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 출신의 매호(梅湖) 손덕승(孫德升,1659~1725)은 1706년 벼슬을 버리고 안강읍 대동소류지 북쪽의 대동마을에 매호초당을 짓고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고, 훗날 1944년 매호정(梅湖亭)으로 중건하였다.
부친 손건(孫鍵)과 모친 안동권씨 대은(臺隱) 권경(權璟,1604∼1666)의 따님 사이에서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난 매호는 어려서부터 외숙 송천자(松川子) 권득여(權得輿:權璟의 次子)에게 글을 배우며, 그의 사상과 학문에 영향을 받았고, 또한 가학을 바탕으로 학문을 이뤘다. 26세 1684년에 반궁 별제에 합격하고 다음 해 식년 문과에 병과 3등을 하였으며, 예조·병조 좌랑 등 여러 요직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으며, 영남학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의 심법(心法)을 따르고, 『근사록』과 『심경』 등을 중시하였다.
7대조 양민공 손소(1433~1484)는 사림파 점필재 김종직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증조부 손노(1578~1649)는 한강 정구(1543~1620)와 여헌 장현광(1554~1637)의 문인이었고, 우재 손중돈(1463~1529)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의 외삼촌이자 스승이었다. 특히 권경은 성호학파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의 문하생으로 학문과 행실이 모두 뛰어났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을 양성하였고, 권득여 역시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가난한 선비로 어렵게 살면서 후학양성에 애썼으니, 매호의 행보와 매우 유사한 점들이 많다.
매호는 자희옹(自喜翁) 최치덕(崔致德,1699~1770) 등을 비롯한 많은 후학을 두었고, 지역문사 우암 남구명(1661~1719), 화계 류의건(1687~1760), 송국재 이순상(1659~1725), 시옹 임화세(1675~1731), 훈수 정만양(1664~1730), 병와 이형상(1653~1733) 등과 왕래하였고, 안재 이덕현(1648~1707), 우와 이덕표(1664~1745), 학고 이암(1641~1696), 동고 이덕록(1677~1743) 등 회재의 후손들과도 많은 교유를 하였다. 그 가운데 치암 남경희의 부친 활산 남용만[화계의 사위]은 최치덕과 동문이며, 남경희의 증조부 우암 남구명과 매호 손덕승이 막역한 사이라 언급하였고, 당시 영덕을 기반으로 활동한 남구명과 경주의 류의건[치암의 외조부]은 양동의 문인들과도 활발한 교유가 있었고, 그 가운데 매호는 영천의 이형상과도 긴밀한 교유가 있었다. 이렇듯 경주지역 학문의 중심 역할을 매호가 담당하였다. 매호집 행장을 보면, 매호초당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경주의 서북쪽 무릉산(武陵山) 아래 금강(錦江) 위에 큰 골짝이 있는데 언덕과 집은 고요하고 들판은 넓었다. 그곳을 좋아한 매호는 언덕 위에 몇 칸 집을 짓고 매호초당(梅湖草堂)이라 편액하고, 글을 지어 스스로 처사(處士)라 하였다. 온갖 꽃과 나무를 심되 각각 구역을 나누고, 매화가 심겨진 곳이 3푼을 넘을 정도로 매화를 가장 좋아하였다. 또 무덤과 가까운 동남쪽 모퉁이에 작은 집을 짓고 띠로 지붕을 덮고 창과 기둥은 모두 대나무를 이어 만들고는 소헌(素軒)이라 편액을 붙였고, 기문이 있으며, 작은 못을 파고 좌우에 연꽃을 심고 못 주변에는 아름다운 꽃을 심었다. 지팡이 짚고서 초당과 소헌을 오가면 정신이 펴지고 흥에 겨웠다. 당시 이름난 문사들이 시축을 품고 술을 싣고서 오는 자들이 서로 이어졌고, 손님들이 떠나가면 작은 방에 바르게 앉아 선현의 책을 읽었다. 고을의 빼어난 선비들이 책을 끼고 배우길 청하고 책을 보내와 경전의 의심나는 것을 묻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이렇듯 매호는 매호초당과 연못을 조성하고, 선대의 묘소 주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는 이따금 초당과 소헌을 유유히 산책하며 호연지기를 펴고 시상(詩想)에 젖곤 하였으며, 가까운 친구가 술을 가지고 오면 속세 밖을 담론하고 선현의 책을 읽었다.
매화를 사랑한 매호선생은 매화의 고결함을 통해 자신의 곧은 의지를 투영하였고, 『매호집』 곳곳에 그의 기상이 넘쳐 흐른다.
사위 이복후(李復厚)에게 쓴 답서(答書)에 “나는 어려서부터 독서하면서 일찍이 특정한 문정(門庭)에 이름을 부탁한 적이 없고, 또한 논설(論說)로 뜻을 과장하는 것과 여항몽사(閭巷蒙士)의 선비들이 와서 항렬을 묻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선생과 제자의 명목으로서 가탁하려하면 번번이 사양하며 피했고, 어떤 경우에는 문자나 사설을 청해 훗날의 계책으로 남겨 놓으려는 자가 있을 때는 붓을 대려하지도 않았다. 이는 하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감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몇 해 전에 그대(李復厚)가 나에게 증행(贈行)의 글을 요청했을 때 역시 사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를 보면, 사위의 부탁조차 거절한 일과 자신의 신념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는 평생을 세속의 이속을 따지는 선비를 멀리하였고, 진정한 학문을 닦는 것을 우선으로 형세에 휩싸이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곧은 지조를 갖고 행동을 실행으로 옮기는 강직하면서도 매화같은 고결한 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