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우중골에 김유신(金庾信) 전설이 서린 단석산(斷石山)이 있다. 산 능선에 4개의 바위가 둘러싸인 천연굴 상인암(上人巖:탱바위)이 있고, 바위굴 속에 불상을 새기고 그 위에 지붕을 덮은 신선사(神仙寺:단석사)가 자리한다. 화랑들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고,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큰 뜻을 품고 무술을 연마하며 바위를 칼로 베었다고 전한다.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오악(新羅五岳)은 동쪽 토함산, 서쪽 선도산, 남쪽 함월산, 북쪽 소금강산 그리고 단석산은 신라의 중악(中嶽)으로 가장 우뚝하고, 단석산에서 발원한 물은 동남쪽으로 흘러 울산부의 남쪽을 지나 동해바다로 들어가는 태화강의 근원이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21권,「경상도·경주부」에 의하면, “단석산은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하며,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전하기를, “신라의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神劍)을 구해 월생산 석굴 속에 숨어 들어가 검술(劍術)을 수련하였다. 칼로 큰 돌들을 베어서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1855년(철종6) 울산부사(蔚山府使)로 임명된 학음(鶴陰) 심원열(沈遠悅,1792~1866)은 울산 및 경주 여러 지역을 두루 탐방하고 「계림옥적기(鷄林玉笛記)」·「처용무서(處容舞序)」·「경주고도기(慶州古都記)」 등 많은 시문을 남겼다. 학음은 노론 시파의 선봉 은파(恩坡) 심낙수(沈樂洙,1739~1779)의 손자로, 문장이 빼어났으며, 주로 시파계열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안타깝게도 벽파에 의한 조부의 삭탈관직으로 가세가 기울어 고단한 삶을 살았고, 44세(1835년) 늦은 나이에 선공감 감역을 시작으로 경조부주부(京兆府主簿)·청양현감(靑陽縣監)·광흥창수(廣興倉守)·고양군수(高陽郡守)·공주판관(公州判官) 등을 역임하였지만 유배도 수차례 당하였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저서 『학음산고(鶴陰散稿)』는 소중한 지역학 연구자료로 평가받는다. 학음은 울산부사로 있을 때 일생산(단석산)을 유람하고 「일생산기(日生山記)」를 지었는데, 일생산은 월생산과 동일한 공간으로 보인다. 글을 통해 마검굴(磨劍窟)에서 10년간 수도한 효험과 비법 그리고 삼국통일 위업의 연관성을 언급하였고, 한편으로 김유신의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조선의 문인들에게 단석산은 김유신과 연관되어 망국의 신라가 아닌 전성기 통일신라의 대업을 이룬 김유신에 대한 칭송의 문장이 주를 이룬다. 경주문인으로는 동곡(東谷) 이공상(李公祥,1787~1856)과 약남(藥南) 이헌락(李憲洛,1718~1791) 등이 단석산의 장관을 글로 남겼다. 일생산기(日生山記) 경주부 서쪽 20리에 ‘일생산’이 있다. 일생산은 높은 봉우리 위에 있어서 편평한 들판이 10리쯤 된다. 그 위에는 천인탑(千人塔)이 있고, 그 아래에는 단석암(斷石庵)이 있으며, 신라장군 김유신이 기도하던 곳이다. 또 마검굴(磨劒窟)이 있는데, 수천 년이 지나도 오히려 그대로이다. 김장군은 단석암에 있으며 목욕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하늘에 기도하며, “적국이 무도(無道)하여 우리 땅을 침범하여 소란케 하니, 주제넘게 일개의 작은 신하가 맹세컨대 화란을 깨끗이 없앨 것입니다. 오직 천신께서 강림하여 살피고 수단을 빌려주시어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한 노인이 와서 “이곳에는 독충과 맹수가 많은데, 귀소년(貴少年)이 혼자 어찌 이곳에 있는가?”라 하였다. 김장군은 재배하며 방술(方術)을 알려주기를 간절히 청하였고, 노인은 비결을 주며 “삼가 망령되이 전하지 말고, 의롭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라 하였다. 말을 마치자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김장군은 고구려·백제·말갈족이 번갈아 가며 우리 땅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평정할 뜻이 있었다. 밤마다 병서를 읽어 군대의 일에 밝아졌으니, 노인이 준 책 덕분이요, 또 칼로 큰 돌을 자른 것은 무용(武勇)을 익힌 덕분이었다. 돌이 잘린 자취가 지금도 그곳에 남아있으니, 사람들이 마검굴이라 불렀다. … 일찍이 듣기에, 김장군의 묘소 앞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는데, 이곳을 지나는 사람 가운데 말에서 내리지 않는 자는 말의 다리가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 모두 신기하게 여겼고, 김장군의 묘소를 지나는 사람들은 감히 말을 타지 못하고 내려서 지나갔다. 훗날 어떤 과객이 타던 말을 죽여 그 피를 김장군의 묘소에 뿌리고 나서부터 신기한 현상이 없어졌으니, 귀신은 말의 피를 가장 꺼린다고 하였다. 나 역시 김장군의 묘소를 지나며 두려운 마음이 없지 않았고, 하마비의 자획이 아직도 마멸되지 않았다. 김장군의 자손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떠났으며, 미약하여 떨치지 못하고 일반 백성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황제나 요순의 성인도 그 후예들은 오히려 씨족의 자손들을 보호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김장군의 후손은 오죽하겠는가? 김장군을 생각하니 매우 애석하였다. … 내(심원열)가 울산부에 있을 때 진양목(晉陽牧:진주)에 거주하는 김장군의 후손들이 뜰에 와서 하소연하며 군안(軍案)에서 제외시켜줄 것을 청하는 사람이 10명 가운데 8, 9명이었다. 나는 김장군의 일에 감탄하여 아울러 군역을 덜어주고, 양반 가문을 지키도록 하였다.
