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경주를, 천년의 왕도·왕족의 느낌으로 사는 도시, 실행자보다 평가자가 많은 도시, 시민과 함께 하지 않는 가진자가 갑인 도시, 문화재는 있지만 문화가 없는 도시, 노력하고·고생하여 얻은 결과에 박수가 인색한 도시, 학연·지연의 단결은 잘되지만, 대중적인 단결이 되지 않는 도시, 기성세대 텃세의 도시라 한다. 1000년의 도시라 세월만큼 따라다니는 수식어도 당연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 모두가 설득력이 있는 말들이며, 이들이 경주미래 1000년을 위한 도약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많은 시민이 가진자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 청렴도 최하위 도시라는 평가만은 아닌 것 같다. 가진자의 자세는 평가자가 아니라 실행자이며, No가 아니라 Yes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시민이 많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안되는 논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평가자 입장보다는 No를 Yes로 전환 할 수 있도록 방안을 찾아주는 실행자를 원하는 주민들의 안타까운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염려를 깨고, 실행자 입장에서 시민의 마음을 담으려 노력하는 이들도 있어 다행이다. 새로운 민선 단체장이 마을 만들기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정부는 하향식 지원방식에서 상향식 지원방식으로 변경하여 마을 만들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상향식 지원방식으로 전환된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이를 받아 들이까지 경주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 마을 만들기 사업을 실행자 입장에서 준비하고. 대상지역의 마을 직접 찾아 도움이 필요한 부분을 발굴하고, 답을 책상에서 평가자의 입장에 접근하지 않고, No의 논리보다 Yes의 관점으로 현장을 찾아 아이디어를 승화시키는 새로운 접근 방식에 모처럼 박수를 보낸다. 낮은 자세로 함께 풀어가는 것이 미래의 결과를 만드는 중요한 자세라고 생각되어 칭찬한다. 수년 전 일본의 쓰레기 소각장을 방문하였을 때, 주민과 공무원의 관계 설정에 대한 질문에 소장이 말하기를 “우리는 쓰레기 소각장의 가장 종은 위치에 민원인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고 했다, 또 주민이 아이디어나 민원문제를 가지고 오면, 반드시 소장이 나가 그들의 말을 청취하고 “주민에게 며칠까지 검토한 답을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반드시 검토한 답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일본 공무원의 Yes는 미래의 희망이 되었다. 현재 경주의 경제는 관광이 침체되어 매우 어렵다. 침제된 경주의 경제 회복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경주가 측은하기도 하다. 하지만, 경제의 침제는 세계적인 경향이며, 쉽게 해결될 지표가 아니라는 것을 미래 경제학자들이 예측하고 있다. 얼마 전 투자의 달인이며 로저스홀딩스 회장인 짐 로저스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미래 먹거리는 관광”이라고 했다. 서구 유럽에서는 한국은 분단된 위험한 국가로 인식하여 중국과 일본관광 보다 한국을 선호하지 않는 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의 위험성이 사라지고, 남북한의 동서철도가 개설되면 관광 여건이 조성되어 한국의 새로운 먹거리가 된다”고 했다. 남북 철도개설은 실크로드가 재 연결되는 시대가 도래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흐름은 Yes를 슬기롭게 승화시킬 수 있는 도시들의 혜택이 될 것이다. 실크로드의 출발지인 경주도 Yes 접근 방식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경주의 미래 먹거리는 역사유적, 동양의 건강한 먹거리이며, 수려한 자연환경과 바다이다. 현재의 어려움 때문에 미래의 씨감자를 먹어 치우는 일은 없어야 한다. 미래세대의 먹거리는 현재의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먹거리와 완전히 다를 것이다. 기득권층들이 사라져갈 그들만의 먹거리를 억지로 잡으려는 시도에 동참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미래 세대들의 먹거리를 위해 기득권층만을 위한 발전을 중지하는 것 까지도 고민도 해야한다. 기성세대가 미래세대를 위해 먹거리를 남겨두는 Yes를 승화시킨 No의 미덕이 필요하다. 경주의 미래준비는 1000년의 걸림돌을 하나씩 해결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No보다 Yes를 말하는 사람이 미래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 Yes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충직한 No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경주의 미래를 이들로부터 희망을 찾을 때이다.
한국이 반만년 역사 단일민족이라는 말은 과거의 말이다. 한국은 이제 단일민족이 아닌 다문화민족이라고 봐야한다. 국내 체류하는 외국인(결혼이주, 근로, 유학 등)은 200만을 진작 넘어섰다. 지역만 해도 합법과 불법체류자들을 다 합치면 2만이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역인구가 26만이라고 봤을 때 약 7.7%의 ..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1799~1870)은 경주 암곡동 명곡리[明谷里.부친 이정열(李鼎說)·모친 영양남씨 치암(癡菴) 남경희(南景羲)의 따님]출신으로 1814년 광주이씨 이정운(李挺運)의 따님과 혼인해 이재희(李在喜)·이재기(李在祺)를 낳았다. 입재 정종로의 문인으로, 조부 이헌석(李憲錫)과 부친의 가학을 이어받았고, 외조부 치암선생을 통해 학문을 이뤘으며, 응와 이원조·동림 류치호·성재 허전·윤종호 등과 교유하였다. 1831년(순조31)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용궁현감·한성판관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회재선생의 학문을 추종하고 합천 이연서원(伊淵書院)의 참석을 통해 김굉필과 정여창의 학문적 도통연원을 계승하였고, 달성 도동서원(道東書院)의 「문루중수상량문(門樓重修上樑文)」을 지었다. 게다가 지역학문의 굳건한 입지를 위해 이의윤의 「무첨당집(無忝堂集)」·남경희의 「치암집」·류심춘의 「강고집(江皐集)」·이언괄의 「농재집(聾齋集)」 등을 교정하였고, 육영재(育英齋)에서 「근사록」·「심경」 등을 강의하였다. 42세에 금오봉 동쪽자락에 한적하게 공부하기 위한 태초암(太初菴)을 지었고, 이후에 정자 현판을 걸었다. 그곳에서 상서장(上書庄)·탄금대(彈琴臺)·매월사(梅月祠)·만고창(萬古倉)·문천도(蚊川渡)·불탱암(佛幀巖)·해목령(蟹目嶺)·만호봉(㻴瑚峯) 등 「태초암팔영(太初菴八詠)」을 통해 금오산의 아름다움을 읊조렸다. 『정헌집』「영광대기」에 의하면 경주의 월정교(月精橋)를 중국 낙양의 천진교(天津橋)와 함경남도 함흥의 만세교(萬世橋)에 견주며 월정교의 가치와 위상을 드높였다. 