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 해양문화축제인 바다의 날 기념식이 수려한 해안선 100리를 자랑하는 경주에서 열렸다. 해양수산부와 경주시가 주최하고 한국해양재단이 주관한 제28회 바다의날 기념식이 지난달 31일 경주엑스포대공원 백결공연장에서 ‘혁신 해양산업, 도약 해양경제, 함께 뛰는 대한민국’을 주제로 개최됐다. 기념식에는 조승환 해양수산부장관, 이철우 경북도지사, 주낙영 경주시장, 남한권 울릉군수, 이철우 경주시의장을 비롯해 국회의원, 도·시의원 및 관계자 등 1500여명이 참석했다. 바다의 날은 매년 5월 31일이다. 828년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 대사의 청해진 설치를 기념하는 날로 바다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해양 수산인들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1996년 지정된 국가 기념일이다. 기념식은 해군 군악대와 경주시립합창단의 축하공연 등 식전행사에 이어 유공자 포상, 기념사, 미래비전 구현 이벤트, 폐식선언 등으로 진행됐다. 유공자 포상은 총 40명 중 △은탑산업훈장 김영득 이스턴마린 대표, 강수일 한국선박관리산업협회장 △홍조근정훈장 차형준 포항공대 석좌교수 △산업포장 김동현 성부수산 대표, 김경율 HMM㈜ 선장 △대통령 표창 (사)한국해양교육연구회가 참석해 수상했다. 바다의 날 기념식과 더불어 2일까지 ‘2023 대한민국 해양수산엑스포’도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렸다. 해양 신산업 발굴과 관련 우수기업 육성을 위한 박람회는 △수산·가공식품 △수산물·급식 기자재 △해양레저·관광 등 해양수산 분야 100개 업체가 전시했다. 경주에서는 천연식품, 감포전촌젓갈 등 지역생산 해산물 가공업체 7개 업체와 이사금 쌀, 한우 브랜드 천년한우 등 지역 특산물도 전시·판매했다. 첫날에는 해양수산 미래정책 포럼을 통해 스마트 수산가공 종합단지 조성계획과 수산가공업 활성화 방안에 대해 논의했으며, 내수면 양식 창업 교육도 병행했다. 특히 사흘간 지역 해양수산 중소기업 제품의 우수성을 알리고 대외 홍보 확대를 위해 진행될 유망MD(merchandiser) 구매상담회는 우수 기술·제품의 내수판매 증진을 위한 유통채널 확대에 기여했다. 한편 경주시는 해양역사, 관광휴양을 융합한 동해안 해양 르네상스 조성을 위해 국립 선부역사기념공원(113억), 문무대왕 성역화(220억) 및 해양역사관(121억) 건립, 해양레저관광(490억) 거점 조성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2021년 착공한 문무대왕과학연구소(6354억)와 SMR 국가산단(3046억) 유치, 중수로해체기술원 설립(723억) 등 경주 바다를 해양 르네상스와 연계한 첨단과학전초기지로 조성해 나갈 방침이다. 주낙영 시장은 “이번 바다의 날을 맞아 시민들께서 바다의 무한한 잠재력과 가치를 다시금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며 “앞으로 경주바다를 연계한 해양레저관광 거점을 조성하고 원전 첨단산업과 연계한 해양관광 시너지가 배가 될 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경주지역 전세보증금이 집값에 육박하는 소위 ‘깡통전세’ 우려가 위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토교통부가 지난해 8월 첫 공개한 경주지역 3개월간 연립·다세대주택(빌라)의 전세가율 121.5%보다 크게 낮아졌지만, 위험을 경고하는 수치인 80%를 여전히 상회하고 있는 것. 이 같은 수치는 아파트도 마찬가지였다. 국토부가 부동산테크 누리집(www.rtech.or.kr)을 통해 공개한 정보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으로 최근 1년간 경주지역 연립·다세대주택(빌라)의 전세가율은 ‘89.5%’로 높게 나타났다. 특히 지난해 8월 기준 전세가율 80.5%에서 9개월간 9%p 상승해 깡통전세 우려가 높아졌다. 아파트의 경우는 4월 기준 1년간 전세가율이 83.4%로 지난해 8월 이후 여전히 80% 초반 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경주지역 빌라와 아파트 전세가율은 전국·수도권·지방·경북 평균보다 높게 나타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빌라의 경우 4월 기준 최근 1년간 평균 전세가율이 전국 81.2%, 수도권 82.0%, 지방 75.6%, 경북 83.9%로, 경주지역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아파트 역시 전국 73.0%, 수도권 68.7%, 지방 76.9%로 경주지역 보다 낮았다. 다만, 경북 평균은 85.7%로 경주지역보다 2.3%p 높게 나타났다. 전세가율은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을 나타내는 수치로, 전세가율이 높을수록 매매가 하락 시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우려가 큰 것으로 간주한다. 부동산업계는 전세가율 70%를 넘으면 깡통전세 ‘주의’ 지역, 80%를 넘으면 깡통전세 ‘위험’ 지역, 90%를 넘으면 깡통전세 지역으로 보고 있다. 집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전세금을 대위변제한 ‘전세보증 사고’도 최근 9개월간 2건이 발생해 위험신호를 보냈다. 지난해 8월부터 올해 4월까지 지역에서 발생한 전세 보증사고는 지난해 12월 1건 1억3000만원, 올해 2월 1건 3억2000만원 등 총 2건에 4억5000만원 규모로 나타났다. 보증사고는 보증채권자가 전세계약의 해지 또는 종료 후 1월 내에 정당한 사유 없이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또 전세계약 기간 중 전세목적물에 대해 경매 또는 공매가 실시돼 배당 후 보증채권자가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경우도 보증사고에 해당한다. 부동산 시장 상황을 나타내는 지표인 경매낙찰통계도 지난해 8월에 비해 나빠졌다. 경매낙찰통계는 임대인의 부도·파산 등으로 해당 주택이 경매에 부쳐지는 경우 임차인이 돌려받을 수 있는 보증금액을 유추해볼 수 있는 자료다. 통계에 따르면 경주지역에서는 지난 2월부터 4월까지 3개월간 경매건수 106건, 낙찰건수 28건으로 낙찰율은 26.4%에 그쳤다. 또 낙찰가율은 69.5%였다. 지난해 8월 기준 3개월간 경매건수는 85건, 낙찰건수 36건, 낙찰율은 42.4%, 낙찰가율은 82.7%였다. 9개월 전과 비교하면 경매건수는 21건 늘고, 낙찰건수는 8건 줄어들어, 낙찰율이 16.0%p 크게 떨어졌다. 낙찰가율 역시 10.9%p 감소해 지역 부동산시장 상황이 열악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의 한 부동산 전문가는 “깡통전세 등의 피해를 막으려면 매물의 권리관계, 주변 매매·전세시세, 임대인의 세금체납 여부 등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전했다.
오래된 기억 속 집은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다. 잊혀진 기억이나 계속 소환되는 기억은 자연의 이미지를 차용해 작품으로 승화된다. 책상 위에 늘 놓여있는 하얀 종이와 연필 한 자루. 종이에 긁적인 아이디어는 어느새 형태로 드러나고, 한지가 켜켜이 덧대어지면서 단단한 조형작이 만들어진다.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진 정교한 조형작은 빛을 투사하거나 커피가루를 더해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고, 어루만진다.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차량이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가 있다. 그 도시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서울로 치면 광화문 정도로 항상 사람과 자동차들의 통행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이런 곳은 그 위치의 중요도 때문에 비즈니를 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건물도 비싸고 조그만 구멍가게조차도 엄청나게 임대료가 높다. 무엇을 해도 되는 곳이고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는 부동의 상권이다. 이런 위치 때문에 이런 곳에는 항상 옥외광고판이 있다. 그것도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큰 광고이고 아마도 광고료 또한 무지 비싸게 지불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체들은 그 비싼 광고를 기꺼이 지불하고 그곳에 자사의 로고가 선명하게 들어간 제품들을 광고한다. 그만큼 노출의 빈도가 높기 때문에 광고효과 또한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런던에도 그런 곳이 있다. 바로 피카델리스커라는 곳이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피카델리 로타리 정도이다. 서울의 종로 혹은 광화문, 경주의 팔우정 로타리 같은 곳이다. 차들이 많이 몰리고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이 몰리는 요지이다. 이곳에는 영국에서 가장 비싼 옥외광고들이 있다. 