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리단 길을 거닐어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과거 문화재 보호라는 미명 하에 이 일대 주민들은 많은 불편과 재산권 침해를 당하며 살아야했다. 건축행위 제한이 너무나도 엄격하고 중첩되어 주민들은 헌집을 제대로 수리도 하지 못한 채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고통스럽게 지냈다. 냄새나고 허물어져 가는 집들이 황남동 주택가 길에서 받는 인상이었다. 상전벽해가 딴 말이 아니다. 황리단 길 주변이 바로 그것이다. 당국이 문화재 보호에 관한 현실적인 접근을 하여 주민들의 주거환경 개선에 눈을 돌리고,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이에 호응하였다. 차츰 경관이 개선되더니 지금은 전국의 관광지 중 핫 플레이스가 되고, 각지의 젊은이들이 꿈을 찾아 이곳에 가게를 내고 있다. 황리단 길을 중심으로 하여, 황남동, 사정동, 인왕동 일대 등이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경관지구, 그 중에서도 특화경관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특화경관지구는 문화적 보존가치가 큰 건축물 주변의 경관 등 특별한 경관을 보호 또는 유지하거나 형성하기 위하여 지정된 지구를 말한다. 그 외에도 고도보존육성법 상의 건축행위제한이 무겁게 작용한다. 황리단 길은 대부분 보존육성지구에 해당하는데, 지역고도보존심의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건축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런데 황리단 길에 들어서는 건축물을 규제하는 역할을 하는 지역고도보존심의위원회나 경관위원회 등의 심의가 과연 올바른 역할을 하는지 조금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 황리단 길과 그 주변에 세워지는 건물들 외관이 그 위원회들이 취하는 규제의 결과로 매우 정형화되어 있는 점에 관해서다. 값비싼 목조의 건물, 그리고 그 지붕에 또 값비싼 골기와를 덮는 건축물 외에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규제는 부당한 재산권 침해의 성격을 갖기도 한다. 여기에 참고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서울의 북촌과 서촌의 한옥마을이다. 1920년대에 강한 민족의식을 가졌던 정세권 선생이 사라지는 우리 전통가옥을 안타까이 여겨 삼청동, 가회동, 익선동에 한옥마을을 건축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새로이 왕성하게 수입되던 일본, 서양의 가옥구조 문물을 받아들여 과거의 한옥을 수정한 개량한옥이었다. 기존의 대형 한옥이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들어선 ‘중정식’이라면, 그는 마루 개념의 거실을 중심으로 방들이 모여 둘러싸는 ‘중당식’을 구현했다. 이것은 소형의 면적으로 집을 지을 수 있는 구조이며, 생활에 편리한 형태이다. 화장실이 한옥의 내부로 들어오고, 부엌은 입식구조로 바뀌었다. 대청마루는 외부 덧문을 추가해 내부 공간인 거실로 바꾸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그가 당시 취한 혁신이 한옥의 표준이 됐다. 그런데 지금 북촌, 서촌 마을의 한옥 형태는 경주시의 건축에 관한 위원회들이 유도하는 한옥의 형태보다 훨씬 다양하다. 왜 우리는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그 기본적인 이유는 북촌, 서촌 마을에서는 목재 외에도 벽돌 같은 건축소재들을 자유로이 사용해 건물의 창의성을 구현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황리단 길 한옥은 복고적이고 고식적이다. 개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무려 백 년 전 선각자에 의해 형성된 한옥 건축물조차 따라갈 수 없는, 다양성이 부인된 한옥으로 채워지고 있다. 왜 벽돌이나 유리 같은 다양한 소재가 한옥에서는 허용되면 안 되고, 또 골기와에만 집착해야 하는 것일까? 경주시의 건축에 관한 위원회들은 여기에 관한 해답을 제시해주었으면 좋겠다. 한국민이 자랑스러워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창덕궁 안에서도 유리 온실이 고즈넉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왜 황리단 길 주변에서는 온실에도 골기와를 덮어야 한다는, 그래서 온실을 짓게 할 수 없는 따위의 고루한 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일까? 시대는 변한다. 변화하는 시대의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요구된다. 백 년 전의 기준에도 따라가지 못하는 복고의 고리타분한 틀에 황리단 길을 가두어서는 안 된다. 이래서는 미래의 생명력이 없게 된다. 발상의 전환을 하자. 백 년 후에 황리단 길 한옥이 새로운 한옥의 표준으로 들어설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창의와 혁신의 정신을 황리단 길에 부어보자. 황리단 길 건축행정에 일대전환이 있기를 바란다.
양동마을 출신의 매호(梅湖) 손덕승(孫德升,1659~1725)은 1706년 벼슬을 버리고 안강읍 대동소류지 북쪽의 대동마을에 매호초당을 짓고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고, 훗날 1944년 매호정(梅湖亭)으로 중건하였다. 부친 손건(孫鍵)과 모친 안동권씨 대은(臺隱) 권경(權璟,1604∼1666)의 따님 사이에서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난 매호는 어려서부터 외숙 송천자(松川子) 권득여(權得輿:權璟의 次子)에게 글을 배우며, 그의 사상과 학문에 영향을 받았고, 또한 가학을 바탕으로 학문을 이뤘다. 26세 1684년에 반궁 별제에 합격하고 다음 해 식년 문과에 병과 3등을 하였으며, 예조·병조 좌랑 등 여러 요직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으며, 영남학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의 심법(心法)을 따르고, 『근사록』과 『심경』 등을 중시하였다. 7대조 양민공 손소(1433~1484)는 사림파 점필재 김종직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증조부 손노(1578~1649)는 한강 정구(1543~1620)와 여헌 장현광(1554~1637)의 문인이었고, 우재 손중돈(1463~1529)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의 외삼촌이자 스승이었다. 특히 권경은 성호학파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의 문하생으로 학문과 행실이 모두 뛰어났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을 양성하였고, 권득여 역시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가난한 선비로 어렵게 살면서 후학양성에 애썼으니, 매호의 행보와 매우 유사한 점들이 많다. 매호는 자희옹(自喜翁) 최치덕(崔致德,1699~1770) 등을 비롯한 많은 후학을 두었고, 지역문사 우암 남구명(1661~1719), 화계 류의건(1687~1760), 송국재 이순상(1659~1725), 시옹 임화세(1675~1731), 훈수 정만양(1664~1730), 병와 이형상(1653~1733) 등과 왕래하였고, 안재 이덕현(1648~1707), 우와 이덕표(1664~1745), 학고 이암(1641~1696), 동고 이덕록(1677~1743) 등 회재의 후손들과도 많은 교유를 하였다. 그 가운데 치암 남경희의 부친 활산 남용만[화계의 사위]은 최치덕과 동문이며, 남경희의 증조부 우암 남구명과 매호 손덕승이 막역한 사이라 언급하였고, 당시 영덕을 기반으로 활동한 남구명과 경주의 류의건[치암의 외조부]은 양동의 문인들과도 활발한 교유가 있었고, 그 가운데 매호는 영천의 이형상과도 긴밀한 교유가 있었다. 이렇듯 경주지역 학문의 중심 역할을 매호가 담당하였다. 매호집 행장을 보면, 매호초당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경주의 서북쪽 무릉산(武陵山) 아래 금강(錦江) 위에 큰 골짝이 있는데 언덕과 집은 고요하고 들판은 넓었다. 그곳을 좋아한 매호는 언덕 위에 몇 칸 집을 짓고 매호초당(梅湖草堂)이라 편액하고, 글을 지어 스스로 처사(處士)라 하였다. 온갖 꽃과 나무를 심되 각각 구역을 나누고, 매화가 심겨진 곳이 3푼을 넘을 정도로 매화를 가장 좋아하였다. 또 무덤과 가까운 동남쪽 모퉁이에 작은 집을 짓고 띠로 지붕을 덮고 창과 기둥은 모두 대나무를 이어 만들고는 소헌(素軒)이라 편액을 붙였고, 기문이 있으며, 작은 못을 파고 좌우에 연꽃을 심고 못 주변에는 아름다운 꽃을 심었다. 지팡이 짚고서 초당과 소헌을 오가면 정신이 펴지고 흥에 겨웠다. 당시 이름난 문사들이 시축을 품고 술을 싣고서 오는 자들이 서로 이어졌고, 손님들이 떠나가면 작은 방에 바르게 앉아 선현의 책을 읽었다. 고을의 빼어난 선비들이 책을 끼고 배우길 청하고 책을 보내와 경전의 의심나는 것을 묻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이렇듯 매호는 매호초당과 연못을 조성하고, 선대의 묘소 주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는 이따금 초당과 소헌을 유유히 산책하며 호연지기를 펴고 시상(詩想)에 젖곤 하였으며, 가까운 친구가 술을 가지고 오면 속세 밖을 담론하고 선현의 책을 읽었다. 매화를 사랑한 매호선생은 매화의 고결함을 통해 자신의 곧은 의지를 투영하였고, 『매호집』 곳곳에 그의 기상이 넘쳐 흐른다. 사위 이복후(李復厚)에게 쓴 답서(答書)에 “나는 어려서부터 독서하면서 일찍이 특정한 문정(門庭)에 이름을 부탁한 적이 없고, 또한 논설(論說)로 뜻을 과장하는 것과 여항몽사(閭巷蒙士)의 선비들이 와서 항렬을 묻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선생과 제자의 명목으로서 가탁하려하면 번번이 사양하며 피했고, 어떤 경우에는 문자나 사설을 청해 훗날의 계책으로 남겨 놓으려는 자가 있을 때는 붓을 대려하지도 않았다. 이는 하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감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몇 해 전에 그대(李復厚)가 나에게 증행(贈行)의 글을 요청했을 때 역시 사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를 보면, 사위의 부탁조차 거절한 일과 자신의 신념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는 평생을 세속의 이속을 따지는 선비를 멀리하였고, 진정한 학문을 닦는 것을 우선으로 형세에 휩싸이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곧은 지조를 갖고 행동을 실행으로 옮기는 강직하면서도 매화같은 고결한 학자였다.
