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동해안의 낚시어선에 대한 안전점검이 대대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경주시는 포항해양경찰서,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 포항어선안전조업국, 한국전파진흥원 등 유관기관과 합동점검반을 편성해 오는 21일까지 안전점검을 실시한다. ‘대한민국 안전대전환 2024 집중안전점검’ 일환으로 실시되는 이번 합동 점검은 낚시객의 증가에 따라 낚시어선의 안전사고를 미연에 예방하는 차원에서 바람직하다. 시는 이번 점검기간 동안 낚시어선의 불법 증개축, 출·입항 신고, 안전장비 구비·작동, 승선정원 초과, 음주운항, 낚시전문교육 이수 여부 등을 집중 점검한다. 점검 결과 구명·소화설비 미비치, 승선정원 초과, 음주운항 등 중대 위반사항은 엄중 조치한다는 방침이다. 포항해경에 따르면 최근 3년간 경주, 포항 등 관할 지역에서 낚시어선 사고는 총 18건 발생했다. 또 봄철 낚시어선 이용객은 월평균 9000여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역 내 낚시어선의 작은 안전사고는 있었지만, 대형사고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낚시어선 사고가 발생해 인명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은 끊이지 않고 있다. 관련 당국의 노력과 낚시어선 등 해상레저업 종사자들의 안전의식이 예전보다는 향상됐다고 한다. 하지만 안전사고는 언제나 방심에서 비롯된다. 구명조끼 착용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출·입항 신고, 안전장비 작동 점검 등 해상안전에 대한 점검과 교육·홍보가 더욱 강화돼야 한다. 특히 점검 대상 어선뿐만 아니라 미신고 어선들의 영업활동도 있는 만큼 전체 어선에 대한 점검이 이뤄져야 한다.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미신고 낚시어선이 더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주를 비롯해 경북 동해안은 바다낚시 동호인이나 낚시체험을 하려는 가족단위 나들이객이 많이 찾는다. 그만큼 사고 위험성도 항상 도사리고 있다. 이번 합동점검 기간 동안 정비소홀이나 정원 초과 승선, 음주운항 등 불법행위 단속과 더불어 선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안전 교육도 강화했으면 한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는 격언처럼, 이번 낚시어선 안전점검이 의례적인 통과절차가 안되게 철저하게 이뤄지길 바란다. 올해는 단 한 건의 낚시어선 사고소식도 들리지 않길 기대한다.
며칠 전 경주의 어느 분으로부터 시의회 의원들이나 공무원들이 시민들의 혈세로 과도한 해외여행을 일삼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분에게 혈세 아니라 뭐라도 좋으니 제발 시의회나 시 공무원들이 경주를 떠나 다른 고도나 유적지, 관광지들을 좀 다니며 제대로 공부하면 좋겠다고 맞섰다. 그런 이유가 있다. 경주시 시의원들이나 공무원들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만나도 경주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고 담장 없는 유물 전시관이라 말하기 일쑤다. 내가 직접 가본 세계의 고도들은 경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유적을 지니고 있었고 고도를 보존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한 시민 의식들도 남다르게 느껴졌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고도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고대의 유적부터 현대에 이르도록 각 시대별로 모든 것을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함부로 없애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경주는 일정한 기준을 두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가차 없이 허물고 비우기를 밥 먹듯 해 왔다. 그 결과 유적지 발굴, 유적지 정비, 유적 공원화라는 이유로 시간이 지나면 이 역시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 될 현재의 삶들이 무턱대고 쓸려나갔다. 수많은 동네가 사라졌고 거기 살던 사람들이 이웃과 친척을 잃고 헤어져야 했다. 반면 정작 보존되어야 할 풍광과 경치는 힘 있는 사람들의 배 불리기로 뭉턱뭉턱 훼손되었다. 불국사 가는 길 배반동에 아파트가 들어섰고 백률사 앞 넓은 들과 동천동 황성동 일대도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었다. 심지어 불국사 앞 주차장은 당시 권력자들의 담합과 신성한 불국의 성역을 지켜야 할 불국사 관계자들의 어이없는 묵인으로 인해 용도변경까지 되면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또 다른 병폐도 있다. 위의 개발 지역을 포함, 용강, 충효, 금장 등 경주를 둘러싼 이른바 ‘신도시’들이 한결같이 경주와 전혀 상관없는 문자 그대로 신도시가 되어버렸다. 이들 도시들을 지나다 보면 이곳이 과연 경주의 도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로마나 피렌체, 파리, 교토에서 만난 특유의 도시 정서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물론 도시의 특성을 떠나 경제성과 도시 편의성을 높인다는 면에서 무조건 비판만 할 수 없다. 그러나 경주의 경우, 기존의 인구밀집 지역은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꽃밭만 남았고 신도시는 완전히 특성을 잃은 이상한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져 과연 이게 온전한 유적지 보존이고 관광도시 개발인지 의심스럽다. 명칭과 마을 기능이 완전히 뒤집힌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교촌한옥마을이 그렇다. 한옥마을은 원래 살던 교촌의 주민들을 대거 몰아내고 기와 얹은 상가건물만 왕창 지어 놓은 기형적인 마을이 되었다. ‘마을’이란 사람들이 살아야 마을인데 정작 중요한 사람들은 몰아내고 상가만 몰아넣은 것은 기막힌 실정(失政)이다. 교촌 한옥마을이 아니라 그냥 어정쩡한 교촌먹자골목이다. 중심상가에 만든 ‘금리단길’을 걸어도 마음이 착잡하다. 황리단길의 북적거림을 중심상가까지 넓혀 보려는 의도겠지만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단순히 길을 지정하고 치장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80년대는 이 길이 사시사철 사람들로 넘쳐났던 길이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이 길에서 반경 2km 이내에 성건동, 중부동, 황남동, 황오동, 사정동, 황성동, 인교동 등이 밀집해 대도시 못지않은 인구 응집력을 과시했다. 지금 성건동과 중부동 이외 대부분 마을들이 유적정비 명목으로 사라지거나 공동화되었다. 황리단길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그 일대가 7~80년대의 모습을 유지하고 그 속에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복고적 열풍에 부응한 덕분인데 생짜로 길 이름을 짓고 휘황한 가로등을 배치한다고 해서 경주 사람이나 외지 사람들이 관심 가질 리 없다. 그래서라도 더욱 경주를 이끌 시의회나 공무원들이 제대로 된 해외답사를 해야 한다. 단, 이런 답사는 단순히 형식적 답사가 아닌 철저한 목적과 공부를 전제로 한다. ‘로마 한 달 살기’, ‘파리 한 달 살기’ 같은 프로젝트 아래 공적 목적에 충실한 답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좀 더 경주다운 장기적이고 발전적인 고도 발전안이 만들어질 것이다. 여행사가 짜 맞춰주는 형식적인 공식 방문지 한두 곳으로 생색만 내는 해외답사는 당연히 나도 반대다.