천진교는 수나라 양제 때 만든 부교(浮橋)이고, 성천강을 가로지르는 만세교와 낙민루(樂民樓)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그런데 부교는 배를 이용해 임시로 만든 다리가 아니라, 교각의 하단부가 물살을 가르기 위한 유선형 배모양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당시 월정교 역시 다리의 기둥 하단부는 부교의 형상으로 설명한다. 이는 현재 월정교의 원형에 대한 논란이 팽배한 상황에 관심을 가질 내용이며, 고증에 입각한 문헌조사가 추가로 이뤄지길 희망하는 바이다. 영광대(影光臺)는 경주선비들이 무너진 월정교 석재를 운반해 대를 쌓은 것으로, 월정교가 있는 교촌마을 물가 쪽에 영귀정(詠歸亭) 정자가 있었다. 영귀정은 문정(汶亭)·문양정(汶陽亭)·병촉헌(炳燭軒)·풍영정(風詠亭) 등 다양하게 불렸고, 이후 생원과 진사들의 강학처 사마소(司馬所)로 활용되었다. 1984년 월성지구 정화사업으로 월정교 북쪽 끝에 있던 사마소를 지금의 교촌마을 서편으로 옮기면서 ‘영광대’ 각석을 사마소 동쪽 담벼락에 옮기고 해설판을 세웠는데, 주자의 「관서유감(觀書有感)」“반 이랑 네모진 못에 거울 하나가 열렸으니,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네(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에서 의미를 빌렸다. 이후 1999년 최현택선생께서 사마소 이건기(移建記)를 짓고, 그 내력에 대해 소상히 적었다. 영광대기 정자의 남쪽에 오래전 다리가 있었으니, 『동경지』에 월정교라 하였다. 생각건대 서라벌이 성대했을 때 이곳은 낙양의 천진교와 함주의 만세교와 더불어 갑을을 겨뤘다. 다리가 부서진 것이 언제인지 모르고, 무너지고 남은 다릿돌이 수면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조부께서 매번 그 돌을 가져다가 대(臺)에 두고 정자의 승람을 돕고자 하였으나, 힘이 부족해 단념한 지가 오래되었다. 전후의 경주부윤들이 이 정자를 별장으로 여겼고, 대부분 정자를 찾은 벼슬아치들과 함께 계사(禊事)를 맺고, 간간이 재물과 곡식을 내어 그 운영을 도왔으며, 해마다 내는 세금은 물자가 넉넉해지길 기다렸다가 지출하였다. 금년(1855) 가을에 비로소 일을 시작해 7일 만에 대를 완성하였다. 높이는 한 장(丈)이 좀 못되고, 너비는 높이의 세배, 길이는 너비의 세배나 되었다. 땅을 높였지만 정자를 짓지는 않았고, 서늘함을 즐기기에 좋았다. … 영광대의 거리는 백 걸음이 안 되고, 얕아서 옷을 걷고 건넌 후에야 다다른다. 때로는 서재를 배처럼 띄운 듯, 뱃전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듯, 그리 깊지 않은 사이에 은연히 흐르는 물줄기의 조용한 경치의 즐거움이 있으니, 영광대라 이름한 것은 그러한 승경을 택한 것이다. 영광대 아래 흐르는 모래는 동경팔괴의 하나이고, 모래는 평평하고 물은 얕고, 물이 세차고 급히 흐르지 않았다. 매년 가을철 맑은 물이 이르면 배가 양쪽 물가에 가득하고 넘실넘실 흘러 평평하기가 거울면 같았다… 이 돌이 월정교의 다리가 되었다가, 영광대가 되었다가 백년 천년이 지나고 또 잃어버려 뉘집의 진석(鎭石)이 되었는지 모른다. … 시종 그 일을 주관하는 자는 집안사람 이능섭(李能燮)과 동생 이호상(李琥祥)이 함께하였다.
저자인 김원영은 골형성부전으로 지체장애 1급을 받은 현직 변호사다. 그가 잘못된 삶, 실격당한 인생이라는 꼬리표를 단 이들의 삶을 변론한다. 차별과 모욕, 수치의 순간들을 참아내고 실제의 자기를 지키기 위해 연극 속에 살아야 했던 저자 자신의 삶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법과 제도아래에 있는 치료와 복지를 어떤 시선으로 접근해야할지 일깨워준다. 더 이상의 인간실격이란 없다.
협주곡의 영단어 ‘concerto’는 경쟁과 협력을 의미하는 동사 ‘concertare’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협주곡이 경쟁과 협력이라는 상반된 속성을 모두 갖고 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협주곡을 잘 들어보면 고개를 끄떡이게 될 것이다. 진짜로 연주 안에 경쟁과 협력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쟁과 협력의 당사자는 협연자(대체로 바이올린 또는 피아노 독주자)와 오케스트라다. 협연자가 먼저 연주 실력을 뽐내면, 반주하던 오케스트라가 웅장한 소리로 받아준다. 이렇게 연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어느 순간에 둘은 하나가 된다. 경쟁이지만 협력이다. 협주곡은 발레의 남녀 주인공이 각자 솔로로 기교를 주고받다가 이내 하나로 합쳐지는 그랑 파드되를 닮았다. 둘 다 경쟁적 요소가 있지만 결국은 협력을 통한 조화가 중요하다. 협주곡은 18세기 초에 생겨나 비발디(A.Vivaldi/1678-1741)가 3악장 형식으로 만들었고, 이후 모차르트(W.A.Mozart/1756-1791)가 이 형식을 공고히 했다. 초기의 합주 협주곡은 점점 사라지고, 독주 협주곡이 일반화되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N.Paganini/1782-1840)이 이어 ‘피아노계의 파가니니’를 자처한 리스트(F.Liszt/1811-1886)와 같은 비르투오소(virtuoso)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신기에 가까운 그들의 연주에 열광하게 되었다. 협주곡에서 카덴차(cadenza)는 협연자가 마음껏 기교를 부릴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 연주가 생략된 부분이다. 보통 1악장 마지막 부분에서 길게는 5분까지 허용된다. 즉 원작곡가가 비어놓은 오선지를 솔리스트가 채우는 것이다. 이미 연주된 카덴차를 따라 하기도 하지만, 완전한 창조로 본인의 개성을 확실히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이때만큼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도 손을 놓고 협연자의 관객이 된다. 오케스트라의 협연자는 일단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갖추어야한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다고 하는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주자다. 유자 왕(Yuja Wang)은 실력도 좋지만 독특한 패션으로 유명한데, 몸에 달라붙는 짧은 원피스를 입고 피아노를 잘도 친다. 힐러리 한(H.Hahn)은 젊은 작곡가의 미발표 신곡을 앙코르로 연주하는 개념 있는 연주자다. 짐머만(K.Zimerman)은 미세한 차이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로 해외 투어에 자신의 피아노를 싣고 다닌다. 이들 스타 연주자는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관객을 구름처럼 모으는 힘이 있다. 연주 중에 협연자의 바이올린 줄이 끊어지면 어떻게 할까? 옆에 있는 악장이 자신의 악기를 바로 건네준다. 악장은 다른 단원의 악기를 받아 연주를 계속한다. 일본의 고토 미도리(Goto Midori)는 바이올린 줄이 두 번이나 끊어졌지만 침착하게 연주를 마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때 나이가 15세였다니 놀라운 일이다. 만약 피아노 줄이 끊어지면? 이때는 연주를 중단하고 줄을 갈아 끼운 후 재개해야 한다. 이런 사고는 협연자에겐 정말 끔찍한 일이지만 관객들에겐 인생장면이 될 수도 있다.