복작복작 빼곡히 동서양의 잡다한 장식품과 생활소품들이 들어차 있는 골동품 가게가 진현동에 있습니다. 봄이면 겹벚꽃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불국사 인근 진현동에는 수 년 전부터 작고 예쁜 카페들과 밥집, 체험형공방, 서점, 갤러리형 카페, 복합문화공간 등이 하나씩 생기고 있습니다. 경주 불국사를 찾는 이들에게 회자되면서 알려지고 있는 이 동네는 높다란 기와들이 웅장하게 줄지어 이어져있는 처마들의 다양한 선들이 일품인 동네지요. 이 골동품가게는 이 동네에 잘 어울리면서도 색다른 콘텐츠로 정착하고 있는 듯합니다. 특이한 모양을 한 물건들과 오래된 잡동사니로 넘쳐나는 이곳은 조심해서 움직여야 할 만큼 골동소품들이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연대가 ‘좋은’ 우리 고유의 물건들에선 추억이 묻어나고 일본과 중국 등의 생활민속품에선 이국적인 향취가 그득하죠. 호롱등불, 옥스퍼드 자수, 커다란 우체통, 생활도자기, 램프, 스테인드글라스 조명등, 장기판, 무쇠솥, 돌확, 옛 책걸상 등 그야말로 잡동사니 천국입니다. 그것이 고가의 진품이든 중국제 저가의 물건이든 각기 개성만점의 물건들은 제 몸에 맞는 가격을 달고 있어 부담 없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흔히 골동품은 상당한 고가인줄 알고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데 비해 이곳은 주인의 쾌활한 ‘유혹’탓인지 문턱이 낮은 가게입니다. ‘100만원 가져오면 잘 골라서 한 트럭 사갈 정도’라고나 할까요? 한 번쯤 들러서 하나씩은 ‘건져’갈 수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겁니다. 누군가는 ‘보물찾기’라는 표현으로 이 가게의 정체성을 대변해 줍니다. 헤집어서 고르면 보물을 찾을 수도 있는 이곳은 비교적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일 것 같습니다. 뒤섞여 있을 땐 눈에 띄지 않지만 나에게로 와서는 소중한 보물이 되는 추억의 저장소 같은 곳이죠. 이 동네 주변의 상가들이 하나씩 들어설 즈음, 주인장은 원래 빈 상가였던 이곳에 입점해 이제 3년째지만 단골손님 확보가 만만치 않습니다. 서글서글하게 잘생긴 듯 예쁜 주인은 시원시원하게 물건을 권하고 안목 또한 탁월한 듯합니다. 최근의 트렌드를 잘 일고 바로 생활인테리어에 활용할 수 있는 물건들을 공급해주기 때문이죠. 그래서일까요?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꾸준하게 이어집니다. 다양한 콘텐츠들이 진현동 이 골목에 하나씩 채워져가는 일은 환영할 일입니다. 개성만점의 가게들이 가지는 자생력이 결합되면 그것이 유인력을 지니기 때문이죠. 쉽게 구경할 수 있고 한 번 찾게 되면 다음을 기약하게 되는 이곳에서 봄꽃 한 송이 꽂을 수 있는 작은 화병 하나 ‘건져’가세요. 글=선애경 문화전문기자 그림=김호연 화백
18세기 나폴리에서 오페라 부파가 생겨나고 유행하더니 페르골레시의 히트작인 ‘마님이 된 하녀’는 월드투어에 나서게 된다. 1752년 프랑스 파리에서 륄리의 오페라 막간에 이탈리아 가수들이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논쟁이 일어난다. 오페라 부파에 대해 상반된 반응 때문이다. 이를 부퐁논쟁(Bouffon's Quarrel)이라고 하는데 부퐁은 ‘부파’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전통 오페라를 옹호하는 국왕파와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를 지지하는 백과전서파는 매우 격렬히 다투어 ‘전쟁’을 방불케 했다. 전자는 루이 15세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과 음악가 집단, 특히 라모(J.P.Rameau/1683-1764)가 중심인물이었다. 한편, 후자는 왕비와 루소, 디드로, 달랑베르 등 계몽주의자들이 전면에 나섰다. 특히 루소(J.J.Rousseau/1712-1778)는 자국 오페라를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를 찬양하여 국왕파의 미움을 샀다. 그럼 결과는 어땠을까? 당시 프랑스에는 서정적 비극(Trag die lyrique)이라고 불리는 프랑스식 오페라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루이 14세의 음악 멘토이자 프랑스 오페라의 아버지라 불리는 륄리(J..B.Lully/1632-1687년)가 프랑스 전통 연극과 발레를 결합시켜 만든 새로운 장르였다. 프랑스는 17세기의 이런 독창적인 전통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이탈리아의 오페라, 그것도 나폴리의 오페라 부파를 선뜻 받아들이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절대국가 시대에 국왕의 뜻을 거스르긴 힘든 법이다. 결국 18세기 부퐁논쟁은 국왕파의 승리로 일단락되었고, 이탈리아 공연단은 프랑스에서 철수하게 된다. 하지만 이탈리아 오페라가 프랑스에 남긴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식 희가극인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의 탄생을 도왔다. 앞서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를 찬양했던 루소는 우리가 사회계약론을 쓴 사람으로 기억하는 루소가 맞다. 루소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마을의 점쟁이’(Le devin du village/1752초연)라는 오페라 작품을 작곡하여 흥행시키기도 했다. 이 작품이 바로 오페라 코미크에 속한다. 그리고 한 세기 뒤에는 희대의 걸작 ‘카르멘’이 프랑스어 오페라로 정점을 찍게 된다. 카르멘 역시 오페라 코미크로 분류된다.
매일 아침 코로나 확진자 수를 확인하며, 때로는 안도의 한숨을, 때로는 걱정과 우려의 한숨을 쉬며 2020년 한 해를 보냈다. 특히, 작년 12월부터 확산된 지역 감염으로 의료기관과 병상 부족이 사회적으로 대두되는 가운데 전염병 대응을 위한 공공의료를 확충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2019년 기준 우리나라 공공의료기관은 총 221개소로 전체 의료기관의 5.5%, 병상은 9.6% 수준으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낮다. 의료보험 제도가 도입된 1977년 이후 44년간 건강보험 등 공공재원은 계속 증가했으나 공공병상 비중은 감소하고 그 자리를 민간의료가 담당해왔다. 그동안 경제적 논리 속에서 공공의료를 민간의료의 보조적 수단으로 인식해온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한국의 공공의료기관은 OECD 평균 10분의 1수준으로 사회보험방식의 의료보험제도를 가진 독일(40.7%), 프랑스(61.5%)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치다. 심지어, 공적 의료보장이 취약하다고 평가받는 미국(23.0%)보다도 낮다. 민간이 의료 공급을 주도하는 구조에서, 병원은 대도시에 집중되고 지방은 필수 의료서비스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연일 대규모의 확진자가 나오는 상황에서는 의료 인프라가 가장 잘 갖춰진 수도권에서조차 확진자가 병상 대신 집에서 사망하는 사례가 발생하는 실정이다. 공공의료기관 확충은 감염병 대응을 위해, 병상확보가 소위 돈벌이가 되지 않는 사회적 취약계층의 치료, 시민의 건강증진사업과 지방 중소도시의 필수의료 제공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사실 공공의료의 필요성은 2013년 진주의료원 폐쇄,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사회적 논의의 중심에 있었지만 메르스의 종식과 함께 흐지부지 되다가 이제 코로나19를 겪으며 다시 반복되고 있다. 공공의료가 활성화 되면 사람들은 어느 지역에 살든지 필수의료 서비스를 적기에 받을수 있고 지역 간 의료서비스의 격차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의료기관의 시설·장비 개선 등을 통해 국내 의료산업 발전과 보건의료 분야에서 정보통신기술(ICT) 또한 활성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공공의료 활성화로 의료서비스 시장 내 영향력이 높아지면 그 지역의 민간의료기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침은 물론 정책집행 비용의 감소와 국민의료비의 절감을 가져올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해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고 국민건강증진에 이바지할 공공의료 확충에 과감한 투자가 있기를 기대한다.