아기 공룡 둘리가 김수정 작가에 의해 탄생한 것은 1983년 4월이었다. 이 둘리 이야기는 10년 조금 넘게 어린이 잡지 책에 연재되어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만화를 보고 자란 어린이들은 이제 대부분 어른이 되었으나 귀여운 말썽꾸러기 둘리를 여전히 잘 기억하고 있다. 이 만화 내용 탓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공룡과 사람들이 같이 살았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서울의 Y대학 공대 전기공학부에서 2015년 가을 학기 교양 과목으로 ‘창조과학 세미나’라는 강좌를 개설하겠다고 하여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이 과목을 담당하기로 되어 있던 C교수는 기존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빅뱅(Big Bang, 우주 대폭발) 이론이나 진화론 등을 모두 부정하였다. C교수는 구약성서 창세기 제1장 제1절 ‘신이 이 세상과 그 사람들을 엿새 동안 창조하였다’는 내용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국내 ‘창조과학회’ 회원들의 생각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지구의 역사를 6-7000년 정도로 여기고 ‘공룡과 인간이 같은 시대에 살았다’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과학적이어야 할 자연과학 분야 교수의 생각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이런 사고(思考)는 17세기에도 있었다. 당시 대주교였던 제임스 어셔(Archbishop James Ussher)는 구약성서의 족보를 토대로 이 세상은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전날 밤에 창조되었다고 계산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19세기 초까지도 신학 교리가 되었으며 신학자들은 이에 심취해 있었다. 17세기 초에 코끼리 뼈와 돌도끼가 공반되어 런던에서 발견되었고 그 이후에도 이러한 발견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리하여 지구의 역사가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 여겨졌으나 당시 학자들은 이러한 물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18세기 말 산업혁명으로 철도, 운하 및 건설 사업이 활성화되어 지질학이 체계적으로 연구되면서 지구의 역사에 대해 기존 학설이 재검토되기 시작하였다. 지질학자들은 다양하고 독특한 동물 뼈가 층위별로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이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지구의 역사가 6-7000년 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주장을 한 사람들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1858년 영국 남서부 브릭스햄(Brixham) 동굴에서 코뿔소, 맘모스, 동굴 곰의 뼈와 석기가 한 지층에서 발견되어 상황이 급반전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절멸된 동물 뼈와 인간들 도구가 같이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만약 둘리와 사람이 함께 살았다면 ‘둘리와 사람 발자국’ 혹은/그리고 ‘둘리와 그 친구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동일한 층위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이를 고고학에서는 공반관계(共伴關係)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공룡 뼈와 고성 덕명리, 의성 제오리, 울산 천전리와 대곡리 암각화 인근에서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공룡 뼈와 도구 그리고 공룡과 사람 발자국은 함께 발견되지는 않았다. 이는 공룡과 사람은 동시기에 같이 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룡과 중생대 인류는 신생대 제4기에 각각 살았기 때문에 둘 간에 최소한 6500만~1억 년 이상 시간 차가 나기 때문에 공반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Y대학에서 ‘창조과학’이라는 교양 과목을 개설하겠다고 하자 학생들은 강하게 반발하였고 과학계에서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당국은 ‘건학 이념’과 궤(軌)가 동일한 창조과학을 강의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반문하였다. 믿을 수 없는 대응이다. 당시 Y대학에서 그 강좌가 개설 혹은 폐강되었는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다만 이 과목을 개설하겠다는 교수나 이것이 문제가 없다는 학교 측이나 모두 황당할 뿐이었다. 아기 공룡 둘리와 사람이 같이 살았고 지구의 역사는 6~70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뭐 하나에 꽂히게 되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보거나ㅁ 들으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나이가 들면 사고가 고착되어 더 심해진다. 한두 사람의 말만 듣지 말고 싫더라도 몇 사람의 말을 듣고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모르는 줄도 모르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다 간다.
대만의 어느 프로그램에서 ‘국가별로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을 뽑았다. 독일인들은 시간 안 지키기는 걸 제일 싫어하고, 프랑스인들은 걸어 다니면서 먹는 걸 못 견딘다고 했다. 남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하는 일본인이지만 국수를 먹을 때 소리를 못 내게 하는 걸 싫어한다고 했다. 그럼 한국인들은 뭘 가장 싫어할까? 일본의 어느 잡지에서 조사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름하여 ‘7가지 한국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확실한 방법’이란다. 그 순위는 이랬다. ‘라면 먹을 때 김치 안 주기’(1위) ‘고기 구워 먹을 때 소주 안 주기’(2) ‘밥 먹은 뒤에 커피 안 주기’(3) ‘화장실 갈 때 휴대폰 못 가져가게 하기’(4) ‘인터넷 속도 느리게 하기’(5) ‘엘리베이터에서 ‘닫힘’ 못 누르게 해 자동으로 닫힐 때까지 기다리게 하기’(6) 그리고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할 때 먼저 일어나지 않고 앉아서 기다리게 하기’(7위)다. 장난 삼아 매겨본 랭킹이지만 나한테 대입해 보니 고구마 먹은 듯 하나같이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아, 난 한국 사람 맞는구나!’ 16년 동안 비행기 승무원으로 근무했던 분이 쓴 글을 보면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인사를 건네면 유독 한국 승객들이 인색하다고 한다. 공항이나 기내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자주 보는 광경이다. 오가며 하루에 몇 번도 만날 관계다 싶어 볼 때마다 인사를 건네는데, 반응은 받아주는 분만큼이나 아닌 분들도 계신다. 무반응의 경우 그때부터 흐르게 될 어색한 침묵을 어떻게 견디려고 그 힘든(?) 걸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잘 참아낸다. 어느 책에서 본 적이 있는데, 먼저 인사하는 것은 스스로 낮은 자라는 걸 인정하는 행동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국인이 인사에 인색한 이유치고는 강렬(!)했다. 여태 친절과 배려, 환대와 겸손이 상호 관계를 건강하고 동등하게 만드는, 인사의 본질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그런 다음 일본 유명 디자이너는 그 책에서 인사를 아주 예술적으로 정의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하는 인사는 상대와의 적절한 간격을 측정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인사를 했을 때 상대가 기분 좋게 받아주느냐? 말없이 받아주지 않느냐? 에 따라 거리를 어느 정도로 유지해야 할 지가 가늠이 된다는 거다. “그러면 불필요한 마찰이 없어져요. 마찰이 생기지 않는다는 건 좋은 기분을 유지하는 데 아주 중요하거든요.” 인사를 너무 정치 역학 구도로 해석하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내가 인사를 할수록 불편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구나 싶기도 했다. 다시 한국인들로 돌아와서 그들은 그럼 어떤 걸 좋아할까? 아마 ‘외국인들이 정리한 한국인의 ‘응’ 사용법‘ 같은 걸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가령 한국인이 응↘ 하고 끝을 내리면 ‘맞아, 오케이’라는 의미란다. 자, 각자 화살표대로 따라 발음해 보시라. 응↘↗는 반대로 ‘노! 그게 아니야!’ 맞다. 우린 이렇게 사용한다. 그럼 응↗은 ‘뭐라고?’라는 의미다. 웃기는 것도 있다. 응↓ 하면 (전화통화 시)‘듣고 있어’의 뉘앙스란다. 전화기에다 대고 계속 응↓응↓거린다면 그는 분명 한국인이라는, 외국인들의 한국인 구별법이란다. 역시 전화랑 관계가 있는 건데 그럼 이건 뭘까? 응↘응↗응↗ 이 소리는 ‘그래, 전화 끊어’ 란다. 끝이 살짝 올라가는 ‘응’을 여러 번 반복한다면 ‘나 이제 전화를 끊어야겠어’ 라거나 ‘그만 통화하자’는 걸 상대방이 눈치챌 수 있다. “응” 하나로 아주 다양한 맥락을 주고받는 우리는 한국인이다. 외국인들은 우리의 이런 습관도 재밌어한다고 한다. 