혹자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옥외광고라 말하기도 한다. 약 15~20여년 전 이곳에 한국 기업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자사의 제품들을 광고하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셋이었다. 그 주인공들은 삼성, 현대, LG였다. 광고를 할 수 있는 공간이 기껏해야 5~6개 정도 옥외광고이고 전 세계의 메이저 회사들이 들어온 그곳에 모국의 회사 광고들이 줄줄이 사람들의 시선들을 한 몸에 받는 그 모습을 볼 때, 가슴이 찡하고 자랑스러움은 어떤 것에도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 그곳에는 이제 삼성도 현대도 LG도 광고를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여전히 그 자리에 수많은 광고가 있고 사람들도 여전히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대한민국 막강 세 광고가 왜 사라졌을까? 기업들이 돈이 없나? 세상 사람들은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필자의 생각은 심플하다. ‘이제 이 기업들은 더 이상 기업광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이다. 이미 전 세계 사람들은 이 기업들을 잘 알고 있고, 이 기업들은 긴 세월 자사의 제품을 통해서 그 기업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대한민국, KOREA라는 국가의 브랜드가 이미 전 세계 사람들에게 깊이 그리고 아주 명료하게 각인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은 좋다는 평가이다. 그것이 제품이라 할 수 있는 물건이든지, 문화적 상품이든지 간에 다 좋다는 평가이다. 모국이 대접받고 힘이 세면 그 나라 사람들 또한 자연히 그 나라의 평가에 편승하면서 대우받는다. 영국에는 한국 사람들이 약 4~5만명 정도 살고 있다. 참으로 반갑게도 경주 사람들도 약 20여 명 정도 된다. 타지에서 모국 사람들만 만나도 반가운데 고향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더 큰 기쁨이다. 한국 사람들은 영국 사람들에게 한국 자랑을 하지만, 경주 사람들은 영국 사람들에게 경주 자랑을 한다. 경주가 고향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경주 자랑은 정말 많다. 사실 그 경주 자랑을 그 사람이 이해를 할 수 있을까? 경주가 로마도 아닌데 우리들의 경주 자랑을 그 사람들이 인정할까? 그런데 이런 우려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자랑하는 당사자들에게는 자랑할 수 있는 그 사실들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향 바라기 우리들은 ‘역사문화관광지 경주’ 혹은 ‘한국에 가면 반드시 가야 하는 도시 경주’라는 식의 그 평범한 멘트를 가장 편하게 영국 사람들에게 무조건 던지고야 만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필자로부터 그런 말들은 듣고 경주에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다시 고민에 빠져 있다. 경주를 좀 더 편하게 그리고 더 많은 영국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다. 그래서 이곳에 살고 있는 경주 사람들이 더 잘 살고 더 자랑스럽고 더 멋지게 영국에 살고 있는 경주인이 될 수 있는 길을 말이다. 간혹은 그런 생각도 해 본다. 런던 시내 그 중앙 피카델리 서커스에 내 고향 경주의 광고가 선명하게 올라올 그날이 있을까? 아 저곳에 경주 불국사가, 첨성대가, 대릉원이, 황리단길이, 황남빵이 슬라이드처럼 휘날려 뽐내게 될 날이 말이다.
가정을 해 보자! 내가 당선이 되어서 고향의 선량이 된다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을까? 내 고향 발전에 이바지하고 불우하고 소외된 이웃의 대변자가 되고, 발전하는 대한민국의 초석이 될 것이라는 각오로 임하리라. 보통은 이런 마음가짐 일 것이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선거라는 큰 문턱 때문에 출마의 결심을 가지기도 힘들다. 선거라는 과정이 보통의 결심으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들 앞에 나서는 것, 진심이든 가식이든 대역죄인 마냥 머리를 숙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지으면서 감내하는 것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또한 대중에게 얼굴을 팔려 나란 존재가 알려져 생활한다는 것은 많은 제약이 수반되기 때문에 불편한 일상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당선이 된다면 이런 것들도 감내하겠지만, 낙선됐을 때는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지금의 선거는 전쟁과 마찬가지다.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극명하다. 이렇다 보니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선거라는 것이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불편함이 없다 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당장은 아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불편함은 현실화가 되고, 그 정도는 점점 커질 것이다. 호황을 누리던 대한민국의 반도체, 자동차산업 등이 부진을 겪으면서 수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대한민국 경제가 당장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씩 어려워지는 것을 체감하는 요즘이다. 방치했을 때는 더욱 큰 위기로 다가 올 수도 있다. 형국이 이러할진데 타개해야 할 지도자들은 정쟁에 치우쳐 눈앞에 권력을 두고 치열한 싸움을 전개할 뿐이다. 무엇이 우선인지, 당장 해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뒷전이고 상대진영을 깎아내리고 훼손하는데만 전력을 쏟는 형국이다. 진영의 공천이 선택의 기준이 돼 버리면서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들이 당선되고, 이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다 보니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지도자가 대한민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네 생활 방식의 중심에는 냉철하고 근거가 확실한 과학적인 사고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사고에 있어서는 전혀 이러한 것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만약에 이러한 사고가 선거에 접목이 된다면 감도 안 되는 사람들이 ‘내가 지도자가 되겠소’하고 나설 수 있을까? 그나마 소위 중도층이라는 사람들이 2~30%있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다. 특정지역을 제외하고는 예전처럼 표차도 크지 않다. 1~2% 차이로 결정되는 예가 많다. 아슬아슬한 차이지만 그 결과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극명하다. 이렇게라도 대한민국의 정치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뤄가고 있다. 하지만 그 대립의 정도가 심해지면서 극대극으로 치닫는 느낌이 들 정도다. 선거 때 수많은 공약이 남발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경 쓰지도 않는다. 진영간 대립의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허황되고 실현가능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가지고 문제를 삼는 예도 찾기 힘들다. 체감하는 공약, 대한민국을 전진시킬 수 있는 안을 가지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인재는 대한민국에 무수히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그 많은 지도자 중 이러한 인재를 찾을 수 없는건 왜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더라도 때가 되면 공천을 받아 선거를 통해 또 당선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렇게 선출된 사람이 대한민국을 이끌어간다. 일반 국민들이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지금의 제도하에서는 불가능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렇게 선출된 선량들이 이끌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에게 우리의 현실, 미래를 맡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할진데 그냥 대충 선출해서야 되겠는가! 