35년간 공기업 근무를 마치고 작년 말 정년퇴직한 김관열 씨 가 은퇴준비 실전 지침서 『은준인(隱準人)-은퇴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는 책(출판사:와일드북)을 출간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이 책은 100세 시대를 맞이해 인생 2막의 은퇴시기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서로 작가는 은퇴준비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없는 현 상황을 인식해 2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바람직한 은퇴준비 모델을 스스로 개발해 습득된 경험을 토대로 저술한 책이다. 그는 은퇴 준비를 위해서는 4가지 영역에 대한 준비가 필요한데 이 ‘은퇴준비 4가지 영역’을 혼즐삶, 함즐삶, 끝도삶, 봉즐삶으로 구분했고 각 영역에 대한 준비를 각자에 맞는 아이템을 구축해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만이 은퇴생활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인생 2막의 ‘자기 핵심 브랜드(Self-core brand)’ 개발에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제1장 ‘준비 없는 은퇴는 성공할 수 없다’ 제2장 ‘은퇴, 나는 이렇게 준비했다’ 제3장 ‘인생 2막, 자기 핵심 브랜드(Self-core brand) 만들기’ 제4장 ‘나의 60에 만든 나의 실천형 버킷리스트’ 제5장 ‘은퇴시기에도 꼭 필요한 일정관리’로 나누어 썼다.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 책을 통해 다가오는 은퇴가 이제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설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 김관열은 1984년 한전에 입사하여 회사 분사에 따라 한수원 고리본부 대외협력처장직을 끝으로 2018년 12월 정년퇴직했다. 그는 오랜 대외 업무를 통해 지역 내에서는 홍보의 레전드로, 회사 내에서는 아이디어 뱅크로 통했다. 핀란드 헬싱키 경제경영대학원 MBA 학위를 취득한 그는 경영혁신에도 관심이 많아 ‘이노베이션 어게인(Innovation again)이라는 경영혁신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경영혁신인상’을 수상한 바 있고 ‘한수원 명예의 전당’에도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그는 약 2년간 이번 은퇴준비를 직접 실천하는 과정에서 양식조리기능사, 제빵기능사 등 2개의 국가기술자격증을 포함한 총 8개의 자격증과 합격증을 취득했다. 현재 그는 은퇴준비 전문작가, ART 코치(국내 1호) 은퇴준비 전문 강연가, 양식조리 홈셰프, 홈 베이커리 제빵 연구사, POP디자인 지도사, 캘리그라피 지도사, 아동요리 지도사, 블로거를 이용한 책쓰기 전도사, 국내 유명 지역 먹거리 밴드 운영자, 작사가, 이모티콘 제작 지망생, 랩 작사 및 시니어 래퍼 준비생, 은퇴준비 연구공간 ‘ART SPACE 19’ 주인장 등의 다양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그는 현재 우리는 ‘30-30-30 트리플 서티(Triple thirty)의 3단계 시대’에 살고 있는데 취준생(就準生)들이 2단계의 30년을 멋지게 살기 위해 1단계에서 열심히 준비하듯이, 은준인(隱準人)들도 마지막 3단계의 30년을 위해 2단계에서 구체적으로 은퇴준비가 잘 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품격 있는 은퇴생활’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경주예술의전당 알천미술관 어린이갤러리(4F)에서는 4월 2일부터 내년 2월 29일까지 ‘환경(eco)과 어린이(I)들이 함께(co)’란 뜻을 담은 특별기획전 ‘에코, 아이코’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를 위해 경주문화재단은 미디어, 회화, 설치, 조각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실력 있는 현대미술 작가들을 초청해 7가지 테마로 환경을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됐다. 갤러리는 작가의 심연으로 이끄는 통로와도 같다. 수만 가짓빛을 품으며 각기 다른 심상을 맺히게 한다. 첫 번째 공간에 임용현, 두 번째 공간에 이미주, 세 번째 공간에 오유경, 네 번째 공간에 엄아롱과 주혜령, 다섯 번째 공간에 이재호 작가의 작품으로 구성돼 있으며, 계단을 따라 전망대로 올라가면 마지막 공간에 이원기 작가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전시가 열리는 동안 오전 10시 30분과 오후 3시 두 차례에 걸쳐 전시설명프로그램인 ‘도슨트 투어’가 진행되며, ‘미술관 2교시’ ‘특별한 미술관’ ‘알천 어린이그리기대회’ 등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연계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입장료는 어른 5000원, 어린이와 청소년은 3000원이며, 경주시민은 할인된다. 그밖에 할인적용되는 사항들 은 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아림 큐레이터는 “에코, 아이코 전시는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의 감각기관을 동시에 자극하는 공감각적인 전시”라면서 “작가들의 상상력이 응집된 작품들로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동심의 세계로 이끌며 예술 속에 담긴 환경의 소중함, 자연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전시오픈에 앞서 3월 문화가 있는 날인 오는 27일 오후 5시부터 어린이갤러리에서는 유치원, 어린이집, 초등학교 미술 교사를 비롯 언론사, 일반인 등 100명을 대상으로 큐레이터 토크가 예정돼 있다. 전시와 관련행사문의는 알천미술관(054-748-7725)으로 하면 된다.
필자가 P고교 재학시절에 고무신 선생이 전근을 왔었다. 아침 조회 때 부임 인사차 조회대 위에 올라온 고무신 선생은 한 말로 가관이었다. 어젯밤 새도록 술을 마셨는지 얼굴은 부은 것 같기도 하고 검은 듯 붉은 듯 눈꺼풀은 좀처럼 떨어질 것 같지 않는 그런 표정이었다. 마치 잠자다가 뛰쳐나온 사람 같았다. 그러나 일단 단상에 올라서서 하는 부임 인사 하나는 요즈음 말로 끝내주었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웃다가 하나같이 감탄하며 그의 달변에 혀를 내돌린다. 청중을 휘어잡는 그의 말솜씨는 대단했었다. 그날 오후 넌닝 셔츠바람으로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굴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오늘 아침 부임 인사를 한 고무신 선생이었다.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 운동장에서 공을 굴리고 있었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학생들을 붙잡고 같이 공을 차자고 으름장을 놓고 했었다. 그는 그만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예의나 체면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부임하여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말본’ 시간이 되어 처음으로 우리 교실에 고무신 선생이 수업하러 왔었다. 그는 분필 한 개와 출석부만 달랑 들고, 뛰다시피 하여 교실에 들어 와서는 들어오자 말자 유치환 선생의 ‘울릉도’를 소리 높여 낭송했다. 어느 친구가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구근 수근 “저 선생님이 시인선생 이란다” 하면서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날 한 시간 수업은 여러 가지 잡담으로 일관했었다. 최현배 선생의 추종자인 그는 최현배 문법에 대해 이야기했고 대학에 강의했던 이야기, 그리고 경남 진주에 삼인 시집(설창수, 조진대, 이경순) 출판 기념회에 참가했는데, 출판기념회 석상에서 “이번 3인 시집 저자가 설창수 조진대 한 사람은 누꼬” 하고 ‘조진대’ 라는 말에 액센트를 주어 발음하다가 설창수 선생한테 호되게 당했다는 이야기, 심지어는 음담패설까지 동원하여 한 시간 수업을 끝냈다. -정민호(시인. 동리목월문학관장)
(사)동리목월기념사업회(회장 김봉환)에서 운영하는 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학장 손진은)은 3월 특강으로 문태준 시인을 초청해 오는 30일 동리목월문학관 영상실에서 열린 강의를 실시한다. 문태준 시인<인물사진>은 그동안 ‘가재미’ ‘맨발’ 등의 시집을 통해 한국 서정시의 적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지난 해 발표한 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로 목월 문학상의 영예를 안은바 있다. 최소의 사건과 그 사건을 다루는 최소의 언어로 된 시, 어린이와 같은 시심으로 시 쓰기가 요즘의 관심사라는 문 시인. 그는 “시는 삼라만상을 내 마음에 들어앉힐 때, 각자의 대상으로 존재하던 나와 사물이 서로에게 공명하면서, 숨결의 원초성과 시원에 가닿고자 하는 과정”이라면서 “공명과 조응을 위해서는 세계(사물)도 각각 자신의 가슴을 열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빛나는 시간들이 이제 점점 사라지고 있다”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여기에 빛나는 광휘를 부여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라고 덧붙였다. 문태준 시인은 이번 강연에서 ‘위대한 자연에게 조언을 구하라’는 주제로 자신이 생각하는 시에 대한 견해를 밝히며, 소동파와 신석정 시인, 릴케와 옥타비오 파스, 예이츠 같은 동서 시인들의 시에서 드러나는 입장을 바탕으로 시를 정의 할 예정이다. 동리목월기념사업회 측은 “문태준 시인의 시에 대한 쉽고도 풍성한 이야기가 펼쳐질 이번 특강에 지역과 인근의 시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호응과 참여를 부탁드린다”면서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랐다. 문태준 시인은 1970년 경북 김천출신으로 고려대 국문과와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으며 발표한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등이 있다.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대상, 서정시학 작품상, 목월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현재 시인이자 불교방송 PD로 활동하고 있다.