한국인들의 독특한 화장지 사용법인데, 한국인들한테 “휴지 한 장 주세요.” 하고 부탁해 보라. 한 장을 주는 한국인들은 없다. 티슈를 꼭 두 장 건넨다. 하나 주면 정(情)이 없다나? 그 외에 한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면 무조건 한국인이고, ‘당기시오’라고 적힌 문을 막무가내로 밀고 나가도 한국인이다. 당기라는 문을 기어이 미는 데는 나름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당기는 것보다 미는 것이 관성의 법칙에 맞기 때문이다. 즉, 미는 행위는 사람의 진행하는 방향과 같아서 당기는 것보다 힘이 덜 든다는 걸 한국인들은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월성 안의 궁궐 유적을 발굴하다. ‘作新宫室 儉而不陋 華而不侈(신작궁실 검이불루 화이불치)’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편 기사이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번 월성 발굴에서 밝혀지고 있는 신라 궁실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출토 유물도 검박한 편이다. 따라서 ‘儉而不陋, 華而不侈’는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의 궁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월성 전체를 발굴하면서 궁성을 이루는 주요 건물들이 모여 있는 중앙 건물지인 C지구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 지구에서 정사각형 담장으로 둘러싸인 통일신라 후기 건물지 17개 동이 확인되었고, 공무수행 기록 등이 담긴 목간, 벼루, 각종 토기와 토우 등 다양한 유물도 출토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다수의 벼루는 이곳이 관청이었음을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유물이고, 터번을 쓴 토우는 서역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던 흔적이라 주목을 하게 되었다. 월성에 대한 여러 기록 중에는 문헌 외에도 목간(木簡)과 기와나 토기에 새겨진 여러 문자 자료가 있다. 목간은 지금의 종이와 같은 용도로 사용하였는데, 길쭉한 나무 위에 간단한 글을 써서 정보를 전달하거나 남기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토양이 산성이 강한 탓도 있지만 유기질인 나무이기에 남아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특히 이번 발굴 과정에서 수습된 목간은 주로 행정문서용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문제, 윗사람의 명령 지시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2016년~17년에 출토된 목간 중에 ‘병오년(丙午年)’이라는 완전한 간지(干支) 목간이 처음 발견되었다. 병오년은 526년(법흥왕 13), 또는 586년(진평왕 8)으로 추정하고 있다. 병오년 목간에는 ‘지방민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일벌(一伐)이라는 관직을 가진 자가 이들을 통제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즉 6세기 무렵 지방민을 동원할 정도의 대규모 정비 사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목간에는 ‘전중대등(典中大等)’이라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관직명이 등장하였고 중국 주(周)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의 이름도 보인다. 신라는 6세기 이전에는 신라 고유한 말로 이름을 지었으나 6세기 후반 즈음에는 중국의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따라 짓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목간 외에도 기와나 토기에 찍거나 새긴 문자 자료가 있다. 확인되는 문자 자료는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 한(漢), 한지(漢只), 정도(井桃), 습부정정(習部井井), 정(井), 주(朱), 본(本), 동궁(東宮; 태자, 또는 태자가 사는 곳), 전인(典人; 신라의 하위 행정기관)과 도부(嶋夫; 토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새긴 사람 이름으로 추정)’ 등이 있다. 이들은 어떤 특정 시점을 지칭하거나 신라 6부 및 궁궐과 연관된 자료로 추정된다. 토기나 기와에 새겨진 문자는 한문에 익숙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구분한다. 또, 신라 사람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출토 유물로는 토우나 토용, 석인상 등이 있다. 월성 해자에서도 사람과 동물을 작게 본떠 만든 토우가 나왔다. 사람은 두 팔을 벌린 모습, 말을 탄 모습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터번을 쓴 소그드 사람(중앙아시아의 이란계 민족)으로 추정되는 토우도 있어 신라와 서역과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동물 토우는 말, 염소, 돼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앞으로 당시 신라 사람들의 궁중을 비롯한 백성들의 생활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월성의 발굴과정과 그 성과를 알아보고자 한다면 먼저 월성 발굴현장에 있는 ‘월성이랑’을 찾고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https://nrich.go.kr/gyeongju/)에서 발간한 안내 책자 ‘찬란했던 신라 왕궁 세상에 나오다, 월성’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또 최근에 교촌마을 건너편에 개관한 숭문대를 찾으면 월성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다.
봉지 날다 박상봉 공중에서 물장구친다 땅으로 내려오기 싫은지 공중에서만 논다 건물 창유리와 가로수 이파리 쪽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하지만 요령껏 빗줄기 한쪽 끝 붙들고 비 내리면 젖어 하염없이 웅크린 몸으로 유배되는 봉지 억누르고 눌린 것이 봉지다 핏기 뽑아버린 빈 봉지 몸통 너머 세상이 보인다 키 큰 나무 넘어 하늘 높이 사무쳐 오르다가 땅속 깊이 뻗쳐 내리다가 나무의 팽팽한 긴 외로운 가지 끝에 와 덜컥, 안긴다 오갈 데 없는 찢어진 봉지 더 이상 밀고 갈 힘없어 비바람에 송두리째 흔들리는 나무에 등 기대고 머물다가 만 리 밖에서 바람이 부르면 후득 후드득 깃을 털며 저문 언덕 넘어간다 바람의 어깨를 깨물고 울창한 공기의 숲으로 기억 속 절망 딛고 길고 긴 하늘 자락 붙들고 일어서는 꿈틀꿈틀 솟아오르는 봉지는 팔뚝보다 질긴 근육을 가졌다 타인과의 교감 없이 메말라가는 삶의 고독 봉지는 원래 내용물을 담아야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시인은 그러나 그 속에 담긴 “핏기”를 “뽑아버린 빈 봉지 몸통”, 용도를 다한 비닐 봉지를 통해 세상을 읽는다. 그걸 우리는 ‘봉지의 자유’라고만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땅으로 내려오기 싫은지 “공중에서 물장구‘치다, 건물 창유리와 가로수 이파리, 비에 젖어 “젖어 하염없이 웅크린 몸으로 유배되는” 지상까지의 이동과 거기서 겪게 되는 “억누르고 눌린” 일까지가 바람과 비 같은 자연현상이, 흙이나 돌과 다른 사물을 통한 외발적 요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카메라로 잡은 봉지의 생의 겹은 여럿이기도 한 것이어서, 이번에는 “키 큰 나무 넘어 하늘 높이 사무쳐 오르다가/땅속 깊이 뻗쳐 내리다가” 쓸쓸하게도, “나무의 팽팽한 긴 외로운 가지 끝에 와 덜컥, 안긴다.” ‘팽팽한 긴 외로운’이라는 세 개의 관형어를 거느린 나무 역시 타자와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오랜 고독과 연민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거기서 용도 폐기를 넘어 “오갈데 없어 찢어진” 봉지는 외로운 존재에게 안기다가 등 기대고 머물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한다. “만 리 밖에서” 바람이 부르는 소리에 광활하고 울창한 공기의 숲으로 “후득 후드득 깃을 털며 저문 언덕 넘어” 날아갈 수밖에 없다. 시인은 “꿈틀꿈틀 솟아오르는 봉지는/팔뚝보다 질긴 근육을 가졌다”고 하지만, 문명의 편의성에 물들어 물건을 담는 용도로 쉽게 쓰이는 봉지가 타인과의 교감 없이 메말라가는 삶의 고독도 아울러 말하고 있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일상의 용도에서 폐기 처분되어 “길고 긴 하늘 자락 붙들고 일어서는” 이 비닐 봉지의 신산한 삶의 층위를 입체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우리 시단에서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생태시의 일반적 경향들과 차별성을 보여주면서, 하잘것없는 존재를 시인 특유의 미학으로 건져올린 범상하지 않은 깊이까지 지녔다.
‘황오재즈페스타 vol.3’이 오는 14일, 15일 양일간 경주문화관1918광장에서 열린다. 행사 시간은 오후 3시부터 10시까지다. <사진> 이번 행사는 황오동만의 독창적인 콘텐츠를 도입해 관광·상권 활성화는 물론 경주시민 및 관광객의 문화향유 증대를 위해 마련됐다. 특히 지역 전문 재즈뮤지션의 공연뿐만 아니라 관람객들을 위해 로컬부스, 먹거리부스 등을 마련해 페스타 분위기를 더욱 즐길 수 있도록 한다. 또 글로벌 퍼레이드와 연계해 다양한 볼거리와 현장참여 프로그램을 확대했다. 한편 경주시 황오동 원도심 황오재즈페스타는 지난 2021년부터 현재까지 3회째 이어져오고 있다. 경주시 관계자는 “주요 관광지에 집중돼 온 경주 방문객들에게 원도심만의 특색 있는 즐거움을 찾아볼 수 있는 행사로 많은 관심을 바란다”고 말했다.