경주를 보자!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일까? 대다수의 시민들은 무엇을 원하고 어떤 변화를 기대하고 있을까? 각자의 생각이 다 다르겠지만 큰 공통분모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을 알고자 시도하는 지도자! 그것을 집어내고 해결하고자 하는 지도자를 우리는 찾아야 한다 그동안 참 아쉬운 것들이 많다. 쪽샘이 그대로 있었다면 황리단길은 비교도 되지 않을 명소가 됐을 것이다. 동천동·황성동·금장·석장동 등 일대의 미로 같은 길은 사는 사람조차 헷갈리게 할 정도다. 그리고 한수원 문제 이런 것들이 잘 해결됐다면 경주시민들의 삶의 질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어떤 지도자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유럽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로 변모한 아일랜드! 한때 세계 10대 부유국에 속했던 아르헨티나가 지금 많이 추락한 것! 단 한명의 어떤 지도자를 선택했느냐에 따른 결과다. 지금 내가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다 해서 강 건너 불구경 하다 보면 그 불이 강을 넘어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철저하고 정확한 과학적인 사고와 함께 내가 당선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고, 거기에 가장 근접한 사람을 찾고 선택하자! 그것이 우리의 밝은 미래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경주시가 중심상권 활성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모양새다. 5월부터 대릉원 무료개방에 이어 ‘불금예찬 야시장’을 26일부터 오는 10월 28일까지 매주 금요일, 때에 따라서는 토요일도 문을 연다. 무엇보다 올해 새로운 사업으로 중심상권을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만들기 위한 금리단 빈 점포 창업지원 사업이 눈길을 끈다. 이는 예비창업자 14곳을 선정해 준비금, 환경개선비 등 초기 사업지원금을 1명(팀)당 최대 2000만원까지 지원한다고 한다. 모집분야는 골목식당과 골목공방 등이다. 선발은 먼저 예비 창업자 18명(팀)을 1차 선정한 뒤 창업 인큐베이팅 교육과 멘토링, 사업계획서 작성, 품평회를 거쳐 최종 14명(팀)을 선정한다. 이 사업은 경주시가 상권 내 특화골목과 함께 빈 점포를 활용해 창업자들에게 도약의 기회를 제공하고, 중심상권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시는 중심상가 동행축제, 골목야시장, 거리예술위크 사업, 금리단 골목창업까지 이어지는 사업을 통해 관광객들의 도심 유입을 유도, 중심상권을 활성화시킨다는 복안이다. 올해 2년차를 맞는 중소벤처기업부 주관 중심상권 르네상스 사업을 통해 다양한 행사와 사업을 추진하는 것으로 중심상권 복원에 기대가 모아진다. 다만 유념해야 할 것도 있다. 효과적인 도시 재생과 중심상권을 살리기 위해서는 황리단길과 같은 신흥 상권이 형성돼야 한다. 그런 만큼 단기적인 목표 달성보다는 장기적이고 큰 틀의 정책들도 함께 추진돼야 한다. 이는 민간 주도가 아닌 관 주도로는 한계가 있다. 원도심 활성화에 필수적인 것은 민관협력에 있다. 관 주도적이며 이벤트적인 목표 달성보다는 상인, 주민들과의 끊임없는 대화가 이뤄져야 하고, 발전적인 대안을 함께 찾아야 한다. 고만고만한 재생정책보다는 경주시, 중심상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담아낼 수 있는 활성화 정책이 실행되길 기대한다.
연례적으로 시작되는 장마철이 다가오고 있지만 지난해 태풍 피해가 아직도 복구되지 않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이상기온이 잦아짐에 따라 게릴라성 집중호우와 과거보다 강력해진 태풍이 많이 발생할 것으로 보여 각별한 대비책이 요구되고 있다. 해마다 태풍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있지만 재난에 사전 대응하는 시스템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다보니 자연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인재(人災)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전국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매한가지다. 지난해 9월 제11호 태풍 ‘힌남노’가 경주를 강타하면서 물 폭탄의 후유증은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 하천과 도로 등 공공시설 754건이 유실되거나 침수돼 1113억원에 이르는 피해가 발생했다. 이를 복구하는데 총 2891억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복구상황을 보면 6개 지방하천과 소하천, 국도14호선 등 8건의 개선복구 추진율이 20%에 그치고 있다. 또 기능복원사업은 총 746건에 추진율은 45%에 불과하다. 개선복구사업의 진척률이 낮은 것은 기능복원사업과 달리 소하천 정비기본법에 따라 정해진 행정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개선복구사업은 그동안 실시설계와 사유지 보상, 주민협의 등을 거쳐 5월이 지나서야 공사 발주가 이뤄진다고 한다. 경주시는 개선복구사업을 오는 7월까지 80%, 내년 연말까지 100% 준공한다는 목표다. 또 기능복원사업은 올해 우기 전 70%까지 준공한다고 한다. 지난해 태풍 피해는 유례가 없을 만큼 피해면적이 넓고, 그 규모도 커서 복구사업에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경주시가 과거 자연재해와 비교해 볼 때 행정상의 업무 추진 속도가 느린 것도 아니다. 문제는 앞으로 발생할 자연재해 피해규모가 더욱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변화무상한 이상기온에 대처할 능력을 갖춰야 하는 이유다. 주민안전이 우선인지, 행정절차가 우선인지 따져 볼 문제다. 지금과 같은 피해 후 복구 식의 사후 행정으로는 대응이 어렵다. 보다 적극적이고 신속한 재해 예방과 함께 항구적인 피해복구가 필수적이다. 번거로운 행정절차는 결국 행정사무를 지연시키기 마련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재해복구에 대한 계획수립, 예산집행, 복구공사 등에 이르기까지 행정절차를 간소화하는 것이 시급해 보인다. 행정절차상 요건을 갖춰야 한다는 이유로 시간만 질질 끌다가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축조된 첨성대(瞻星臺)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는 첨성(瞻星)․점성(占星)으로 표현되지만, 『삼국사기』에는 검색되지 않는다. 그 용도에 대해서 천문관측, 불교 우주론, 선덕여왕의 상징성, 점성술 등 다양한 추론이 설왕설래 등장하지만 정확한 의미도출은 아직도 어려운 상태이다. 『세종지리지』에 “첨성대는 부성(府城)의 남쪽 모퉁이에 있다. 당나라 태종 정관 7년 계사(633)에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圓形)으로 높이가 19척 5촌, 위의 둘레가 21척 6촌, 아래의 둘레가 35척 7촌이다. 그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가운데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瞻星臺在府城南隅 唐太宗貞觀七年癸巳 新羅善德女王所築 累石爲之 上方下圓 高十九尺五寸 上周圓二十一尺六寸 下周圍三十五尺七寸 通其中 人由中而上)”라 기록한다. 포은 정몽주(1337~1392)는 1375년에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아들이지 말 것을 상소하였다가 언양에 유배된 적이 있는데, 첨성대를 보며 “첨성대는 월성 가운데 우뚝 서 있고, 옥적소리는 만고의 바람을 머금었네. 문물은 때에 따라 신라와 다르건만, 아! 자연은 예나지금이나 한결같네(瞻星臺兀月城中 玉笛聲含萬古風 文物隨時羅代異 嗚呼山水古今同)”라며 월성 안의 첨성대를 언급하였다.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은 1580년 여름에 경주를 여행하다가 “첨성대는 당시에 천문기상(天文氣象)을 관찰하던 곳이다. 잘 다듬은 돌을 쌓아 높이가 수십장(丈)이고, 형체는 둥글고 덮개는 모나며 배 부분은 크고 목 부분은 좁았다. 허리 쪽 구멍으로 들어가서 가운데에서 위로 올라간다. 아! 우리나라 좁은 땅에 삼국(三國)이 서로 대립하여 각각 그 천문기상을 살피고 각각 닥쳐올 일에 대해 대응하였으니, 운수 또한 반드시 그 사이에 있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1626~1690)은 1660년 봄에 첨성대를 보았는데 “대는 월성의 서북쪽에 있었는데, 그 체제는 둥근 원으로 마치 병과 같았다. 높이는 수십 척(尺)이 되고, 가운데 허리에 문을 내었다. 