소리가 아닌 울림으로 기억되는 세계적인 음악가 양방언이 경주에 온다. 오는 27일 저녁 8시 경주예술의전당 화랑홀에서는 ‘양방언 EVOLUTION 2019’ 공연이 펼쳐진다. 이번 공연은 ‘2019 한수원과 함께하는 문화가있는날’ 세번째 시리즈로 (재)경주문화재단은 한국수력원자력(주)과 함께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마다 시민 특별 할인 티켓가로 양질의 공연 관람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번 공연은 양방언의 올해 첫 단독 공연으로, 더욱 진화한 무대로 관객들을 사로잡을 예정이다. 주요 출연진은 양방언 외 14인조 규모의 슈퍼 밴드로 카와구치 센리(드럼), 후루카와 노조미(기타), 사쿠라이 테츠오(베이스), 크리스토퍼 하디(퍼커션), 박세라(태평소), 권송희(보컬) 등 국내·외 최고의 뮤지션들로 구성된다. 양방언은 한국적 뉴에이지로 전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곡가 겸 연주자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폐막식의 음악감독을 역임하며 우리에게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음악가다. 그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 성룡 주연의 홍콩 영화 ‘썬더볼트’ 등을 포함한 CF와 다양한 영상매체의 음악감독으로 자신의 색을 보여주고 있다. 2005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양방언 EVOLUTION 2005’를 처음 선보인 이래로 꾸준히 ‘진화(evolution)’해온 양방언의 공연은 음악 인생의 대표작 ‘Frontier’ 및 최신작 ‘KBS 특집 다큐멘터리 아리랑로드’ 메인 테마곡의 연주도 이번 공연에 포함한다. 제주도 출신 아버지와 신의주 출신 어머니가 일본 도쿄에서 만나 도쿄에서 태어난 양방언. 5세 때부터 피아노 시작하고, 중학생 때부터 밴드활동을 했던 그는 의사출신 집안환경에 따라 음대에는 진학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재일 한국인의 삶을 경험한 아버지는 양방언 역시 의사가 되길 원했고, 마냥 음악이 좋았던 양방언은 음악을 하기 위해 의과대학을 진학했다. 결국 의사가 됐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음악. 그는 부모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출을 강행하며 프로 뮤지션의 길을 택하게 된다. 여러 아티스트들의 키보디스트로 음악 활동을 시작하며, 일본의 대중음악계의 신화적 존재인 ‘하마다 쇼고’의 프로듀서 및 키보디스트를 비롯, 해외 아티스트의 프로듀서, 작곡가, 뮤지션으로 폭넓은 활약을 이어오고 있는 양방언. 그는 “산 정상에 올라가면 눈 앞에 또 다른 정상이 보입니다. 음악인으로써 늘 새로운 산을 찾아 올라가듯 항상 노력하는 음악가이고 싶습니다”라며 늘 새로운 것을 도전하고 노력하는 음악가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재)경주문화재단 공연사업팀 손범호 대리는 “이번 공연은 클래식, 대중음악과는 또 다른 현대적 사운드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무대가 될 것”이라면서 “양방언 외 국내외 실력파 연주자들의 참여와 짜임새 있는 사운드 전달을 통해 감동이 배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공연의 티켓은 경주예술의전당 홈페이지(www.gjartcenter.kr), 티켓링크(www.ticketlink.co.kr)에서 예매가능하며, 정가는 R석 5만원, S석 4만원이다. 경주시민 및 경주 소재 학교 재학생 및 기업 직원은 전석 2만원에 관람할 수 있으며, 증명 확인증(주민등록증, 면허증, 사원증, 학생증 등)을 공연 당일 티켓 수령 시 지참해야 한다. 입장 가능 연령은 초등학생 이상이며 미취학 아동을 동행해야 할 시에는 사전에 아이누리장난감도서관의 시간제 보육실 이용을 신청하면 된다. 러닝타임 110분.
흥무초(교장 엄명자)는 지난 16일 3~6학년 학생들로 구성된 흥무학생오케스트라를 올해 첫선을 보였다. <사진> 7년째를 맞이한 흥무학생오케스트라는 학생들의 음악적 잠재력 및 음악문화 발전을 위해 창단됐다. 바이올린, 첼로, 플롯, 클라리넷, 타악기, 금관악기, 콘트라베이스 총 7개의 파트로 구성된 흥무학생오케스트라는 매주 토요일 악기별 연습 시간을 가지고 매주 수요일 합주 연습을 실시하고 있다. 첫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악기별로 교실에 모여 수준별로 악기를 접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올해 오케스트라 수업을 처음 듣는 학생들은 악기 다루는 방법, 보관 방법, 악기 잡는 자세와 같은 악기에 대한 기초를 익혔다.