지난 해 경주 흥무대왕릉을 안내해 본란에 올랐던 정윤영 선생이 최근 곤줄박이 가족과의 아주 특별한 만남으로 페이스북 감성을 폭발시켰다. 정윤영 선생이 곤줄박이 부부를 만난 것은 지난 4월 29일. 그러다 지난 5월 13일 정원 살구나무에 올려 둔 새집 구멍에 손녀가 손을 쑥 밀어넣으면서부터 그 집에 곤줄박이 부부가 포란 중인 것을 알았다. 몇 년 전에 쇠박새 부부가 알을 까고 이소한 적 있는 기록적인 새집이었다. 이때부터 정윤영 선생의 관찰이 페북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포란 중이던 곤줄박이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날아든 것은 5월 23일. 부부의 보호아래 다섯 마리의 새끼가 입 딱딱 벌리며 모이 받아먹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이와 함께 고양이 한 마리가 새집을 노리는 모습이 포착되어 패친들을 긴장에 빠뜨렸다. 이에 정윤영 선생은 판자로 고양이가 함부로 못 뛰어들도록 벽을 설치하며 새들의 안녕을 빌었다. 하지만 그런 바람도 잠깐 뿐 이틀 후인 25일에 절망적인 소식이 올라왔다. 고양이에게 잡혀 먹힌 모양인지 어미새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 다행히 새집 통로가 좁아 새끼 새들까지 해코지 할 수는 없었던 듯. 이에 본인이 직접 기를 것인지 자연의 선택에 맡길 것인지를 두고 난색을 표하던 정윤영 선생은 기어코 스스로 육추의 길을 떠맡았다. 마음의 결정을 하고 둥지를 내렸을 때는 이미 새끼 두 마리는 죽고 세 마리가 살아있었다. 이때부터 정윤영 선생은 그물로 육추장을 만들고 돼지고기 다진 것과 삶은 달걀, 파리를 잡아 먹이기도 하다가 결국 새들이 즐겨먹은 먹이인 밀웜을 사 사육에 정성을 기울인다. 그러나 이 와중에 또 한 마리가 죽고 곤이와 박이라 이름 지어진 나머지 두 마리가 끝까지 생존, 결국 새집을 떠났다. 이때까지 정윤영 선생의 육추일기는 350~850여 개의 ‘좋아요’가 달리는 등 그야말로 문전성시였고 정선생과 두 마리 곤줄박이를 응원하는 댓글들도 무수하게 이어졌다. 육추일기의 재미는 중간에 고양이에 대한 경계와 정선생 집 반려견 봄이의 경계로 긴장감도 충만했다. 그럴수록 새들을 향한 정성은 깊어만 갔고! 이런 정성과 응원의 결과, 두 마리 곤줄박이는 정윤영 선생을 알아보고 손가락과 머리위에 앉는 등 부부와 특별한 교감을 나누며 성장했고 마침내 6월 6일 열흘 여의 지극한 정성 끝에 결국 새장을 떠났다. 날아 간 새들을 향한 정선생의 바람은 ‘다시 보고 싶다’와 ‘그래도 다시 오지 말라’는 이중성으로 표현됐다. 그리고 하루 만인 6월 7일 다시 날아와 자신의 손가락에 내려앉은 곤이와 뜨거운 재회를 기록하는 것으로 육추일기가 일단락됐다. 긴 여정을 짧게 요약하느라 감동의 순간들이 제대로 옮겨지지 못했지만 곤이와 박이의 쩨쩨거리는 울림이 긴 여운을 안고 뇌리에 남는다. 특히 곤이가 다시 돌아와 손에 내려앉은 것에 대한 페이스부커들의 찬사는 감동 그 자체다. 사람과 자연의 교감, 자신을 아끼는 사람에 대한 새의 친밀감은 어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십여 일 간 곤줄박이 아버지, 아니 엄마로 산 정윤영 선생의 바람대로 곤이와 박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좋으니 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살기 바란다.
경주사람들, 배불리 먹고 누울 자리 등 따시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는 해학으로 입과 귀에 익은 말, “조천(교촌) 최부자 눈 알(아래)로 보인다” 이렇듯 멀지 않는 이웃인 최씨가다. 신라궁궐터 옆 마을, 남천을 내다보는 천혜의 환경에 둘러싸여있다. 양 사방 유서 깊은 자취로 더욱더 돋보이는 조선시대 전형적인 선비가옥이다. 과객들 붐비던 그 시절 연상되듯 고색창연한 고택 주위로 관광객 발길 여전하다. 긴 세월 양반집의 원형을 보존하고 명부의 격조와 품격을 갖춘 역사의 산실이다. 원래는 99칸이었으나 1972년 사랑채가 불에 타 소실되었다. 2006년 큰 사랑채는 복원되었고, 작은 사랑채는 주춧돌만 남아 있다. 경주 내남면에서 터를 이루다가 ‘최언경’(1743~1804) 대에 교동으로 이주해 터전을 굳혔다. 건축당시 향교 유림들의 반대가 심했다. 그 뜻을 수용하여 향교보다 2단계 낮게 터를 깎아내고 집을 지었다. 소통과 화합으로 지역민과 더불어 나아가는 삶의 겸손을 실감하는 대목이다. 1700년대 건립 된 조선한옥의 솟을대문은 그 당시 향교유림들의 반대에 부딪쳐 원하는 취지에 맞게 지어졌다. 기존의 솟을대문 구조와는 달리 화려하지 않으며 평범함이 수수한 솟을대문 형식이다. 1970년대 필자 학창시절 서부리에서 노서동으로 굵은 대들보 한옥지어 이사했다. 아버지의 삼천리호자전거 바빴던 오남매 크던 집, 골기와 솟을대문 형식이었다. 문간채방 구조배치를 빼고 보면 최씨고택 솟을대문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최근에 복원한 최씨고택 큰 사랑채는 명문집안의 역사를 대물림 하고 있다.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 면암 최익현, 그리고 방문당시 스웨덴의 왕세자였던 구스타프 국왕, 의친왕 이강공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손님들이 머물렀다. 작은 사랑채는 1972년 11월, 불에 탄 흔적들로 주춧돌만 흩어져 있다. 그 당시 화재뉴스를 듣고 이모가 거쳐하던 마을이라 놀란 가슴 궁금증이 컸다. 겨울방학에서야 비로소 현장을 둘러보고 안타까움을 쓸어내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안채는 남향의 ㅁ자 형태로 지어진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생활공간이다. 붉은 벽돌 둘러친 마당 장독대로 큼직한 항아리들 장맛솜씨 담고 있는 듯하다. 행랑마당, 사랑마당, 안마당, 고방마당, 작업마당, 사당마당 등 6개 마당을 중심으로 각 건물이 배치되었다고 보면 된다. 고방마당 동편엔 정면 5칸, 측면 2칸, 현존하는 전통 한옥의 곳간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건물이 있다. 쌀700~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다. 국가와 민족을 살피는 애민정신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후하게 대접했다. 흉년이면 이웃들에게 나눔과 배품의 문을 활짝 열었던 곳간이다. 그 곳간에서,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자료가 발견되었다. 편지와 공문서, 명함, 서책 등 수 만 가지 경주의 보물급 문서들이다. 주요한 기록유산과 학술적 문서들이 큰 궤짝 세 개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다. 『동경통지』는 1933년 ‘최 준’이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정인보’ ‘최남선’의 자문을 받아 집필했다. 목판본 14권 7책 중, 영남대학에 기증하고 남은 5권의 초고 원고도 나왔다. 독립운동관련자료, 경주국채보상운동문서 등, 보존된 무더기 귀중한 문서자료 발견은 최씨가의 명성을 더 실감하게 하는 세간 사람들의 관심사다. 발견문서 중 필자를 포함한 친정오빠, 남동생 4남1녀 모교인 <월성초등> 기사를 보면, 『경주시사』 제7편 교육 편에 경주월성초등학교연혁이 1927년이다. 