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없이 푸른 솔잎들이 꽃샘추위에 실핏줄을 돋운다. 천년을 둘러쳐온 솔향기가 소나무 숲길 따라 봄을 재촉하고 있다. 자취 모를 곳에서 그대가 걸어 나온다. 자취 모를 곳에서 내가 마중을 한다.
한걸음 또 한걸음 디딜 때 마다 흔적 모르게 다가오고 사라지던 천년을 옭아맨다. 홀로 그립고 쓸쓸했던 자국들을 소나무 뿌리 깊은 기억으로 박아둔다. 꽃샘바람에 휘청거리며 능의 품안에 안기는 하루가 천년숨결로 아득하다.
원성왕릉은 원형봉토분으로 봉분의 직경 2183㎝, 능묘의 높이 750㎝, 호석 높이 107㎝, ⌜신라왕릉 전기탐사와 구조해석⌟ 이진락 박사논문 기록이다.
원성왕릉은 신라의 능묘 중 석조물이 완벽한 유적지로 손꼽힌다.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빛바래지 않고 늠름한 소나무의 기백이 우렁차다.
왕릉의 완비된 능묘 모습은 왕위계승 관계가 부자상속 또는 형제상속과 연관이 깊다. 혈족으로 이어지는 안정적인 정치상황일 경우에 한하여 많이 나타나고 있다.
유구한 세월이 흘렀건만 나이 들수록 점잖고 근엄한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과 마주한다. 머리에 쓴 관모엔 곤충형상 장식이 조각되어져 있다. 김태식은 “괘릉 관검석인상은 무인(武人), 관(冠) 장식 곤충은 벌”이라 해석했다.
이진락은 “매미날개(翼蟬) 모양의 소각(小角) 2개가 위쪽을 향해 달려있는 익선관(翼蟬冠⦁翼善冠) 매미장식 관모”라 피력했다. 중국 현지 왕능들을 순회한 심층 있는 답사와, 해박한 지식의 학문적 근거자료를 제시했다.
문인석 또는 신라인으로 알려진 관검석인상은 기존의 주장을 부정하고 중국 북방자치국인 위구르인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제도상의 문무(文武)를 살펴보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702~737)조 ‘원년 9월에 문무관(文武官)에게 관작 한 급씩을 올려 주었다’라는 기록을 읽었다.
관검석인상을 관찰해 보면 전면은 대수장포(大袖長疱) 도포차림새다. 긴 홀(笏)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있다. 통이 넓은 소매 속에 잡은 홀이 양쪽 다리 사이에 나타난다. 대석 앞쪽 신발이 드러나고 뒷면에는 양당개라는 찰갑을 착용하고 있다.
1992년 발표한 권영필 논고에, ‘이 석인상 얼굴 윤곽은 각진 사각형이고 짙은 눈썹을 도드라지게 조각했다. 이마와 눈자위를 턱지게 하였으며 오뚝한 코와 꽉 다문 입 사이에 팔자형의 수염을 얹고 있다는 점, 또 양 귀밑에서부터 턱 전체를 가지런히 빗겨진 턱수염이 상당한 볼륨으로 덮고 있다. 가늘고 긴 눈은 한국적이라 다소 친근감이 있지만 악센트를 주고 있는 터럭들은 이례적인 점. 터럭들이 이란계와 같은 곱슬곱슬한 것이 아니라 직선형인 점 등은 위구르인들의 인상과 직결되는 요소들이다. 아울러 용강동 석실고분 출토의 문관상이 이에 해당된다고 하며 그들은 위구르인이다’라는 것이다.
신라의 능묘에 신라인 신하들을 도열하지 않고, 외국인 모습을 조각하여 배치하였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다양하다.
김원룡은 ‘신라인들은 당의 능묘제도를 숙지하고 있어서 능묘 앞에 문무인석과 객사를 도열시킬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와 당과의 관계가 대등한 관계에 처해 있지 못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제도에 대한 욕구는 당연히 당나라 제도의 축소 또는 자숙의 형태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乙亥: 795)에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 한 달을 머물다 돌아갔다. 하루가 지난 뒤에 두 여자가 대궐에 찾아와 아뢰었다. “저희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에 사는 용(龍)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 우물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마리를,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임금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을 호국용으로 여기에 다시 머무르게 해 주십시오”하니 왕이 직접 하양관까지 말을 타고 달려가서 친히 연회를 베풀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우리나라 호국용을 몰래 잡아 도망쳤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극형에 처할 것이다” 그제야 하서국 사람들이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주니 각각 물속에서 한 길이나 뛰고 기뻐했다. 이에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함에 감복했다’
【삼국유사】 ‘어느 날 왕이 황룡사의 중 지해(智海)를 대궐 안으로 청하여 화엄경을 50일 동안 외게 했다. 사미 묘정이 매양 금광정(金光井) 우물가에서 바릿대를 씻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에 떴다가는 다시 가라앉곤 하므로 사미는 늘 먹다 남은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희롱했다. 법석(法席)이 끝나려 할 무렵 사미 묘정은 자라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 지가 오랜데 너는 무엇으로 갚으려느냐?” 했다. 그런지 며칠 후에 자라는 조그만 구슬 한 개를 입에서 토하더니 묘정에게 주려는 것같이 하므로 묘정은 그 구슬을 얻어 허리띠 끝에 달아놓았다. 그 후로부터 대왕은 묘정을 보면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대궐에 맞아들여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때 잡간(匝干) 한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그도 묘정을 사랑해 같이 가기를 청하자 왕이 허락했다. 당나라 황제도 묘정을 매우 사랑했다. 승상과 좌우신하들도 존경하고 신뢰했다. 관상 보는 이가 황제께 “사미 관상이 길(吉)한 상이 아닌데,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보배로운 물건을 지녔을 것입니다” 황제가 사람을 시켜 몸을 살펴보니 허리띠 끝에 작은 구슬이 달려있었다. 황제가 말하기를 “여의주 네 개가 있던 것을 지난해 한 개를 잃어버렸는데 내 구슬이라고 했다” 묘정은 구슬을 갖게 된 연유를 말했다. 황제가 구슬을 잃은 날과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이 일치했다. 황제가 구슬을 빼앗아 두고 묘정을 돌려보냈다 그 뒤로 아무도 묘정을 사랑하지 않고 신뢰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