22년간 성인 문해교육을 이끌어 온 경주행복학교(교장 강석근) 입학식과 개강식이 지난 18일 경주청년회의소 2층 강당에서 개최됐다. 경주행복학교 2019학년도 입학식 및 개강식에는 입학생과 승급생 100여명이 참석해 성황리에 개최됐다. 경주행복학교 사물놀이반의 식전공연으로 시작된 행사에는 학교현황보고, 입학생 선서, 교육장 및 경상북도의원의 축사, 입학생 교육수기 낭송 순으로 진행됐다. 강석근 교장은 “나이와 건강에 관계없이 배움에 대한 의지가 경주행복학교로 발걸음이 내딛게 했다”면서 “배움을 통해 목표한 바를 이룰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경주행복학교는 고 서영자 교장이 1994년 경주청년회의소 지하에 있는 한림학교 교실을 빌려 시작된 문해교육 기관이다. 1997년 9월 정식으로 경주한글학교로 개교했으며 2007년 경주행복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경주행복학교는 가난과 남녀차별로 배움의 기회를 놓친 어르신들이 한글을 깨우치기 위해 설립됐다.
청년무역전문가들이 세계로 향하고 있다. 동국대 경주캠퍼스 지역특화 청년무역전문가양성사업단(이하 GTEP사업단)은 지난 14일부터 17일까지 터키 이스탄불 투얍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제26회 터키 국제기계 전시회’와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린 ‘제52회 코스모프로프 볼로냐 전시회’에 각각 참가했다. 제26회 터키 국제기계 전시회는 유라시아 지역에서 개최되는 최대 규모의 산업기계 관련 전문전시회로서 산업자동화, 용접, 표면처리 기술, 물류, 금속가공 및 기계, 에너지 등 총 6개의 산업기계 전문 전시가 이루어지는 기계전시회이다. 제52회 코스모프로프 볼로냐 전시회는 화장품, 미용용품, 헤어제품, 미용기계, 네일케어 제품, 포장산업 등 미용과 관한 모든 품목을 한 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 최대규모의 미용전시회이다. 동국대 GTEP사업단은 ▲(주)삼우 비앤비 ▲(주)엔에스 웰 ▲(주)은성 ▲㈜태원정공 등과 함께 제26회 터키 국제기계 전시회에 참가해 이들 회사의 제품들을 바이어들에게 소개했다. 제52회 코스모프로프 볼로냐 전시회에서는 ㈜고센코리아의 화장품들을 바이어들에게 소개하고 직접 시연했다. 또한 기업의 수출계약 성사를 위해 수출 상담과 통역 지원, 사전 해외시장 조사부터 부스설치, 마케팅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중소기업의 해외진출과 해외 판로 개척을 지원했다. 정성훈 GTEP사업단장은 “동국대 GTEP사업단은 이론중심으로 이루어진 대학교육에 무역 실무지식과 현장체험을 접목해 기업현장의 요구에 부합하는 맞춤형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면서 “학생들이 직접 협력 기업의 발굴부터 마케팅 관련 업무 전 과정을 모두 스스로 수행하며 무역 전문가의 능력을 키워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도예가 지산 이종능 작가가 고향에서 여는 첫 전시회 ‘빛은 동방에서’가 오는 5월 21일부터 6월 9일까지 보문단지 내 황룡원 중도타워 건명홀로 결정됐다. <사진> 이번 전시회는 국내외적으로 큰 호응을 얻어온 이종능 작가의 역량이 고향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가늠해 본다는 의미와 지금까지 완숙한 기량으로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가 35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면모를 고향에 소개한다는 차원에서 관심이 모아지는 전시회가 될 전망이다. 토흔(土痕)으로 대별되는 이종능 작가의 도자기는 흙이 가진 질감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작품을 시작으로 유약과 불의 조화로 이뤄진 세련된 예술의 경지, 조각이나 소조를 연상하게 하는 변화와 ‘물방울 자기’로 알려진 다기류, 근년에 선보인 벽걸이형 도자기 등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문자 그대로 ‘일생을 건 기획전’이 될 전망이다. 이번 전시회 이름 ‘빛은 동방에서’는 이종능 작가 자신의 예술인생의 발현점인 경주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경주 천북면에서 태어나 경주고등학교를 다니며 청소년기를 보낸 이종능 작가는 ‘고향 경주의 산천과 역사문화환경은 평생의 예술적 자산이었다’고 회고한다. “고향에서 여는 첫 전시인 만큼 이전의 어느 전시회보다 설레고 긴장됩니다. 고향 분들에게 제 작품에 대해 어떤 평가를 받건 그 모두가 저를 북돋우는 자양분이자 뛰게 하는 채찍으로 삼을 예정입니다” 마침 이 시기는 봄기운이 완연할 때고 보문단지에 관광객도 많을 시기라 이종능 작가의 이번 전시회는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좋은 볼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경주 출신 송재용 단장이 이끄는 뉴코리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서울시 축제사업으로 선정됐다. ‘제2회 탑골공원 대음악축제’가 그 주인공. 탑골공원 연주는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양악대를 창설하고 연주회를 연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기획됐다. 올해 연주회는 9월 7일로 예정돼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서양 음악이 도입된 것은 1897년 5월.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민영환, 윤치호 등이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 후 4개월 간 유럽 각국을 둘러보고 양악대의 창설을 적극 상소해 1900년 칙령59호로 창단됐다. 양악대는 독일음악가 Franz Eckert(1852-1916)를 50여가지의 서양악기와 함께 초빙, 조선인들을 선발해 탑골공원에서 오전 이론, 오후 실기교육을 하며 키웠다. 첫 연주회는 4개월여 만인 1901년 9월 7일 고종황제즉위 40주년을 축하하는 만수성절에서 열렸고, 이때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와 함께 연주됐다. 황실양악대는 이후 100여명의 단원으로 늘어났고 탑골공원에서 매주 목요일 공연했고 인기에 힘입어 남산공원, 장충단공원에서도 음악회를 열었다. 뉴코리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바로 이런 역사적인 사건의 의미를 부활시켰다는 취지에서 서울특별시의 지속적인 후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송재용 단장은 “지금은 1년에 한 번 연주회를 열고 있으나 향후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때와 같이 매주 탑골공원에서 음악회를 열어 이곳을 휴식공간으로 삼는 노인들은 물론 인사동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을 포함,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변화시키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한편 이번 제2회 탑골공원 대음악축제는 각 도를 대표하는 전국의 초·중·고·일반인이 참여해 인사동 길을 퍼레이드로 전진한 후 합동연주를 할 계획이다. 경주에서 참가하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다.