땅에서 문까지 사다리로 올라갈 수 있고, 그 문으로 그 가운데가 비어서 잡고 당겨서 올라가면 바로 정상으로 나가는데, 제도가 매우 기이하였다”라 묘사하였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1546~1632)은 「동도유적(東都遺跡)」 27수에서 “첨성대는 천문을 관측하였다(候天文)” 그리고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1814~1888)은 동경을 회고하며 “첨성대 위엔 주린 까마귀가 모여들고, 반월성 가엔 야윈 송아지가 올라가 있네(瞻星臺上飢鴉集 半月城邊野犢登)”라며 황량하고 쓸쓸한 첨성대의 모습으로 묘사하였고,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는 『속동문선』 「첨성대」 칠언고시에서 신라 때 제작된 첨성대가 아직도 남아있는 사실에 감탄하였다(羅時制作堪一噫). 경주 남산리 출신의 선비 시암(是庵) 임화세(任華世,1675~1731)는 서거정과 어세겸 시에 차운한 계림 12영에서 ‘별을 보는 오래된 대[瞻星老臺]’라 칭하였다. 높고 우뚝한 첨성대라 불리는 대는 崇臺突兀號瞻星 한나라에 견주듯 하늘 높이 옛성 옆에 서있네 軼漢凌霄傍古城 길게 금오봉과 마주하여 천년을 견디었지만 長對鼇岑千載立 왕업을 따르지 못하여 일순간 기울었네 不隨王業一時傾 나그네는 몇 번이나 지난 일을 상심하고 遊人幾度傷心事 들판 새만 다분히 벗 부르는 소리에 지저귀네 野鳥多般喚友聲 백리의 강산은 이미 두루 보았건만 百里江山看已遍 올라 반나절을 머무니 심정 어찌할꼬? 登臨半日若爲情 *『是庵集』 卷2, 「詩, 次徐四佳居正 魚文靖世謙 雞林十二詠 幷序」 첨성대는 오랜 세월을 침묵하며 제자리에서 신라의 흥망과 고려 그리고 조선의 역사를 보았을 것이다. 임화세는 고향사람으로 늘상 보던 고적이 오늘따라 애상함이 가득하고 무려 반나절이나 머물려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사뭇 궁금해진다. 이렇듯 수많은 시인묵객이 경주를 유람하며 동도의 고적을 보았고, 그 가운데 첨성대를 보며 저마다 소회를 읊조렸다. 조선의 선비들은 망한 신라의 애석함과 조선의 국운(國運)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첨성대를 바라본 시각이 지배적이다. 정작 첨성대의 용도는 세월이 오래되어 전하는 말로 이해될 뿐이고, 변함없이 월성 앞 들판에 우뚝한 첨성대는 역사의 장면을 담고 지금도 우직하게 서 있다. ‘첨성대’제목으로 창작된 제영시는 무려 90여 수가 넘는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발굴되겠지만 단일 소재로 적지 않은 작품이라 여기며, 반드시 이에 담긴 다양한 방향의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30년 전, 대학생 시절 연극 동아리 활동을 했다. 한두 달 연습하고서 단 한 번 공연을 하거나 고작해야 2~3일 공연을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열정으로 가득했던 시절이다. 공연이 끝난 후 졸업 동문들까지 함께 하는 뒷풀이는 회포를 푸는 자리다. 공연의 아쉬움을 달래는 자리였고 마음의 허함을 채우는 자리기도 했다. 그때 남자 선배들 옆자리에는 여자 후배들을 앉혔다. 물론 자주 못 뵙는 선배님들과 후배, 특히 새내기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농담으로 ‘술은 여자가 따라줘야 맛있지.’하는 말이 당연한 시대였다. 그래서 아줌마가 새내기였을 때는 하늘 같은 선배님 옆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앉았었고 내가 선배가 되어서는 후배들이 내 옆에 앉았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어린 사내아이를 보고 ‘요놈, 고추 따먹어야지’하면 성추행이다. 물론 내가 어렸을 때, 내 조카들이 어렸을 때는 동네 어르신들이 인사말처럼 하던 말이 이렇게 된 상황이 당황스럽고 아쉽기도 하지만, 친근한 동네 어르신, 이웃사촌보다는 모르는 사람을 더 만나는 시대니, 당연한 결과라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시대가 변한 만큼 우리들의 성(性)문화., 성(性)인식은 얼마나 변했을까? n번방 사건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짓인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 사회 성인식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본다. 어디 그뿐인가. 어느 섬에 발령받은 선생님을 동네 남자들이 성폭행한 사건, 명문대 남학생들이 단톡방에서 동기 여자들을 외모나 성적 농담으로 비하한 사건, 초·중학교 동년배 친구나 후배를 집단 성폭행한 사건. 특히 이런 사건 중 가해자가 어리고 미래가 밝다며 소년보호처분을 받고 성인이 되어 다시 의대나 교대 진학, 의사와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수 있다는 뉴스를 봤다. 그런 전력을 가진 사람이 의사나 교사로 우리 아이들과 만난다고 생각해봐라.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라고 생각되는가? 아무리 성문법에 기초한 판결을 한다고 하지만 다른 나라와 너무나 비교되는 성폭행, 성추행 관련 사건의 판결을 볼 때마다 뒷목을 잡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 학교에서 성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아는가?” 모른다면 반성하자. “올바른 성문화, 성인식에 대해 우리는 어느 수준일까, 생각해봤는가?” 제발 생각해보자! 올바른 성(性)문화, 성(性)인식 교육은 모두가 다 받으면 좋다. 하지만 제일 먼저 받아야 하는 사람은 윗대가리 분들이다. 갑질을 할 수 있는 사람, 권위로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다음이 일반 사원들이란 소리다. 국회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도 이런 교육을 받는 것으로 안다. “이러이러하면 성추행입니다. 이러이러하면 ~” 이런 비슷한 레파토리의 교육일 것이다. 그런데 바쁘신 국회의원은 안 받고 말단 직원들만 교육을 받는다. 일반 회사도 비슷하다. 뭐가 잘못됐다는 걸 알겠는가? 국회나 일반 회사에서 성추행, 성폭력, 갑질 등 이런 문제를 일반 평사원들 사이에서 벌어질까, 아니면 간부급 이상에서 벌어질까?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사자가 느끼는 압박이 어디가 심할까? 인사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 가해자라면 피해자는 쉽게 거부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 밑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 그들의 성(性)문화, 성(性)인식은 또 어떻게 변하게 될까? 또한 성추행, 성폭행 관련 뉴스에서 가해자를 혼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를 쉽게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줌마는 안타까움을 넘어 무서움, 두려움을 느낀다. ‘짧은 치마가 문제라고, 그렇게 늦은 시각에 왜 돌아다녔냐고? 지가 무슨 꼬투리를 줬겠지….’ 아줌마, 올라간 혈압 간신히 낮추며 부탁한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다. 왜 이따위 세상을 물려줬냐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힘이 약한 친구를 보면,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주라고 우리가 가르치지 않았나? 그렇다면 우리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 가해자를 엄벌하는지 언론을 통해 감시하고 후속 뉴스를 요구하고, 피해자는 지켜주는 것. 그래야 우리가 어른이라 하지 않겠는가!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바그너 필생의 역작이다. 그는 이 작품에 30년 가까운 시간을 쏟아 부었다. 4부작으로 구성되어 공연시간이 무려 15시간이나 된다. 당연히 엄청난 제작비가 들기 때문에 당시 ‘링 사이클(Ring cycle)’ 네 작품을 선뜻 수용하는 극장은 없었다. 그래서 바그너는 자신만의 극장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꿈을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가 실현시켜 준 것이다. 1875년에 바이로이트 극장이 드디어 문을 열었다. 링 사이클 네 작품 중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은 1869년에, ‘발퀴레(Die Walküre)’는 1870년에 뮌헨에서 초연되었다. 나머지 ‘지그프리트(Siegfried)’ 와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은 1876년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라인의 황금이 나머지 세 작품의 서주 역할을 한다. 바그너가 루트비히 2세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런 기적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할 초대형 오페라 작품이 탄생했고, 유럽은 바그너의 음악극 열풍에 빠져 들었다. 니벨룽의 반지는 바그너가 직접 대본을 쓰고 작곡한 작품이다. 그는 북유럽신화를 참고했다. 우리에겐 단군신화가 있고, 서양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듯이 북유럽에도 그들 고유의 신화가 있다. 