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는 분명하나 갈급한 그 어떤 목적 없이 떠나는 기차여행은 뾰족한 역사(驛舍) 지붕을 마주하면서부터 이미 설렌다. 순식간에 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과의 교감은 유난히 시적으로 다가와 자질구레했던 일상의 번잡함을 금세 휘발시킨다. 경주 울타리 안이지만 낯선 동네로의 이동을 기차로 해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까지 승객을 기다리고 실어나르는 역은 지역 내 5개 역(경주역, 안강역, 서경주역, 불국사역, 건천역) 뿐이다.
오래된 침목들 위로 얼마나 많은 기차들이 지났을까. 수많은 기차가 지나간 흔적은 모두 애틋하다. 철커덩 거리는 적당한 흔들림 속에서‘떠나왔다’는 해방감과 ‘다다랐다’는 안도감을 교차시키는 객차에서 우리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지도 모른다. 미뤄서 해악이 되는 일이 더러 있다. 그 중 하나가 아날로그의 대명사로 상징되는 ‘무궁화’호 타고 떠나는 기차여행이다. 하물며 그 이용기간이 한시적임에랴. 혼자만의 여행이라면 Sarah Vaughan의 ‘A Lover`s Concerto’ 같은 음악을 들으며 출발해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경주의 철도는 1900년대 초 중앙선 개설로 최초 개통됐으나 어언 100년의 시간을 지난 현재는 동해남부선과 중앙선의 복선화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올해 2021년 12월경(예정) 역이 신설 및 이설됨에 따라 기존 철로는 폐선이 되는 수순을 밟는다.
현재 경주시를 통과하는 열차는 중앙선과 동해남부선으로 17개의 역이 있다. 동해남부선 총 12개 역과 중앙선 5개역이다. 동해남부선 총 12개 역(부조역, 양자동역, 안강역, 사방역, 청령역, 나원역, 경주역, 동방역, 불국사역, 죽동역, 입실역, 모화역)중에선 현재 6개역이 운행되고 있으나 나원역은 화물만 취급하고 있다. 6개역은 폐역되었다. 한편, 중앙선 총 5개역(서경주역, 율동역, 모량역, 건천역, 아화역) 중 건천역과 서경주역만 운행 중이며 나머지는 여객취급이 중단된 상태다. 따라서 지역내 현재 여객을 운행중인 역은 동해남부선으로는 경주역, 불국사역, 안강역이 있으며 중앙선으로는 서경주역, 건천역으로 모두 5개소 역이다.
폐선이 되기 전 아직까지 운행중인 지역 내 5개소 역 탐방을 시작으로 경주 이외 동해남부선과 중앙선상에 있는 다른 도시의 역을 찾으며 각 역의 사계절 풍경도 담을 예정이다. 지난달부터 세 차례, 경주역과 서경주역에서 출발해 건천역, 안강역, 불국사역을 다녀왔다.
-서경주역~건천역...시류도 잊은 채 준비해 간 커피와 삶은 계란, 사이다는 건천역 대합실에서 해결하고 건천5일장 찾아 시골 인심도 만끽 지난달 21일 첫 번째 기차 여행지는 서경주역에서 출발해 도착한 건천역이었다. 오후 12시18분 서경주역을 출발해 건천역 도착은 12시31분 이었다. 약 13분간의 짧은 시간이었다. 요금은 2600원. 현곡면 용담로에 있는 서경주역은 중앙선으로 단촐하고 작지만 단단해 보였다. 서경주역을 이용하는 일반철도 일일 승객 수는 2019년 기준 574명 정도다. 향후 현곡면 하구리로 이전함과 동시에 동해선 나원역과 통합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역은 현곡면 주거밀집지를 끼고 있어선지 이용객이 많아 보였다. 난방이 잘 된 역대합실에선 간간이 승객들이 문을 여닫고 있었다. 서경주역에서 만난 우리(동행자)는 대합실(맞이방)과 역명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건천역으로 향하는 기차에선 코로나로 거리두기를 시행하고 있어 차창 좌석만 가능했다. 자가용으로 익숙하게 다녔던 건천 국도를 멀리서 바라보니 작게만 보인다. 차창 밖으로 모량역을 바라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모량역을 지나며 바깥 풍경을 정신없이 찍어대다 보니 이내 건천역에 도착했다.
중앙선 건천역은 아화역과 모량역 사이에 있다. 대 여섯 명이 하차를 한 건천역을 이용하는 일일 승하차객은 2019년 기준 21명 정도라고 한다(철도통계연보). 1일 8회 무궁화호가 운행되며 건천역에 정차하는 모든 무궁화호는 동대구에서 포항까지만 운행한다. 복선전철화가 완료되면 모량역처럼 신호장으로 이전할 예정이라고 한다. 모량역과 흡사한 외관에선 신산함이 묻어났으나 한없이 다정스러웠다. 시류도 잊은 채 준비해 간 커피와 삶은 계란과 사이다는 건천역에 내려 대합실에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승객이 급격히 줄어든 탓일까. 텅 빈 대합실에서 커피와 계란으로 든든해진 우리는 마침 건천5일장이 서는 장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걸어간 시골장터에는 장이 한창이었다. 건천장 한 켠에 있는 ‘건천대장간’을 찾아 대장장이가 손수 만든 주방용 칼 한 자루씩을 샀다. 인심 좋고 손 재간이 뛰어난 주인장은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보기 드문 장인이다. 파격 할인가로 구입한 칼은 정말 손맛이 제대로인 작품 같았다. 건천맛집을 찾아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건천읍행정복지센터 바로 옆 카페서 커피 한 잔을 나눴다.