남리(南里) 최영조 화백의 서울 인사아트센터 전시회(3월 13일~18일)를 찾는 사람들이 숨을 죽인다. 120호 넓은 화폭에 바다가 열렸고 안개 속에 섬이 떠 있고 그 앞으로 아웃 포커스 된 선명한 매화들이 하늘거린다. 어느 화폭에는 푸르디푸른 봄 하늘을 배경으로 진눈깨비가 내리고 드문드문 꽃송이에 눌린 가지가 느릿한 팔을 드리웠다. 거친 매화둥치에 한 송이 한 송이 핀 매화 끝에서 은근한 향기가 퍼져 나올 듯하다. 이렇게 서울 인사동에 ‘남리 최영조’ 다섯 글자가 불도장처럼 분명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캔버스에 아크릴이라는 소재의 혁명을 완연하게 몸에 익힌 최 화백의 그림은 장지에 먹을 쓸 때보다 훨씬 더 과감하고 거침없다. 특히 캔버스의 투박한 질감이 매화나무 특유의 거친 겉껍질을 한결 더 승화시킨다. 전시회 동안 전국에서 최영조 화백의 매화도를 보겠다고 달려 온 사람들과 우연히 들렀다 기운이 생동하는 매화를 보고 놀라는 사람들의 탄성이 전시장 이곳저곳에서 수시로 들려온다. 그들 중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감탄하며 존경심을 표한다. 그림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최 화백의 그림은 너무 쉽고 분명하게 다가서고 있었다. 때마침 근처 갤러리들에서 몇몇 매화도들도 전시되고 있었는데 남리의 매화도 때문에 그림이 그림다워지지 못했고 꽃이 꽃다워지지 못했다. 남리의 매화도를 본 사람의 눈에는 어떤 매화도건 전부 매화를 본 뜬 흉내로 비칠 뿐이다. 그런 최 화백의 그림에도 뜻밖의 벽이 있었다. “이 바닥에 누워 잠이라도 자면 영락없이 매화밭에서 자는 것 같을 거라···” 전시회 둘러보던 한 인사가 매화도에 반해 한 마디 한다. 최영조 화백이 웃으며 대답한다. “매화밭에서 자고 싶다는 생각은 자주 했는데 제 작품 밑에서 자보겠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습니다. 오늘 한 번 자 볼까요?” 어쩐 일인지 그 뒤로 이 말이 계속 머리를 맴돈다. 솔거가 그린 소나무에 속은 새들이 벽화를 들이받고 떨어져 죽었다 했는데 최 화백의 그림은 아직도 최 화백에게조차 그림으로만 존재한다는 현실이 불현듯 아쉬웠다. “아, 지나친 욕심이다···!” 속으로 스스로에게 나무랐다. 그 순간 만약 최 화백이 ‘저도 그래서 실제로 제 매화 밑에서 자보았습니다’라고 했다면 오히려 ‘이 환쟁이가 미쳤나?’ 소리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저는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뗐을 뿐입니다. 그림을 그릴수록 부족함이 더 느껴집니다” 말을 듣는 순간 최 화백에게 강하게 제동 걸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지나친 겸손이라고!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최영조 화백의 이 고백이야말로 그의 그림이 해를 거듭할수록 더 좋아지는 원초적인 힘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봄이 깨어나거나 깨어날 기색만 보이면 어김없이 탐매(探梅) 떠난다는 최 화백의 치열함이 지금 이토록 생생한 매화를 그려낸 원동력 아니었을까? 전시장을 빠져 나오는데 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명필에 그림까지도 잘 그리는 모 인사로부터 걸려온 전화다. 그 역시 남리의 그림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왔다며 탄복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특히 120호 대작 ‘겨울연밭’에서 최 화백의 깊은 내공을 보았다며 혀를 내둘렀다. 남리의 설명에 따르면 이 그림에 도사린 작법이 일반의 범주를 넘어서 있다. 먹을 다루는 방법과 장지를 다루는 방법이 달인 이상의 경지에 이르고서야 가능한 그림이다. “야-! 나는 그런 대단한 작가가 경주에 있는 줄 몰랐어··· 왜 내가 여태 최영조 화백을 몰랐을까?”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탓에 미처 고향의 예술인을 알지 못했다며 한탄하던 그가 한 마디 더 했다. “그런 작가는 경주에 있으면 안 돼.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기면 대번에 대성할 거야!!” 척박한 소비시장을 아쉬워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서울에서, 이 정도 남리의 그림이라면, 그가 조금만 꾸준히 자신의 이름과 그림을 알리고 다녔다면 이번 전시회의 그림이 죄다 주인을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지금 이대로라도 썩 나쁘지는 않다는 위안을 해 보았다. 아무리 늦은 때라도 남리 스스로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만만치 않은 전시회 비용 부담을 안고 작품이 팔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엄연한 미술계 현실을 알고도 과감히 암흑 같은 정글로 달려온 최 화백의 용기 하나만으로도 그의 긍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만함만으로 충분히 이번 전시회는 가치 있었다.
복면강도 안희제 기록은 잘못 와전된 이야기, 박상진과의 일화··· “백산이 거액의 독립자금이 필요해 최준을 찾아가 부탁했으나 너무 큰돈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백산은 다른 곳으로 돈을 구하러 떠났다. 며칠 후 최준의 집에 강도가 들어 칼을 들고 돈 2만원을 내라고 위협했다. 최준은 강도가 내민 백지수표에 2만원을 적은 뒤 사인했다. 그러자 강도가 복면을 벗어던졌다. 놀랍게도 복면 안에서 안희제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튿날 최준은 2만원을 결재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더러 있을 것이다.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 선생이 마지막 경주 최부자 문파(汶坡) 최준(崔浚 1984-1970)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복면강도로 가장해 최준을 떠본 끝에 자금을 얻어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안희제의 전기문에도 나와 있어서 많은 이들이 사실인 양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와전된 이야기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최준과 독립운동가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1884~1921) 의사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사촌 처남매부지간으로 독립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놓을 사람들이었고 그 이전에 서로의 진면목을 충분히 알고 의기투합한 사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까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안희제와 최준과의 관계가 그만큼 밀접했기 때문일 것이고 최준의 재력이 뒷받침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3.1운동과 함께 초기 독립운동의 가장 중요한 자금줄 역할을 담당한 백산무역주식회사 창립 100주년이다. 백산무역의 양대 산맥 최준과 안희제! 최준이 안희제를 처음 만난 것은 손병희 선생과 교유하며 천도교를 지원할 무렵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 최준은 박상진이 조직한 대한광복회 재정부장과 조선국권회복단 경주대표 역을 맡아 독립군의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소문난 재력가인 최준의 입장에서 지속적이고 과감하게 독립자금을 대기에는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큰돈을 마련하려면 땅이나 곡식을 팔아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일제의 감시망이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고심을 할 무렵 안희제가 최준을 찾아 교촌으로 왔다. 안희제는 허위 선생과 허위 선생의 제자인 박상진 의사 등과 함께 만주에서 활동하며 ‘기미육영회’라는 학교를 세우고 ‘중외신문’이라는 신문사도 운영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해 오고 있었다. 부산에서 몇 백 석 중농의 아들로 자란 안희제는 최준을 만나기 전 이미 부산에 ‘백산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차려 이곳을 통해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큰 부자가 아니라 언제나 자금에 시달리던 중 박상진을 통해 최준의 존재를 알게 된다. 