지역 청년마을 ‘가자미마을’의 2024년 1기 참가자들이 각자의 시각으로 담아낸 ‘감포’를 선보였다.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이틀간 열린 ‘가자미스토어 팝업샵’에는 가자미마을에서 감포를 즐기고 있는 9명의 청년들이 만들어낸 ‘감포’가 지역주민과 관광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서울, 부산, 대전, 경기 등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온 9명의 청년들은 감포에서 생활하면서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상품으로 만들어 냈다. 감포의 풍경, 감포 바다, 감포 해녀, 가자미마을을 거쳐 경주에 정착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엽서와 같은 굿즈 또는 체험상품으로 만들어 팝업샵을 찾은 지역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제공했다. 가자미마을 팝업샵을 기획한 청년들은 “저희가 느낀 감포라는 지역을 상품으로 다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감포라는 지역이 단순한 어촌마을이 아닌, 특유의 분위기와 이야기를 품은 마을이라는 것을 전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며 “팝업샵을 통해 체험자들이 조금이라도 감포를 이해하게 됐다면 우리의 목표는 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고 말했다. 이어 “청년마을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돼서 신청해 감포지역에서 지내게 됐지만, 이번 팝업샵을 함께 준비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젊은 나이에 배를 운영하는 선장, 가자미마을을 통해 경주에 정착하게 된 앞 기수들을 인터뷰하면서 ‘나도 경주에 정착해봐야겠다’라는 마음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화재는 언제든 예상치 못한 재난으로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합니다. 특히 공동주택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화재예방에 대한 더욱 신중한 대응이 필요합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다양한 측면에서 화재예방에 집중하고, 사전 대비 및 대응책을 마련하여 안전한 주거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먼저, 화재예방은 개인과 가정 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가스 및 전기 시설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화재 발생 시 대응할 수 있는 소화기와 화재경보기를 설치해야 합니다. 가연물은 안전한 장소에 보관하고, 쓰레기는 정기적으로 처리하여 화재 위험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또한, 가정 내 화재대응 계획을 마련하고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화재 대피 및 대응 훈련을 실시하여 비상시에 신속하고 안전한 대응이 가능하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공동주택에서는 이웃 간의 협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건물 내에서는 복도와 비상구를 뚫어두고, 화재 대피로를 방해하는 물건을 배치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건물 관리자와 협력하여 화재예방 시설을 유지보수하고, 정기적인 화재 대피 훈련을 실시하여 모든 거주자가 대처 및 대피 절차를 익힐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건물 관리자는 화재예방을 위해 건물 전체를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유지보수해야 합니다. 화재 경보 시스템 및 소화시설의 작동 여부를 확인하고, 건물 구조의 안전성을 유지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또한, 화재대응 계획을 마련하고 거주자들에게 화재예방에 대한 교육 및 정보를 제공하여 전반적인 화재예방 활동을 지원해야 합니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신속하고 침착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화재 대피 경로를 잘 알고, 비상상황에 대비하여 필요한 비상연락망 및 구조 계획을 마련하여야 합니다. 또한, 화재 발생 시 신속한 대피 및 구조활동을 위해 건물 내의 모든 거주자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화재예방은 우리 모두의 공동 책임입니다. 개인의 노력과 협력을 통해 우리는 안전한 주거 환경을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함께 노력하여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안전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구축해 나가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지속가능발전’은 ‘미래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이라고 정의한다. 이 보고서(「우리 공동의 미래(Our Common Future)」, 1987)는 ‘필요’와 ‘환경 용량의 한계’라는 두 가지 핵심 개념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는 빈곤 원인을 사회적·문화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고 생산과 소비문화의 가치와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이창언·오수길·유문종·신윤관, 2013: 36). 1982년 세계문화정책회의 선언은 처음으로 문화를 유형문화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 사회조직, 가치·신념 체계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명시하였으며 이러한 문화 정체성의 개념을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Blake, 2023).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문화의 필요성이 적극적으로 요청된 것은 1992년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이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의제21(환경과 개발에 관한 리우 선언)의 원칙 9와 원칙 10에는 지속가능발전에서 문화의 중요함을 언급하고 있다(김진희, 2018: 59). 이어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요하네스버그 선언에서는 인류 연대감 구축의 중요성을 인지하면서, 인종, 장애, 종교, 언어, 문화 및 전통에 상관없이 세계 문명 및 민족 간 대화와 협력의 증진을 촉구한다. 문화가 사회, 경제, 환경에 이어 지속가능발전의 네 번째 기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유네스코 「세계문화다양성선언(The Universal Declaration on Cultural Diversity)」(2001)을 통해서다. 세계문화다양성선언이 명시한 “자연에 있어 생물 다양성이 중요하듯이, 인간에게는 문화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언설은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의 지속가능성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함축한다(이철호·박소윤, 2020: 19). 국제사회는 지금까지 발전의 진정한 성공에서 문화가 중요한 공헌을 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해 왔다. 1998년 발전을 위한 문화정책 정부 간 회의는 문화 다양성과 지속가능발전 개념을 제시했다. 2000년대에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다양성 선언,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2003년), 문화다양성협약(2005년)이라는 지속가능발전개념을 기본원칙으로 규정하였다. 2개의 문화에 관한 국제 조약이 잇따라 성립하고 있으며, 그러한 가운데 문화를 ‘경제’, ‘환경’, ‘사회’와 나란히 지속가능발전의 측면의 하나로서 자리매김하려고 시도하는 논의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세계지방정부연합(UCLG)의 2004년 문화의제 21은 도시의 문화적 특성에 따른 지속가능발전을 돕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2010년 UCLG는 경제, 사회, 환경과 함께 문화를 지속가능발전의 4번째 축으로 채택했다(이철호·박소윤, 2020: 19-20). 2005년 유네스코(UNESCO)는 지속가능발전교육을 매개로 지속가능발전에 대한 새로운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지속가능한 발전 담론과 문화(culture)의 결합이었다. 유네스코는 개인의 가치관의 전환이 세계의 전환의 전제로 보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ESD(지속가능발전교육)라고 제시한다. 유엔은 2010년과 2011년 ‘문화와 발전 결의안’을 연속 결의했다. 이 결의안은 지속가능발전과 새천년개발목표(MDGs) 달성에 문화의 중요성을 천명한다. 2012년 리우+ 20정상회의는 지속가능발전에서 문화의 가치를 확인했다. 유네스코가 주도한 2013년 항저우 문화와 발전 국제회의는 지속가능발전의 동인으로서 문화를 포스트 의제에 포함시킬 필요성을 천명했다. UCLC도 2015년 문화실천21을 통해 지속가능발전문화 실행을 위한 지침을 제시한다. 