개교식 당일 연설문이 수록돼 있는 새로운 문서기록에 ‘1911년 월성여학교 (월성초등학교전신) 설립자 ’최 준’이 경주군청 주사(오경수 전)에게 보낸 개교식 안내초청장’이 발견됐다. 16년을 앞당기는 월성초등학교의 설립자로 ‘최 준’선생을 다시 재조명돼야할 과제로 남았다. 계림·월성·황남, 경주시내권 초등학교 설립일자를 보면, 계림초등 1907년. 이현세 ‘공포의 외인구단’ 만화책에 등장하는 황남초등학교는 1940년이다. 우연한 기회에 창고를 열어 경주 최부잣집 정신의 보고(寶庫) 문서를 대거 발견한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이사는 “위대한 건축물이나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전국 어디서나 많이 볼 수 있지만, 지난해(2019년 여름) 창고에서 발견한 기록유산들은 진정한 최부잣집의 정신적 보물입니다. 조선후기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아직 해제되지 않는 22~33년 전의 서류와 귀중한 문서만 해도 만 점이 넘습니다. 최부잣집을 더 알려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유물로서 이런 소중한 자료인 경주 자산을 제대로 조명해야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우선은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해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라고 소명을 토로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임시정부 땐 주석 김구에게 군자금을 보냈다. 광복 후에는 인재양성을 위해 계림대학과, 전 재산을 기증해 현 영남대학을 설립했다. 300년 최부잣집 부의 명성은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한 나눔의 봉사정신이다.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는 삶의 철학으로 민족운동의 뜻을 펼친 최씨가, 훌륭한 가문의 영광이 실감된다.
경주시 궁도협회(회장 성창용)는 지난 5일 양동초와 국궁교육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이번 업무협약은 올해 궁도협회에서 추진 중인 호림정과 궁도에 대해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국궁교실 사업의 일환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리 전통 문화를 익히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궁도협회는 매주 월요일 양동초 전교생 52명을 대상으로 전통사법, 활쏘기, 활터 예절 등을 가르치게 된다. 성창용 회장은 “지역의 자라나는 아이들이 궁도를 배움으로써 심신단련을 통해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다”며 “육체적 정신적 건강은 물론 우리 전통문화를 익히고 배우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양동초에서 처음 실시하는 국궁교실이 경북도 모든 학교에 전파되는 계기가 돼 청소년 활쏘기 문화가 정착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활쏘기는 1928년 전국체육대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고 지난 4월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예정했다. 특히 활쏘기에서 배울 수 있는 궁도구계훈은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인애로써 덕을 베풀며 성실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어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보건복지부가 오는 30일까지 노인맞춤돌봄서비스 집중 신청기간을 운영한다. 올해 1월부터 시행된 노인맞춤돌봄서비스는 노인의 욕구에 따라 맞춤형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기존 노인돌봄서비스를 통합·개편한 것으로 현재 약 30만 명의 어르신이 전국 647개 수행기관에서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지역은 경주시종합사회복지관, 공영재가노인지원서비스센터, 하나노인복지센터, 경주노인복지센터, 참사랑노인복지센터에서 서비스를 제공한다. 노인맞춤돌봄서비스를 이용하고자 하는 어르신은 각 읍·면·동 주민센터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신청자격은 만 65세 이상 국민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또는 기초연금 수급자로서 유사중복사업 자격에 해당하지 않는 자로 독거노인뿐만 아니라 고령부부, 조손가정도 신청할 수 있다. 직접 방문이 어려운 경우에는 읍·면·동 주민센터에 전화, 우편 또는 팩스로도 신청이 가능하며, 가족 등이 위임장 등 관련 서류를 준비해 대리 신청하는 것도 가능하다. 노인맞춤돌봄서비스 안내, 신청 방법, 신청 서류 등 자세한 정보는 관할 읍·면·동 주민센터, 보건복지상담센터(국번 없이 129) 또는 독거노인종합지원센터(1661-2129)에 문의하면 된다.
대한노인회 경주시지회(회장 노창수)는 지난달 27과 28일 양일간 노인재능나눔사업 참여자 80명을 대상으로 올해 노인재능나눔 사업 참여자 사전교육을 실시했다. <사진> 노인재능나눔사업은 노인의 사회참여 확대와 재능 나눔, 자원봉사, 기부 등 노인들의 사회참여 관심과 욕구가 증가하면서 재능을 보유한 노인에게 재능 나눔 활동 기회를 부여하는 사업이다. 사회 참여를 통해 성취감과 자기만족을 느낄 수 있고, 건강 및 대인관계도 개선되는 등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다. 사업 진행은 지역사회 내 초록노인복지센터, 경로당, 아란지역아동센터 등에서 진행되며 사업비는 대한노인회 노인지원재단에서 지원된다. 이날 교육은 노인재능나눔 활동안내와 노인학대 예방 등 안전교육이 진행됐으며 노인들에게 코로나 19 생활수칙과 유증상시 및 확진자 접촉시의 대응 등을 교육했다. 교육장입구에 손소독제, 비접촉체온계, 1회용장갑을 각각 비치했고 교육 전과 후에는 소독제로 문손잡이, 난간, 책상 등 자주 접촉하는 표면을 소독했으며 교육 중에는 전원이 마스크를 쓰도록 하고 교육장 입장 시 체온을 측정하는 등 코로나19 감염대비 및 예방, 확산방지에 철저히 대비했다. 재능나눔 담당자는 “재능나눔활동 사업기간을 2월부터 10월까지 계획했으나 코로나19로 5월 말부터 12월까지로 변경됐다. 참여자들은 학습지도, 문화예술 재능나눔으로 구분하여 활동하며 참여자는 1일 3시간, 월4회/10시간. 활동일지는 매월 말일까지 제출해야 한다”고 행정 사항을 강조했다. 재능 나눔 활동에 참여한 어르신들은 매월 10시간씩 재능나눔활동을 하고 월10만원 이내의 활동비를 받는다. 노창수 지회장은 “건강한 모습으로 나눔 활동에 동참해주시는 열정에 다시한번 감사드린다”며 “코로나19 사태로 만나서 반가워도 악수도 못하고 표정을 바로 볼 수 없어 아쉽지만 건강하게 이 사업에 참여해 성취감과 자존감을 높이고 지금처럼 건강한 노년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지역사회 보탬이 되는 것이다”고 말했다.
