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때론 느닷없이 찾아옵니다. 그 봄이 채 무르익기 전 ‘봄’ 이라는 시어를 유난히 즐겨 썼던 한 시인이자 학자가 고인이 되었습니다.
영원으로 이어진 봄날, 먼 길을 떠난 그의 별세 소식은 다소 느닷없어 우리를 깊이 슬프게 했습니다. ‘삼십 사년 반 동안 학생들에게 문학과 삶을 이야기하고 바른 세상을 위해 주위와 이웃에 최선을 다했다’라고 담담히 토로했던 그는 동국대 경주캠퍼스 국어국문학과 이임수 명예교수입니다.
그의 부고 소식은 마지막 시집의 제목인 ‘봄날의 사진 한 장’처럼 이 스산한 세상에서 그리움으로 펄럭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말 자유로워지셨을까요? 그 많은 인연과 윤회도 내려놓으셨을까요? 종신토록 ‘문학은 무엇이고 삶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물음에 자신이 없었다는 이임수 교수.
이제 바람에 날리는 꽃 잎 하나로, ‘봄꽃들 지고 보리밭 고랑 사이로 흘러가는 바람처럼’ 편하게 거하고 계시겠지요.
그랬습니다. ‘거미와 귀뚜라미들을 다치지 않게 장갑 낀 손안에 잡아 창밖으로 내보냈다’는 그는 항상 다정한 말씨와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진정한 ‘학자’셨습니다. 명징한 정신의 소유자로 학문에 대한 집념과 근성은 우리시대 보기 드문 선비의 기상을 가진 사표로 손색없었지요.
지역민들은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기여한 바가 큰 분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지역민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이였습니다.
그는 지난 1983년부터 동국대 국문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는 것은 물론, 여러 학문적 업적과 함께 특히 향가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그의 경주에 대한 사랑과 향가에 대한 집요한 연구가 없었다면 신라향가의 문학적 이해는 요원했을 것입니다. 신라향가의 독보적 연구자였습니다.
그는 또 생전 졸업생들에게 ‘국문학과에 시 쓰고 소설 쓰고 문학하는 게 좋아서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니 졸업하고 각자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살다가 삶이 힘들면 언제든지 고향처럼 여기 찾아오너라. 밥 한 끼 사줄게’ 하셨다죠. 참스승이 귀한 시절 늘 다정다감한 ‘선생’이었습니다.
-고 이임수 교수의 유족,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발전기금으로 천만 원 기부해 잔잔한 울림 고 이임수 명예교수가 지난달 26일 수년간의 투병 끝에 향년 70세로 작고했다. 이 교수는 투병 중 마지막 시집(2020년 출간)을 통해 ‘삶과 죽음처럼 순간과 영원의 거리가 그리 멀지도 않으며 이만큼 살았으니 언제 떠나도 미련은 없다. 그래도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다’고 위무하며 다가올 시간을 예감했던 것 같다. 장례는 경주문화축제위원장으로 치러졌으며 한평생 국문학자로 후학들을 길러냈던 경주동국대 교정에서 노제가 열렸다.
박임관 경주문화축제위원회장은 “매향이 지천으로 가득한 정월 대보름 날, 어찌 이리 홀연히 영면에 드셨답니까? 서라벌 유서깊은 고도에서 생전에 그토록 천 수백 년을 거슬러 들추어 온 향가 노랫말을 전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소년 같은 해맑은 웃음이 저렇게 고귀한데 이제는 정녕 그 모습 보여주지 않으시려니 남은 저희들의 허망함은 어찌합니까? 울컥 생각날 때는 부질주 한잔에 마주하듯 그리움을 곱씹겠습니다”며 조사에 갈음했다.
이 교수가 떠난 지 열흘 여, 지난 5일, 동국대 경주캠퍼스에 이임수 교수의 유족이 국어국문학과 발전기금으로 천만 원을 기부해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다. 이 교수의 배우자인 김을조 여사가 동국대와 국어국문학과의 발전을 위해 써 달라며 장학금을 전달한 것이다.
