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玉山書院)은 1572년(선조5) 자옥산 아래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선생을 모신 공간으로, 경주부윤 서간(西澗) 이제민(李齊閔,1528~1608.재임1571.08~1574.02)과 도내 유림들의 공의로 세워졌다. 1573년 서악의 향현사(鄕賢祠)에 임시 봉안된 위패를 옥산으로 모셔왔고, 사액(賜額)을 받았다. 회재의 삶을 한마디로 일축하기는 어려움이 많지만, 무오사화(1498)·갑자사화(1504)·기묘사화(1519) 그리고 을사사화(1545)·정미사화(1547:양재역벽서사건) 등을 겪으며 정당의 처신과 사상과 학문에 많은 변화를 가졌다. 사실 정미사화의 직접적인 계기는 정언각(鄭彦慤)이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권력을 농단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를 서서 기다릴 것인가?’라는 벽서를 발견하면서, 권벌(權橃)·이언적·정자(鄭滋)·노수신(盧守愼)·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513~1577)·백인걸(白仁傑) 등 20여 명이 유배 당하였다. 그 가운데 유희춘은 하서 김인후 등과 교유하였고, 선조의 신임을 받은 인물로, 『회재집』 발문을 남겼다. 회재선생 사후 그의 행적을 담은 시문학 작품들이 아들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1516~1568)에 의해 수집되고, 1565년 퇴계 이황이 지은 행장(行狀)이 추가된 정고본(定稿本:필사본)이 제작된다. 1574년 잠계의 아들 구암(求庵) 이준(李浚,1540~1623)은 경주에서 부윤 이제민과 경상 감사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의 도움을 받아 회재집을 처음 간행하였고, 이후 옥산서원에서 1600·1624·1631·1641·1794·1864·1926년 등 여러 차례 개간되었다. 《이병훈, 「조선시대 경주 옥산서원의 위상 변화」,『한국서원학회』, 2020》학술논문에 의하면 “옥산서원은 문묘 종사 대현인 이언적을 제향하는 서원으로서 경주부윤과 향인, 후손, 문인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건립되었다.”언급하였고, 실상 후손들 가운데 구암 이준 등이 회재의 서적을 간행하고 서원건립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경주부윤 초당(草堂) 허엽(許曄,1517~1580.재임1564.09~1565.02)은 『회재집』 발문에서 “만력 계유년(1573, 선조6) 12월에 경주 이회재(李晦齋) 선생의 손자 이준이 찾아와서 경주 부윤 이제민의 편지와 선생의 유고집(遺稿集)을 꺼내 보여 주었다. 일찍이 이 문집은 퇴계 선생이 손수 교정하여 돌아가실 무렵에야 끝내셨다 하니, 반드시 정밀함을 다하여 한 글자도 온당하지 않은 부분이 없을 것이다. … 부윤 공이 또 나에게 서문과 발문을 요청하였는데, 내가 비록 글을 잘 못하지만 사양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며 회재집 학문연원의 깊이와 문집편찬의 과정 등을 설명하였다. 당시 경주부윤을 지낸 허엽과 이제민 등은 옥산서원 건립과 문집편찬에 많은 관심과 협조를 하였고, 지역 유림들과 공조해 서원운영에도 일부 동참하였다. 원래 서원은 당색이 분명한 공간으로 때로는 훼철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지만, 옥산서원은 서원훼철의 화살을 비껴나 지금도 온전함을 과시한다. 회재 이언적 선생 문집 발문 - 유희춘 영의정 회재 이언적선생의 도덕과 학문은 퇴계 이황이 자세히 말하였으니, 어찌 후생(後生)의 군더더기 말을 기다리겠는가? 다만 선생의 시문은 근엄하고 정확하여 한 글자도 구차한 것이 없어서 유림 가운데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전체의 문집(全集)을 보기를 원한 지가 오래되었다. 지금 계림 부윤 이제민(李齊閔)이 방백[경상 감사] 노진(盧禛)에게 청하여 목재를 모으고 목공을 모집하여 개판을 마치고 발문을 나[유희춘]에게 부탁하였다. 또 서원의 누(樓)ㆍ재(齋) 등의 이름을 지어주기를 요구하니 내 어찌 감히 담당하겠는가? 하지만 천 리 밖의 요청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삼가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선생의 아름다운 덕을 아는 자는 태산북두(泰山北斗)라 하고, 모르는 자라도 일시제일류(一時第一流)라 합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생은 일생동안 『소학(小學)』에 힘을 쏟아 『대학(大學)』에 나아가신 분으로, 그칠 데를 알아 정함이 있고 고요함을 지키려는 뜻이 많았을 것이니, 누와 재의 이름도 아마 반드시 이러한 뜻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또한 훌륭한 많은 선비들이 높은 산을 우러러보듯이 존경하니 이 재에 거처하고 이 누에 오르는 자는 진실로 인륜을 밝히고 몸을 공경히 하는 근본을 배양하고,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경지에 이름으로서 선생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선생께서 말을 세우고 모범을 드리운 것이 후학들에게 무궁한 은택이 될 것이요, 여러 선비들도 선생을 저버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문집을 간행하는 성대한 뜻입니다. 부윤께서도 어찌 이것으로써 여러 선비들을 격려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만력(萬曆) 갑술년(1574, 선조7) 2월 초, 가선대부 행 홍문관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동지성균관사 유희춘 삼가 발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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