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숲을 삐져나온 햇살이 능 정수리에 고봉밥으로 수북하다. 겨울바람에 시달려 풀죽은 덤불로 납작 엎드린 그늘도 조금씩 주름을 편다. 바람으로 떠돌았던 낙엽들이 휑한 마침표를 찍어놓은 계절이다. 자질구레한 편린들을 내팽개치고 홀로 거닐고픈 심사일 때가 든다. 들키고 싶지 않는 마음을 풀어놓기 좋은 곳으로 신라의 능원은 품을 내놓고 있다.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번지 일대, 기세등등한 솔숲 원성왕릉이다. 솔숲을 배경으로 능묘제도의 완벽함을 따른 신라의 왕능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능이다. 양쪽 화표석 영역으로 서역석인상(西域石人像) 1쌍,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 1쌍, 석사자상(石獅子像) 2쌍이 도열된 형상으로 마주서서 반긴다. ⌜대숭복사비」 ‘돌아가신 해인 무인년(798) 겨울에 장례에 대해 유교(遺敎)하면서 인산(因山)을 명했다. 땅을 가리기가 어려워 절을 지목하여 유택(幽宅)을 모시려 하였다. 이때 반대가 있었다. “절을 뺏어 장사지내려는 것은 좋지 않다”하였다. 그러자 담당자가 나무라며 말했다. “절이란 자리하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며 어디에 짓던 복된 터가 되어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할 것이다” ‘절을 옮겨 지울 때 인연 있는 대중들이 솔선하여 옷소매가 이어져 바람이 일지 않고 송곳 꽂을 땅도 없을 정도였다’ ‘금성의 남쪽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산기슭에 숭복사(崇福寺)라는 절이 있다. 원성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다. 바위가 고니 모양이다. 왕이 돌아가신 70여년을 넘긴 아홉 왕이 바뀐 후인 경문왕(48대 861~875)대 조성 되었다’ 봉분 둘레는 회랑식으로 석주를 세우고 돌난간을 이었다. 현재 돌기둥은 모두 남아 있으나, 돌기둥 사이에 끼웠던 난간 살대는 거의 망실되어 새로 설치한 것이다. 호석은 목조건축의 석단과 같이 지대석 위에 판석으로 된 면석을 놓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렸다. 각 면석 사이엔 봉분 내부로 뿌리가 길게 뻗어 면석과 봉토가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탱석을 배치하였다. 전면보다 약간 앞으로 돌출된 탱석의 높이 83㎝ 너비 66㎝에는 두 칸 건너 하나씩 무복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12지상이 조각되어있다. 빙 둘러 서서 무복(武服)을 여미고 능을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는 12신상이다. 남쪽방향 영혼 승천을 호위인도 하는, 정면을 향한 오상(午像) 말을 중심으로 좌우 치우치고 있다. 당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신라로 놀러온 쥐(자子)⦁소(축丑)⦁범(인寅)⦁토끼(묘卯)⦁용(진辰)⦁뱀(사(巳)⦁말(오午)⦁양(미未)⦁원숭이(신申)⦁닭(유酉)⦁개(술戌)⦁돼지(해亥), 각자의 방위를 호위하는 수호신으로 깜찍하고 늠름한 표상이다. 12지신상은 위진남북조시대(578) 중국의 묘장제도에서 발생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왕릉 12지신상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어, 통일신라의 독창적 기법의 예술성으로 창조되었다고 보여 진다. 신라능묘에 등장한 것으로 성덕왕릉 둘레에 배치된 환조(丸彫)형 무복12상으로 추측하는 실정이다. 신라의 능묘에 12지상을 각인한 곳은 28대 진덕여왕릉, 33대 성덕왕릉, 35대 경덕왕릉, 38대 원성왕릉, 41대 헌덕왕릉, 42대 흥덕왕릉 대까지 이어진다. 김유신장군묘, 능지탑, 구정동방형분, 원원사탑기단, 박물관 야외전시장 등 에서도 볼 수 있다. 중국 당나라시절 문헌 속 12지 동물형태는 시간의 신(神)으로 해석 된다. 사신(四神)이 방위의 신으로 정립된다. 동(東): 토끼(묘卯)⦁서(西): 닭(유酉)⦁남(南): 말 (오午)⦁북(北): 쥐(자子) 십이시(十二時)는 당(唐) 중기에 사신과 연관을 지어 능묘에 배치된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에 유입된 신장상(神將像)을 적립하여 무덤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독창적으로 전개된다. 당의 능묘는 십이지가 용(俑)의 역할로 평복차림새로 부장했다. 신라는 불교의 사천왕상 복장을 십이지신상에 도용했다. 이진락 ⌜신라왕릉 십이지신상 호석성립과 변천과정의 새로운 해석⌟에는 ‘통일신라시대 왕릉 둘레에 조각된 12지신상은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독특한 석각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연원과 출현 시기에 대해선 연구자들 사이에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상의 연원에 대해서는 신라 자체에서 발생했다는 설.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설. 그리고 자생과 전래가 동시에 일어났다는 설 등 세 가지로 나뉜다’고 피력했다. 강우방은 ‘중국 당나라의 십이지상을 도입하되 모방과 창조를 통해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독특한 양식인 신라왕릉 호석 십이지상이 탄생되었다’고 보았다. 강우방 의견을 따른 이근직은 신라왕릉 능묘제도 변천과정을 정리하면서, 신라왕릉 외부호석 구조변화 속에 십이지신상 호석이 탄생하는 과정의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로 비교하며 피장자를 추정하였다. ‘신라능묘는 스투파처럼 능 자체에 견실한 호석을 두르고 난간과 회랑이라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 세부에 있어서 물론 다른 점들이 허가하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의도라 볼 수 있다. 난간과 회랑은 인도의 스투파를 모방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너무도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신라 12지 능묘는 그러한 스투파의 외형을 모방함으로써 ‘왕은 곧 부처’라는 관념을 표현하려 하였다고 본다’는 견해도 있다. 원성왕릉능묘의 십이지는 과시적 성향을 의도한 큰 규모로 호석 전체를 아우른다. 조선의 금석학자 김정희 선생이 제23대 순조 24년(1824)에 경주를 방문했다. 괘릉과 김유신묘의 12지신상을 탁본해서 청(淸)나라에 보냈다. 축소된 탁본과 김정희 선생의 발문이 『해동금석원』 상권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