니벨룽의 반지는 난쟁이 니벨룽 족 알베리히가 라인강에서 훔쳐낸 황금으로 만든 절대 반지에 관한 이야기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그러나 저주가 걸린) 반지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보탄을 중심으로 한 신의 세계가 몰락하고, 지그프리트(바그너는 자신의 아들이름을 지크프리트로 했다)로 대표되는 인간들의 세계가 새로이 탄생한다. 전 세계적인 흥행영화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역시 반지신화를 모티브로 한다. 바그너 작품은 예나 지금이나 자주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 엄청난 제작비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니벨룽의 반지가 해외 프로덕션으로 두 차례(2005년 세종문화회관-마린스키, 2022년 대구오페라하우스-만하임)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 2018년에는 국내 프로덕션(아힘 프라이어 연출)으로 야심찬 시도를 했지만, ‘라인의 황금’만 공연되고 후속제작이 불발되었다. 바그너의 음악사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바그너의 인지도가 떨어지는 이유는 그의 작품을 무대에서 자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세계적인 음악축제가 된 이유는 어찌 보면 이런 희소성에 기인한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공연되는 바그너의 오페라 작품은 모두 10개다. 이를 ‘바이로이트 캐논(Bayreuth Canon)’이라고 하는데, ①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② 탄호이저, ③ 로엔그린, ④ 트리스탄과 이졸데, ⑤ 뉘른베르크의 징거마이스터, ⑥ 라인의 황금, ⑦ 발퀴레, ⑧ 지크프리트, ⑨ 신들의 황혼, ⑩ 파르지팔이다. 파르지팔은 바그너의 마지막 음악극 작품(1882년 초연)으로 아서왕 전설에 나오는 성배의 기사 파르지팔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타락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그린 대표적인 대중영화를 꼽자면 단연 ‘화려한 휴가(2007/김지훈 감독)’일 것이다. 7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광주의 진실에 대해 제대로 알린 첫 영화로 자리매김했다. 1980년 이후 무려 27년만에 그날의 참상과 아픔, 분노를 제대로 알렸다. 그 10년 후에 만들어진 택시운전사(2017/장훈 감독)는 1200만이 넘는 관객에게 다시 한 번 광주의 진실을 공개했다. 이 영화는 광주의 진실을 처음으로 세계에 알린 독일의 피츠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택시 운전사 김사복 씨의 일화를 재구성한 것이다. 두 영화의 중간에 만들어진 26년(2012/조근현 감독)은 앞의 두 영화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진실을 집중적으로 묘사한 것과 달리 남겨진 사람들이 남긴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만화가 강풀의 원작을 영화화 한 것으로 300만 관객을 영화관으로 이끌었다. 이들 영화에 대해 일부러 ‘대중영화’라는 수식을 붙였다. 국민 대중들이 마음 놓고 볼 수 있었던 광주 영화라는 의미에서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광주를 다룬 영화가 없었을까? 물론 있었다. 일부러 찍기 위해 큰 비용을 들이지도 않았고 재미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다소 억지스러운 연출도 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광주 영화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 중 이른바 운동권 언저리에 있었던 사람이었다면 반드시 지나쳤던 통과의례가 있다. 그게 바로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는 것이었다. 그 다큐멘터리들은 아주 소수의 약속된 사람들에게만 몰래 공개되었고 그것을 보여주거나 본 사람은 철저히 그 사실을 숨겨야 할 만큼 위험한 영화였다. 그것을 보는 자체가 불법이었고 용공·좌경으로 몰려 감옥에 가야 하는 심각한 범죄로 여겨졌다. 그 당시 광주는 방송과 언론에 의해 철저히 ‘북한의 사주에 의한 역성 반란’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런 놀랍고 무서운 왜곡을 부정하고 광주의 참상을 알린 다큐멘터리들을 몰래 상영했으니 그것을 막으려는 독재정권의 감시가 얼마나 집요했을지 짐작될 것이다.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독재자들의 전횡은 치열한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무너졌다. 이와 함께 폭도들의 역성반란지로 왜곡되던 광주도 조금씩 정체성을 찾아갔다. 이른바 ‘광주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완전히 바뀐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1998년 이후였다. 그러나 영남권 대다수 사람들과 반공 이데올로기 교육의 오랜 세뇌에 갇힌 국민들에게 광주는 아직도 ‘빨갱이 반란지’에 머물러 있다. 헌법전문에도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넣겠다는 논의가 벌어지는데 한쪽에서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왜곡과 날조가 진행되는 것이다. 지난달 18일 KBS가 ‘거리의 만찬’이라는 교양 프로그램에서 ‘광수를 찾습니다’는 제목의 시사물을 방영했다. 그 내용은 지만원 씨 등 일부 극우 인사들이 주장하는 ‘광주민주화운동 사진에 나온 600명의 북한 군인, 현재는 북한의 고위층으로 행세하는 인물들’의 허구를 밝히는 것이었다. 여기에 출연한 인물들은 극우 인사들이 주장하는 북한의 고위층이라는 말과 달리 2023년 현재 대한민국의 당당한 국민임은 물론 1980년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을 북한의 고위층으로 왜곡한 극우 인사들은 1980년대 광주를 역성반란지로, 살육과 폭력진압을 정당하다고 왜곡한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이 제대로 민주화운동으로 공감되는 것이 왜 중요한지 모른 채 단순히 광주에 무슨 명예를 주는 것쯤으로 안다. 그러나 광주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앞으로 언제 생길지 모를 또 다른 독재자를 막는 효과가 있다. 광주를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인식함으로써 42년 전 총칼을 앞세워 광주와 국민을 기만했던 독재자들을 확고히 심판하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힘 있는 자들이 함부로 날뛸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광주의 참상을 묘사한 ‘화려한 휴가’와 ‘택시운전사’, ‘26년’이 아무렇지 않게 제작되고 국민의 호응을 얻은 것은 그만큼 대한민국이 민주화 됐다는 반증이다. 그 민주화의 정점에 광주가 있기에 대한민국 민주화는 필연적으로 광주의 혜택을 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아가 그 민주화의 혜택은 광주를 부인하는 영남권 국민과 수구 세력들도 함께 누리고 있다. 그런 광주에 대해 지역의 이기심이나 정파의 이익으로 부정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또 다른 독재를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 목에 스스로 칼 겨누는 바보짓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아이슬란드 관광 오리가 물 위에 떠 있는 모습의 아이슬란드는 남한 면적정도인데, 인구는 33만밖에 안된 작은 섬나라입니다. 영국을 거쳐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공항에서 6시간 후 이곳 수도 레이캬비크에 있는 공항에서 내렸고, 아이슬란드에서 는 10여일 동안 가족과 함께 렌트카로 다녔습니다. 물과 불, 또는 빙하의 나라라고 해서 항상 겨울 같은 추위와 외계인이 사는 칙칙한 회색 환경만이 있는 게 아니라, 사계절 따라 더운 날, 푸른들, 목가적인 풍경도 펼쳐있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코로나 방역해제로 여행 붐이 일어나는 이 때에 한번 가볼만한 이색적인 나라로 생각하여, 관광에 도움이 되고자 이곳을 소개하기로 합니다. 지난 여행 글에 언급된 바도 있지만, 지리적, 환경적으로 가기 힘든 먼 섬나라임을 감안, 쉽게 이해되도록 핫프레이스 중심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습니다. 아이슬란드 여행은 그곳 1번 국도를 따라 둥글게 (1)수도 레이캬비크와 골든 서클지역 (2)이 나라의 심장격인 상벨리아 국립공원지역 (3)하늘로 치솟는 지열 분화구 구역( 케이시르) (4)요크살론 중심의 빙하와 화산, 폭포지역 (5)불루라군과 미바톤중심의 온천지역, 그리고 (6)검은 모래와 주상절리지역 (7)제2의 수도인 북쪽 아큐레이리 항구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있습니다. 