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1799~1870)은 경주 암곡동 명곡리[明谷里.부친 이정열(李鼎說)·모친 영양남씨 치암(癡菴) 남경희(南景羲)의 따님]출신으로 1814년 광주이씨 이정운(李挺運)의 따님과 혼인해 이재희(李在喜)·이재기(李在祺)를 낳았다. 입재 정종로의 문인으로, 조부 이헌석(李憲錫)과 부친의 가학을 이어받았고, 외조부 치암선생을 통해 학문을 이뤘으며, 응와 이원조·동림 류치호·성재 허전·윤종호 등과 교유하였다. 1831년(순조31)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용궁현감·한성판관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회재선생의 학문을 추종하고 합천 이연서원(伊淵書院)의 참석을 통해 김굉필과 정여창의 학문적 도통연원을 계승하였고, 달성 도동서원(道東書院)의 「문루중수상량문(門樓重修上樑文)」을 지었다. 게다가 지역학문의 굳건한 입지를 위해 이의윤의 「무첨당집(無忝堂集)」·남경희의 「치암집」·류심춘의 「강고집(江皐集)」·이언괄의 「농재집(聾齋集)」 등을 교정하였고, 육영재(育英齋)에서 「근사록」·「심경」 등을 강의하였다. 42세에 금오봉 동쪽자락에 한적하게 공부하기 위한 태초암(太初菴)을 지었고, 이후에 정자 현판을 걸었다. 그곳에서 상서장(上書庄)·탄금대(彈琴臺)·매월사(梅月祠)·만고창(萬古倉)·문천도(蚊川渡)·불탱암(佛幀巖)·해목령(蟹目嶺)·만호봉(㻴瑚峯) 등 「태초암팔영(太初菴八詠)」을 통해 금오산의 아름다움을 읊조렸다. 『정헌집』「영광대기」에 의하면 경주의 월정교(月精橋)를 중국 낙양의 천진교(天津橋)와 함경남도 함흥의 만세교(萬世橋)에 견주며 월정교의 가치와 위상을 드높였다. 천진교는 수나라 양제 때 만든 부교(浮橋)이고, 성천강을 가로지르는 만세교와 낙민루(樂民樓)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그런데 부교는 배를 이용해 임시로 만든 다리가 아니라, 교각의 하단부가 물살을 가르기 위한 유선형 배모양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당시 월정교 역시 다리의 기둥 하단부는 부교의 형상으로 설명한다. 이는 현재 월정교의 원형에 대한 논란이 팽배한 상황에 관심을 가질 내용이며, 고증에 입각한 문헌조사가 추가로 이뤄지길 희망하는 바이다. 영광대(影光臺)는 경주선비들이 무너진 월정교 석재를 운반해 대를 쌓은 것으로, 월정교가 있는 교촌마을 물가 쪽에 영귀정(詠歸亭) 정자가 있었다. 영귀정은 문정(汶亭)·문양정(汶陽亭)·병촉헌(炳燭軒)·풍영정(風詠亭) 등 다양하게 불렸고, 이후 생원과 진사들의 강학처 사마소(司馬所)로 활용되었다. 1984년 월성지구 정화사업으로 월정교 북쪽 끝에 있던 사마소를 지금의 교촌마을 서편으로 옮기면서 ‘영광대’ 각석을 사마소 동쪽 담벼락에 옮기고 해설판을 세웠는데, 주자의 「관서유감(觀書有感)」“반 이랑 네모진 못에 거울 하나가 열렸으니,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네(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에서 의미를 빌렸다. 이후 1999년 최현택선생께서 사마소 이건기(移建記)를 짓고, 그 내력에 대해 소상히 적었다.영광대기 정자의 남쪽에 오래전 다리가 있었으니, 『동경지』에 월정교라 하였다. 생각건대 서라벌이 성대했을 때 이곳은 낙양의 천진교와 함주의 만세교와 더불어 갑을을 겨뤘다. 다리가 부서진 것이 언제인지 모르고, 무너지고 남은 다릿돌이 수면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조부께서 매번 그 돌을 가져다가 대(臺)에 두고 정자의 승람을 돕고자 하였으나, 힘이 부족해 단념한 지가 오래되었다. 전후의 경주부윤들이 이 정자를 별장으로 여겼고, 대부분 정자를 찾은 벼슬아치들과 함께 계사(禊事)를 맺고, 간간이 재물과 곡식을 내어 그 운영을 도왔으며, 해마다 내는 세금은 물자가 넉넉해지길 기다렸다가 지출하였다. 금년(1855) 가을에 비로소 일을 시작해 7일 만에 대를 완성하였다. 높이는 한 장(丈)이 좀 못되고, 너비는 높이의 세배, 길이는 너비의 세배나 되었다. 땅을 높였지만 정자를 짓지는 않았고, 서늘함을 즐기기에 좋았다. … 영광대의 거리는 백 걸음이 안 되고, 얕아서 옷을 걷고 건넌 후에야 다다른다. 때로는 서재를 배처럼 띄운 듯, 뱃전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듯, 그리 깊지 않은 사이에 은연히 흐르는 물줄기의 조용한 경치의 즐거움이 있으니, 영광대라 이름한 것은 그러한 승경을 택한 것이다. 영광대 아래 흐르는 모래는 동경팔괴의 하나이고, 모래는 평평하고 물은 얕고, 물이 세차고 급히 흐르지 않았다. 매년 가을철 맑은 물이 이르면 배가 양쪽 물가에 가득하고 넘실넘실 흘러 평평하기가 거울면 같았다… 이 돌이 월정교의 다리가 되었다가, 영광대가 되었다가 백년 천년이 지나고 또 잃어버려 뉘집의 진석(鎭石)이 되었는지 모른다. … 시종 그 일을 주관하는 자는 집안사람 이능섭(李能燮)과 동생 이호상(李琥祥)이 함께하였다.
글=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