능 안에 잠든 사람 일으켜 세우지도 못하고 천년이 흘렀다고, 솔바람이 귀 솔깃 홀기는 한나절이다. 솔숲을 삐져나온 햇살이 능 정수리에 고봉밥으로 수북하다. 겨울바람에 시달려 풀죽은 덤불로 납작 엎드린 그늘도 조금씩 주름을 편다. 바람으로 떠돌았던 낙엽들이 휑한 마침표를 찍어놓은 계절이다. 자질구레한 편린들을 내팽개치고 홀로 거닐고픈 심사일 때가 든다. 들키고 싶지 않는 마음을 풀어놓기 좋은 곳으로 신라의 능원은 품을 내놓고 있다.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번지 일대, 기세등등한 솔숲 원성왕릉이다. 솔숲을 배경으로 능묘제도의 완벽함을 따른 신라의 왕능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능이다. 양쪽 화표석 영역으로 서역석인상(西域石人像) 1쌍,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 1쌍, 석사자상(石獅子像) 2쌍이 도열된 형상으로 마주서서 반긴다. ⌜대숭복사비」 ‘돌아가신 해인 무인년(798) 겨울에 장례에 대해 유교(遺敎)하면서 인산(因山)을 명했다. 땅을 가리기가 어려워 절을 지목하여 유택(幽宅)을 모시려 하였다. 이때 반대가 있었다. “절을 뺏어 장사지내려는 것은 좋지 않다”하였다. 그러자 담당자가 나무라며 말했다. “절이란 자리하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며 어디에 짓던 복된 터가 되어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할 것이다” ‘절을 옮겨 지울 때 인연 있는 대중들이 솔선하여 옷소매가 이어져 바람이 일지 않고 송곳 꽂을 땅도 없을 정도였다’ ‘금성의 남쪽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산기슭에 숭복사(崇福寺)라는 절이 있다. 원성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다. 바위가 고니 모양이다. 왕이 돌아가신 70여년을 넘긴 아홉 왕이 바뀐 후인 경문왕(48대 861~875)대 조성 되었다’ 봉분 둘레는 회랑식으로 석주를 세우고 돌난간을 이었다. 현재 돌기둥은 모두 남아 있으나, 돌기둥 사이에 끼웠던 난간 살대는 거의 망실되어 새로 설치한 것이다. 호석은 목조건축의 석단과 같이 지대석 위에 판석으로 된 면석을 놓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렸다. 각 면석 사이엔 봉분 내부로 뿌리가 길게 뻗어 면석과 봉토가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탱석을 배치하였다. 전면보다 약간 앞으로 돌출된 탱석의 높이 83㎝ 너비 66㎝에는 두 칸 건너 하나씩 무복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12지상이 조각되어있다. 빙 둘러 서서 무복(武服)을 여미고 능을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는 12신상이다. 남쪽방향 영혼 승천을 호위인도 하는, 정면을 향한 오상(午像) 말을 중심으로 좌우 치우치고 있다. 당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신라로 놀러온 쥐(자子)⦁소(축丑)⦁범(인寅)⦁토끼(묘卯)⦁용(진辰)⦁뱀(사(巳)⦁말(오午)⦁양(미未)⦁원숭이(신申)⦁닭(유酉)⦁개(술戌)⦁돼지(해亥), 각자의 방위를 호위하는 수호신으로 깜찍하고 늠름한 표상이다. 12지신상은 위진남북조시대(578) 중국의 묘장제도에서 발생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왕릉 12지신상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어, 통일신라의 독창적 기법의 예술성으로 창조되었다고 보여 진다. 신라능묘에 등장한 것으로 성덕왕릉 둘레에 배치된 환조(丸彫)형 무복12상으로 추측하는 실정이다. 신라의 능묘에 12지상을 각인한 곳은 28대 진덕여왕릉, 33대 성덕왕릉, 35대 경덕왕릉, 38대 원성왕릉, 41대 헌덕왕릉, 42대 흥덕왕릉 대까지 이어진다. 김유신장군묘, 능지탑, 구정동방형분, 원원사탑기단, 박물관 야외전시장 등 에서도 볼 수 있다. 중국 당나라시절 문헌 속 12지 동물형태는 시간의 신(神)으로 해석 된다. 사신(四神)이 방위의 신으로 정립된다. 동(東): 토끼(묘卯)⦁서(西): 닭(유酉)⦁남(南): 말 (오午)⦁북(北): 쥐(자子) 십이시(十二時)는 당(唐) 중기에 사신과 연관을 지어 능묘에 배치된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에 유입된 신장상(神將像)을 적립하여 무덤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독창적으로 전개된다. 당의 능묘는 십이지가 용(俑)의 역할로 평복차림새로 부장했다. 신라는 불교의 사천왕상 복장을 십이지신상에 도용했다. 이진락 ⌜신라왕릉 십이지신상 호석성립과 변천과정의 새로운 해석⌟에는 ‘통일신라시대 왕릉 둘레에 조각된 12지신상은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독특한 석각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연원과 출현 시기에 대해선 연구자들 사이에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상의 연원에 대해서는 신라 자체에서 발생했다는 설.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설. 그리고 자생과 전래가 동시에 일어났다는 설 등 세 가지로 나뉜다’고 피력했다. 강우방은 ‘중국 당나라의 십이지상을 도입하되 모방과 창조를 통해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독특한 양식인 신라왕릉 호석 십이지상이 탄생되었다’고 보았다. 강우방 의견을 따른 이근직은 신라왕릉 능묘제도 변천과정을 정리하면서, 신라왕릉 외부호석 구조변화 속에 십이지신상 호석이 탄생하는 과정의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로 비교하며 피장자를 추정하였다. ‘신라능묘는 스투파처럼 능 자체에 견실한 호석을 두르고 난간과 회랑이라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 세부에 있어서 물론 다른 점들이 허가하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의도라 볼 수 있다. 난간과 회랑은 인도의 스투파를 모방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너무도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신라 12지 능묘는 그러한 스투파의 외형을 모방함으로써 ‘왕은 곧 부처’라는 관념을 표현하려 하였다고 본다’는 견해도 있다. 원성왕릉능묘의 십이지는 과시적 성향을 의도한 큰 규모로 호석 전체를 아우른다. 조선의 금석학자 김정희 선생이 제23대 순조 24년(1824)에 경주를 방문했다. 괘릉과 김유신묘의 12지신상을 탁본해서 청(淸)나라에 보냈다. 축소된 탁본과 김정희 선생의 발문이 『해동금석원』 상권에 실려 있다.