안희제는 부산 구포에서 큰 부자로 이름 난 윤상은이란 사람과 함께 교촌으로 와 한 달 가깝게 최부자집에서 머물며 독립운동에 관한 세부적인 계획을 짠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이 바로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단체를 돕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자신이 꾸려오던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만들고 한편으로는 실제 무역을 해 일경의 눈을 속이고 은행에 신뢰를 쌓아가고, 사업규모가 커지게 되면 무역을 빙자, 현지에 물품대금을 더 보내거나 해외에서 물건 값을 떼였다거나 장사를 잘못해 밑지게 됐다는 등의 핑계로 자금을 빼서 독립운동하는 단체에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공식적인 주식 수는 위장,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실질적 견인차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설립될 당시 발행된 총 주식은 2만주였는데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안희제가 2500주, 최준이 1800주를 보유하고 있었고 안익상이 850주, 정상환이 640주, 이우식(李祐植)이 600주, 이종화(李鍾和)가 560주, 허걸(許杰)이 550주, 정재완(鄭在涴) 500주, 윤현태가 400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숫자상의 분배일 뿐, 실제로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당시 회사규모로서는 국내 최고의 수준인 자본금 100만원으로 설립됐는데 그 중에서 최준이 처음 4분의 1 비용인 25만원을 먼저 내놓으면서 회사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장본인이 됐다. 이들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에는 모두 182명의 주주들이 참여했는데 그 중에는 독립운동을 하려는 사람보다 실제로 경주최부자가 주도하는 회사에 투자해 돈을 벌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그만큼 철저하게 회사를 위장한 것이다. 주식 보유량도 위장술이다. 최준이 주식을 적게 보유했으면서도 백산무역의 대표 취체 및 지배인역을 한 것만 봐도 이 회사의 중심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주식을 적게 기록한 것 역시 최준이 백산무역에 전력을 다할 경우 일본경찰의 경계심이 커지게 될 것이기에 일부러 안희제보다 주식을 작게 보유한 것으로 위장한 것이다. 부산에 본사를 두고 대구와 원주에 지사를 둔 이 회사는 우리나라 특산품, 명주, 면포, 강포(마직물), 인삼 등을 해외로 수출하는 것을 명분으로 세워졌다. 그리고 초기에는 실제로 부지런히 사업을 전개해 일본경찰의 눈을 속였다. 사업을 제대로 해야 은행대출도 순조롭게 받을 수 있었고 그래야 일제의 의심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최대한 키워놓고 그 자금을 해외독립운동단체에 넘긴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수익을 남기기보다 해외 독립지사들에게 자금을 보내는데 목적이 있었던 이 회사는 사업이 궤도에 올라 일본의 감시망이 느슨해지면서 물품 대금을 떼이거나 수출품이 비적들에게 약탈당했다거나 거래에서 손해를 봤다는 등의 이유로 자본금이 잠식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본금이 잠식되자 식산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다시 그 대출마저 탕진하게 돼 급기야 1925년 회사경영부실로 은행으로부터 피소 당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자본금 100만원은 물론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까지 전부가 독립운동단체에 넘어갔고 경영부실로 인해 최준은 회사에서 쫓겨나게 된다. 최준은 이 일로 백산무역에서 완전히 물러나지만 안희제는 다시 회사에 복귀해 해외로 출장을 다니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백산무역주식회가 완전히 부도 난 것은 1928년. 그러나 주식회사인 백산무역의 파산은 곧바로 최준의 개인재산에 대한 조선식산은행의 압류로 이어졌다. 주식회사의 부도에 개인재산이 압류 당한 게 이해되지 않겠지만 그렇게 된 이유는 식산은행이 백산무역에 대출을 해줄 당시 기체결의서에 최준이 ‘개인입보’를 섰기 때문이다. 당시 돈을 대출 받은 곳이 주거래 은행인 조선식산은행이었고 부거래 은행이 경남합동은행이었다. 조선식산은행은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 1925년부터 새로운 대출건이 생길 때마다 최준에게 개인보증을 하라고 압박했다. 어차피 독립자금을 대는데 목적이 있었던 최준은 기꺼이 개인보증을 수락했고 이로써 식산은행에서 대출된 자금 역시 고스란히 독립운동 단체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최준이 개인보증으로 갚아야 할 돈의 총액은 130만엔, 쌀로 무려 3만석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3만석이면 단순히 지금의 가치로만 쳐도 100억원 가까운 거금이다. 한편 최준이 국내에서 백산무역회사의 실질적인 운영을 했다면 안희제는 일경과 마적단이 횡행하는 국경을 넘나들며 스스로 독립자금을 해외로 전달하는 운반책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던 것. 안희제는 일본경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본 여자들과 어울리며 장사를 했다. 일본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방탕한 모습도 보여주고 사업가로 위장하기 위해서는 씀씀이도 큰 것처럼 위장하거나 어떤 때는 피눈물도 없는 장사치로 보여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로서의 안희제는 고결한 양심의 소유자임이 증명된다. 해방 후 김구 선생이 최준을 만나 안희제가 전해 준 독립자금 명부를 보여주었는데 최준이 보낸 자금과 일치해 최준을 감동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최준은 당시의 어려운 여건 상 반쯤의 자금만 전해져도 성공적이라 당연하게 여겼는데 예상을 뛰어넘어 거의 대부분 전달됐던 것이다. 최준이 남쪽 안희제의 묘소가 있는 남쪽을 향해 곡하며 잘못을 빌었다고 전한다. 사형제 중 세 명이 독립운동, 독립운동에 얽힌 역사적 인물들도 경주최부자댁 들러··· 독립운동의 또 다른 산실!! 한편 최준의 형제들 역시 독립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셋째 동생 최완 선생이 상해임시정부 재정부장(현대의 재무관련 장관)으로 활동하다 일경에 의해 체포돼 순국했다. 당시 경주경찰서에서 최완을 유인하기 위해 일경이 최준의 필적을 위조해 어머니가 편찮다는 핑계로 최완을 국내에 불러들여 잡아갔을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다. 넷째 최순 선생은 백산무역 자금을 맡아 운영하는 상무이사 역할을 수행하며 자금 마련에 골몰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해방 후 친일경찰 출신 서영출이란 자의 사주에 의해 피살된다. 그에 비해 둘째 동생 최윤은 중추원 참의를 맡음으로써 친일행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부자댁 종손인 최염 선생은 집안의 누군가가 친일행위를 함으로써 독립운동에 쏠리는 이목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고 회고하며 비록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나 내놓고 친일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술회한다. 과객을 후히 대접하라는 최부자댁의 교훈처럼 마지막 경주최부자 최준 당대에는 구한말 이래 최준과 교유를 맺은 역사적 인물들도 즐비하다. 먼저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이 최준 선생의 유년기에 최부자댁에 장기간 은거해 있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최준이 19세 되던 해 경주최부자댁을 방문해 달포를 머물며 경주의 유생들과 교유를 나눈다. 당시 면암을 따라 온 인원이 200~300여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왕세자 부부도 최부자댁을 다녀갔다. 이들은 당시 발굴 중이던 신라고분에서 금관을 직접 꺼내기도 하는데 이 고분이 스웨덴의 한문식 가차이름인 서전의 ‘서’와 유물의 ‘봉’을 따 서봉총으로 불리기도 했다. 