-“늘 제자를 다 챙겨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하셨죠... ‘부질없다’며 늘 소탈하고 소박하게 생활하셨습니다 이임수 교수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김억조 교수를 동국대학교에서 만났다. 이임수 교수의 제자기도 한 김 교수는 장례 당일 호상(護喪)을 맡아 유가족의 뜻을 존중하면서도 차분하게 이 교수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다.
“선생님은 늘 저희 곁에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2016년 정년퇴임 6개월 전 대장암을 판정받고 수술을 받으셨죠. 구정 전 댁에서 뵀는데 독한 약으로 신장까지 나빠져 악화된 상황으로 보였습니다. 사모님(김을조 여사)께서 ‘이렇게 빨리 가실 줄 알았으면 그렇게 싫어하시던 독한 약을 권할 게 아니라 당신 좋아하시던 술을 드릴 걸 그랬어요’ 라며 통탄해 하셨지요”
“선생님은 학문적인 면에서는 고려가요로 연구를 시작하셨지만 이후 신라의 노래인 향가 연구를 평생 하셨죠. 경주에서 경주사람들이 향가 연구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며 중앙의 학자들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 따로 있으며 향가에 대해선, 우리 지역사회 향토사학자 등과 중앙의 학자들과 연계할 수 있는 고리 역할로 지역대학의 교수들이 충분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뜻을 견지하신 것은 가장 존경하는 부분입니다. 선생님께선 사회 참여적인 성향을 띄셨는데 주로 주류의 과오들을 질타하시는 시각이 많으셨죠. 열린 사고로 ‘대학교수가 그런 역할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하느냐’고 하시며 저희에게 질책도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선 늘 입버릇처럼 ‘부질없다’고 말씀하셨죠. 선생님을 표현할 수 있는 한 가지 말이 있다면 ‘부질없다’ 일 것입니다.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다소 탈속적인 입장이셨죠. 그러니 늘 소탈하고 소박하게 생활하셨습니다. 도솔마을(황남동 밥집)의 ‘부질주(맥주)’라는 술 이름도 선생님이 명명하셨죠. 늘 ‘됐다, 그만해라, 너무 집착하지마라’하셨구요. 명예나 지위, 권력에는 덜 집착하셨고 그래서 마음껏 소신있게 비판하셨던 성향이셨습니다”
한편, 벌써부터 유고시집 발간이나 시비 건립 등의 말들이 나오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선생님이 남긴 시들이 여러 편 있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동문이나 제자들이 유가족과 협의해 진행해야 할 일입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이 지대한 만큼 이른 시간 내에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지역사회를 위해서 많은 활동을 하셨고 기여 한 바가 많아 주변에서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라고 전했다.
“선생님은 고전문학 쪽에서 한국향가연구를 바라보셨다면 저는 한국향가연구의 문학부분의 연구보다는 우리말과 관련된 어학쪽의 연구가 더 많습니다. 신라어와 관련해서요. 어학부분으로서의 향가에 치중해 연구하는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선생님의 향가 문학의 맥을 이어갈 생각입니다”
“사실은 선생님께서 늘 제게, 경주에 있으면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고 경주 사람이니 그런 연구를 해보라고 언질을 주셨어요. 제게 남기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라는 김 교수의 계획은 지속적인 향가 연구에 대한 아쉬움이 크던 차에 안도가 되는 대목이었다.
-시(詩) 통해선 나즈막히, 읊조리듯 따뜻하게 조언해/ “이곳이 바로 신라이기에 향가연구는 나의 임무” 기자는 2015년 3월, 향가 특집 구성때 이임수 교수와 인터뷰하고 2017년 6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사랑 그 한없는 집착으로부터’라는 시집을 냈다는 소식을 전하며 인터뷰 했던 적이 있다.