천연색 도시, 수도 ‘레이캬비크’ 주변 볼꺼리 이 나라 수도인 레이캬비크는 영국 북서쪽에, 노르웨이와 비슷한 위도상에 위치합니다. 인구 12만의 항구도시로 어업, 상공업, 수산가공업의 발달로 나라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이 주변에는 많은 캠핑장들이 산재해 있어 관광도시로서 여행자의 숙소 해결에 도움을 주고 있지요. 깨끗한 잔디밭에 캠핑 생활에 불편 없도록 통신, 조명시설, 화장실 등이 고루 잘 갖추어져 있어요. 우리도 그곳 ‘그린랜드 캠핑장’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먼저 이 도시 중앙도로에 어디서나 바라볼 수 있는 흰색 대형 교회가 눈에 띄는 데 ‘할림 스키르카’라고 하지요. 높이 75미터의 거대한 용암이 분출하는 모습을 하고 서 있어, 마치 땅에서 솟아오르는 로케트 모습과도 같고, 구조형태가 주상절리처럼 생긴 대형 흰색 건물이죠. ‘아이슬란드의 랜드마크’로, 도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특이한 건물입니다. 소정의 입장료를 주고 엘리베이트로 올라, 전망대에서 사방을 내려다보면, 북해 바다, 도시 호수, 천연색 집들, 하얀 설산 등 아름다운 경관이 멋지게 펼쳐저 있어 여행 처음부터 가슴이 후련해집니다. 아이슬란드의 성지, 상벨리아 국립공원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약 90여km, 북동쪽으로 20여 분 달리니, 넓은 들판에 전망대가 있고, 성벽으로 이어진 바위길에 돌무덤과 돌탑이 자주 나타납니다. 여행객들이 안전을 빌며 돌을 주어 쌓아놓은 탑들이라고 합니다. 길에서 보면 아래로 시냇가에 교회 건물과 몇 채의 집이 보입니다. 이곳을 ‘디트홀라이’라고하는 데, 바이킹족이 이 땅에 상륙하면서 거처를 만들어 마을 대소사를 민주적으로 처리하던 곳으로 전해와, 의회제도 1000년의 역사를 가진 민주주의 최초 발생지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어요. ‘시날라키스카’란 예쁘장한 교회와 집 몇채가 나란히 있고, 총리공관과 공원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초대 총리인 ‘한네스 하프스테인’ 동상이 있고, 그리고 앞쪽 물 웅덩이에는 관람객들이 던진 동전들이 널려있어요. 오래전 덴마크 왕이 여기서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빌었다고 해서 그 후 관광객들이 따라 던진다고 합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사&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밀사리’란 것이 있다. 늦은 봄, 밀을 추수하고 난 뒤 밀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 밀짚과 북대기로 불을 지핀 후 이삭을 구워 먹는 것을 말한다. 밀사리는 먹거리가 귀하던 시절 어른·아이 없이 즐겨 해 먹던 것으로 가난한 시절의 아련한 풍경이자 시골 사람들의 흔한 추억이었다. 태운 밀 이삭을 양손으로 비비면 밀껍질이 일어나 바스러지는데 이것을 입으로 불어 껍질을 날려버리고 익은 낱알을 먹는다. 손으로 낱알들을 털어넣다보면 입 언저리에 시꺼멓게 재가 묻기 마련, 입 검은 강아지처럼 검게 변한 얼굴 덕분에 상대적으로 이가 훨씬 하얗게 보이는 게 재미있어 깔깔 웃다 보면 해가 서산으로 기울곤 했다. 그 밀사리를 김현주 씨가 재현해 보였다. 지난 21일 김현주 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과 동영상에는 밀사리에 빠진 김현주 씨의 즐거운 시간이 올라 왔다. 이를 본 페이스북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밀사리 추억에 대해 이야기를 쏟아냈다. 하루 사이 밀사리와 관련한 ‘좋아요’가 수백 개 달렸고 댓글도 100개 가깝게 달렸다. 밀사리 하다보면 덜 익힌 밀을 씹는 경우도 잦았는데 이 경우 밀을 씹으면 씹을수록 전분이 침과 반응해 껌처럼 변한다는 사실도 댓글 속에 있었다. 밀사리를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달 수 없는 댓글이다. ‘주디가 시꺼매진다’는 댓글도 마찬가지다. 손이 얼얼해져야 배가 부를 것이라는 댓글도 있지만 밀사리로 배가 잠깐의 요기는 되겠지만 배부를 일은 거의 없었다. 갈곡밀밭에서 밀사리를 체험했다는 김현주 씨 사진을 보면 밀사리를 즐기는 모습 자체로 우리나라가 참 살기 좋고 풍요로운 나라로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추억 속의 밀사리는 먹을 것 귀하던 가난한 시골들이 허기를 때우기 위해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 했던 반면 사진 속 밀사리는 밀을 밀짚째로 태워서 해먹은 그야말로 ‘체험’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밀사리 하던 그 시절 사진처럼 밀짚째 불에 태워 먹었다면 어느 부잣집 자제였거나 어른들에게 야단을 크게 맞거나 했을 법한 풍경이다. 아무렴 어떨까? 오월 밀밭에 황금물결이 일고 그 한쪽에서 해먹는 밀사리는 꿀맛이지 않았을까? 보나마나 입언저리가 시꺼멓게 변해 마주 보고 깔깔 웃었을 김현주 씨 일행에게 2023년 5월 밀밭은 아주 특별한 추억이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Homeros)의 작품으로 알려진《오디세이아(Odysseia)》는 ‘오디세우스(Odysseus)의 노래’라는 뜻으로 1만2110행의 장편 서사시이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함께 싸워 승리하고, 이타카(Ithaca)로 귀향하는 10년 동안 겪은 모험담을 다룬 서사시이다.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인 오디세우스는 트로이(Troy) 전쟁에서 대활약을 하여 트로이를 함락시킨 영웅이자 이타카(Ithaca)의 영주이며, 고대 그리스의 영웅이다. 트로이 전쟁은 스파르타왕인 메넬라오스(Menelaus)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Paris)에 의해 빼앗긴 아내 헬레네(Helene)를 찾아오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오디세우스는 영웅들과 함께 트로이 전쟁에 참여한다. 오디세우스는 10년 동안 트로이 앞바다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함께 싸웠으나 트로이를 정복하지 못했다. 오디세우스가 나무로 된 큰 말을 만들고 그 안에 30명의 그리스 전사를 몰래 숨겨놓고 항복하는 척하는 속임수로 철수를 하였고, 전쟁이 끝났다고 믿었던 트로이 사람들은 승리의 잔치를 벌였다. 나무로 만든 큰 말인 트로이 목마 안에 그리스 군인들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트로이 사람들이 잔치 술에 취해 잠이 들자 트로이 목마에서 나온 그리스 군인들은 잔인하게 트로이 사람들을 죽이고 트로이 성을 파괴하여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전쟁을 끝낸 오디세우스는 부하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트로이를 출발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아 무려 10년이나 걸렸고, 돌아가는 동안 무수히 많은 모험을 겪게 된다. 오디세우스와 함께 고향으로 출발한 부하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고, 신탁(oracle)의 예언대로 20년이 지나서야 오디세우스는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도착한 이타카 궁에는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Penelope)에게 구혼하기 위해 찾아온 귀족 청년들에 의한 연회가 밤낮으로 열리고 있었다. 오디세우스가 아내 페넬로페에게 자신이 떠나고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재혼을 하라고 했지만, 페넬로페(Penelope, 그리스 여인 중에서 정숙한 여인으로 분류)는 20년이나 지나도 재혼하지 않고 아들 텔레마코스(Telemachos)와 함께 오디세우스를 기다렸다. 오디세우스가 이미 죽었다고 알려지자 이웃 귀족들이 페넬로페이게 구혼하러 몰려와 반강제적으로 청혼을 하였고, 페넬로페는 마지막으로 오디세우스의 아버지에게 바칠 옷(수의)을 완성하면 결혼하겠다고 핑계를 대고, 낮에는 옷을 만들고 밤에는 풀어버리는 식으로 3년이나 버텼지만 하녀의 배신으로 들통 나게 된다는 <페넬로페의 베짜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아내와 결혼하여 재산을 가로채려고 한 108명의 구혼자들을 염탐하기 위해 거지로 변장해서 20년 만에 그가 사랑했던 궁전으로 돌아왔다. 오디세우스가 궁전 뜰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무도 몰라보았으나, 궁전 안에 드러누워 있던 늙은 개 한 마리가 머리를 쳐들고는 귀를 쫑긋 세우고 알아보는 감동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 개가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터로 가기 전에 길렀던 아르고스(Argos)다. 