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황동규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들기 위해쉰다섯 여름과 겨울그 헐렁한 길을맨머리에 눈비 맞으며 헤매다녔노니이마를 땅바닥에 찧기도 했노니. 공사장에 나가거칠은 낱말들을 체질해 거르다찢어진 체가 되기도 했노니, 정신 온통 너덜너덜. 그 해골 돌로 두드리면돌 소리 내고나무로 두드리면나무 소리 내는구나.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들기 위해 ‘알맞게’ 익은 미소 하나를 위한 생 제목부터가 엉뚱하고도 재밌는, 그러나 알고 보면 해학과 깊이, 거기에다 예지의 빛까지를 거느리고 있는 시다. 그것은 무엇보다 ‘해골’이라는 말에서 온다. 진짜 해골이라도 ‘촉루(髑髏)’라고 표현하면(“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髑髏)가 빛나리”, 박두진 「묘지송」 ) 향기가 나는 법인데, 시인은 역으로 우리의 ‘얼굴’을 ‘해골’이라고 유머와 해학으로 그러나 현실감 있게 표현한다.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다. 온갖 감정이 다 담기는 민낯의 얼굴, 그게 해골이 아닐 것인가. ‘해골’밖에 안 되는 주제에 온갖 거짓과 가식으로 남을 속이고 화를 내는 것이 마땅하냐, 하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런데 그 해골을 수식하는 관형절이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이다. ‘알맞게’라는 말은 과장에는 이르지 않고, 거짓의 탈을 쓴 가식은 걸러내고,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자연스럽게 익은 양태를 말한다. 문득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얼굴이 떠오른다. 시인은 쉰다섯 인생길을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들기 위해” 헤매다녔다고 밝힌다. 그 나이에 이르는 동안 시인이 내면에서 추구하는 이상과 부딪힌 현실은 얼마나 괴리가 많았을까? 자주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헐렁한” 길이 되어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시인은 그 과정에서 만난 중첩된 고난과 시련을 “맨 머리에 눈비 맞으며 헤매다녔”다고 표현한다. 심지어 “이마를 땅바닥에 찧기도” 하는 참을 수 없는 치욕과 좌절, 절망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기에 시인에게 ‘공사판’으로 비유되는 삶이라는 여정은 무엇보다 “거칠은 낱말들을 체질해 거르”는 말의 순화과정의 연속이지만, 그것은 쉽사리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찢어진 체가 되”는 낭패와 소모과정을 거쳐, “정신 온통 너덜너덜”해질 지경까지 이른다. 그러나 웬걸? 정신이 다 닳고 나자 시인은 자신이 변화되는 경이를 맛보게 된다. 그 과정은 2연과 3연 사이의 여백에 생략되어 있다. 3연은 앞의 연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의 탄생을 그린다. 바로 어떤 말을 들어도 다 소화가 되는, 귀가 순해진 인간이다. 타자가 “돌로 두드리면/돌 소리 내고/나무로 두드리면/나무 소리 내는” 해골. 그것은 내 마음이 타자에 대한 적의가 사라졌기에 가능한 반응이다. 오히려 내 마음에 긍휼과 여유가 있기에 그 사람이 어떤 것으로 나를 치고 들어오든 그 사람에게 맞는 미소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건 혼자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 나오는 미소다. 시인은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드는 데 쉰다섯 해가 걸렸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이순(耳順), 귀가 순해져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나이를 예순이라 하니, 시인은 그것을 몇 해나 당겨서 이룬 셈이지만, 나중에 우리 생을 결산할 때 과연 어떻게 살아야 일생을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더도 덜도 말고 알맞게 지은 미소를 가진 얼굴, 그거면 된 게 아니냐고 시인은 우리의 옷깃을 당기며 속삭이듯 말한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