정년퇴임식 및 출판기념회를 겸한 당시의 이 교수는 그해 2월말 갑자기 대장암 판정을 받아 봄과 함께 누워 삶을 되돌아보았다며 소회를 밝혔었다. 성찰에 다름 아닌 시집에는 행과 연마다 진한 페이소스가 깃들어있어 자신을 가만히 관조하는가하면, 그것을 뛰어넘는 삶에의 애정과 활기도 가늠할 수 있었다. 나즈막히, 읊조리듯 우리에게 충고하고 따뜻하게 조언했다. 암 투병 중인 시인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관조’가 강물처럼 흘렀고 한없는 로맨티스트로서의 면모도 보였었다.
2015년 3월 인터뷰에서는 ‘신라향가는 경주를 알아야만 연구할 수 있고 경주의 언어를 이해해야 독해가 가능하다’고 힘주어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곳이 바로 신라이기에 향가연구는 나의 임무”라고 했었다. “세계의 문학사에서 10세기 이전 자국어로 표현된 문학작품을 가진 나라는 몇 나라밖에 없다. 향가는 향찰 문자로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표현했지만 우리말의 소리를 그대로 표현했기에 우리 시의 원형이요, 우리의 노래다”
“남아있는 향가는 6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500년에 걸쳐 창작된 신라와 고려 초기의 시가 작품이다. 신라시대의 우리말을 표기한 문학작품으로 그 해독이 간단치 않다. 신라의 고어(古語)뿐 아니라 한자의 음훈에 대한 지식과 문학적 감수성까지 겸비해야 접근할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 전하는 향가는 14수밖에 안 되지만 삼국유사의 작품들은 모두 배경 설화를 가지고 있어 역사적·서사문학적 가치 또한 높고 현재에도 공존하며 살아있는 문학이라고 했다.
향가를 통해 신라의 문학과 미술, 음악과 무용 등 종합적인 예술을 유추해 볼 수 있다면서 “향가는 오늘날 많은 현대적 변용이 이뤄지고 있다”고도 했다.
이 교수는 갈수록 향가에 대한 연구나 논문이 국어학적이든 문학적이든 점차 줄어들고 있다며 우려했었다. 또 언어적인 면에서도 향찰을 통해 신라어를 복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국어학적인 자료로도 대단히 중요하다면서 향가를 지속적으로 연구해야하는 당위성에 대해 수차례 강조한 바 있다. 2019년 2월에는 병마와 싸우며 중단한 연구도 있고 사비를 털어서라도 만들고 싶은 향가 관련 연구소 설립에 대한 열정도 꺾여버렸다며 지역사회와 후학들에게 향가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떠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겠지. 살아 있는 동안 아름다운 시간만을 기억’하고자 했던 이임수 교수. 그의 빈 곳을 누가 어떻게 채워나갈지, 참 많은 과제를 던져주고 그는 가고 없다.
-고 이임수 교수는...,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1977)하고 1988년 경북대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동국대 경주캠퍼스 전임강사로 부임해 국어국문학과장, 교수회장, 교무처장, 국제언어문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정년퇴임하는 2017년까지 경주에 살면서 34년간 후학을 지도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교육자로 일생을 바쳤다. 려가문학과 향가의 권위자로 시인이며 문화인으로 경주 교육문화 창달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경주문화축제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아 ‘충담재’를 봄에 개최하고 ‘월명재’를 가을에 개최했다. 또 ‘단오제’ 행사와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를 진행했다. 저서로는 ‘려가연구’ ‘월명의 삶과 예술’ ‘향가와 서라벌 기행’ ‘한국시가문학사’ ‘한국의 고대시가-향가’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 ‘수유꽃 피더니 하마 산꿩이 울고’ ‘구름이나 쳐다보는 하느님’ ‘사랑, 그 한없는 집착으로부터’ ‘봄날의 사진 한 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