드론의 활용은 다방면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새로운 차원의 영상자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혁명적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영상촬영은 눈높이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눈높이를 높이려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공중에서의 촬영은 사다리차를 타고 올라가거나 비행기나 헬기 등 항공기를 타야 했다. 당연히 많은 비용이 들고 전문 작가가 탑승해야 하는 불편이 따랐다. ‘항공기로 본 도시의 영상’이 매우 중요한 관광 콘텐츠나 영상자료로 세계적인 호응을 얻었던 것은 그 영상이 그만큼 촬영하기 어렵고 귀해서일 것이다. 이런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 것이 드론이다. 드론에 연결된 무선 조정 카메라는 드론의 성능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까지 정면 위주로 촬영되고 개시되는 영상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즐거움으로 급격히 대처하고 있다. 건축으로 치면 정면도를 평면도로 바꾸어 보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관광지를 보는 시각의 다양성 자체로 향후 또 다른 관광지 홍보의 가능성이 열리기도 할 것이다. 지난 2월 1일 강정근 씨가 페이스북에 신형 드론으로 촬영한 사진을 올리며 앞으로 드론의 활용에 대한 즐거움을 소개했다. 경북관광공사 처장인 강정근씨는 앞으로 신형드론으로 경상북도의 관광지와 산천은 물론 전국의 구석구석을 새롭게 찍어 올려보고 싶다는 포부를 알렸다. 올린 사진도 눈높이 아닌 드론 높이로 훨씬 높아진 보문호수의 시원한 전경과 위에서 내려다본 자신의 사진을 올려 드론 촬영의 멋을 한껏 드러냈다. 드론으로 촬영한 보문호의 영상미가 마치 높은 산에서 촬영한 것처럼 시원하고 이를 보는 페이스북 친구들의 평가도 환호일색이다. 심지어 다른 지방 사람들이 미리 자신의 고장도 촬영해 달라며 때 이른 요구를 하기도 한다. 이처럼 드론의 활용은 지척으로 다가왔다. 다만 조심할 것은 드론이 자칫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뜻밖의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마땅히 드론 조정에 따른 충분한 기술습득과 드론 사용이 허락된 곳에서 날리는 공중의 수칙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목적지는 분명하나 갈급한 그 어떤 목적 없이 떠나는 기차여행은 뾰족한 역사(驛舍) 지붕을 마주하면서부터 이미 설렌다. 순식간에 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과의 교감은 유난히 시적으로 다가와 자질구레했던 일상의 번잡함을 금세 휘발시킨다. 경주 울타리 안이지만 낯선 동네로의 이동을 기차로 해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까지 승객을 기다리고 실어나르는 역은 지역 내 5개 역(경주역, 안강역, 서경주역, 불국사역, 건천역) 뿐이다. 오래된 침목들 위로 얼마나 많은 기차들이 지났을까. 수많은 기차가 지나간 흔적은 모두 애틋하다. 철커덩 거리는 적당한 흔들림 속에서‘떠나왔다’는 해방감과 ‘다다랐다’는 안도감을 교차시키는 객차에서 우리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지도 모른다. 미뤄서 해악이 되는 일이 더러 있다. 그 중 하나가 아날로그의 대명사로 상징되는 ‘무궁화’호 타고 떠나는 기차여행이다. 하물며 그 이용기간이 한시적임에랴. 혼자만의 여행이라면 Sarah Vaughan의 ‘A Lover's Concerto’ 같은 음악을 들으며 출발해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경주의 철도는 1900년대 초 중앙선 개설로 최초 개통됐으나 어언 100년의 시간을 지난 현재는 동해남부선과 중앙선의 복선화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올해 2021년 12월경(예정) 역이 신설 및 이설됨에 따라 기존 철로는 폐선이 되는 수순을 밟는다. 현재 경주시를 통과하는 열차는 중앙선과 동해남부선으로 17개의 역이 있다. 동해남부선 총 12개 역과 중앙선 5개역이다. 동해남부선 총 12개 역(부조역, 양자동역, 안강역, 사방역, 청령역, 나원역, 경주역, 동방역, 불국사역, 죽동역, 입실역, 모화역)중에선 현재 6개역이 운행되고 있으나 나원역은 화물만 취급하고 있다. 6개역은 폐역되었다. 한편, 중앙선 총 5개역(서경주역, 율동역, 모량역, 건천역, 아화역) 중 건천역과 서경주역만 운행 중이며 나머지는 여객취급이 중단된 상태다. 따라서 지역내 현재 여객을 운행중인 역은 동해남부선으로는 경주역, 불국사역, 안강역이 있으며 중앙선으로는 서경주역, 건천역으로 모두 5개소 역이다. 폐선이 되기 전 아직까지 운행중인 지역 내 5개소 역 탐방을 시작으로 경주 이외 동해남부선과 중앙선상에 있는 다른 도시의 역을 찾으며 각 역의 사계절 풍경도 담을 예정이다. 지난달부터 세 차례, 경주역과 서경주역에서 출발해 건천역, 안강역, 불국사역을 다녀왔다. -서경주역~건천역...시류도 잊은 채 준비해 간 커피와 삶은 계란, 사이다는 건천역 대합실에서 해결하고 건천5일장 찾아 시골 인심도 만끽 지난달 21일 첫 번째 기차 여행지는 서경주역에서 출발해 도착한 건천역이었다. 오후 12시18분 서경주역을 출발해 건천역 도착은 12시31분 이었다. 약 13분간의 짧은 시간이었다. 요금은 2600원. 현곡면 용담로에 있는 서경주역은 중앙선으로 단촐하고 작지만 단단해 보였다. 서경주역을 이용하는 일반철도 일일 승객 수는 2019년 기준 574명 정도다. 향후 현곡면 하구리로 이전함과 동시에 동해선 나원역과 통합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역은 현곡면 주거밀집지를 끼고 있어선지 이용객이 많아 보였다. 난방이 잘 된 역대합실에선 간간이 승객들이 문을 여닫고 있었다. 서경주역에서 만난 우리(동행자)는 대합실(맞이방)과 역명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건천역으로 향하는 기차에선 코로나로 거리두기를 시행하고 있어 차창 좌석만 가능했다. 자가용으로 익숙하게 다녔던 건천 국도를 멀리서 바라보니 작게만 보인다. 차창 밖으로 모량역을 바라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모량역을 지나며 바깥 풍경을 정신없이 찍어대다 보니 이내 건천역에 도착했다. 중앙선 건천역은 아화역과 모량역 사이에 있다. 대 여섯 명이 하차를 한 건천역을 이용하는 일일 승하차객은 2019년 기준 21명 정도라고 한다(철도통계연보). 1일 8회 무궁화호가 운행되며 건천역에 정차하는 모든 무궁화호는 동대구에서 포항까지만 운행한다. 복선전철화가 완료되면 모량역처럼 신호장으로 이전할 예정이라고 한다. 모량역과 흡사한 외관에선 신산함이 묻어났으나 한없이 다정스러웠다. 시류도 잊은 채 준비해 간 커피와 삶은 계란과 사이다는 건천역에 내려 대합실에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승객이 급격히 줄어든 탓일까. 텅 빈 대합실에서 커피와 계란으로 든든해진 우리는 마침 건천5일장이 서는 장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걸어간 시골장터에는 장이 한창이었다. 건천장 한 켠에 있는 ‘건천대장간’을 찾아 대장장이가 손수 만든 주방용 칼 한 자루씩을 샀다. 인심 좋고 손 재간이 뛰어난 주인장은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보기 드문 장인이다. 파격 할인가로 구입한 칼은 정말 손맛이 제대로인 작품 같았다. 건천맛집을 찾아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건천읍행정복지센터 바로 옆 카페서 커피 한 잔을 나눴다. 길을 잃어도 좋을, 익숙치 않은 곳에서의 배회는 즐거웠다. 너무 느긋하게 있었던가. 오후 3시48분 경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기 위해 급히 역으로 향했다. 간신히 기차 시각을 맞추긴 했는데 역으로 가는 길은 꽤 멀어 나중엔 뜀박질을 했다. 학창시절 버스를 타기 위해 ‘우다다’ 뛴 기억이 소환됐다. 시간이 정해져있는 기차를 타기 위해 서두는 모습이 생경했지만 마냥 유쾌했다. 관성처럼 자가용을 이용하고 쉽게 이동했던 습관에서 모처럼의 해방이었다. -경주역~ 불국사역...불국사역 내려 구정동과 진현동이 선사하는 여유로움과 낭만에 ‘흠뻑’ 두 번째 기차여행은 경주역에서 불국사역까지였다. 동해남부선 경주역을 이용하는 일반철도 일일 승객 수는 2019년 기준 2685명이다. 폐역 후 모든 업무를 신경주역으로 이관할 예정이며 지금은 새마을호도 명절임시열차를 제외하고는 운행하지 않는다. 경주역은 KTX중심 열차이용패턴 변화에도 불구하고 행락철, 휴가(방학)시즌 중에는 아직도 이용객이 폭증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경주역에서 오전 11시31분 기차로 불국사역에 도착한 시간은 11시42분. 10여 분 걸려 불국사역에 도착하다니! 절로 웃음이 났다. 경주역과 불국사역은 일요일이라 그런지 유난히 이용객이 많았다.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기차는 낮이건 밤이건 환하게 불을 켜고 들어온다. 대체로 노후화된 기차들은 경적소리도 늙어있는 듯 했다. 불국사역 대합실에서 이번엔 미리 쪄간 떡에 향긋한 커피를 곁들여 홀짝거렸다. 불국사역 맞이방을 볼때마다 매번 그 대합실의 작은 크기에 놀란다. 이렇게 작은 대합실에서 수많은 승객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냈을 것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동해남부선 불국사역을 이용하는 일반철도 일일 승객 수는 2019년 기준 391명이다. 불국사역에서 걸어서 인근 맛집을 찾았다. 밀면으로 유명한 이 집은 그날도 길게 줄을 서고 있어 놀라웠다. 거리두기를 준수한 이 식당에서 석쇠에 구운 돼지고기를 곁들인 밀면 한 그릇을 맛나게 먹고는 택시로 진현동으로 향했다. 이 동네에 하나둘씩 조심스레 입점하고 있는 상가 중 새로 입점한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이어 생활소품 등을 파는 잡화점을 둘러보고 골동품 가게도 들렀다. 문턱이 낮은 이 가게서 가성비 갑(?)이었던 한 점의 도자기와 등불조명을 구입했다. 돌아오는 기차에 실었던 도자기의 무게와 들고 이동하는 불편함도 잊은 채였다. 우리는 구정동과 진현동이 선사하는 여유로움과 낭만에 흠뻑 빠졌다. 열심히 살아 온 자신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고 위로였다. -경주역~안강역...새마을호가 운행되기도 했던 제법 규모 큰 안강역, 안강서 경주역으로 돌아오는 기차는 역방향으로 운행 지난 1일 경주역에서 안강역으로 출발한 시간은 오전 11시30분으로 안강역 도착은 11시48분이었다. 18분여. 경주 시내를 내려다보며 가는 기차에서는 경주 시내 건물과 골목의 속살과 민낯이 그대로 보인다. 기차여행의 참맛이다. 객차 안은 조용했다. 의외로 혼자서 기차를 이용하는 승객이 많았다. 안강역으로 가는 창 밖 풍경은 유난히 논이 많았는데 성급하게 봄이 머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얼음이 녹은 강에서, 포실포실해진 논흙들이 그랬다. 창 밖으로 나원역과 사방역의 모습도 스치듯 지나간다. 마을 건널목을 지날때마다 딸랑딸랑 신호음이 울렸고 ‘우리 열차 곧 안강역에 도착합니다’ 라는 안내방송에서의 ‘우리’는 정겹다. 동해남부선 안강역을 이용하는 일반철도 일일 승객 수는 2019년 기준 46명이다. 1918년 12월 경동선 협궤로 최초 영업을 시작한 안강역은 1966년 현 역사가 준공됐고 2015년 새마을호가 운행중지 되었다. 안강역은 비교적 읍내 끝자락에 위치해 주변 역세권이 잘 형성돼 있지 않았다. 역사는 생각보다 제법 규모가 컸고 일직선으로 뻗은 직선의 선로가 시원해 보인다. 역사 건너편 플랫폼에는 승객대기실이 아직 운영되고 있으나 텅 비어 있는 승객대기실은 미련하게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강역을 빠져나와 이어지는 비화원로 거리는 조용했다. ‘역전이용소’, ‘안강초등학교’ 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갑산한의원’이 보이는 큰 사거리를 지나니 안강읍행정복지센터가 보이는 다운타운으로 이어졌다. 안강 시내 골목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차 없이 걸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안강서 경주역으로 돌아오는 기차는 역방향으로 운행됐다. 기차 시각을 맞추려고 헐레벌떡 뛰어 본 기억이 언제쯤에서 멈춰 있을까. 기차가 떠나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계속 시계를 들여다본 기억은 또 언제였을까.