문화실천21은 문화정책, 공공정책에 관한 실행지침으로써 문화·권리·시민권, 지속가능발전문화, 지방정부의 책임이라는 세 가지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2004년 어느 날 대학교서 함께 지내던 시간강사 교수님이 “경주에 꼬리 짧은 개가 있다는데 신라개라고 합니다. 한번 연구해 보실랍니까?”라는 물음에서 경주개 동경이 혈통고정화 연구가 시작되었다. 경주개 동경이의 역사성이 2005년에 최석규 교수에 의해 확인된 후에 경주시에 경주개 동경이의 혈통고정화 연구에 대한 요청을 무수히 했지만, 결국 최석규 교수의 과거 방사성 폐기물 매립장 반대 환경운동 전력이 걸림돌이 되어 무산되었다. 2006년 7월 31일 구미시의 적극 도움으로 산업자원부 RIS(지역혁신특화사업)인 ‘토종견 동경구를 주제로 한 애견문화테마파크 조성(구미시)’ 과제로 선정되어, 1차 사업인 포럼 사업비로 2000만원이 배정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경주시 요청에 의해 경주개 동경이 혈통고정화 사업은 경주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경주시의 요청에 의해 반려동물 학회와 페티앙 연구진이 함께 혈통고정화 사업에 필요한 연구비와 연구계획을 세웠다. 계통번식, 혈통고정화, 유전형질 등 3분야로 구분하고 분야별로 약 3억여원으로 4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요청하였으나 모든 예산은 반영되지 않았고, 확보된 예산은 2000만원 뿐이었다. 사업진행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서라벌대학에 함께 있던 성기창, 이은우, 박순태 교수의 도움으로 경주개 동경이 혈통고정화사업이 출발되었고, 희생과 봉사의 긴 여정의 시작이 된 것이다. 2006년, 경주시 축수산과 이상호 계장님에 의해 확인된 동경이를 키우고 있는 농가를 방문조사했다. 경주 곳곳을 방문하여 확인하고 수집된 개체 중에서 경주개 동경이의 형질을 지닌 73두가 경주개 동경이 혈통고정화 연구의 원종이 되었다. 2008년 6월에 경주개 동경이의 외형과 유전형질의 특성 확인과 품종 표준화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제1회 경주시민의 날에 ‘경주개 동경이’라는 견명으로 시민들에게 공개하였다. 그러나 매년 경주개 동경이의 예산확보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예산이 세워졌다가 없어지길 수차례나 되었고, ‘최교수님! 첨성대도 팔아야 할 이 시기에 개 사료비가 웬 말입니까?’라 했던 시의회 의원의 말이 아직도 섭섭한 말로 가슴에 남아 있다. 수많은 곡절을 겪은 끝에 2011년 3월에 경주개 동경이 천연기념물 신청을 경상북도 문화재심의위원회에 했지만 심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조직적인 반대와 경상북도에 천연기념물로 2종류의 토종개가 지정되는 것은 정부의 지원이 축소될 수 있다는 논리로 반대의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경상북도 문화재위원회 심의에서 설명할 수 있는 마지막의 기회를 경주대학교 최재영 교수가 만들어 주었다. 드디어 2011년 10월 27일에 경상북도 문화재 심의위원회에서 경주개 동경이 천연기념물 심의가 의결되었고, 11월 16일에 문화재청 천연기념물 지정 신청을 하였다. 2012년에 문화재청 심의위원회에 의결되어, 4월 4일 경주개 동경이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지정이 예고되었다. 동경이 연구팀에서 서라벌대학에게 경주개 동경이 사업의 주관을 요청했지만 학교는 받지 않았다. 사업을 반대했던 학교가 천연기념물 지정 예고가 되자 4월 9일에 동경이 소유권 이의신청을 문화재청에 요청하는 바람에 천연기념물 지정은 연기되었다. 10년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자 수십 번 문화재청을 방문하였고, 어느 날은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의 큰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면서 사정했던 때가 나를 여기까지 지켜오는 원동력이었다. 나는 저먼 세퍼드의 아버지 폰 스테파니츠 같이 독단적으로 이끌지 못했다. 하지홍 교수와 같이 끈질기지도 못했다. 공무의 갑질에 그냥 주저 앉아 버렸다. 무수히 많은 인연들이 스스로 나를 떠났다. 나는 이 일을 후회한다. 그러나 또 가고 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연구사업은 원래 불가능한 것이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마음에 항상 함께 했던 우공이산(愚公移山), 마부작침(磨斧作針), 욕궁천리목(欲窮千里目), 수시여전(受施如箭) 덕분이다.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면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말라(Do right and fear no one)”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주변의 멸시를 뿌리치면서 저먼 세퍼드의 품종 표준화를 완성한 막스 폰 스테파니츠로 나도 남고 싶다. 최석규 경주개 동경이 혈통보존연구원장 경주신문 독자위원회 위원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① 안강읍 갑산리 ‘효부이씨 정려비’<孝婦李氏 旌閭碑> 안강읍 갑산리에는 임진왜란 당시 적장이 효부(孝婦)의 효행에 감복해 왜적의 침탈로부터 면하게 됐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효부이씨 정려비(孝婦李氏 旌閭碑)에 새겨져 있는 효부 이야기다. 이 비각은 경주에서 안강읍으로 가는 2차선 국도를 따라 갑산리 농공단지를 지난 뒤 옛 철길 건널목에서 300여m 쯤에 한옥 기와 한 채가 보인다. 바로 앞은 형산강 줄기다. 이 비각 내 비석에는 ‘孝婦李氏之閭(효부이씨지여)’ 여섯 글자가 음각돼있다. 이 비의 주인공인 이씨는 안강읍 죽전마을에서 태어나 영천군 창수마을의 문중으로 출가했다. 이씨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남편의 아버지 즉, 시아버지는 앞을 볼 수 없었다. 남편은 충절이 놀라운 선대의 피를 이어받은 선비로서 학문을 숭상하는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집안이 가난해 제대로 학문을 하지 못한데다 허약한 몸으로 인해 결혼한 지 1년도 못 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어머니마저 괴질로 몸져 누웠다. 청상과부인 이씨는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했지만 시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창수마을에서 살길이 막연하게 된 이씨는 여러 이웃들의 권유로 친정인 죽전마을로 돌아오게 됐다. 이후 이씨는 친정 집안 어른들로부터 어느 양반 가문의 후실로 재가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창수마을에 홀로 지내는 앞을 볼 수 없는 시아버지가 주야로 걱정돼 감히 재가할 마음을 낼 수 없었다. 생각다 못한 이씨는 시아버지를 설득해 죽전마을로 모시고 와 친정 집안이 마련해 준 오두막집에서 살게 됐다. 친정 집안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하면서 오로지 갈 곳 없는 시아버지를 정성으로 섬기며 살았다. 그러자 친정 집안에서는 시아버지를 영천으로 모셔다드리고 재가할 것을 재촉했지만, 이씨는 단호히 거절하고 시아버지 모시는 일에만 정성을 쏟았다. 항상 방을 따뜻하게 해 잠자리를 보살폈고, 식사 공양도 지성으로 받들었다. 인근 마을에서는 이씨의 효행에 칭송이 자자했다. 적장 ‘효부마을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 표식 남겨 하지만 때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적이 침략하면서 “왜적은 성질이 아주 포악해 부녀자들을 농락하고 잔인한 짓은 예사로 한다더라”, “왜적은 닥치는대로 사람을 죽인다”는 등의 말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집집마다 피난 준비로 부산했다. 이씨의 친정 집안도 피난가기에 바빴다. 이씨도 시아버지께 피난갈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맹인의 몸으로 다리마저 성하지 못해 며느리에게 짐이 될까봐 이씨에게만 피난을 떠나라고 말했다. “아가! 나는 이미 늙었으니 설령 왜적들이 온다 해도 어찌하겠느냐? 어서 사돈댁 식구들과 같이 너나 떠나거라”고 했다. 그러자 이 씨는 “아버님께서 떠나시지 않으시면 저도 아버님을 모시고 이대로 남겠어요”라고 했다. 효성이 지극한 이씨는 앞을 못 보고 다리마저 성하지 않아 걷지도 못하는 시아버지를 두고 차마 떠날 수는 없었다. 결국 친정 식구들의 강요를 뿌리치고 텅빈 마을에 시아버지와 외로이 남았다. 이씨는 집에서 왜적들에게 당하는 것보다 시아버지를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에 갑산마을로 향했다. 그러나 저 멀리 왜적들이 오는 것을 보고 엉겹결에 유교(柳橋) 다리 밑으로 내려가 시아버지와 함께 숨었으나 들키고 말았다. 이 씨는 짐보따리 옆에 시아버지를 숨기고 치마로 덮어두고는 떳떳이 왜적들을 맞이했다. 왜적들이 치마를 들치고 시아버지를 발견하자 더욱 수상히 여겨 죽이려했다. 이때 이씨는 왜적들에게 “아버님을 죽이려거든 나를 죽여라”하며 대항했다. 왜적들은 시아버지를 가짜 맹인이라고 우기며 칼로 내려치려 할 때 마침 다리 위에서 말을 타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왜적 장교가 “두 사람을 이리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러고는 10리나 떨어진 죽전마을까지 끌려갔다. 왜장은 외모가 귀골스럽게 생긴 시아버지를 첩자로 알고 혹독하게 문초했다. 그러자 이씨는 왜장에게 매달리며 손짓발짓으로 사실이 아님을 전하려 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왜적들은 시아버지를 막아서는 이씨를 사정없이 매질했지만, 이씨는 시아버지만 살려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끈덕진 부인의 호소에 감동된 왜장은 왜적 첩자와 통역을 통해 이씨와 시아버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했다. 갑산마을과 죽전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이씨의 덕행을 알게 된 왜적들은 그의 효행에 감복했다. 