길을 잃어도 좋을, 익숙치 않은 곳에서의 배회는 즐거웠다. 너무 느긋하게 있었던가. 오후 3시48분 경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기 위해 급히 역으로 향했다. 간신히 기차 시각을 맞추긴 했는데 역으로 가는 길은 꽤 멀어 나중엔 뜀박질을 했다. 학창시절 버스를 타기 위해 ‘우다다’ 뛴 기억이 소환됐다. 시간이 정해져있는 기차를 타기 위해 서두는 모습이 생경했지만 마냥 유쾌했다. 관성처럼 자가용을 이용하고 쉽게 이동했던 습관에서 모처럼의 해방이었다.
-경주역~ 불국사역...불국사역 내려 구정동과 진현동이 선사하는 여유로움과 낭만에 ‘흠뻑’
두 번째 기차여행은 경주역에서 불국사역까지였다. 동해남부선 경주역을 이용하는 일반철도 일일 승객 수는 2019년 기준 2685명이다. 폐역 후 모든 업무를 신경주역으로 이관할 예정이며 지금은 새마을호도 명절임시열차를 제외하고는 운행하지 않는다. 경주역은 KTX중심 열차이용패턴 변화에도 불구하고 행락철, 휴가(방학)시즌 중에는 아직도 이용객이 폭증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경주역에서 오전 11시31분 기차로 불국사역에 도착한 시간은 11시42분. 10여 분 걸려 불국사역에 도착하다니! 절로 웃음이 났다. 경주역과 불국사역은 일요일이라 그런지 유난히 이용객이 많았다.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기차는 낮이건 밤이건 환하게 불을 켜고 들어온다. 대체로 노후화된 기차들은 경적소리도 늙어있는 듯 했다. 불국사역 대합실에서 이번엔 미리 쪄간 떡에 향긋한 커피를 곁들여 홀짝거렸다. 불국사역 맞이방을 볼때마다 매번 그 대합실의 작은 크기에 놀란다. 이렇게 작은 대합실에서 수많은 승객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냈을 것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동해남부선 불국사역을 이용하는 일반철도 일일 승객 수는 2019년 기준 391명이다.
불국사역에서 걸어서 인근 맛집을 찾았다. 밀면으로 유명한 이 집은 그날도 길게 줄을 서고 있어 놀라웠다. 거리두기를 준수한 이 식당에서 석쇠에 구운 돼지고기를 곁들인 밀면 한 그릇을 맛나게 먹고는 택시로 진현동으로 향했다. 이 동네에 하나둘씩 조심스레 입점하고 있는 상가 중 새로 입점한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이어 생활소품 등을 파는 잡화점을 둘러보고 골동품 가게도 들렀다. 문턱이 낮은 이 가게서 가성비 갑(?)이었던 한 점의 도자기와 등불조명을 구입했다. 돌아오는 기차에 실었던 도자기의 무게와 들고 이동하는 불편함도 잊은 채였다. 우리는 구정동과 진현동이 선사하는 여유로움과 낭만에 흠뻑 빠졌다. 열심히 살아 온 자신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고 위로였다.
-경주역~안강역...새마을호가 운행되기도 했던 제법 규모 큰 안강역, 안강서 경주역으로 돌아오는 기차는 역방향으로 운행지난 1일 경주역에서 안강역으로 출발한 시간은 오전 11시30분으로 안강역 도착은 11시48분이었다. 18분여. 경주 시내를 내려다보며 가는 기차에서는 경주 시내 건물과 골목의 속살과 민낯이 그대로 보인다. 기차여행의 참맛이다. 객차 안은 조용했다. 의외로 혼자서 기차를 이용하는 승객이 많았다. 안강역으로 가는 창 밖 풍경은 유난히 논이 많았는데 성급하게 봄이 머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얼음이 녹은 강에서, 포실포실해진 논흙들이 그랬다. 창 밖으로 나원역과 사방역의 모습도 스치듯 지나간다. 마을 건널목을 지날때마다 딸랑딸랑 신호음이 울렸고 ‘우리 열차 곧 안강역에 도착합니다’ 라는 안내방송에서의 ‘우리’는 정겹다.
동해남부선 안강역을 이용하는 일반철도 일일 승객 수는 2019년 기준 46명이다. 1918년 12월 경동선 협궤로 최초 영업을 시작한 안강역은 1966년 현 역사가 준공됐고 2015년 새마을호가 운행중지 되었다. 안강역은 비교적 읍내 끝자락에 위치해 주변 역세권이 잘 형성돼 있지 않았다. 역사는 생각보다 제법 규모가 컸고 일직선으로 뻗은 직선의 선로가 시원해 보인다. 역사 건너편 플랫폼에는 승객대기실이 아직 운영되고 있으나 텅 비어 있는 승객대기실은 미련하게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강역을 빠져나와 이어지는 비화원로 거리는 조용했다. ‘역전이용소’, ‘안강초등학교’ 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갑산한의원’이 보이는 큰 사거리를 지나니 안강읍행정복지센터가 보이는 다운타운으로 이어졌다. 안강 시내 골목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차 없이 걸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안강서 경주역으로 돌아오는 기차는 역방향으로 운행됐다. 기차 시각을 맞추려고 헐레벌떡 뛰어 본 기억이 언제쯤에서 멈춰 있을까. 기차가 떠나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계속 시계를 들여다본 기억은 또 언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