대한노인회 경주시지회(지회장 노창수)는 지난 3일 경주시노인종합복지관 현관에서 지역 경로당에 라면과 국수, 손세정제와 수건을 전달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번 행사는 노창수 지회장이 선거 후보 시에 경로당 어르신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는 자식된 마음으로 잘 모시겠다”는 공약사항을 수행한 것으로 자신에게 지급된 직무수행경비 등을 모은 440만원으로 라면과 국수 184박스를 구입해 1차로 전달했다. 노 지회장은 올해 안으로 지역 623개 전 경로당에 전달할 계획이다. 노창수 지회장은 이날 “그동안 코로나로 경로당 폐쇄 등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르신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하루빨리 경로당에 모여 식사도 하시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덕환 부회장과 배진석 도의원이 참석해 격려했으며 초심을 잃지 않고 어르신들을 잘 모시겠다는 노창수 지회장의 마음을 전달을 받은 경로당 행복도우미들을 통해 나눠줬다. 라면과 수건, 세정제를 전달받은 각 경로당 회장들은 “코로나로 모두가 힘든 시기에 지회에서 경로회원들과 경로당에 관심을 가져주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나눠준 손세정제는 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로부터 사업비 5000만원을 지원받은 대한노인회 경북연합회 경로당광역지원센터(센터장 김월선)에서 시·군·구에 전달된 물품이다. 이 사업은 어르신들이 자기 주도적 건강관리를 통해 일상적인 생활로 되돌아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경주시지회는 지역 623개 경로당에 전달할 예정이다.
경주YMCA 경주시종합사회복지관은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저소득 가정에 희망상자(식료품키트)를 전달하기 위해 지난달 28일 ㈜신한은행경주금융센터와 전달식을 가졌다. 이번 행사는 신한금융그룹, 신한금융희망재단의 후원과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및 한국사회복지관협회의 지원으로 코로나19 피해 지원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착한 소비, 희망상자’사업이 진행됐다. 온누리상품권을 통한 식료품(과일, 찹쌀, 견과류, 참기름 등) 구입으로 지역 내 전통시장 및 소규모 상점 등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고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노인·장애인 등 80세대를 직접 방문해 희망상자를 전달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생활 속 거리두기’ 기간으로 직원들이 마스크 착용. 손 소독 등 예방수칙을 철저히 준수하여 개별 가정을 방문했으며 희망상자 전달과 함께 개인방역 5대 기본수칙 안내를 통해 개개인이 일상생활에서 거리두기를 실천할 수 있도록 했다. 복지관 관계자는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에게 희망을 전달해준 신한금융에 감사드리며, 후원해주신 희망상자가 이웃들에게 전달되어 따뜻한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시인 조희길 선생(나이스 엔지니어링 대표이사·인물사진)이 월간문학세계, 시세계에서 주최한 신인문학상 작사부문에 당선됐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번에 당선된 조희길 선생의 작품은 ‘눈물의 봄’, ‘더러는 물 젖어’, ‘상처는 가만히 안아주는 것’ 등 모두 3편으로 그동안 발표해 온 시작품의 감성이 녹아있다. 이로써 조희길 선생은 월간문학세계 선정, 대한민국 제3호 작사가로 이름을 올리게 됐고 선생의 시 3편이 앞으로 노래로 나올 전망이다. 종합문예지 ‘월간문학세계’가 우리나라 최초로 실시한 ‘작사가 등단 제도’는 이를 통해 아름다운 가사를 선정하여 트로트 음반을 제작하고, 유튜브영상으로 올리고 있다. 한국 작사계의 대부로 불리는 작사가 유정 심사위원장을 비롯한 심사위원단은 “언어미학의 표현이 매우 예리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품격 있는 시어로 이끌었고 인생의 고된 삶의 역경 속에도 병들지 않고 참된 마음으로 살아가자는 메시지가 깊게 담겨 있어 대중가요 노랫말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다. 대중들과 늘 함께 할 수 있는 언어가 친밀감을 주며 시를 대중가요로 승화시킨 멋이 신선한 울림으로 다가온다”며 조희길 선생의 작품을 평가했다. 조희길 선생은 시인이자 경영학 박사로, 생산성 본부와 청호나이스, 청호 나이스 계열 나이스 엔지니어링 등에서 30년 넘게 왕성한 기업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 활동에도 끊임없이 정진, 지난 1987년 ‘제8회 호국문예’ 당선을 통해 등단한 후 ‘한국을 빛낸 문인들 100인’에 6회 선정됐으며 ‘제8회 세계문학상’ 본상,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제16회 문학세계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더러는 물 젖어 그저 매일이 똑같으면 사는 재미가 있나 슬쩍 호미걸이라도 거는 척해줘야지 걸리는 척이라도 해줘야지 밋밋하게 매일이 흘러가면 사는 재미가 있나 짜글짜글 냄비라도 끓여야지 홀로 들판에 서서 겨울바람 이겨내는 잡목만도 못한 인간들 무어 그리 불만 많고 말들이 많은가 한발만 빠져 잠시만 생각해봐도 나도 당신도 흠 많은 인생인 걸 그저 나날이 조용하면 무슨 재리로 사나 더러는 깨지고 더러는 부서지고 더러는 물 젖어 충혈된 눈으로 떠오르는 햇살을 응시하기도 해야지 가끔은 분노도 키우고 욕망에 충실하기도 해야지
미사 신도시 모 초등학교 어린이 보호구역에 서 있는 신호등 하나. 횡단보도 한 쪽에 서 있다 기자도 모르게 발 한 쪽이 슬쩍 횡단보도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때 신호등에서 경고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위험하오니 횡단보도 밖으로 물러서 주세요” 잠시 후 파란불이 들어와 횡단보도를 건너려 하자 다시 신호음이 흘러나온다. “좌우를 살핀 후 안전하게 건너 주세요” 횡단보다를 다 건넜다 싶은데 마침 뒤늦게 출발해 횡단보도에 발 들여 놓는 행인이 보인다. 다시 신호등에서 경고음이 나온다. “위험하오니 다음 신호에 건너 가세요” 찬찬히 살펴 보니 횡당보도에 검은색 박스 하나가 붙은 모습이 보인다. 신호등에는 어린이 보호 및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방송이 나오는 것으로 안내되어 있다. 그런데 기계를 읽다 눈에 띄는 문구가 또 하나 들어온다. “이 시설물은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른 지원금으로 설치(구입)된 것입니다” 어떤 사안인지 취재해 보니 이 근처에 대형 송전탑이 건설되어 있어 이 송전탑을 중심으로 반경 700미터 이내 아파트 주민들에게 매년 보상을 전제로 상당한 금액이 지원되고 있으며 이 기금 중 50%는 해당지역 주민들의 전기세 감면혜택으로, 50%는 주민공동사업에 쓰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문득 맥스터와 관련한 경주 혹은 원전지역 주민에 대한 보상이 이에 미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처럼 직접적이고 생생하게 보상 받은 예는 본 적 없다. 단순한 송전탑 하나로도 서울에서는 이렇듯 눈에 보이는 보상이 주어지는데 경주는 원전이라는, 맥스터(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사용후 핵연료봉)을 안고도 현실적인 보상이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원전발전소 지역에 고준위 핵폐기물을 보관하는 것은 분명히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얼렁뚱땅 보관되어 왔다. 경주는 더더욱 방폐장(중저준위 방사선 폐기물 처리장)조차 연약지반위에 건설된 것으로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경주 사람들이 순한 것인지 수도권 신도시 사람들이 똑똑한 것인지 헷갈리지만 아무래도 경주는 원전 안고 사는 시민들 같아 보이지 않는다. “시민들이 위험하오니 고준위 핵 폐기물은 멀리 치워주세요” 경주의 신호등마다 이런 안내멘트를 넣을 수는 없을까?