왜장은 이 씨에게 “훌륭하신 부인을 몰라뵙고 무례하게 행한 일을 용서하오”하면서 사과하고, 부하에게 명령해 지필묵을 가져오게 했다. 왜장은 ‘효부의 마을에 함부로 들어가 동민을 해치지 말라’는 글을 써서 마을 입구에 표식을 남기고 떠났다. 이후 왜인들은 갑산마을을 지나치면서도 동민들을 괴롭히거나 약탈 방화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갑산마을 사람들은 ‘이씨의 지극한 효성 때문에 온 마을이 왜적의 참화를 모면했다’며 이씨의 효성을 기리는 효부각을 세워 오늘에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효부이씨 정려각 앞에는 효부이씨의 일화를 새긴 비석이 있다. 1991년 10월 세운 비석에는 건립 연대(조선 인조 조), 위치(경주군 안강읍 갑산리 715), 관리주체(창녕조씨 하양중립 죽원재 문중) 등이 새겨져있다. 또 ‘인조께서 정려해 건립했으나 그 후 퇴락해 1805년 중수하고, 1923년 철도 부설로 인해 현 위치로 이건했으며, 1960년 보수 후 1991년 10월 중건하다’라고 건립 연혁도 기록돼있다. ② 안강읍 대동리 ‘월성손씨정려비’<月城孫氏旌閭碑> 안강읍 대동리 182번지에는 조선시대 암행어사가 조정에 알려 세웠다고 전해지는 월성손씨정려비(月城孫氏旌閭碑)가 있다. 본지 146호(1992년 12월 7일자) 보도 당시에는 정려비가 쓰려져 있어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지난 2일 찾은 이곳의 비는 제대로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비각 내외로 수풀이 우거져 있고, 안내판은 녹슬어 있는 등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었다. 출입문은 잠겨져 있어 내부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려비는 최근에 세워진 듯 보였다. 이 비의 주인공은 월성손씨다. 집안에서 엄격한 가풍 속에서 자란 손씨부인은 총명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부덕을 닦아 현모양처로서 손색이 없는 인품을 갖췄다고 한다. 조선조 때 김씨와 지금의 약혼식으로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손씨가 결혼해 시댁에 들어가기도 전에 남편이 모진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아눕자 시댁에 들어와 성심을 다해 남편을 간호했다. 그러나 남편 김씨는 부인이 간호한 효험도 없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말았다. 손씨 부인은 남편을 따르고자 결심했으나 시부모님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가족들 몰래 집을 빠져나와 마을 앞 연못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이 주민들에 의해 암행어사에게 알려졌고, 암행어사는 조정에 알렸다. 조정은 열부 경주손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정려하고, 비와 함께 비각을 세웠다. 이상욱 기자 lsw8621@hanmail.net
경주재가노인통합지원센터는 재가노인을 대상으로 여가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나들이 프로그램 ‘소풍같은 인생’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사진> ‘소풍같은 인생’은 DGB사회공헌재단의 후원을 통해 지역 목공예 공방을 방문해 목공 레진 압화 냄비 받침 만들기 체험활동을 진행한다. 이번 ‘소풍같은 인생’프로그램은 문화 활동의 기회에서 소외된 재가노인에게 문화 체험활동 시간을 지원하며 건강한 여가를 보내는 데 도움을 제공했다. 참가자들은 “일상에서 벗어나 건강한 여가를 보낼수 있어서 너무 즐거웠다”며 “정서적 안정이 되는 것같다”고 말했다. 한편, 경주재가노인통합지원센터는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이유로 일상생활 유지가 곤란한 복지사각지대 취약 및 위기노인에게 전문사례관리를 비롯한 상담, 자원연계, 일상생활지원 등의 서비스를 통합적·연속적으로 제공하여 지역사회에서 건강하고 안정된 노후생활을 영위하도록 예방적 복지 실현과 사회안전망 구축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경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지난달 30일 장애인 역량강화를 위한 ‘2024 중증장애인 자립생활 아카데미’를 개최했다. 이날 등록장애인 및 장애인활동지원사, 장애인기관 종사자, 경주시민 등 100여명이 참여했다. <사진> 이번 아카데미는 교육을 통해 장애인 권리 및 인권에 대해 이해하고, 장애인 당사자가 가지고 있는 권리보장 및 역량 강화를 통해 영위해 나갈 자립 생활의 실천 방향을 모색하도록 하기 위해 마련됐다. 아카데미는 1주제 ‘장애인 당사자로 산다는 것은, 장애인 인권(경주시장애인단체협의회장 김헌덕)’, 2주제 ‘장애인 수급권과 경제활동(울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과장 안영환)’ 2개 교육으로 진행됐다. 박귀룡 센터장은 “이번 교육을 통해 장애인 인권과 더불어 장애인 당사자, 시민들이 흔히 접해보지 못한 수급권 교육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도록 했다”며 “아카데미를 통해 중증장애인의 지역사회 참여와 자립 생활 실현을 위해 마땅히 보장돼야 할 권리에 대해 알리고 귀한 정보를 얻는 마중물이 되었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2007년부터 이어진 중증장애인 자립생활 아카데미는 올해로 17년째 이어지고 있다. 내년에도 유익한 교육으로 장애인 당사자가 자기결정권과 선택권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의 주체가 될 수 있는 환경 조성을 위해 노력할 예정이다.
지난 1일 안강청소년문화의집 앞마당 정자에서 65세 이상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꽃신 신고 칠평천 나들이’ 행사가 열렸다. 이번 행사는 2024년 경주시 주민(마을) 공동체 사업의 일환으로, 안강교육공동체 ‘안강마루’가 주관했다. 안강마루는 고령화로 인해 상대적으로 문화 체험 기회가 적은 어르신들을 위해 고무신에 직접 그림을 그려 추억이 있는 칠평천을 걸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실 수 있도록 기획했다. 행사에는 지역 주민들의 하모니카와 라인댄스 공연 등 재능기부도 이어졌다. 지난달 25일 첫 회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된 이날 행사는 당초 100명으로 한정됐던 고무신 체험에 어르신들의 뜨거운 호응으로 200여명이 참여하는 성황을 이뤘다. 특히 당초 65세 이상을 대상으로 했으나, 아이와 젊은 세대들도 참여해 여러 세대가 함께했다. 참가자들은 고무신과 부채에 그림을 그리고, 주민이 직접 만든 김밥 도시락을 나누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한 참가자는 “고무신에 직접 그림을 그리고 신고 걸으니 어린시절 옛 추억이 떠올랐다”며 “앞으로도 이런 뜻깊은 행사가 안강지역에 많이 열렸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안강마루 관계자는 “어르신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활동을 고민하던 중 스마트폰 교육의 필요성도 느꼈지만, 이번에는 여건상 진행하지 못해 아쉬웠다”면서 “내년에 또 기회가 된다면 대상의 범위을 넓혀 전시, 스마트폰 교육 등 안강 지역민들에게 더욱 유익하고 알찬 프로그램으로 찾아뵙겠다”고 말했다. 이어 “뜻깊은 일에 재능기부로 함께해 주신 모든분들께도 정말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최부자댁은 해방전후를 막론하고 외국인들도 다녀간 특별한 곳이다. 더구나 이런 방문은 당순한 방문에서 그치지 않고 역사적으로 매력적인 기록들을 남겨 더 의미가 깊다. 최부자댁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 사람은 뒤에 스웨덴의 황제가 된 구스타프 아돌프 6세(1892~1973 / 재위 1950~1973)였다. 방문 당시에는 황태자 신분이었다. 서봉총의 이름이 지어진 최부자댁 사랑채, 구스타프 6세 황제의 궁금을 풀어준 문파 선생 1926년 10월, 구스타프 황태자가 일본으로 신혼여행차 와 있었다. 마침 당시 경주에서 신라시대 무덤을 발굴하던 조선총독부 소속 고이즈미 박물관장이 고고학자인 구스타프 황태자를 초청했다. 부산을 통해 경주로 온 구스타프 황태자는 역사적인 서봉총 발굴작업에 참여했고 그의 이름을 이 무덤에 영구히 남기게 된다. ‘고분발굴’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발굴이 거의 끝나 있었고 결정적으로 왕관과 주요 유물들을 드러내는 마지막 작업만 남겨놓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이 고분발굴에 굳이 구스타프 황태자를 초청한 것은 발굴의 성과를 세계에 알리고 그로써 내선일체 된 조선을 통해 자신들의 역사적 정통성을 공고히 하려는 속셈 때문이었다. 구스타프 황태자 일행은 1926년 10월 9일에 경주에 도착하여 지금의 경주 불국사역 앞에 있던 ‘철도호텔’에서 묵고 난 뒤 이튿날 노서리에서 진행 중이던 고분 발굴에 참여한다. 황태자는 당시 발굴된 금관을 자신의 손으로 들어 올리면서 “주여, 저에게 이 영광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 무덤의 이름을 스웨덴의 한문식 가차 표현인 서전(瑞典)의 ‘서(瑞)’와 금관장식에 있는 봉황의 ‘봉(鳳)’자를 합쳐서 서봉총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어지간한 경주 사람들이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이 ‘서봉총’이란 이름이 지어진 곳이 다름 아닌 경주 최부자댁 사랑채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발굴이 끝난 후 구스타프 황태자 일행은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최부자댁 사랑채에 머물게 된다. 