬을 잃은 날과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이 일치했다. 황제가 구슬을 빼앗아 두고 묘정을 돌려보냈다 그 뒤로 아무도 묘정을 사랑하지 않고 신뢰하지도 않았다’
봄은 때론 느닷없이 찾아옵니다. 그 봄이 채 무르익기 전 ‘봄’ 이라는 시어를 유난히 즐겨 썼던 한 시인이자 학자가 고인이 되었습니다. 영원으로 이어진 봄날, 먼 길을 떠난 그의 별세 소식은 다소 느닷없어 우리를 깊이 슬프게 했습니다. ‘삼십 사년 반 동안 학생들에게 문학과 삶을 이야기하고 바른 세상을 위해 주위와 이웃에 최선을 다했다’라고 담담히 토로했던 그는 동국대 경주캠퍼스 국어국문학과 이임수 명예교수입니다. 그의 부고 소식은 마지막 시집의 제목인 ‘봄날의 사진 한 장’처럼 이 스산한 세상에서 그리움으로 펄럭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말 자유로워지셨을까요? 그 많은 인연과 윤회도 내려놓으셨을까요? 종신토록 ‘문학은 무엇이고 삶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물음에 자신이 없었다는 이임수 교수. 이제 바람에 날리는 꽃 잎 하나로, ‘봄꽃들 지고 보리밭 고랑 사이로 흘러가는 바람처럼’ 편하게 거하고 계시겠지요. 그랬습니다. ‘거미와 귀뚜라미들을 다치지 않게 장갑 낀 손안에 잡아 창밖으로 내보냈다’는 그는 항상 다정한 말씨와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진정한 ‘학자’셨습니다. 명징한 정신의 소유자로 학문에 대한 집념과 근성은 우리시대 보기 드문 선비의 기상을 가진 사표로 손색없었지요. 지역민들은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기여한 바가 큰 분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지역민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이였습니다. 그는 지난 1983년부터 동국대 국문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는 것은 물론, 여러 학문적 업적과 함께 특히 향가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그의 경주에 대한 사랑과 향가에 대한 집요한 연구가 없었다면 신라향가의 문학적 이해는 요원했을 것입니다. 신라향가의 독보적 연구자였습니다. 그는 또 생전 졸업생들에게 ‘국문학과에 시 쓰고 소설 쓰고 문학하는 게 좋아서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니 졸업하고 각자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살다가 삶이 힘들면 언제든지 고향처럼 여기 찾아오너라. 밥 한 끼 사줄게’ 하셨다죠. 참스승이 귀한 시절 늘 다정다감한 ‘선생’이었습니다.
1970년 대부터 1990년대까지 수석(壽石)이 전국적인 붐을 탄 적 있었다. 전국의 명산대천에는 돌 줍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어지간한 수석 하나에 그때 당시 금액으로 몇 십 만원부터 몇 천 만원 나가는 돌이 수시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심지어 자연석만을 수석으로 인정하는데도 불구하고 몰래 돌의 일부를 가공해 수석이라고 판매하는 사례도 생겼다. 그런 변칙 수석이 횡행하면서 수석열기가 급격히 꺼졌고 수석의 가치도 하락했다. 그러나 수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돌의 가치와 상관없이 꾸준히 수석생활을 지속해 왔고 인터넷 발달과 더불어 동호인을 중심으로 각종 커뮤니티도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2010년대 들어 수석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기 시작해 동호인의 수에서는 이전의 전성기를 뛰어넘을 만큼 수석 열정이 넘쳐난다. 그에 따라 유튜브상에는 수석을 전문으로 채널을 운영하는 전문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전의 인터넷 카페를 비롯해 수석 밴드들도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의 원류이자 수도라 할 수 있는 경주는 돌에서도 다른 고장에 비해 특별한 돌이 나는 명석산지로 유명하다. 