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선덕여왕 때 축조된 첨성대(瞻星臺)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는 첨성(瞻星)․점성(占星)으로 표현되지만, 『삼국사기』에는 검색되지 않는다. 그 용도에 대해서 천문관측, 불교 우주론, 선덕여왕의 상징성, 점성술 등 다양한 추론이 설왕설래 등장하지만 정확한 의미도출은 아직도 어려운 상태이다. 『세종지리지』에 “첨성대는 부성(府城)의 남쪽 모퉁이에 있다. 당나라 태종 정관 7년 계사(633)에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圓形)으로 높이가 19척 5촌, 위의 둘레가 21척 6촌, 아래의 둘레가 35척 7촌이다. 그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가운데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瞻星臺在府城南隅 唐太宗貞觀七年癸巳 新羅善德女王所築 累石爲之 上方下圓 高十九尺五寸 上周圓二十一尺六寸 下周圍三十五尺七寸 通其中 人由中而上)”라 기록한다. 포은 정몽주(1337~1392)는 1375년에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아들이지 말 것을 상소하였다가 언양에 유배된 적이 있는데, 첨성대를 보며 “첨성대는 월성 가운데 우뚝 서 있고, 옥적소리는 만고의 바람을 머금었네. 문물은 때에 따라 신라와 다르건만, 아! 자연은 예나지금이나 한결같네(瞻星臺兀月城中 玉笛聲含萬古風 文物隨時羅代異 嗚呼山水古今同)”라며 월성 안의 첨성대를 언급하였다.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은 1580년 여름에 경주를 여행하다가 “첨성대는 당시에 천문기상(天文氣象)을 관찰하던 곳이다. 잘 다듬은 돌을 쌓아 높이가 수십장(丈)이고, 형체는 둥글고 덮개는 모나며 배 부분은 크고 목 부분은 좁았다. 허리 쪽 구멍으로 들어가서 가운데에서 위로 올라간다. 아! 우리나라 좁은 땅에 삼국(三國)이 서로 대립하여 각각 그 천문기상을 살피고 각각 닥쳐올 일에 대해 대응하였으니, 운수 또한 반드시 그 사이에 있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1626~1690)은 1660년 봄에 첨성대를 보았는데 “대는 월성의 서북쪽에 있었는데, 그 체제는 둥근 원으로 마치 병과 같았다. 높이는 수십 척(尺)이 되고, 가운데 허리에 문을 내었다. 땅에서 문까지 사다리로 올라갈 수 있고, 그 문으로 그 가운데가 비어서 잡고 당겨서 올라가면 바로 정상으로 나가는데, 제도가 매우 기이하였다”라 묘사하였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1546~1632)은 「동도유적(東都遺跡)」 27수에서 “첨성대는 천문을 관측하였다(候天文)” 그리고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1814~1888)은 동경을 회고하며 “첨성대 위엔 주린 까마귀가 모여들고, 반월성 가엔 야윈 송아지가 올라가 있네(瞻星臺上飢鴉集 半月城邊野犢登)”라며 황량하고 쓸쓸한 첨성대의 모습으로 묘사하였고,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는 『속동문선』 「첨성대」 칠언고시에서 신라 때 제작된 첨성대가 아직도 남아있는 사실에 감탄하였다(羅時制作堪一噫). 경주 남산리 출신의 선비 시암(是庵) 임화세(任華世,1675~1731)는 서거정과 어세겸 시에 차운한 계림 12영에서 ‘별을 보는 오래된 대[瞻星老臺]’라 칭하였다. 높고 우뚝한 첨성대라 불리는 대는 崇臺突兀號瞻星한나라에 견주듯 하늘 높이 옛성 옆에 서있네 軼漢凌霄傍古城길게 금오봉과 마주하여 천년을 견디었지만 長對鼇岑千載立왕업을 따르지 못하여 일순간 기울었네 不隨王業一時傾나그네는 몇 번이나 지난 일을 상심하고 遊人幾度傷心事들판 새만 다분히 벗 부르는 소리에 지저귀네 野鳥多般喚友聲백리의 강산은 이미 두루 보았건만 百里江山看已遍올라 반나절을 머무니 심정 어찌할꼬? 登臨半日若爲情*『是庵集』 卷2, 「詩, 次徐四佳居正 魚文靖世謙 雞林十二詠 幷序」 첨성대는 오랜 세월을 침묵하며 제자리에서 신라의 흥망과 고려 그리고 조선의 역사를 보았을 것이다. 임화세는 고향사람으로 늘상 보던 고적이 오늘따라 애상함이 가득하고 무려 반나절이나 머물려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사뭇 궁금해진다. 이렇듯 수많은 시인묵객이 경주를 유람하며 동도의 고적을 보았고, 그 가운데 첨성대를 보며 저마다 소회를 읊조렸다. 조선의 선비들은 망한 신라의 애석함과 조선의 국운(國運)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첨성대를 바라본 시각이 지배적이다. 정작 첨성대의 용도는 세월이 오래되어 전하는 말로 이해될 뿐이고, 변함없이 월성 앞 들판에 우뚝한 첨성대는 역사의 장면을 담고 지금도 우직하게 서 있다. ‘첨성대’제목으로 창작된 제영시는 무려 90여 수가 넘는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발굴되겠지만 단일 소재로 적지 않은 작품이라 여기며, 반드시 이에 담긴 다양한 방향의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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