-남북 교류 법들이 30년 넘은 오래된 것들이더라고요. 이걸로 과연 판결할 수 있을까요? “북한으로 전단 뿌리는 걸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터뷰하러 간 기자에게 권은민 변호사가 자리 앉기 무섭게 던진 질문이다. 최근 일부 탈북단체들의 대북전단살포와 관련, 북한에서 연일 남한에 대한 성토가 잇따르고 있어서 품는 의문인 듯하다. 그로부터 10여분, ‘과연 이게 바람직한 행위인가? ‘북한에 대해 그럴 권리가 있는 것인가?’, ‘만약 중국이나 일본이 우리를 비방하는 삐라를 보낸다면 그걸 어떻게 보겠는가?’, ‘심지어 쓰레기를 다른 나라에 버리면 안 된다’는 농담에 ‘탈북자들 중에는 그런 행위를 통해 조직의 활동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거나 그런 행위를 통해 북한주민에 영향을 주려 한다’는 논의, ‘그 심정의 절박함에 비해 방법이 너무 원시적이다’는 등 대화가 진지하게 이어졌다. 권은민 변호사가 유독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있다. 탈북자나 관련 기관 종사자를 제외하고는 북한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우리 사회에서 권은민 변호사는 법조인 중 아주 드문 북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북한대학원 대학교에서 ‘북한외국인투자법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12년부터 동대학원에서 강의도 하고 있다. 북한을 4차례나 다녀오기도 했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남한 사회가 통일에 대해 매우 큰 기대를 품게 되었지요. 당시에 판사로 재직하면서 ‘어쩌면 북한에서 재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떤 기준에서 재판해야 할지 궁금해지더라는 것. “그렇지 않나요? 남한 중심으로 통일된다고 가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았을 때 북한법으로 재판할 수도 없고, 분단상황이 오래 지속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남한법을 적용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런 의문과 함께 분단상황이란 것에 대한 깊은 회의, 특히 왜 같은 민족끼리, 더구나 가족이 살고 있는 고향에 분단이란 이유로 갈 수 없는 것이 이해되지 않더라는 것. 오죽하면 이산가족이 생전에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는 현실이 상식에 맞지 않았다. “세계 인권선언에 ‘모든 사람은 자기나라를 포함한 어떤 나라로부터도 출국할 권리가 있으며, 또한 자기나라로 다시 돌아올 권리가 있다’는 항목도 있는데 고향에 가고 싶은 소망이 무시되는 건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이런 의문 끝에 북한법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자료들을 찾아보았으나 자료 자체가 너무 적어 조금씩 자료를 모으면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다 거제시 법원에 근무할 때 그곳에서 한국전쟁 때 피난 내려온 주민으로부터 ‘팔순 아버지가 치매에 걸렸는데 걸핏하면 ‘고향에 가자’며 짐을 싸는 바람에 가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런 국민이 수십 만 명이라 생각하니 북한연구의 필요성을 더욱 깊이 실감했다고 회고한다. “이렇게 혼자 힘들게 공부하다 ‘북한법연구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젊은 판사가 제 발로 찾아갔더니 학회에서 아주 반갑게 맞아 주시더군요” 이것이 1998년, 당시 학회 구성원 대부분 원로 교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종로구 삼청동에 경남대학교가 설립한 ‘북한대학원’이 있어 2000년에 3기로 입학했다. 마침 그해는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 김정일 위원장과 6·15 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등 북한과의 관계가 해빙무드라 연구열기가 한층 뜨거웠고 이런 기류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실용적인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아울러 권은민 변호사는 북한의 사회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북한 소설 수십 권을 읽기도 했다. “북한 소설들의 대부분 결론이 ‘당과 수령께 충성해야 한다’ 식의 결말이지만 그 이전의 갈등구조까지는 일상적인 소설구조와 비슷해 북한 주민의 사회상이나 의식구조를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었지요” 권은민 변호사는 2002년 미국 하버드 대학으로 유학하면서 이곳에서도 북한 관련 연구를 계속했다. 당시 권은민 변호사는 북한법 지식을 바탕으로 남북화해 무드에 편승한 대북 투자에 관심 가지는 글로벌 기업들의 북한 투자상담을 전담하는 성과도 거둘 수 있었다고. 마침 이때는 9년 동안의 판사활동을 끝내고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어서 권은민 변호사의 활동이 대내외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부각되던 시기였다고. 아쉽게도 여러 격변 속에서 북한과의 화해무드가 지속되지 못해 남북관계가 좀 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북한에 대한 연구 활동은 아직도 비중 있게 진행 중이다. “궁극적으로 미래지향적인 관계 설정이 중요합니다.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 영토를 한반도를 포함한 부속 도서로 규정한다’고 한 헌법 제3조에서도 보듯, 북한과 관련한 법적 근거들이 대부분 해방 후 만들어진 오래된 법들입니다. 당시 제정된 법은 분단이 한시적이고 곧 통일될 것이라는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그것을 75년이 지난 지금에 글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지요. 우리 내부에서 먼저 미래지향적 관점으로 법을 정비해야 합니다” -경주고도보존회 상임이사, 수필가, 사진작가까지 다양한 분야 섭렵한 ‘신사’, 오늘도 발전하는 삶 추구! 권은민 변호사는 비단 북한법 연구 뿐 아니라 행정소송, 조세소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신망 받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한편으로는 법조계 밖 사회활동에도 만만치 않은 관심을 가지는 특별한 출향인이다. 특히 고향 경주를 향한 오래고 진정어린 열정은 누구보다 뜨겁다. 이정락 변호사와 함께 경주출신 법조인 모임인 ‘법경회’의 주요 멤버로 활동하며 2005년 경주고도보존회 창설에 주도적으로 기여했고 현재까지 가장 열심히 참여하는 상임이사다. 그런 그는 경주에 대해 보존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경주는 서울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진정성 있는 고도입니다. 지금도 도처에서 유물과 유적이 발굴되고 있을 정도로요. 이런 진정성은 국가차원에서 지켜져야 하고 경주시의 지자체 단체장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가꾸어나가야 합니다. 인구를 늘인다거나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거창한 약속보다 발굴되는 유물과 유적을 지키면서 이들을 뉴스화 하고 상품화 하는 것에 주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경주를 경주답게 발전시킬 수 있지요” 그런 한편 권은민 변호사는 글쓰기에도 남부럽지 않은 경륜을 쌓았다. 