설 명절을 앞두고 대한노인회 경주시지회 박승석 부회장은 지난 2일 지역 23개 분회 어르신들께 전달해 달라며 쌀 23포(10kg들이)를 경주시지회에 기탁했다. <사진> 매년 쌀 나눔을 이어오고 있는 박승석 부회장은 “비록 작은 정성이지만 건강한 신체와 마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이렇게 지은 건강한 쌀을 조금이라도 나눠 우리 노인들이 함께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원한다”면서 “앞으로도 지속적인 나눔 활동으로 온기가 넘치는 지역사회 만들기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노창수 경주시지회장은 “코로나19와 한파 등 힘든 시기에 심리적으로 온정의 손길이 필요한 노인들을 위해 사랑을 전하며 나눔 활동에 앞장서는 마음에 감사하다”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 옛 전통을 이어가는 것은 기쁨이 두 배다. 나눔 활동 확산으로 모두가 희망을 품는 2021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가 검증된 정신건강 정보를 하나의 사이트에서 통합으로 제공하는 ‘국가정신건강정보포털’서비스를 시작했다. ‘국가 정신건강현황 보고서 2019’에 따르면 18세 이상 국민의 정신질환 평생 유병률이 25.4%로 국민 4명 중 1명이 정신과적 질환을 경험하고 있지만 정신건강 서비스 이용률은 22.2%로 상당히 저조하다. 이번에 개설된 국가정신건강정보포털은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 마련됐다. 생애주기별 자가검진과 질환별 자가검진(17종) 서비스를 제공한다. 포털 사용자들은 자가검진 결과에 따라 정신건강 서비스 이용에 도움이 되는 위치기반 정신건강 관련 기관 검색, 약 정보 등 필요한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고 부정적 인식의 개선을 위해 칼럼, 회복 수기, 카드 뉴스, 동영상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한다. 정신건강 관련 주요 통계정보, 책 정보, 앱 정보, 연구 동향 등의 정보를 주기적으로 제공하여 정신건강 최신 현황 및 관련 현안, 이슈도 한눈에 볼 수 있다. ‘국가정신건강정보포털’은 국립정신건강센터와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공동으로 개발에 참여하였고,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운영한다. 주요 질환별 정보, 자주 찾는 질문 등 정신건강 정보 콘텐츠 60여종에 대해서는 전문가 검증을 거쳐 국립정신건강센터와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인증 로고를 발급함으로써 정보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확보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정확한 정신건강 정보 제공을 통해 국민의 정보 접근성을 향상하고 자신과 가족의 정신건강을 스스로 지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경주시어린이급식관리지원센터(센터장 이인숙)는 지난달 26일부터 28일까지 원장대상 온라인 집합교육을 실시했다. <사진> 온라인 집합교육은 코로나19 감염병 예방 및 확산방지를 위하여 화상프로그램 줌(ZOOM)을 이용했다. 등록 시설의 원장들은 적극적인 분위기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순회방문지도 관련 교육은 방문지도계획, 지원물품 및 유통기간 표시와 올바른 달걀보관 등 식재료 위생관리에 대하여 동영상과 함께 전달했으며 올바른 식단사용에 대한 교육은 식단 감수와 관련된 소책자를 담당 직원이 설명했다. 이인숙 센터장은 “비대면 교육에 대비하여 체계적으로 다양한 컨텐츠를 개발해 지원할 계획이다”면서 “코로나19로 인해 올해도 급식위생안전을 위해 보다 철저히 관리할 계획이니 협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한편 2013년 12월에 개소한 경주시어린이급식관리지원센터는 위덕대(총장 장익) 산학협력단에서 위탁운영하고 있으며 관내 199개 어린이급식시설의 6000여명의 어린이를 위한 급식 영양·위생안전관리의 지도·점검 및 관리를 하고 있다.
(주)한국수력원자력 원전건설처 봉사단(이하 원전건설처 봉사단, 단장 최일경)과 친절한 경자씨가 설 명절을 앞두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식료품키트 나눔 활동을 펼쳤다. <사진> 원전건설처 봉사단의 후원으로 시작된 이번 식료품키트 나눔은 떡국 떡, 라면, 즉석식품, 햄 등 간단히 차려먹을 수 있는 식품들로 키트를 구성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6개 봉사단체(재가봉사단, 은비둘기, 사랑한스푼, 건천봉사회, 등대회, 불국사로타리)에 전달 독거어르신 및 취약계층 총 109세대에 전달했다. 원전건설처 봉사단은 “설 명절을 맞이해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싶어 식료품들을 후원하게 됐다. 많은 양을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필요한 가정에 잘 전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원봉사센터 관계자는 “코로나19로 인해 더욱 힘들어진 이웃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후원해준 물품은 봉사현장에서 활동 중인 6개 단체를 통해 전달됐다. 원전건설처 봉사단의 후원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설 명절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과 마찬가지다. 친절한 경자씨도 더욱 열심히 활동하겠다”고 전했다.
서울시가 봄철 건조한 날씨로 산불발생 위험이 증가하는 2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산불방지대책본부’를 가동하고 산불방지 총력대응에 나선다. 특히 서울시는 드론과 무인감시카메라 등 첨단 산불감시 장비를 활용해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산불진화차량, 산불소화시설 등 산불장비를 수시로 운용할 수 있도록 비상근무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첨단장비 무인항공 드론을 띄워 산불 발생을 선제적으로 감시하는 방안은 작년에 시범적으로 시작한 것으로 올해 들어와 이를 체계적으로 보완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년부터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북한산, 관악산, 수락산 등 주요 산림 지역에 드론을 활용했고, 올해도 고성능 카메라 및 열감지기를 탑재한 무인항공 드론을 이용하여 주요 산림을 순찰한다. 또 입산자 실화 예방을 위해 산불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과 취약 시간대에 드론을 띄워 순찰한다는 계획이다. 서울시는 드론 사용과 함께 산불감시 강화를 위해 기존에 운영 중인 무인감시카메라 14대에 더하여 블랙박스 8대(기존 57대) 추가 신설을 추진한다고도 밝혔다. 기존 감시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시민들의 경각심을 높이기 위한 취지이다. 그런 한편 서울시는 산불통계 등을 근거로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제작한 산불발생 지도를 활용해 취약지역을 중심으로 산불감시인력(248명)을 배치하여 산림 내 화기소지 등 위법행위를 사전에 방지하고 집중 순찰할 계획이다. 서울시 소방청, 산림청 등 화재시 필요한 각 기관과의 업무협조를 점검하는 한편 입산자 실화를 예방하기 위해 산불예방 홍보영상·웹툰 홍보를 실시하고, 산불로 인한 인명 및 재산피해가 없도록 대시민 위기상황 홍보·전파 체계 운영 및 주민대피 안내체계를 구축한다. 이에 따르면 산불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봄철에 산불예방 홍보영상(20초)을 지하철 등 교통·다중이용이설에 표출하고 웹툰을 SNS 등에 적극 홍보할 계획이다. 또 산불 확산이 우려되는 경우 시민들에게 긴급재난문자를 발송해 신속하게 정보를 제공한다. 산불방지도 이제는 첨단장비를 활용하고 SNS를 활용하는 진일보한 시대로 진입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옛말이 무색할 만큼 지상과 공중에서 감시의 눈이 커졌다.