늙어서 거의 빈사 상태로 드러누운 채로 옛 주인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귀를 세우며 머리를 들었다. 개는 오랫동안 보지 못하던 오디세우스가 가까이 오는 것을 느끼고 기쁜 듯 꼬리를 흔들었으나 일어날 기력은 없었다. 20년 만에 주인을 다시 본 충견 아르고스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고, 측은한 아르고스를 본 오디세우스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이 아르고스가 수천 년 동안 충견의 상징이 되었다. 서양에서 ‘개는 사람에게 최고의 친구(Man's best friend)’라고 한다. 친구 중에서 가장 친한 최고의 절친인 단짝이 되었다. 오늘날 반려견의 원조가 아르고스이다. 최석규 경주개 동경이 혈통보존연구원장 경주신문 독자위원회 위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도톰한 입술, 크고 시원한 눈매, 미간 사이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콧대. 위로 살짝 들어 올린 여인의 입꼬리에선 수줍은 듯 해맑은 미소가 묻어난다. 수막새 기와 끝 둥근 공간에 눈·코·입만으로 1400여년 전 신라 여인의 미소를 절묘하게 표현했다. ‘신라의 미소’란 수식어로 널리 알려진, 보물 제2010호 ‘얼굴무늬 수막새’다. 이 얼굴무늬 수막새는 지름이 11.5㎝로 손바닥에 쏙 들어올 정도의 아담한 크기다. 온전한 형태였다면 14㎝의 크기로 추정된다. 학계는 이 수막새의 제작 시기를 7세기쯤으로 판단한다. 수막새는 추녀나 담장 끝에 기와를 마무리하기 위해 사용된 둥근 형태의 와당이다. 틀로 찍지 않고 손으로 빚은 이 독특한 얼굴무늬 수막새는 왼쪽 하단 일부가 사라졌으나 이마와 두 눈, 오똑한 코, 잔잔한 미소와 두 뺨의 턱선이 조화를 이룬 자연미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화재청은 2018년 얼굴무늬 수막새를 보물로 지정할 당시 “신라의 우수한 와당 기술이 집약된 대표작”이라며 “기와가 단독으로 보물로 지정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 얼굴무늬 수막새가 출토된 곳이 바로 영묘사 터다. 도톰한 입술, 크고 시원한 눈매, 미간 사이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콧대. 위로 살짝 들어 올린 여인의 입꼬리에선 수줍은 듯 해맑은 미소가 묻어난다. 수막새 기와 끝 둥근 공간에 눈·코·입만으로 1400여년 전 신라 여인의 미소를 절묘하게 표현했다. ‘신라의 미소’란 수식어로 널리 알려진, 보물 제2010호 ‘얼굴무늬 수막새’다. 이 얼굴무늬 수막새는 지름이 11.5㎝로 손바닥에 쏙 들어올 정도의 아담한 크기다. 온전한 형태였다면 14㎝의 크기로 추정된다. 학계는 이 수막새의 제작 시기를 7세기쯤으로 판단한다. 수막새는 추녀나 담장 끝에 기와를 마무리하기 위해 사용된 둥근 형태의 와당이다. 틀로 찍지 않고 손으로 빚은 이 독특한 얼굴무늬 수막새는 왼쪽 하단 일부가 사라졌으나 이마와 두 눈, 오똑한 코, 잔잔한 미소와 두 뺨의 턱선이 조화를 이룬 자연미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화재청은 2018년 얼굴무늬 수막새를 보물로 지정할 당시 “신라의 우수한 와당 기술이 집약된 대표작”이라며 “기와가 단독으로 보물로 지정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 얼굴무늬 수막새가 출토된 곳이 바로 영묘사 터다. 일제강점기 일본 의사가 구입 이 얼굴무늬 수막새는 하마터면 영영 잃어버릴 뻔했던 드라마 같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초(1933년에서 1934년 사이로 추정) 경주 야마구치(山口)의원에서 의사로 일하던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 1908~1993)는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다. 경북 경주 사정동에서 독특한 와당인 수막새 한 점이 발견됐고, 일본인 골동품상인 구리하라(栗原)에게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당시 수막새를 발견한 장소가 지금은 영묘사 터로 추정되는 ‘사적 제15호 흥륜사지’였다. 목조건축에서 지붕의 기왓골 끝에 얹는 수막새의 무늬는 대개가 연꽃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수막새에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1933년 한국으로 건너와 의사로 일하며 경주에서 출토되는 골동품을 수집하던 20대 중반의 청년의사 다나카는 구리하라의 가게로 달려가 주저 없이 100원을 주고 이 수막새를 구입했다.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 정도였다고 한다. 이 같은 내용은 1934년 6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 제229호에 ‘신라의 가면화’란 이름으로 사진과 함께 실렸다. 오사카 로쿠손(大坂六村)이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이 글을 쓴 이는 훗날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지낸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1877~1974)였다. 오사카 긴타로는 1915~1930년 사이 경주 공립보통학교(지금의 계림초)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근무하다 정년퇴임했다. 이후 1932년 국립부여박물관의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 부여분관장으로 역임했고, 1934년 경주분관으로 돌아온 뒤 1938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제3대 경주분관장을 지냈다. 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얼굴무늬 수막새를 소개한 1934년 6월은 오사카가 부여에서 경주분관으로 복귀한 직후였다. 종적 감춘 지 30여년 만에 귀향 이 수막새는 3개월 뒤인 1934년 9월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 1881~1938)와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1890~1983)의 보고서 ‘신라 고와 연구’에 다시 한 번 소개된 이후 자취를 감춘다. 소장자인 다나카가 1940년 일본으로 돌아간 탓이다. 이후 그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까지 필리핀 전선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다나카는 1940년 귀국 때 얼굴무늬 수막새도 함께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다나카가 1940년 이전에 일본으로 옮겨놓았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하나밖에 없는 이 독특한 수막새는 고향땅인 경주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그러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24년이 흐른 1964년 이 수막새를 기억하고 있던 이가 있었다. 당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의 박일훈(1913~1975) 관장이었다. 박 관장은 1927년 5월부터 1929년 3월까지 경주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얼굴무늬 수막새를 소개한 오사카 긴타로는 이 무렵 이 학교의 교사였고, 박 관장과는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이런 인연으로 박 관장은 스승이 관장으로 있던 경주분관(박물관)에서 근무하게 된다. 1964년 박 관장은 일본에 있는 오사카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신라사 연구 협조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이따금씩 편지를 주고받게 됐고, 그 과정에서 박 관장은 수막새의 존재를 기억해냈다. 이후 박 관장은 1967년 일본을 방문하면서 오사카에게 수막새의 소재를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오사카는 수소문 끝에 소장자인 다나카 도시노부의 소재를 찾는 데 성공했다. 다나카가 후쿠오카의 기타큐슈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수막새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박 관장은 오사카에게 “한국에 하나뿐인 얼굴무늬 수막새인 만큼, 기증이 성사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사카도 적극 협조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다나카에게 수차례 기증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고 직접 만나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박일훈은 1972년 2월 일본 방문 길에도 스승 오사카를 만나 거듭 부탁을 했다. 