봉계부터 서천에 이르기까지 분포하는 ‘혹돌’, 안강의 평원석, 남산 주변의 옥석 등이 전국 수석가들의 관심대상이다. 이렇다 보니 경주에도 수석에 관심 가진 사람들이 많고 수십 년 이상 취미생활해 온 수석가들도 여러 곳에서 활동한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한 인터넷 수석동호회 카페인 ‘무찰수석’ 카페를 만들고 관리하고 있는 윤병숙 선생이다. 옥룡암 근처 경상북도 임업시험장 주변 갯마을길에 자리잡은 윤선생의 집은 우선 담장부터 눈에 띈다. 한눈에 봐도 좌대위에 얹어 귀하게 대접할 법한 귀한 수석들로 담을 쳐놓았기 때문. 담 위에는 더 눈에 띄는 돌들이 우뚝 우뚝 솟아나 있어 누가 봐도 수석 고수의 집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무찰수석 카페는 3월 9일 현재 8042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고 전체적으로 9만6000개 글이 개시된,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수석카페다. 무찰수석이 시작된 것은 인터넷 카페가 활성화되기 이전부터다. 처음 경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동호인들을 중심으로 시작해 전국 각지역의 동호인들이 참여하며 동호회 홈페이지를 활성화 시켰다. 그러다 네이버에서 카페가 만들어지면서 2001년 4월부로 자연스럽게 네이버 카페 체계로 전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무찰수석 카페는 수석의 공간, 수석 나눔의 공간, 수석여행, 수석 전시회, 수석 자료실, 무찰 쉼터, 지역별 동호인 연락방 등 큰 카테고리 속에 80여개 작은 카테고리가 세분화 돼 있어 회원들의 다양한 수석 욕수를 만족시키고 있다. 무찰카페가 인상적인 것은 스마트폰 보급과 함께 인터넷 카페문화가 내리막길을 걷거나 대부분 회원들이 밴드로 옮겨가는 와중에도 굳건히 회원들의 활동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평일 하루 평균 올라오는 개시물이 30개 내외고 하루 평균 방문자 수가 천여 명에 이른다. 이렇게 카페가 활성환 된 이유는 초보자부터 고수까지 다양한 수석가들이 활동하고 특히 고수들을 통해 돌에 대한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것은 물론 전국 각지의 탐석지가 공유되기 때문이다. 돌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주워온다고 전부 수석이 될 수 없으므로 명석 산지의 정보 없이는 움직여봐야 헛고생이라는 사실이 지금도 초보부터 경력 있는 수석가들이 무찰카페를 찾는 이유다. 오랜 기간 탐석활동해온 수석 고수들은 돌 사진만 보고도 그 돌이 어느 지방에서 나온 돌인지 알 정도여서 초보자들을 지도하고 이끄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해주는 것이 이 카페의 매력이다.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열성적인 회원들이 자신의 정보를 나누어주고 탐석한 돌을 올려 좋은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초보자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전성기 때보다는 활동이 상당히 줄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주기적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주역들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게 돌에 대한 열정과 관계있을 겁니다” 지금도 꽤 활동적인데 윤병숙 선생의 말을 빌리면 지금보다 훨씬 활성화 되었다고 하니 그때의 카페는 오히려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카페 이력을 찾아보면 카페 출범 이후 전국규모 혹은 각 광역단체별 합동탐석활동이 꾸준히 진행되어왔고 수석전시회 역시 전국 혹은 지역별로 해마다 열리는 등 활발한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동호인 출품 수석으로 이루어진 ‘달력 만들기 행사’도 2016년까지 지속되었다. 