한국관광학회는 20여개 분과를 가진 전국 3000여관광학 관련 전공 연구자와 학자들로 구성된 학술단체이고, 대표적인 실용학회다. ‘실용’이란 현실접목성이 크다는 뜻으로 그만큼 학회와 정부, 학회와 지방자치단체, 학회와 업계 간 소통이 유기적이란 뜻이기도 하다. 경주는 최근 2명의 한국관광학회 회장을 징검다리 뛰기로 배출한 바 있다. 제23대 회장이 경주대학교 변우희 교수였고 제25대 현재 회장이 경주 건천 출신으로 순천향대 교수인 정병웅 회장이다. 이런 중요한 학회의 회장이 경주를 기반으로 활동했거나 활동하는데도 불구하고 경주시와 연대가 없어 대한민국 관광의 성지라고 자부하는 경주와 관광학회의 괴리가 심각해 보인다. 정병웅 회장은 임기 중 대전과 부산 등에서 대규모 국제관광학회 학회를 치렀고 지난 해 말 코로나 19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출발점으로 전국 순회포럼을 단행, 대구경북국제학술대회를 치르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외에 소규모의 분과학회와 다양한 관광포럼이 한국관광학회와 지자체의 연결로 다양하게 치렀지만, 정작 경주는 이 기간 동안 한국관광학회와의 교류가 전혀 없었다. 경주시의 경우 수시로 관광 관련 각종 심사나 경쟁에서 떨어졌다고 안타까워하면서도 정작 국가적 관광정책입안과 심사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관광학회와 교류를 등한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특별한 연결고리가 없었다고 하기에는 관광학회회장을 두 명이나 배출한 경주시로서 관광학회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부족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물론 경주에도 훌륭한 관광학 교수들이 활동하면서 지역 관광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나 학회차원의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교류는 경주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다음은 한국관광학회 정병웅 회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지난 해 하반기 비대면 전국 순회 학술대회를 개최, 대구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전체 현황과 대미였던 대구경북국제학술대회의 진행 현황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기 바란다. 한국관광학회 학술대회가 규모가 커져 보통 2년 전에 개략적인 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인 준비는 1년 정도한다. 유감스럽게도 ‘코로나’라는 팬데믹 현상으로 대회 계획이 몇 번이나 취소와 번복, 수정되고 예산도 줄어 학회 실무자들이 애 먹었다. 전체적인 상황이 어려운 시기였던 만큼 전국을 순회하는 릴레이관광포럼을 대구경북국제학술대회 개최로 마무리하는 것으로 급선회했다. 준비했던 많은 행사들이 대거 취소돼 안타까울 뿐이다. 결론적으로 10월 16일 서울에서 전국순회포럼의 선포식 및 수도권 관광포럼을 하고 10월 22일에는 대전에서 충청권 관광포럼을 진행했다. 10월 23일에는 평창에서 강원권 관광포럼을, 10월 29일에는 광주에서 호남권 관광포럼을 진행, 관광에 관련된 지역 현안과 지역관광에 대해 발제하고 토론 할 수 있었다. 방역지침을 지키며 온 오프라인 양쪽으로 치르느라 학회실무자들이 고생을 많이 했고 지자체 관광 공무원과 관련 담당자들의 수고로 엄격한 방역 중임에도 대구경북국제학술대회에서만 3일간 400여명의 학회원들이 참석했다. #대구에서 마친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가? 대회의 구체적인 성과는? 기본적으로 관광에 대한 R&D를 구축할 수 있었다. 제가 경북 경주 출신에 고교시절은 대구에서 보냈기 때문에 누구보다 이 지역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었고 관광으로 우리 지역에 보탬이 되는 길을 찾던 차에 마침 ‘대구경북 방문의 해’가 선포되어 두 광역단체 기관장들을 만나 학술대회를 개최하자고 누차 권유했었다. 다행히 문화체육관광부에도 일정부분 예산을 신청해놓은 상태라 좋은 기회였다. 알다시피 코로나로 제일 먼저 피해를 본 지역이 대구와 경북이라 코로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인상도 짙게 받았다. 이럴 때 학회가 나서서 관광에 대한 붐업을 일으키고 코로나 확진의 본산이었던 그 현장에서 이렇게 학술대회도 할 수 있다는 전범을 보임으로써 대구경북의 이미지 쇄신에도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을 번외의 소득이라 여긴다. 학술대회를 통해 대구경북 관광 활성화에 관한 많은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다. 관광관련 전공 교수들이 100여편에 달하는 논문을 발표했고, 학부생들의 참신한 아이디어 경연도 있었다. 비록 온라인으로 진행되었지만 세계적인 석학들을 모시고 국제학술토론도 가질 수 있었다. 공항유치 등에 대해서도 긴밀한 논의가 있었는데 추가적인 관심이 기대된다. #한국관광학회와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관계는 어떤가? 학회는 학술단체로서 관광정책이나 관광산업이론을 발굴하는 기능을 한다. 올바론 관광정책을 펼치고 관광산업을 이끌어가려면 그에 따른 이론과 정책제언이 필요하다. 정부는 그런 측면에서 연구를 학회에 의뢰해 왔고 학회도 자발적으로 여러 가지 제안사업을 시행해왔다. 현 장관이 다행히도 관광전문가 출신이라 관광학회와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코로나 상황으로 보다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해 아쉽다. 지자체와도 협력할 분야가 많다. 지자체의 대부분 용역이 관광관련 사업이다. 연구자나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런데 일을 하다보면 지자체마다 특색이 있어서 관광학회와 네트워크를 잘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광역단체도 있다. 단체장과 관광 관련 공무원들의 관광에 대한 전향적이고 혁신적인 마인드가 필요하다. #학회와 현업이 긴밀해질 방법이 있다면? 최근 소상공인들 중심으로 코로나19 영업중지에 대한 보상안이 대두되고 있다. 관광업은 자연적 휴업상태인데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관광학은 실용학문이다. 당연히 실사구시 정신에 기반한 연구가 필요하다. 최근 관광학은 질적인 측면에서 많이 발전해 한국관광학회가 발간하는 관광학연구가 우수등재지에 수록 됐다. 이는 인문사회 계통의 13개 학술지의 하나로 전통적인 학문인 교육학이나 인류학 등도 들지 못하는 대단한 일이다. 이렇게 관광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 것은 모두 관광산업이 받쳐주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만큼 관광학이 관광산업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체계를 기반으로 이론을 발굴하고 그 이론을 정책과 산업에 적용할 수 있도록 실용화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현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로는 협회가 있다. 학회와 협회, 이 두 단체 간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하다. 코로나19로 관광 관련 종사자들이 큰 피해를 입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관광생태계가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산업은 물론이고 국민 건강 차원에서도 여가와 관광산업을 지원하고 활성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코로나 시대 이후에 닥칠 관광패닉 현상에 대처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관광 관련 학과 지망생들이 급격히 위축 되었다.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과 앞으로 어떤 분야가 각광받을지 팁을 준다면? 당장은 위축될 것으로 보이지만, 인류역사를 길게 보면 여가나 관광에 관한 부분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온전히 회복하는데 2년 내지 4년이 걸린다고는 한다. 관광학도의 측면에서 막연히 인내하고 기다리기보다 이 시기에 IT부문과 어학 능력 배양에 더 투자해야 한다. 산업측면에서 4차 산업혁명시대이니만큼 관광분야에도 빅 데이터나 인공지능, 사물인터넷과 관련된 기술접목이 필요할 것이고 회의산업, 개별 목적에 맞는 체험여행 등 고부가가치를 낳는 관광산업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국내 여행을 기반으로 한 일상생활 속의 관광이나 여가산업, 생태나 환경과 관련된 분야와 공정관광도 발전할 것이다. 여전히 스토리텔링이나 체험에 기반 한 여행과 토털 레저업체로서 소규모 여행사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프로그램을 판매하는 전문화의 시장이 활성화 될 전망이다. #경주시는 관광의 핵심도시다. 앞으로 관광학회와 연계 방안은? 경주 출신 관광학회회장으로서 가교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경주는 한국 관광의 초대 거점관광도시이며 관광의 원조도시다. 관광과 한국의 경제가 열악할 때부터 시작해 관광으로 인하여 한국의 산업자본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인근의 포항과 울산의 산업을 활성화 시킬 수 있었고 울산과 포항, 대구, 부산의 레크레이션 지역으로 배후역할도 수행했다. 반면 관광 초창기의 열악하고 부정적이던 단계부터 시작된 관광으로 인해 경주 이미지가 약간은 흐려진 부작용도 있었다. 지금은 문화의 시대고 관광의 시대다. 경주는 그 정점의 도시라는 자부심과 긍지로 넘치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 관광도시 경주의 세계적 성장을 위해 학자와 지자체와 관광종사자들이 뜻과 아이디어를 모아야 한다, 한마디 보탠다면, 1년 전에 선정된 관광거점도시는 편중된 지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관광성장거점도시이다. 그 지정과 상관없이 경주는 한국 관광의 근원적 거점도시이다. 작은 지정에 얽매이지 말고 거시적 관점에서 한국관광의 종주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그에 걸맞은 한 단계 높은 정책을 펴야 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앞으로 관광학회의 젊고 유능한 연구자들과 함께 경주를 위한 네트워크를 함께 만들고 싶다. 경주시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기대하고 당부한다.