수필집 ‘에세이스트’로 2016년 등단한 이후 수필가로 활동해 왔고 지금도 에세이스트에 ‘통일단상’이란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으며 경주에 대한 열정과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8년째 경주 서라벌 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기도 하다. 사진에도 각별한 조예가 있어 동호회 작가들과 함께 수차례 사진전을 연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사람에 대한 편견 없이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온화하여 그를 아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신사’로 기억되는 권은민 변호사는 그래서인지 사진도 사람 중심의 사진을 즐겨 찍는다. “지금은 어느 단체에서나 ‘~위원장’ 혹은 ‘~장’으로 불릴 만큼 연륜도 쌓였습니다. 그러나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도 변함없이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작업들을 통해 삶의 희열과 보람을 느낍니다.” 누군가 ‘정치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고 전하자 ‘권력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은 물음이다’며 일축하는 권은민 변호사. 그와의 담백한 대담은 아무리 길어도 짧을 듯하다.
동천동은 2만4000여명의 주민들이 생활 터전을 잡고 있으며 경주시청, 보건소, 한국전력 등 주요 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조강호(58) 통장은 8년 세월을 동천동 25통 통장으로 지역사회에 봉사해 오고 있으며, 또한 동천동 통장협의회 회장으로서 첫 임기를 보내있다. 전임 회장의 추천으로 협의회장 직을 맡게 된 그는 봉사정신을 바탕으로 지역 발전, 주민 화합에 앞장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강호 통장은 코로나19 방역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했다. 경주에서 코로나 확산 초기, 동천동에 신천지 교회가 위치해 있어 주목을 많이 받아 그만큼 방역활동에 많은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 특성상 음식점과 주점들, 원룸이 많아 방역활동을 끊임없이 펼쳐오고 있다. “코로나19가 급격히 확산된 2월 말부터 저희 동천동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방역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주말, 공휴일 없이 모두가 함께 개인시간을 투자하는 등 노력을 한 거죠. 각 단체 회원들은 물론 동천동 직원들도 정말 많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조강호 통장은 동천동의 단체 회원들의 고생에 감사를 표하는 동시에 동 직원들의 솔선수범에 특별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지역실정에 밝고 방역현장 투입이 가능한 단체들이 중심이 돼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냈고, 무엇보다 이정완 동천동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솔선수범했기에 매일같이 방역활동이 가능했다는 것. “매일 진행되는 방역활동에 적극 참여해 주신 각 단체 회원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또 이정완 동장님, 강순중 행정민원팀장님, 김경은 생활지원팀장님을 비롯한 직원들에게 특별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주민이야 일주일에 1~2회 지역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지만, 그분들은 매일 나와서 방역활동을 펼치며 솔선수범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죠. 덕분에 주민들이 모여 매일같이 이뤄지는 방역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동 직원과 주민들이 합심해 방역활동을 하는 모습에 다양한 지원도 이끌어 냈다고 설명했다. 동천동에서 사업을 하는 주민부터 작은 가게를 하는 주민, 교회, 각 단체, 통장 등 많은 동천동 주민들이 방역활동을 하는 봉사자들에게 간식과 식사, 방역용품 등을 제공해 힘들지만 지역을 위한 활동에 보람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조강호 통장은 동천동에는 주차난 해소, 지역 경기활성화 대책, 주민복지 향상 대안 등 다양한 현안들이 있다고 말했다. 주차난의 경우 곧 준공되는 보건소 뒤편 공영주차장으로 일부 해소되기는 하지만 시청과 보건소 등 주요 기관이 위치한 동천동의 전체 주차난을 해소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입장도 전했다. “시청과 보건소가 있어 민원인 등 많은 사람들이 주간에 동천동으로 몰려듭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건소 뒤편에 공영주차장이 곧 운영을 시작하게 돼 조금이나마 주차난 해소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황성초와 동천초 주변의 스쿨존 불법 주차차량에 대한 단속이 시작되면 추가적인 공영주차장의 필요성이 대두될 것입니다” 또 코로나19로 동천동 지역 경기는 최악을 달리고 있다면서 동천동 178번지 일원에 조성중인 한수원 직원 사택의 공사가 하루빨리 완공되기를 희망했다. “동천동에는 음식점과 주점이 많아 코로나19로 폐업을 하고 타 지역으로 전출하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죠. 인구의 유입과 지역 경기 활성화를 위한 한수원 사택이 2022년 말에 완공되지만 시민들의 건강한 소비가 있어야 인구 유출을 막을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저희 또한 한수원 사택에 직원들이 들어오게 되면 지역 내에서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대책들을 마련하겠습니다” 이밖에 조강호 통장은 2만4000여명의 주민들에게 여가 선용과 복지 혜택을 주기 위한 체육문화복합 시설, 우범지대 방지를 위한 공원 및 산책로 조명 개선 등이 꼭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현재 주민센터에서는 수업 하나 듣기가 매우 힘들고, 체력단련실 사용도 어렵습니다. 인구는 많으나 시설이 이에 비해 현저히 작기 때문이죠. 별도의 공간에 주민들의 여가 선용과 복지 혜택을 위해 주민자치센터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라며 체육문화복합시설에 건립에 대한 필요성을 언급했다. 한편, 조강호 통장은 지역에 많은 피해를 가져다 준 코로나19의 확산방지와 조기 종식을 위해 행정기관, 주민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모든 시간이 멈췄다. 그 속에서도 봄은 왔고, 꽃도 피었으며, 지금까지 소홀했던 일상에서 또 다른 즐거움을 하나하나 찾아간다. 서양화가 김정란의 네 번째 개인전 ‘시간에 머물다’ 展이 오는 30일까지 갤러리 란(관장 최한규)에서 전시된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선보인 개인전 ‘시간을 건너다’ 展의 후속편으로 ‘피크닉’ ‘멈추다’ ‘기록하다’ 등 그간의 신작을 포함해 주제에 맞는 작품 24점을 선보인다. 코로나19로 일상생활에 많은 제약이 따랐던 시기. 작가는 우연히 3년 전 작품 ‘가든파티’를 보면서 희망을 발견한다. 사람들이 떠나고 오랫동안 방치된 폐가 주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선인장과 송엽국이 다부지게 자라나 마치 가든파티를 즐기는 듯하다. 