아마도 호텔까지 가는 것이 번거롭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통 가옥이 어떤지 경험해보고 싶었던 황태자의 각별한 청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황태자를 모시던 수행원들은 즉시 최부자댁으로 달려와 문파 선생과 상의했고 선생은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때 문파 선생은 귀한 손님들과 함께 침식하던 전례를 처음으로 깨고 황태자 부부에게 사랑채를 통째 내주었다고 한다. 황태자 일행은 일국의 황태자일 뿐만 아니라 부부가 함께 내방하였기에 그에 대한 예우로서 합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날 밤 우리나라 고고학사에 기념비적인 논의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문파 선생님을 통한 최염 선생님의 회고담! 이날 밤, 함께 발굴에 참여했던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스웨덴 즉 서전국 황태자가 무덤을 발굴한 것을 기념하여 ‘서전총’이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황태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깊은 생각에 잠긴 구스타프 황태자가 “찬란했던 동양의 고대 왕릉에 서양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불가하다. 발굴하면서 보니 금관 정수리에 봉황 같은 새가 세 마리 붙어 있었는데 ‘봉황총’이라고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봉황대’라는 이름의 고분이 발굴된 고분의 바로 맞은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의 끝에 스웨덴의 ‘서’와 봉황의 ‘봉’자를 하나씩 따서 서봉총이라 부르기로 한 것이다. 구스타프 황태자 일행이 최부자댁에 머문 것은 단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하루 동안 황태자는 전통 한옥의 매력과 최부자댁의 진귀한 음식에 심취해서 돌아갔다. 이때 구스타프 황태자는 최부자댁 안채를 보고 싶어 했는데 외국인에게 안채를 보여주는 것이 예법에 어긋난다고 여긴 문파 선생이 만류하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 뜻을 이루지 못한 구스타프 황태자의 소원은 6·25전쟁의 와중에 결국 이루어지게 된다. 다시 최염 선생님 말씀! “6·25가 터지고 1년쯤 경과한 때, 일단의 머리 노랗고 눈이 파란 여인들이 갑자기 우리집을 방문했어요. 그들은 스웨덴 병원선의 여군 간호장교들이었어” 6·25가 터진 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전 세계 유엔 회원국들을 독려하여 한국으로 파병(派兵)하도록 촉구하는데 이 조치에 응해 스웨덴에서도 의료진과 함께 병원선(病院船)을 보내 한국을 지원하게 된다. 최부자댁을 찾아온 간호 장교들이 바로 그 병원선에 근무하던 여군 간호장교들이었다. “그들이 우리집에 들러 할아버지께 안채를 보여 달라고 청했어요. 무슨 이유로 안채를 보려 하느냐고 묻자 자신들이 파병될 때 구스타프 황제께 신고하러 갔더니 경주에 가면 최부자댁에 들러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반드시 안채를 보고 와서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하라고 했다는 거라요. 물론 할아버지는 이들에게 안채를 열어 보여주었고 후하게 대접해서 보냈지. 이로써 구스타프 황제의 궁금증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간접적으로나마 해결될 수 있었지요!” 구스타프 황태자는 서봉총 발굴 이후 경성과 평양을 방문하며 유서 깊은 우리나라의 모습을 가슴속 깊이 담아 간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경주와 최부자댁에 머문 시간은 짧았지만 역사적인 큰 족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고 서봉총과 최부자댁을 통해 신라와 조선, 우리 고유의 문화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서봉총의 조선인 최남주 선생과 최정필 교수, 최정대 선생 등 후손들의 오랜 스웨덴 교류 구스타프 황태자와의 관련한 미담이 또 있다. 당시 고이즈미 관장과 구스타프 황태자를 도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왕릉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경주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석당(石堂) 최남주(崔南柱 1905~1980) 선생인데 이 최남주 선생과의 교류를 통해 구스타프 황태자는 처음으로 자신이 발굴한 무덤의 주인이 일본인이 아닌 조선의 고대인 ‘신라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 만약 최남주 선생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구스타프 황태자는 서봉총을 일본의 한 고분으로 알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젊은 조선인이 고분 발굴에 참여함으로써 이 고분이 조선의 고대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이 사실을 알았기에 귀국 후에도 최남주 선생과의 인연을 이어갔을 것이다. 더구나 석당 선생의 아들인 역사학자 최정필 세종대학교 명예교수와 최정대 코리아 타임스 칼럼리스트 등 아드님 형제분들이 지금도 선대의 인연을 이어 한국과 스웨덴 간 민간우호 사절단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역사학자인 최정표 선생, 차문화 연구가인 최정간 선생도 경주와 우리나라 문화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최정필 교수는 한국박물관재단이사장을 맡을 만큼 역사학계의 권위자로 활동하며 경주를 위한 각종 연구에도 활발히 참여해 아버님의 유지를 이어가고 있고 최정대 선생은 국제학술지에 동경대전, 용담유사를 소개하며 동학의 인본평등주의를 세계에 알리며 역시 경주 출신의 명예를 빛내고 있다. 기왕 최남주 선생 이야기가 나온 걸음에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가면 최남주 선생은 문무대왕 수중릉, 임신서기석, 남산신성비, 황복사지 발굴 등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분이다. 그러나 이런 공로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박물관장과 관계자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한다. 더구나 해방 후 정식으로 공부한 학자들 위주로 박물관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또다시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다만 선생의 공을 익히 알아온 경주의 향토 사학자들, 경주 시민들의 노력으로 일부나마 공로를 인정 받았을 뿐이다. 이런 무시와 상관없이 선생은 해방후 경주에 경주고적보존회를 조직해 경주뿐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재보존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심지어 자신의 재산을 팔아가며 경주 문화재 보존에 앞장서 무열왕릉 비각과 석탈해왕릉 비석을 세우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를 학계에 소개하고 서봉총 금관이 기생에게 쒸어진 비사, 석굴암 일본 우체부 발견 왜곡에 대한 비사, 일제의 성덕대왕신종으로 탄환을 만들고자 한 비사를 낱낱이 증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다 2006년 9월 2일 한국박물관협회에서 선생의 공헌을 인정해 김유신 장군 묘 아래 석당공원을 만들고 기념비를 만들어 세움으로써 선생의 공로가 비로소 우리나라 발굴사의 귀감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최남주 선생과 동시대 경주에서 발굴작업에 참여했던 사이토 타다시 선생이 한국 고분발굴 100주년 기념식 차 한국으로 와 최남주 선생에 대해 언급했고 석당공원을 방문해 선생과의 교분을 추억함으로써 선생의 역할이 다시 한번 조명되었다. 일제강점기는 우리에게는 분명하게 굴욕의 시간이었고 분노의 시간이었고 회한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문화유산과 유물조차 우리 것으로 말하지 못하던 시기였고 해외에서는 우리를 일본으로 알고 찾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경주최부자가 있어 우리의 주거 문화와 예법을 알릴 수 있었고 석당 선생이 있어 서봉총을 제대로 알릴 수 있었다. 나라를 빼앗겼다고 혼까지 빼앗기지 않았음을 이로써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즈음 학술모임이나 기업업무 회의에서 인공지능(AI), 빅데이터(big data), 기계학습(machine learning), 심층학습(deep learning), 데이터마이닝(data mining) 같은 단어들이 대화에 곧잘 등장한다. 이는 우리가 이미 4차 산업사회의 한복판에 있음을 말한다. 언급된 내용은 모두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4차 산업사회는 데이터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기반으로 형성되고 발전한다고 할 수 있다. 데이터과학은 의료라는 사람들의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을 예방·치료하는 모든 행위, 그리고 이와 관련된 전문 분야와 기술을 포함하는 거대한 환경에서 어느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해나갈 것인가? 의학과 의료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전 분야에 걸쳐 뿌리를 박고 영양을 섭취하면서 발전해왔다. 대표적인 기반이 화학, 물리, 생물학 등 전통 자연과학인데, 지난 70여 년간 성장해온 데이터과학은 이들 못지않은 힘으로 의료 발전을 뒷받침하게 될 것이다. 데이터과학이 진단검사의학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고 앞으로 줄 것인가? 