무찰카페가 수석카페인 만큼 개시물 대다수는 단연 전국에서 채집되는 돌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의 여러 지류, 동해안 몽돌 밭, 거제도를 비롯한 남해안, 백령도와 선유도 등 서해 도서와 해안, 평창, 포천 등 전국의 토중석 산지에서 캐낸 이름 있는 수석들이 매일 3~40점씩 전시된다. 보고만 있어도 기묘한 전국의 수석들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꼴이다. “카페를 만든 것은 전국의 동호인들이 마음 놓고 활동하고 수석 생활을 통해 힐링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것에서 작은 보람을 느낍니다” 윤병숙 선생은 수석의 묘미는 수석 그 자체의 탐석활동에도 물론 있지만 그것보다는 수석활동을 통해 전국의 아름다운 풍광과 경치를 누리며 자연 속을 거니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며 수석의 보람을 설명한다. -카페 통해 나눔활동도 전개, 30만 원 이상 되면 유니세프에 자동 송금. 목공방 뜨락 운영하며 자연과 함께 삶 영위 여기에 카페를 통해 또 하나 의미 있는 실천을 병행해온 것이 윤병숙 선생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카페출발과 함께 전국의 동호회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독거노인, 불우한 외국인 근로자 등 소외된 사람들에게 꾸준히 나눔활동을 해온 것. 수석카페답게 나눔과 봉사에 관심가진 수석가들이 자신의 돌을 ‘수석나눔방’에 올려 입찰을 붙여 기금을 조성하는 식이었다. 지금은 이전만 못해 직접적인 지원을 하는 대신 30만원이 차면 자동으로 유니세프에 후원금이 빠져나가도록 조치해 두고 있다. 다른 어지간한 동호회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데 무찰수석 카페가 자발적으로 이런 나눔활동을 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윤병숙 선생은 이런 활동이 가능하도록 실질적으로 카페 관리를 맡고 있는 운영진들에게 그 공을 돌린다. 윤병숙 선생은 최근 들어서는 수석활동보다 목공공방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편이다. ‘뜨락’이라 이름 붙인 목공방은 윤병숙 선생이 소일을 겸해 운영하는 창작공간이다. “수석이 자연이 만들어 놓은 것을 찾는 작업이듯이 목공은 거친 나무속에 숨은 아름다운 결과 문양을 찾는 작업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수석이나 목공이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지요. 다만 돌은 자연상태 그대로를 즐기지만 나무는 창작의 즐거움을 줍니다” 처음에는 수석을 위해 좌대를 깎고 수석 올리는 지판을 만들면서 목공예 작업을 시작했지만 작업하는 과정에서 목공예의 매력을 느껴 지금은 생활에 필요한 각종 목기와 가구까지 만드느라 오히려 목공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윤병숙 선생의 집 안쪽에는 꽤 넓은 목공방이 있고 각종 목공 기계와 연모들, 온갖 귀한 나무들이 즐비하다. 목공방 맞은 편에는 작은 규모의 전시장도 마련되어 있어 윤병숙 선생의 목공 작품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다. 한눈에 봐도 수석의 아름다운 문양처럼 나무판에 화려하게 새겨진 나뭇결과 문양에 눈이 즐겁다. 그런 한편 집 뒤 넓은 밭에는 감나와 소나무 복분자 나무 등을 가꾸며 전원생활의 맛을 즐긴다. 엉뚱하게도 자연이 주는 대로 거둔다는 생각에 농약을 치지 않아 넓은 감나무 밭에서 지난 해 고작 두 상자의 감을 수확했다고. 이렇듯 수석과 나무에 묻혀 사는 윤병숙 선생은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지만 정작 철학공부에 더 심취해 대학 졸업 후 한 때는 출가해 절에 들어간 적도 있을 만큼 관조적 삶을 추구하고 있으며 지금도 명상과 좌선을 통해 좀 더 바른 삶을 향해 묵묵히 정진 중이다. 경주시에서 공직자로 활동하는 윤병숙 선생은 자신의 닉네임인 ‘무찰’처럼 억지로 무언가를 꾸미지 않는 속에서 물과 모래가 돌을 씻어내고 바람과 햇볕이 나무를 키우듯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런 그가 만든 무찰수석 카페이기에 역시 모나지 않은 좋은 사람들이 어울려 물 흐르듯 자연을 탐닉하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