외동농협(조합장 이상은)은 지난달 25일 코로나19 확산을 막고 농업인조합원의 건강과 영농활동을 위한 마스크 전달식을 가졌다. 외동농협은 전 조합원 2300명에게 25개씩 모두 5만7500개(2000만원 상당)의 마스크와 영농자재 교환권 10만원씩(2억3000만원)을 지원했다. 이번 전달식에는 거리두기관계로 최소인원만 참석해 진행했으며 마스크와 영농자재 교환권은 각 마을 영농회장을 통해 조합원 가정에 배부 됐다. 이상은 조합장은 “코로나19 확산세가 멈춰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합원들과 함께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자”면서 “앞으로도 조합원 독감 무료접종과 같은 다양한 복지사업을 펼치겠다”고 말했다.
새해가 되면 주고받는 연하장에 어김없이 새겨져 있는 글 송구영신.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며 갤러리 란에서는 2021 새해맞이 전이 진행되고 있다. 이번 전시는 갤러리 란의 소장전으로 건강과 행복의 바람을 담은 회화 작품 20여점을 만나볼 수 있다. 밭에서 방금 수확한 듯 캔버스에 담긴 싱싱한 자두에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 흘러넘칠 듯 가득 찬 자두에서 어머니의 모자람 없는 사랑이, 곱고 탐스러운 자두의 붉은색에 이창효 작가는 평안과 건강의 의미를 담았다. 할머니 손길이 묻어나는 묵직한 솜이불이 어린 시절 추억과 함께 차곡차곡 포개어져 있다. 이강 작가는 평범한 삶 속에 숨겨진 인생의 따뜻함을 소박하고 진실한 사유를 통해 담백하게 풀어낸다. 막대사탕 하나로 행복했던 어린 시절 아련한 추억에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임지혜 작가는 발랄한 색채의 달콤한 막대사탕을 통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전통과 해학을 화폭에 담아내는 김호연 작가의 십장생은 새해맞이를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주제다. 작품 곳곳에 표현된 해학적인 요소는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연인의 노랫소리가 귓가를 행복하게 하듯 김정란 작가는 시원한 아침 공기와 싱그러운 햇살을 머금은 한적한 도로를 따라 기분 좋은 하루를 예견한다. 자연경관과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는 대왕암에 최한규 작가의 인연(人蓮) 꽃이 고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자연풍광 속에 현대인들의 삶과 바람을 녹여내고 있다. 이 밖에 휘어진 철사의 선을 따라 추억과 상상 속을 유영하며 연상되는 이미지를 표현하는 김영목 작가, 인간의 근원적인 사유를 꼬아 붙인 한지를 통해 표현하는 박수미 작가, 참새와 꽃을 소재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김미지 작가, 화선지에 먹과 붓으로 자연의 감정을 들춰내는 김복희 작가, 로봇과 단청을 소재로 이미지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박종희 작가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김정란 대표는 “갤러리 란에서는 개관 이후 시민들과 관람객들의 희망찬 새해를 기원하며 신년 기획전을 열고 있다”면서 “코로나19로 모두가 어려운 시기에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2021 새해 맞이전’에 이어 3월 갤러리 란에서는 개관 3주년을 맞아 기념초대전 ‘다시 희망을 ; 봄 전’을 계획하고 있다. ‘다시 희망을 ; 봄 전’에서는 현장 사생의 생생함을 화면에 전하는 이기선 작가, 참새의 익살스러운 재잘거림으로 즐거움을 전하는 김미지 작가, 자연의 길 속에서 오롯이 시간을 안내하는 김정란 작가, 달과 연꽃을 통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최한규 작가 등 4인의 작가가 참여해 각자만의 방식으로 희망을 이야기하는 따뜻한 전시를 선사할 예정이다. 전시는 생활 속 거리 두기 지침 아래 관람이 가능하며, 운영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월요일 휴관. 문의 070-7360-3794.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변화라고는 하지만 인성이 바뀌고 효심을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가정폭력이 일어나고 형제·자매간 재산 때문에 다퉈 원수지간이 되고, 부모가 병들면 서로 눈치나 보는 가정이 늘어나 서로를 원망하는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나는 요즘, 백행의 근본인 효를 바로 세우기 위해 그들이 나섰다. 김영제<인물사진> 남경주문화연구회장과 최정인 박사가 최근 효 복원을 위한 책 ‘왜 孝인가’를 출간했다. 이 책은 △효의 뜻과 유래 △신라의 효행 △효를 권장한 신라왕 △고려시대의 효행 △조선시대의 효행 △효행록에 담겨있는 효 △고가사와 고사성어에 담긴 효 △현대의 효행 △현대문학에 담겨있는 효 △효도하는 길을 물어라 △효 바로 세우기와 실행의 필요성 등 총 11장으로 나뉘어 효의 의미와 유래, 과거와 현재의 효행 사례가 내용으로 엮어져 있다. 저자 김영제는 “효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학교나 가정 또는 유림의 학자들이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나 체계적인 시스템이 부족하고 소극적인 활동에 그치는 사례가 많은 실정”이라면서 “이 책은 효행에 관한 전문 서적과 사례 등을 근거로 집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21세기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사회·역사학자인 영국의 아놀드 토인비는 ‘한국이 인류사회에 기여 할 것이 있다면 바로 효 사상이다’라고 한 바 있다. ‘왜 孝인가’ 출간을 계기로 우리의 소중한 효 정신을 다시 살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에 효행을 알리는 동기가 되고 효가 복원돼 모두가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여수에 ‘여수 밤바다’가 있다면 경주에는 국악가요 ‘경주아리랑’이 있다! 역사문화도시 경주를 홍보하는 대표적인 국악가요 ‘경주 아리랑’이 숨은 재주꾼 세 사람에 의해 모습을 드러냈다. 코로나19로 인한 관광도시 경주의 경기 침체를 극복하고 역사문화도시 경주의 아름다움을 전국에 전하기 위해 경주와 가장 잘 어울리는 대중적 노래 ‘경주아리랑’이 탄생하게 된 것. 김관열 작사, 김기범 작곡, 김수연이 노래한 ‘경주아리랑’은 경주의 관광 테마와 아리랑을 접목해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국악가요다. 이 노래를 기획하고 작사를 맡은 김관열 씨는 경주에 본사를 둔 한수원 출신의 정년퇴직자로 퇴직 후 국내 최초 은퇴준비실전지침서인 은준인(隱準人)을 저술했고 작가와 강사, 1인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 ‘내 안에 있는 내 아내’ ‘오드리헵번보다’ 등 10여편을 작사하며 전문 작사가로 변신했다. 김 씨는 퇴직 후 경주를 위해 가장 보람된 일을 찾던 중 경주를 대표할만한 대중적 노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경주로 가자’라는 관광테마와 아리랑을 접목시켜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국악가요의 가사를 썼다. 작곡을 맡은 김기범 씨는 경주의 대표적인 7인 퓨전국악단 세라온 대표이자 작곡가 겸 싱어로서 지금까지 ‘뻥뚫린 저하늘’ 등 여러 곡을 작곡했다. 경주의 크고 작은 주요 행사에 자주 초청되다 보니 지역에서는 알려진 대중음악인으로 현재 청년예술인연합 푸른창공의 대표이자 블루뮤직 실용음악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노래를 맡은 김수연 씨는 전통 국악인이다. 전주대사습전국대회 제42회 민요 부문에서 장원을 수상한 경기민요 명창이자 진정한 전통 소리꾼으로 현재 김수연 국악연구소, 경주청소년 국악 관현악단-작은 악꾼들, 국악예술단 다꽃의 대표를 맡고 있다. 김수연 씨는 “‘경주아리랑’을 통해 지역민들이 경주를 더욱 사랑하고 지역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더 열심히 활동하겠다”면서 “이 노래를 통해 더 많은 관광객이 경주를 찾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동국대 경주캠퍼스 호텔관광외식경영학부는 지난달 27일 힐튼호텔에서 경주시 경북관광두레협력센터, 경주관광두레협력센터와 각각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경북관광두레협력센터와 업무협약은 경상북도의 지속가능한 지역관광 생태계 조성 및 지역 관광사업체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상호 협력 및 향후 컨설팅 지원을 위해 체결됐다. 