지난 50여 년간 컴퓨터를 활용한 전산화가 발달하면서 현재 대부분의 의료기관은 검사업무와 결과 관리 등에 정보화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그러면 데이터과학이 무엇을 더 추가해 줄 수 있는가? 한마디로 기존의 컴퓨터 기술로 발전한 검사의학에 새로운 옷을 입혀 검사의학의 전 과정을 개선, 검사 결과의 신뢰도를 높이고 명품 검사 결과의 활용을 극대화할 것이다. 다시 말해 검사의 선택, 검사 시행, 검사 결과 산출, 의사에 의한 활용 등 진단검사의 전 과정이 새롭게 디자인될 것이다. 의사들이 의료에서 행하는 의사결정(decision making)의 70~80%는 진단검사 결과를 핵심 근거로 삼고 있다. 즉 검사 결과의 품질은 의료의 품질을 결정한다 할 수 있다. 데이터과학에 기반한 기술들은 환자의 상태에 적합한 검사를 선택하고 전체 검사 과정을 최상의 방법으로 관리해 신뢰할 수 있는 검사 결과를 산출한 다음, 이를 적절하게 시각화하여 의사에게 제공함으로써 검사 결과를 정확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데이터과학에 기반해 구축된 AI 기술이 적절한 검사를 선택하고 검사 방법, 오류 발생 방지, 결과의 신뢰도 검증 등 전 과정을 최적화하고 결과의 시각화로 결과 활용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검사 과정도 데이터과학에 기반한 관리로 최선의 검사 방법을 선택하고 과정을 최적화하여 오류 발생을 예방하고, 그래도 피할 수 없이 생기는 오류는 실시간으로 발견·제거하는 일 등은 데이터과학으로 구축된 AI가 해줄 것으로 전망된다. 진단검사업무에 활용하는 데이터과학 데이터과학을 진단검사업무에 활용하는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검사실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정제, 전처리하여 초기 데이터세트를 구축한다. 이 데이터세트에 들어 있는 데이터를 데이터마이닝 기법으로 분석하는데, 데이터마이닝 기법으로는 패턴인식(pattern recognition), 회귀분석(regression analysis), 클러스터링, 의사결정나무(decision trees), 분류(classification) 등이 있다. 이를 데이터의 성격과 분석 목적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한다. 여기에서 생산된 정보들을 활용, 기계학습을 거쳐 알고리즘을 구성하고 그 알고리즘에서 생산된 정보를 쉽게 볼 수 있도록 보고 형태로 만들어 전달하면 이는 의사결정의 근거로 활용된다. 의료에서 발생하는 의사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데이터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검사의학에서는 그 데이터의 정확성과 신뢰성 그리고 활용성을 높이기 위해 AI 등 데이터과학의 기법과 기술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전문의, 전공의, 병리사등 검사실 직원들이 기본적인 정보 기술과 데이터 관리와 관련된 통계, 코딩, 소프트웨어에 대한 훈련이 돼 있어야 한다. 특히 전공의 과정에서 AI 활용 전문가가 되도록 집중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컴퓨팅 기술, 기초 확률이론, 매트릭스, 네트워크와 그래프 이론, 최적화 등 수학적 이론 이해, 탐색적 데이터 분석, 통계적 모델링, 모델 평가, 시뮬레이션, 통계적 실험, 문제 해결을 위한 알고리즘 구성, 고급 수준의 프로그래밍 언어 구사, 데이터 수집·정리·관리, 불필요한 데이터 제거, 데이터베이스 구축, 데이터에서 추출된 지식의 평가 및 활용 등이 교육 내용에 포함돼야 한다. 이상을 실현하려면 진단검사의학 전문의와 임상병리사 중에서 데이터과학자가 양성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큰 규모의 대학병원에 최소한 20명 정도만 확보되어도 이들을 중심으로 데이터과학에 관심 있는 검사의학 전문가들이 배움 집단을 만들어 이 분야를 개척해나가면 4차 산업사회의 발전 속도에 맞춰 진단검사 분야가 발전할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데이터과학 분야의 빠른 발전 속도에 맞추어 진단검사의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는 검사의학 전문가들이 데이터과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각 의료기관과 전문학회에서 전략을 세우고 주위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글: 조한익 한국건강관리협회 중앙검사의원장 자료제공 : 한국건강관리협회 경상북도지부 대구북부건강검진센터 자료출처 : 한국건강관리협회 건강소식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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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경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섬세한 먹의 농담으로 표현해낸 수묵화 작품들이 한자리에 펼쳐진다. 플레이스씨에서는 오는 9월 8일까지 마음을 울리는 ‘무여 문봉선 경주 그림’ 전시가 열리는 것. 이번 전시는 문봉선 작가가 경주의 자연에서 받은 영감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아낸 작품들로 구성됐다. 작가는 천년 역사를 품은 신라의 혼과 더불어 푸른 소나무, 질박한 돌, 은은한 달빛, 우뚝 선 석탑 등 경주 곳곳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캔버스 위에 생생히 재현해냈다. 작품 속에는 경주의 절경들이 묵묵히 깃들어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든다. 작가는 현대의 다양한 재료가 넘쳐나는 가운데에서도 먹과 붓, 그리고 수묵화의 전통을 고집한다. 이는 먹이 단순한 검은색 재료가 아닌 우리의 정신과 역사를 담고 있다는 신념 때문이다. 작가는 먹과 물이 만나 수묵화를 이루고, 운필을 통해 종이 위에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을 통해 수묵화의 추상성과 깊이 있는 세계로의 진입이 가능함을 강조했다. 문봉선 작가는 “검은 먹과 물이 만나 수묵이 되고, 운필을 통해 하얀 종이 위에서 생명을 뿜어낸다”면서 “수묵화는 현실 세계를 초월한 깊은 경지에 쉬이 도달하기 어려운 추상성을 지녔지만, 또 어느 순간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서게 한다”고 수묵화의 매력을 설파했다. 그러면서 “먹은 3000년 역사를 관통해 지금까지 이어져 온 만큼 그 생명은 영원무궁할 것이며, 그것은 동양회화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강조했다. 그림의 묘미란 닮고 닮지 않은 경계에 있다는 말이 있다. 수묵화는 단순히 사물을 그리거나 관찰하는 것을 넘어서는 예술적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문봉선 작가는 “단순히 고루한 양식을 답습하는 것이 아닌, 문인화가 지닌 정신성과 조형미를 깨우쳐 현대미술 속에서 수묵화만의 생명력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하지만 아무리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서예의 필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지은 누각과 같아서 쉽게 허물어질 수 있다”면서 서예 기초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문 작가는 지난 1990년부터 30여년간 자연을 모티브로 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황룡사지, 삼릉계곡, 포석정 등 경주의 비경들이 고스란히 녹아있어 보는 이의 감흥을 자아낸다. 작가는 변함없는 자연에 대한 사랑과 혁신을 추구하는 법고창신의 정신이야말로 수묵화를 꽃피우는 근간이라 믿고 있다. 플레이스씨 최유진 대표는 “이번 전시가 관람객들에게 경주 자연이 선사하는 고졸미를 느끼고, 나아가 현대 수묵화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전시는 연중무휴로 진행되어,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언제든 경주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김시준 작가의 ‘a clay doll’ 전시가 141갤러리에서 오는 30일까지 열린다. <사진> ‘눈으로 맛을 느끼다’라는 부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경주에서 활동하는 김 작가가 신라시대부터 발견된 토우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선보이는 자리다. 김시준 작가는 경주에서 발견된 기마인물상과 신라 토우인형 등을 현재의 피규어나 모형, 조형물과 같은 관점에서 작업했다고 밝혔다. 그는 “과거 토우 속 동경이를 현재에 꺼내 하나의 캐릭터로 재해석했다”면서 “쓰임새와 가치가 없어진 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 김 작가는 경주 시민이자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로서 기존에 누군가 해왔던 작품이나 익숙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역사 속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그는 “경주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기억에 남을 스토리텔링을 평면과 입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팝아트적인 요소를 가미해 재미나고 선명한 이미지로 관객과 소통하고 있는 작가. 그는 “작품 속 동경이를 단순히 경주의 개 이미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다”면서 “이를 통해 남녀노소 누구나 토우와 동경이에 대한 역사와 경주와의 연관성을 교육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전시는 경주문화재단이 주최하고 한국수력원자력(주)가 후원하는 ‘2024한수원과 함께하는 지역예술인 상생프로젝트:쌍쌍경주’의 일환으로, 김 작가는 이 프로젝트에 선정돼 사업비를 지원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