능을 배경으로 멈춰져 있는 빨간 자동차와 붉게 핀 나팔꽃은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첨성대와 조화를 이루는 불두화를 통해 잠시나마 선덕여왕의 숨결을 느껴본다. 이번 전시에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독특한 화면으로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인 김정란 작가는 “삶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시간 속에 머묾이다. 그리고 지금을 사는 삶은 절망하지 않는다. 힘든 시기에도 봄은 오고, 꽃은 핀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새로운 꽃망울을 맺고 있는 식물들처럼 지난 몇 달간 일상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화폭에 옮겼다”고 설명했다. 안양에서 가족과 함께 갤러리를 찾은 정학수 씨는 “가족들과 둘러본 경주의 곳곳을 작품으로 다시 만나 볼 수 있어 친근하고 편안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면서 만족감을 내비쳤다. 사제 간의 인연으로 오랫동안 김정란 작가의 작품을 지켜봐 온 최한규 관장은 “자연의 일상을 화폭에 담아 많은 이들에게 쉼 없이 달려온 일상 속 쉼터를 제공하는 김정란 작가는 최소한의 붓 터치로 최대한의 효과를 보여주는 작가”라면서 “경쾌하고 과감한 색채와 필치로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나면 편안한 복장으로 산책 겸 작품을 위한 사진 찍기에 나선다는 작가. 작품의 모티브 대상을 발견하게 되면 다양한 구도와 빛을 생각하며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같은 장소를 찾는다. 다양한 재료와 기법 등 그동안 작품 활동에 있어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반인들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익숙하고 친숙한 구상작품이 좋다는 작가. “관람하시는 분들이 제 작품을 통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김정란 작가는 2013년 서울 한옥갤러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시작으로 4회의 개인전과 국내외 기획전 및 단체전, 아트페어에 다수 참가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신라미술대전, 대한민국회화대전, PSCO불빛대전, 대한민국여성미술대전, 서라벌예술대전, 일본미술협회 공모전 등 다수의 공모전에서 입상했으며, 현재 갤러리 란 대표이자 (사)한국미술협회, 경주수채화협회, 경북창작미술협회, 31작가회 회원, 신라미술대전 추천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갤러리 란의 다음 전시로 기획초대전 ‘경주, 그리고 황남 이야기 전’이 이어진다. ‘황남 이야기’는 갤러리 란에서 해마다 진행해 온 특별기획전시로 올해는 오감회 회원을 초청해 7월 한 달 간 조각, 공예, 사진, 한국화, 서양화, 문인화 등 25점의 다양한 작품으로 세번째 황남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생활 속 거리 두기 지침 아래 관람이 가능하며, 운영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월요일 휴관. 문의 070-7360-3794.
경주 코오롱호텔이 경주시민과 관광객을 위해 초여름 더위를 시원하게 날려버릴 공연을 준비했다. 오는 20일 오후 7시, 코오롱호텔 야외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악단광칠의 ‘미치고 팔짝 콘서트-신들의 파티’가 바로 그것. <사진> 악단광칠이 선사하는 이번 초여름 밤의 신명나는 콘서트는 모든 관객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무대다. 악단광칠은 광복 70주년인 2015년 창단됐으며, 황해도 굿과 민요를 바탕으로 황해도 지방의 독특한 음악 어법을 새로운 음악으로 재탄생시켰다. 굿은 음악과 노래, 그리고 춤이 공존하는 종합예술로 악단광칠은 이를 통해 연주자와 관객이 하나가 되기 위한 전통·공명·소통의 가치를 음악에 담아 흥겨운 한마당을 펼치게 된다. 코오롱호텔 관계자는 “악단광칠은 국내외를 사로잡은 최고의 국악 단체로 경주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수준 높은 무대를 선사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며 “관객을 무아지경에 빠뜨리는 그들만의 매력으로 초여름 일찍 찾아온 무더위를 시원하게 날리길 바란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로 지친 심신을 비대면 야외 공연으로 준비한 악단광칠의 무대로 활력을 되찾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악단광칠은 세계최대 월드뮤직마켓인 ‘2019WOMEX’ 공식 쇼케이스와 2020년 뉴욕 최대 월드뮤직플랫폼 ‘글로벌페스트’에서 성공적인 무대를 연출했다.
코로나19로 위축된 세상이지만 우리가 하나 될 때 우리 사회의 회복도 빨라질 수 있다. 경주시립합창단(단장 김강규)의 특별연주회 ‘다시 하나 되어’가 오는 20일 오후 3시 경주예술의전당 화랑홀에서 열린다. 경주시민들의 지친 심신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연주회는 ‘네가 있어 살아가는 세상’ ‘코로나 응원송 모음’ ‘경주시립 신라고취대 특별연주’ ‘회복 그리고 다시 하나 되어’ 등 총 네 개의 테마로 나눠 진행된다. 연주회의 첫 번째 무대는 ‘네가 있어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테마로 △You raise me up(R.Loyland & B. Graham) △아프지 말아요, 그대(탁계석 시, 민남일 곡) 알토 리코더/ 정기수 △Bridge over troubled water(K.Shaw 편곡)로 그대를 향한 이 시간 속의 안타까운 외침을 노래한다. 두 번째 무대는 ‘코로나 응원송 모음’으로 △상록수(김민기 시곡, 이영수 편곡)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거죠(박주연 시, 하광훈 곡, 김준범 편곡) 곡중솔로/ 박유준 △슈퍼스타(이한철 시곡, 지혜정 편곡) △무조건 무조건이야(한솔 시, 박현진 곡, 지혜정 편곡) 등 코로나 극복과 응원에 대한 귀에 익은 음악을 선보인다. 세 번째 무대는 경주시립신라고취대의 국악관현악 연주 무대다. 이 무대는 지난 1월에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신라고취대 박경현 예술감독이 처음으로 경주시민들에게 인사하는 자리다. 연주곡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의 기개를 보여주는 곡으로 첫 부분은 화랑의 기상을, 중간 부분에서는 화랑의 사랑을, 마지막 부분은 화랑의 용맹을 나타낸 △화랑(백규진 곡)이라는 연주곡이다. 마지막 무대는 ‘회복 그리고 다시 하나 되어’라는 주제로 △I Love You/ What a wonderful World(Craig H.Johnson 편곡) 곡중솔로/ 오규홍 △하나 되어(최준영 시, 임기훈 곡, 백현주 편곡) △아름다운 나라(채정은 시, 한태수 곡, 이민정 편곡) 협연/ 경주시립 신라고취대 등으로 꾸며진다. 경주시립합창단 김강규 단장은 “이번 특별연주회는 모든 세계가 우왕좌왕하고 한 치 앞도 모르는 이 시대에 이 땅과 우리나라에 대한 자존감이 우리에게 꼭 필요함을 노래한다”면서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 될 때 이 어려움을 함께 이기고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생활 속 거리 두기 실천 속에 진행되는 이번 공연의 러닝타임은 총 90분이며, 초등학생 이상 입장이 가능하다. 전석 무료공연이며, 공연 시간 1시간 전부터 티켓박스에서 선착순으로 테켓이 배부된다. 문의 1899-2138.
