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인이 저승길에 나섰다. 저승은 바다를 건너 저 멀리 있는 곳이라 하였다. 그가 나루터에 도착해 저승배를 타고 떠나려는데 밤하늘은 달도 없이 깜깜하였고, 바다에는 폭풍우가 불고 있었다. 그가지금 떠나게 된다면 배는 어둠 속에 길을 잃거나, 폭풍우에 뒤집힐 것이다.
그러자 배우들이 마당으로 나가 눈물향가를 공연했다. 떠나려는 이의 공적을 아름답게 꾸며 노래가사를 만들어 불렀다. 다른 배우들은 정성스레 음식을 만들어 떠나는 이에게 바쳤다. 떠나려던 이가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꾸민 자신의 이야기에 감동하여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다음날 새벽이 밝아왔다. 이제 폭풍우가 그쳐 바다의 파도도 잔잔해졌다. 떠나는 이는 환송을 받으며 먼 길을 떠나갔다. 이것이 산상억량이 체계화한 눈물향가의 기본 골격이었다.
이러한 풍습은 일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 경주에서 발굴되어 공개된 쪽샘지구의 장례 행렬도에도 이와 똑같은 내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쪽샘지구 행렬도는 신라의 사슴공주가 저승으로 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다. 그녀가 떠날 때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고, 바다의 파도는 잔잔하였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신라의 사슴공주는 나룻배를 타고 저승바다를 건너고 있었던 것이다.
백촌강 충격 이전에 한반도의 향가문화는 이미 왜국에 흘러 들어가 있었다. 세살박이로 현해탄을 건너간 산상억량이 일본에 수출되어 있던 한반도 박래품에 백제 디아스포라들이 가진 한의 정서를 덧붙여 눈물가를 만들었다. 그것이 당시 일본인들의 정서에 먹혔다. 억량의 향가에 대한 새로운 태도는 큰 호응을 받았다. 새로 만들어지는 향가의 대다수가 눈물가로 채워졌다. 일본에 눈물향가가 만개하였다. 눈물가는 일본의 주류문화가 되었다.
향가가 대중화되면서 작품 수는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현대에까지 전해지는 것만 해도 4516장에 이르게 되었다. 대중화의 계기는 백촌강의 충격으로 부터 비롯되었고 그 중심에 산상억량이 있었다. 일본 중서진(中西眞) 교수는 향가의 그래프상에 나타난 변곡점의 위치를 지적한 대로 백촌강 전투 이후 백제인들이 댐의 둑이 터지듯 왜국에 밀려 들어갔다. 그들은 다방면에 걸쳐 크고 작은 충격을 가했고, 향가도 그중 하나였다.
이야기가 조금 빗나가지만 눈물향가의 이론은 일본의 역사서술 인식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생전의 공적을 꾸며 알리라’는 것이 눈물향가의 핵심이론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이 지식인 계층에도 팽배해졌다. 눈물향가가 씌어질 무렵 일본에서는 최초로 역사책이 씌어졌다.
‘고사기(712)’와 ‘일본서기(720)’라는 책이다. 일본서기 안에 향가가 적절히 인용되고 있었다. 이는 눈물가 이론이 역사편찬 분야에까지 받아들여졌음을 말한다. 그들은 역사를 기술하면서 사실을 기록하면서, 눈물가의 이론에 따라 실제보다 `꾸며` 서술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가들의 역사 기술방식은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소위 춘추의 필법이다. 김부식의 경우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유교적 합리주의에 맞지 않은 사실들은 죄다 버렸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신화가 없다. 한일 고대사 편찬의 기본 태도에 있어 일본의 역사가들은 ‘눈물향가의 창작방식’을 받아들여 ‘꾸미자’고 했고, 대한민국의 역사가들은 ‘춘추의 필법에 따라’ 기록하고자 했다. 기술방식을 달리하여 쓴 고대사를 두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일 양국민들은 자기들의 서술내용이 옳다고 죽자고 으르렁거리고 있다.
다시 이야기를 눈물향가로 돌리겠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중서진(中西進) 교수의 말대로 만일 백촌강 전투가 없었더라면, 일본에 눈물가 문화는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산상억량의 시대 일본에는 눈물향가라는 꽃이 만개하였다. 산상억량은 세살에 건너간 이후 일본땅에서 70년을 살며 활동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지 26년이 지나던 해에 향가의 역사에 중요한 일이 발생했다. 그날은 759년 1월 1일이었다. 야카모치(家持)라는 지방장관에 의해 마지막 향가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한반도에서 현해탄을 건너간 우리의 누이가 가녀린 손으로 일본인들의 눈물을 거두어주다가 숨을 거두었다.
향가의 종언이었다. 이후 일본에 향가문화가 사라졌다. 만드는 법도 사라지고, 푸는 법도 잊혀졌다. 암흑의 시대가 도래했다. 일본 향가 마지막 작품은 4516번가다. 우리의 누이가 남긴 유언이라 할 마지막 작품을 보자. 新年乃始乃波都波流能家布敷流由伎能伊夜之家余其騰 신년이 시작되었다. 베풀어주고 백성들을 번무하게 하리니. 그대들도 밤늦도록 베풀고 다스려야 하리. 나머지 사람들도 힘차게 달리라.백제 도거인들이 들어간 직후 일본에 향가가 꽃을 피웠고, 도거인들이 사망한지 한세대도 지나지 않아 향가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기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어떠한 형태로던 백제 도거인들이 향가문화의 도입과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엽집에 작품을 남긴 향가의 작자들은 500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은 때와 장소를 달리했기에 작품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소장되고 있었다. 그러던 작품들이 여러 단계를 거치며 차츰 취합되다가 만엽의 기적이 일어났다. 마지막 작품을 만든 야카모치(家持)라는 이가 4516장을 모아 취합하였다. 그는 작품들을 한 곳에 묶었다. 이 두루마리 묶음이 우리가 보고 있는 만엽집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향유하던 문화가 한 사회의 주류 문화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문화사적 계기가 필요하다. 그 계기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천재가 만든다. 대한민국의 트롯에게는 백영호라는 작곡가가 있어 그 일을 해냈고, 일본의 눈물가에게는 산상억량이 있어 그 일을 해냈다.
눈물향가 이론을 체계화 했고 향가문화를 대중화해 오늘날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만엽문화의 시대를 연 세살박이 산상억량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최고의 만엽가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 일본 곳곳에 그의 가비(歌碑)가 세워져 있다.
봄이 오면 진주에 가보아야 하겠다. 그곳에서 백영호 기념관을 찾으려 한다. 논개처럼 붉게 강낭콩 꽃이 핀다는 그곳 남강 촉석루에서 짙은 커피를 마시며 트롯과 눈물향가의 가요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