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나폴리에서 오페라 부파가 생겨나고 유행하더니 페르골레시의 히트작인 ‘마님이 된 하녀’는 월드투어에 나서게 된다. 1752년 프랑스 파리에서 륄리의 오페라 막간에 이탈리아 가수들이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논쟁이 일어난다. 오페라 부파에 대해 상반된 반응 때문이다. 이를 부퐁논쟁(Bouffon`s Quarrel)이라고 하는데 부퐁은 ‘부파’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전통 오페라를 옹호하는 국왕파와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를 지지하는 백과전서파는 매우 격렬히 다투어 ‘전쟁’을 방불케 했다. 전자는 루이 15세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과 음악가 집단, 특히 라모(J.P.Rameau/1683-1764)가 중심인물이었다. 한편, 후자는 왕비와 루소, 디드로, 달랑베르 등 계몽주의자들이 전면에 나섰다. 특히 루소(J.J.Rousseau/1712-1778)는 자국 오페라를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를 찬양하여 국왕파의 미움을 샀다. 그럼 결과는 어땠을까? 당시 프랑스에는 서정적 비극(Trag die lyrique)이라고 불리는 프랑스식 오페라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루이 14세의 음악 멘토이자 프랑스 오페라의 아버지라 불리는 륄리(J..B.Lully/1632-1687년)가 프랑스 전통 연극과 발레를 결합시켜 만든 새로운 장르였다. 프랑스는 17세기의 이런 독창적인 전통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이탈리아의 오페라, 그것도 나폴리의 오페라 부파를 선뜻 받아들이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절대국가 시대에 국왕의 뜻을 거스르긴 힘든 법이다. 결국 18세기 부퐁논쟁은 국왕파의 승리로 일단락되었고, 이탈리아 공연단은 프랑스에서 철수하게 된다. 하지만 이탈리아 오페라가 프랑스에 남긴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식 희가극인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의 탄생을 도왔다. 앞서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를 찬양했던 루소는 우리가 사회계약론을 쓴 사람으로 기억하는 루소가 맞다. 루소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마을의 점쟁이’(Le devin du village/1752초연)라는 오페라 작품을 작곡하여 흥행시키기도 했다. 이 작품이 바로 오페라 코미크에 속한다. 그리고 한 세기 뒤에는 희대의 걸작 ‘카르멘’이 프랑스어 오페라로 정점을 찍게 된다. 카르멘 역시 오페라 코미크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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