순종이 아들 의친왕 이강 공도 최부자댁에 머물며 최준에게 문파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손병희 선생, 인촌 김성수, 안희제 선생 등은 말할 필요도 없이 최부자댁을 자주 내왕했다. 경주최부자댁은 의병장 신돌석 장군도 최준, 최윤 형제와 함께 많은 일화를 남겼다. 지금의 교촌에 ‘요석궁’이라는 한정식 집 사랑채 대들보가 신돌석 장군이 혼자서 끌어올린 목재로 만들어졌다는 일화가 숨어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 독립운동 정신이 돋보였던 육당 최남선과 위당 정인보 선생 등이 경주최부자댁에서 지은 사마소 내 병촉헌에 머물며 경주역사서 ‘동경통지’를 편찬하기도 했다. 독립운동하다 망명했다가 해방 후 국방장관 등을 지낸 신성모 씨와 내무장관을 지낸 이효석 씨도 최부자댁 과객으로 오래 지냈다. 이 정도만으로도 독립운동사에서 경주최부자댁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하다. 3.1절 100주년과 동시에 백산무역주식회사 100주년 되는 2019년, 경주최부자댁과 문파선생의 삶을 회고해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천북농협은 김삼용 조합장이 959표 중 513표(53.5%)를 받아 3선에 성공했다. 김삼용 조합장은 “성원을 보내주신 조합원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면서 “이번 선거기간 조합원의 지역 사랑과 천북농협의 변화에 대한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지난 조합장 재임기간 오로지 천북농협의 발전을 위해 힘써온 점을 강조하며 “천북농협을 앞으로 4년 동안 더욱 분골쇄신해 작지만 경쟁력 있고, 단단한 농협으로 만들어 조합원들에게 보답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김 조합장은 “천북농협이 직면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내실을 다지고 성장세를 공고하는 공약들을 실현하겠다”고 말했다. -공약 실천계획은? 무엇보다 어려운 환경에서의 성장과 농협의 주인인 조합원들이 더욱 만족하며 농협사업을 활용하실 수 있게 하고자합니다. 첫째, 로컬푸드직매장의 지속성장을 위해 출하 농업인 포장관련 지원 사업을 확대하고 가칭 로컬푸드 레스토랑을 설치해 직매장의 매출을 증대시키는 등 농가소득 신장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둘째, 들녘공동경영체 사업을 새로운 역점사업으로 추진해 쌀 대체작물 재배환경을 조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농산물 생산과 가공·유통·서비스를 융합하는 농업의 6차산업 환경을 천북에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셋째, 현재 경제사업장 부지로 본점을 신축 이전해 시설의 현대화를 통한 고객 이용만족도를 올리고 조합원 휴게공간을 제공하는 동시에 다양한 문화·취미활동을 즐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조합원들에게 한마디 농협은 조합원 여러분들이 주인이고, 여러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당장 신용사업으로 얼마의 손익을 내느냐를 걱정하기 보다는 조합원에게 필요한 사업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어려운 영농환경을 어떤 사업의 지원을 통해 개선해야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로써 농업인 조합원 여러분을 위한 농협을 만들고, 열악한 농촌경제 속에서도 고군분투하시는 조합원들을 도와 농가소득 5000만원 시대를 만드는 것에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농협으로 성장시켜 나가겠습니다. 조합원들께서는 농협을 믿고 농협사업을 전이용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경주축협은 지역 조합 중에서 유일하게 무투표로 조합장 당선자를 배출했다. 이번에 당선된 하상욱 조합장은 “믿고 성원해 주신 조합원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조합원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조합원 중심의 경주축산업협동조합을 만들어 성원에 보답드리겠다”고 밝혔다. 그는 “신용사업장, 경제사업장, 상임이사, 축산인 등을 하면서 경험한 모든 것을 바탕으로 조합원 이익증대, 권리, 조합이용의 편리함 등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공약 실천계획은? 첫째, 축산지원단을 신설하겠습니다. 축산지원단을 활용해 축산컨설팅, 거세, 육질진단, 가축시장 지원, 방역 등은 물론 축산현장에 필요한 사항을 통합관리하고 금융·세무·행정, 그리고 현장의 민원까지 지원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천년한우 브랜드 및 축산유통사업을 더욱 활성화해 축산농가 소득증대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먼저 다양한 판매처를 확보하고 공판장 출하보다 유리하게 정산될 수 있도록 해 조합원님의 거세우는 전량 천년한우 브랜드로 출하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HACCP, 친환경 인준을 득한 농가는 고급화를 통해 프리미엄 천년한우로 발전시키겠습니다. 특히 일정기준을 갖춘 우수한 품질의 암소도 브랜드화해 수취가격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겠습니다. 셋째, 사료공급 체계를 재정비 하겠습니다. 조합원님 의견수렴, 내부 논의 등을 거쳐 효율적인 TMF 및 배합사료 공급체계를 확립해 공급에 불편함이 없고, 생산 원가절감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넷째, 신용사업의 수익을 극대화 하겠습니다. 상임이사의 책임하에 합리적인 방향 제시, 목표 설정, 철저한 관리로 수익을 극대화해 조합원님에게 배분하는 동시에 조합의 기초를 튼튼하게 만들겠습니다. 또한 조합원님의 예금·대출의 실질적인 우대 대책을 마련하겠습니다. 다섯째, 조합원님의 본점 이용 편의를 위해 이전을 목표로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여섯째, 환경문제로 발생되는 민원 등 현장에서 느껴지는 어려움인 축산분뇨 처리를 위해 시설과 시스템 구축이 실현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합원들에게 한마디 축산현장에는 무허가축사 적법화 등 당면문제들이 있지만 조합원님과 축협 임직원이 힘을 하나로 모은다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주어진 책무에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리며, 모든 조합원님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함이 가득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포석정 주변에 위치한 포석계 포석곡 1사지가 불법 투기된 쓰레기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곳은 포석정 주변의 가정집에 있던 석조유구들을 포석정 인근으로 옮겨 보관·보존을 하고 있는 장소다. 포석정 주차장 좌측 골목으로 들어가면 바로 있는 이곳은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접근을 금지한다는 안내표지판만 있을 뿐 사적지 주변은 관리되지 않은 잡초와 방치된 쓰레기로 인해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쓰레기는 연탄재와 생활쓰레기가 대부분이며 현장에는 쓰레기를 태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적지 주변에는 관리되지 않은 잡초가 많아 쓰레기를 태우며 발생한 불씨가 큰불로 번질 위험도 있지만 지자체의 관리가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주말 포석정을 찾은 한 관광객은 “신라문화 중에서도 특히 건물 양식, 불교문화에 관심이 많아 경주를 자주 찾는다. 포석정을 들렀다 우연히 포석정 주변 마을을 둘러보던 중 포석곡 1사지를 발견했다. 연탄재와 쓰레기가 많아 지나칠뻔 했다”며 “우연히 안내표지판을 보지 않았다면 석조유물이라는 것을 분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안내표지판에는 소중한 문화유산의 보호를 위한다는 내용과 은닉과 훼손시 처벌한다는 내용이 있지만 정작 관리는 소홀하다니, 말뿐인 문화유산인 것 같다”고 말했다. 문제는 마을주민들도 이곳에서 쓰레기를 버리고, 태우는 것이 큰 문제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 기자가 현장을 찾은 지난 15일에도 쓰레기를 버리는 마을주민들이 있었다. 마을주민은 “불이 안 나게 조심히 태우면 된다”며 기자가 지켜보는 중에도 비닐포대를 태우고 있었다. 경주시 관계자는 “쓰레기가 방치되어 있는 몰랐다. 현장을 확인 후 빨리 조치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