협약을 통해 동국대 호텔관광외식경영학부와 경북관광두레협력센터는 관광두레 주민사업체 컨설팅 및 운영지원, 지역관광인력 양성을 위한 교육사업 및 청년일자리 창출을 위한 협력사업, 지역사회 연계공동프로젝트 발굴 및 운영을 통한 지역사회 공헌, 기타 양 기관 협력 가능한 상호 관심사항에 대해 상호 협력한다. 이어서 경주관광두레협의회와 경주시의 지속가능한 지역관광 생태계 조성 및 관광두레 주민사업체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상호 협력 및 향후 컨설팅 지원하는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호텔관광외식경영학부와 경주관광두레협의회는 지역관광사업체 컨설팅 및 운영지원, 지역관광인력 양성을 위한 교육사업의 협업, 지역관광관련 연구자료 및 연구 성과 공유, 기타 양 기관 협력 가능한 상호 관심사항에 대해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동국대 호텔관광외식경영학부는 지역산업 특성에 맞게 동국대가 경주캠퍼스에만 개설한 학과이다. 동국대 경주캠퍼스는 호텔관광외식경영학부를 학문분야 특성화학과로 선정하고 교육 및 산학, 연구 분야에 우선적으로 자원을 투입하여 관광 및 관광 관련 사업에서 요구하는 유능한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망인이 저승길에 나섰다. 저승은 바다를 건너 저 멀리 있는 곳이라 하였다. 그가 나루터에 도착해 저승배를 타고 떠나려는데 밤하늘은 달도 없이 깜깜하였고, 바다에는 폭풍우가 불고 있었다. 그가지금 떠나게 된다면 배는 어둠 속에 길을 잃거나, 폭풍우에 뒤집힐 것이다. 그러자 배우들이 마당으로 나가 눈물향가를 공연했다. 떠나려는 이의 공적을 아름답게 꾸며 노래가사를 만들어 불렀다. 다른 배우들은 정성스레 음식을 만들어 떠나는 이에게 바쳤다. 떠나려던 이가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꾸민 자신의 이야기에 감동하여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다음날 새벽이 밝아왔다. 이제 폭풍우가 그쳐 바다의 파도도 잔잔해졌다. 떠나는 이는 환송을 받으며 먼 길을 떠나갔다. 이것이 산상억량이 체계화한 눈물향가의 기본 골격이었다. 이러한 풍습은 일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 경주에서 발굴되어 공개된 쪽샘지구의 장례 행렬도에도 이와 똑같은 내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쪽샘지구 행렬도는 신라의 사슴공주가 저승으로 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다. 그녀가 떠날 때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고, 바다의 파도는 잔잔하였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신라의 사슴공주는 나룻배를 타고 저승바다를 건너고 있었던 것이다. 백촌강 충격 이전에 한반도의 향가문화는 이미 왜국에 흘러 들어가 있었다. 세살박이로 현해탄을 건너간 산상억량이 일본에 수출되어 있던 한반도 박래품에 백제 디아스포라들이 가진 한의 정서를 덧붙여 눈물가를 만들었다. 그것이 당시 일본인들의 정서에 먹혔다. 억량의 향가에 대한 새로운 태도는 큰 호응을 받았다. 새로 만들어지는 향가의 대다수가 눈물가로 채워졌다. 일본에 눈물향가가 만개하였다. 눈물가는 일본의 주류문화가 되었다. 향가가 대중화되면서 작품 수는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현대에까지 전해지는 것만 해도 4516장에 이르게 되었다. 대중화의 계기는 백촌강의 충격으로 부터 비롯되었고 그 중심에 산상억량이 있었다. 일본 중서진(中西眞) 교수는 향가의 그래프상에 나타난 변곡점의 위치를 지적한 대로 백촌강 전투 이후 백제인들이 댐의 둑이 터지듯 왜국에 밀려 들어갔다. 그들은 다방면에 걸쳐 크고 작은 충격을 가했고, 향가도 그중 하나였다. 이야기가 조금 빗나가지만 눈물향가의 이론은 일본의 역사서술 인식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생전의 공적을 꾸며 알리라’는 것이 눈물향가의 핵심이론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이 지식인 계층에도 팽배해졌다. 눈물향가가 씌어질 무렵 일본에서는 최초로 역사책이 씌어졌다. ‘고사기(712)’와 ‘일본서기(720)’라는 책이다. 일본서기 안에 향가가 적절히 인용되고 있었다. 이는 눈물가 이론이 역사편찬 분야에까지 받아들여졌음을 말한다. 그들은 역사를 기술하면서 사실을 기록하면서, 눈물가의 이론에 따라 실제보다 '꾸며' 서술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가들의 역사 기술방식은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소위 춘추의 필법이다. 김부식의 경우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유교적 합리주의에 맞지 않은 사실들은 죄다 버렸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신화가 없다. 한일 고대사 편찬의 기본 태도에 있어 일본의 역사가들은 ‘눈물향가의 창작방식’을 받아들여 ‘꾸미자’고 했고, 대한민국의 역사가들은 ‘춘추의 필법에 따라’ 기록하고자 했다. 기술방식을 달리하여 쓴 고대사를 두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일 양국민들은 자기들의 서술내용이 옳다고 죽자고 으르렁거리고 있다. 다시 이야기를 눈물향가로 돌리겠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중서진(中西進) 교수의 말대로 만일 백촌강 전투가 없었더라면, 일본에 눈물가 문화는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산상억량의 시대 일본에는 눈물향가라는 꽃이 만개하였다. 산상억량은 세살에 건너간 이후 일본땅에서 70년을 살며 활동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지 26년이 지나던 해에 향가의 역사에 중요한 일이 발생했다. 그날은 759년 1월 1일이었다. 야카모치(家持)라는 지방장관에 의해 마지막 향가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한반도에서 현해탄을 건너간 우리의 누이가 가녀린 손으로 일본인들의 눈물을 거두어주다가 숨을 거두었다. 향가의 종언이었다. 이후 일본에 향가문화가 사라졌다. 만드는 법도 사라지고, 푸는 법도 잊혀졌다. 암흑의 시대가 도래했다. 일본 향가 마지막 작품은 4516번가다. 우리의 누이가 남긴 유언이라 할 마지막 작품을 보자. 新年乃始乃波都波流能家布敷流由伎能伊夜之家余其騰 신년이 시작되었다. 베풀어주고 백성들을 번무하게 하리니. 그대들도 밤늦도록 베풀고 다스려야 하리. 나머지 사람들도 힘차게 달리라. 백제 도거인들이 들어간 직후 일본에 향가가 꽃을 피웠고, 도거인들이 사망한지 한세대도 지나지 않아 향가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기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어떠한 형태로던 백제 도거인들이 향가문화의 도입과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엽집에 작품을 남긴 향가의 작자들은 500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은 때와 장소를 달리했기에 작품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소장되고 있었다. 그러던 작품들이 여러 단계를 거치며 차츰 취합되다가 만엽의 기적이 일어났다. 마지막 작품을 만든 야카모치(家持)라는 이가 4516장을 모아 취합하였다. 그는 작품들을 한 곳에 묶었다. 이 두루마리 묶음이 우리가 보고 있는 만엽집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향유하던 문화가 한 사회의 주류 문화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문화사적 계기가 필요하다. 그 계기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천재가 만든다. 대한민국의 트롯에게는 백영호라는 작곡가가 있어 그 일을 해냈고, 일본의 눈물가에게는 산상억량이 있어 그 일을 해냈다. 눈물향가 이론을 체계화 했고 향가문화를 대중화해 오늘날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만엽문화의 시대를 연 세살박이 산상억량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최고의 만엽가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 일본 곳곳에 그의 가비(歌碑)가 세워져 있다. 봄이 오면 진주에 가보아야 하겠다. 그곳에서 백영호 기념관을 찾으려 한다. 논개처럼 붉게 강낭콩 꽃이 핀다는 그곳 남강 촉석루에서 짙은 커피를 마시며 트롯과 눈물향가의 가요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