오사카 또한 끝까지 노력하기로 약속했다. 9년에 걸친 이들의 간절한 요청은, 드디어 다나카의 마음을 움직였다. 다나카는 그해 10월 직접 경주박물관으로 찾아와 “마음속에 감명을 주는 인면와(人面瓦)를 제작한 와공을 생각하며 신라 땅에 안식처를 제공하고자 경주박물관에 기증합니다”라는 기증서와 함께 수막새를 기증했다. 화랑연수원 건물에 깃든 ‘명작의 비밀’ 얼굴무늬 수막새 기증은 박 관장과 오사카의 9년에 걸친 간절한 노력과 설득의 결과였다. 하지만 소장자인 다나카가 기증을 결심한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나카는 자신이 한국에서 수집한 기와와 탁본 등 160여 점을 이미 기타큐슈시립박물관에 기증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 얼굴무늬 수막새 한 점만은 기증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나카가 이 얼굴무늬 수막새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말해 주는 대목이다. 그는 얼굴무늬 수막새를 자신의 집 거실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그는 매일 이 신라의 미소와 눈을 마주쳤을 것이다. 그토록 아꼈던 신라 기와 한 점. 너무나 소중했기에 결국엔 그 기와가 원래 있었던 신라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을까. 어쩌면 이 일본인 의사의 수집과 기증이 없었다면 우리는 ‘신라의 미소’가 지닌 매력을 영영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나카 도시노부는 1993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1930년대에 근무했던 경주 야마구치 의원 건물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경주경찰서 맞은편에 있는 화랑수련원이 그곳이다. 그가 이 수막새를 구입했던 골동품 가게도 이 근처 어딘가에 있었다고 한다. 화랑연수원 건물 주변에서 얼굴무늬 수막새에 얽힌 스토리를 만날 수 없어 아쉽다. 김운 역사여행가
주낙영 시장이 지난 23일 시청 대외협력실에서 복지직 직원들과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사진> 이날 간담회는 복지행정 최일선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7급 이하 복지직 공무원 10여명과 점심까지 함께하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눴다. 먼저 주 시장은 늘어가는 복지서비스 업무량, 각종 민원인들의 폭언과 협박 등으로 인한 고충과 애로사항을 직접 청취하고 직원들의 노고를 격려했다. 특히 지난 3년간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주민들과 취약계층에게 생활지원금 지원을 비롯해 복지사각지대 발굴에 힘써 온 직원들을 위로하며 사명감을 가지고 업무에 더욱 정진해 주길 당부했다. 이어 시민들에게 각종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며 실무자로서 보람된 순간 등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공유했다. 시는 이번 소통 간담회를 시작으로 고충이 많은 직렬 등으로 확대해 자유로운 소통 분위기를 이어갈 방침이다. 주낙영 시장은 “경주시가 온 가족 행복누리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건 복지 현장 최일선에서 여러분들의 헌신과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며 “간담회를 통해 건의된 다양한 의견은 다각도로 검토해 최대한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경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지난 14일부터 18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일본 문화탐방(오사카·교토·고베)을 진행했다. <사진> 이번 문화탐방에는 중증장애인 및 활동지원사, 후원회, 랑콩뜨레 직원 등 37명이 참가했다. 뇌병변 최중증 장애인 회원은 “장애로 인해 혼자서는 갈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생애 처음으로 간 해외여행이 너무 좋아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가고 싶다”고 소감을 전했다. 후원회 김동수 회장은 “장애인의 해외여행은 생각조차 힘든 게 현실인데 이런 벽을 허물고 장애인도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후원회가 참여할 수 있는 한 지원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경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중증장애인들이 지역사회 한 사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는 비영리민간단체다.
경주시치매안심센터는 올해 치매극복 선도단체로 서라벌문화예술공연단과 내남농협을 새롭게 지정하고 지난 18일 현판식을 가졌다. <사진> 서라벌문화예술공연단은 지역 어르신과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통해 재능을 기부하는 봉사단체로 치매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확산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주민 접근성이 높은 내남농협은 지역민의 치매조기검진이나 예방을 위한 홍보 활동에 적극 동참해왔다. 한편 올해 추가 지정된 치매안심가맹점인 내남면 하늘정원과 옹심이메밀칼국수도 23일 현판식을 가지고 촘촘한 치매안전망 구축에 동참한다. 경주시치매안심센터는 매년 치매보듬마을을 중심으로 치매극복 선도단체와 치매안심가맹점을 각각 1~2곳 지정하고 치매친화적 도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보건소 관계자는 “다양한 단체와 기관, 가게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활동이 시민들의 치매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경주시사회복지협의회는 가정의 달을 맞아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지원사업 참여자 200여명을 대상으로 나들이 행사를 마련했다. <사진> 노인일자리 사업단 어르신을 초청해 지난 17일, 19일 양일간 불국사 및 동궁원과 버드파크 등 경주시 일대를 방문하고 다양한 체험을 제공하며 사업단 담당자와 참여자 어르신들이 서로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을 만들었다. 노인들의 축소된 사회적 관계망을 넓히는 역할과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불안감을 해소시키며,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지원해 노인들의 우울감을 해소하고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도움을 주었다. 한 어르신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예쁘게 단장한 불국사를 구경하니 또 새롭고,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새들이 있는지 몰랐다”며 “앞으로도 이런 프로그램에 꼭 참여하고 싶다”라고 고마움을 전했다. 노인일자리 사업단은 “앞으로도 다양한 프로그램 및 참여 기회를 만들어 참여자 어르신들이 더욱 건강하고 활기찬 노후를 보내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경주시사회복지협의회는 지난 23일 용황초등학교와 교육복지우선지원 대상 발굴 및 지원확대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사진> 이번 협약은 교내 취약계층 학생들을 발굴하고 자원을 연계하는 협력 기반을 조성하고자 마련됐다. 협약을 통해 양 기관은 취약계층 학생 발굴 및 교육·문화·경제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진 지원을 추진할 계획이다. 용황초 최희송 교장은 “올해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에 따른 연합형 학교로 선정됨으로써 교육복지사 선생님들 중심으로 다양한 자원을 연계해 사각지대 학생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협의회와 협력관계를 잘 이어나가겠다”고 전했다. 경주시사회복지협의회 박경복 회장은 “2023년 상반기 경상북도 경주교육지원청을 비롯해 계림중, 경주초에 이어 용황초에 이르기까지 4개소와의 협약 체결이 이뤄졌다. 복지사각지대 아이들의 사례 발굴 및 지원을 통해 학생의 삶 전반에 안정을 찾아갈 수 있도록 지역사회 차원의 지원망 구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경주시사회복지협의회는 경주시에 있는 복지소외계층 발굴 및 지역사회 자원을 연계 지원하고 있으며, 다양한 사회복지 유관기관과 정기적인 통합사례회의를 실시해 취약계층들에게 필요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