경주향교 이상필 전교가 지난 8일 ‘제13회 경주시민의 날’ 기념식에서 문화예술 부문 ‘경주시문화상’을 수상했다. 이상필 전교는 “개인적으로 참 영광이지만, 제가 한 작고 가벼운 이력에 비해 크고 무거운 상을 받게 돼 송구스럽다. 유림의 한 사람으로, 사명감으로 유교 및 경주향교 발전에 기여하라는 뜻으로 알고 역할을 다하겠다”라며 겸손과 진심이 느껴지는 수상소감을 남겼다. 이 전교는 재임 기간을 더해 지난 6년간 유교 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경주향교를 이끌어왔다. 이달 말 임기 만료를 앞두고 이 전교는 “지난 임기 동안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은 앞섰지만, 결과가 부족해 이룬 것 없음에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원로 고문, 감사, 사무국 등 경주향교 구성원들과 주위 많은 분의 관심과 도움으로 큰 대과 없이 임기를 마치게 돼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경북향교 전교협의회장 및 국학 진흥명예자문위원으로도 활동을 하는 이상필 전교는 전교 임기 기간 동안 △향교 부설 사회교육원 운영 △향교·서원 문화재 활용사업 ‘천년경주, 향교사랑’ △전통혼례체험 △신라 전래음식 경연대회 △향교정비사업 △어린이선비학교 △경주향교와 중국 간 학문교류 및 지역관광 연계화 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해오며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활성화에 앞장서 왔다. 특히 경주향교는 주자학의 발상지로 불리는 중국 난핑시와 우호 도시를 맺는데 기여한 바가 컸으며,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지난해 향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추진을 위해 각 향교와 합의하고 본격적인 구상을 했지만 여러 가지 상황과 한계로 인해 추진되지 못해 아쉽다는 이상필 전교. 이 전교는 “한국 서원 9곳이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사림파가 중심이 돼 각 지방에 세운 사립학교가 ‘서원’이라면 ‘향교’는 정부가 세우고 지원했던 지방의 공립중등학교다. 현재 전국에 8대 향교가 보물로 지정돼 있다. 향교는 교육기관 역할과 유교를 탄생시키고 발전시킨 성현들에 대한 사당으로써의 역할도 함께 수행한 의미 있는 곳이기에 마땅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돼야 한다. 현직에서 물러나도 향교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그 가치와 의미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돕겠다”면서 의지를 내비쳤다. 이어 “유교 문화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세대가 공감할 수 있도록 발전 시켜 나가야 한다”면서 “유교 문화의 정신과 가치가 경주와 대한민국을 도약시키는 원동력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는 공연 연습에다 주말이나 휴일에도 공연을 해야 하는 공연예술의 특성상 출산과 육아로 경력단절에 이르는 여성 예술인들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 한마음으로 공동육아를 하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공연 연습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유식과 기저귀, 장난감 몇 개를 챙겨 연습실에 아이와 함께 출근하는 이들도, 어린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 시켜 놓고 서둘러 나선 이들도, 바로 너울 무용단(단장 임설아) 단원들이다. 너울무용단은 지난 2014년 1월, 한국무용의 매력에 흠뻑 빠진 젊은 무용수 3명이 지역민들에게 다양한 무대를 통해 한국무용의 멋과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창단, 지금은 객원단원 4명을 포함해 10명의 단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지역의 크고 작은 문화행사에 초청돼 다양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다 비슷한 시기 단원들의 결혼과 출산, 육아로 경주, 울산, 대구, 양산 등으로 흩어지게 됐다. 하지만 단원 간의 친목과 화합, 긍지와 열의로 경주에 위치한 연습실을 오가며 육아도 공연 준비도 소홀하지 않은 너울무용단이다. 2016년부터는 교촌마을에서 진행하는 지역의 대표공연 창작마당극 ‘신라오기’에 참여해 조금씩 인지도를 다져왔으며 전국의 사찰공연, 천안함 6주기 추모행사, 한국&중국 불교문화교류 초청공연, 경주국제뮤직페스티벌 등 우리 전통무용의 특색을 기반으로 단아하고 화려한 공연을 선보이며 남녀노소 관람객들의 마음을 한 번에 사로잡은 그녀들이다. 지난해에는 전통무용의 예술성을 바탕으로 지역성과 시대의 감각을 가미한 너울무용단의 첫 번째 정기공연 ‘화용월태’에서 한국무용의 대중화를 시도하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조상의 숨결과 우리 전통무용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전통무용은 무용수로 평생 연구해야 할 과제인 것 같아요. 전통예술이 모두 그렇듯 알면 알수록 더 새롭고 어려워 더 많은 훈련과 연습이 최선이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몇몇 단원들은 전국의 명무를 찾아다니며 전통무용을 사사하고 있습니다. 관람객들에게 우리 전통무용의 멋과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드리기 위해, 그리고 전통무용의 체계적인 계승발전과 보존 전승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너울무용단이 되겠습니다” 전통무용을 잘하는 단체로 성장해 가고 싶다는 너울무용단은 시대에 맞춰 전통에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활동도 게을리 않겠다고 다짐한다. 또 기회가 되면 시각·청각 장애인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연, 아파트 베란다에서 즐길 수 있는 찾아가는 공연 등을 기획해 남녀노소 모두가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춤판을 펼치고 싶다는 단원들. 독창적이고 참신한 기획으로 각종 지원사업 공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한국무용의 매력을 전국적으로 어필하고 있다. 무용수로 행복한 삶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준 부모님과 남편, 아이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라는 단원들은 육아로 경력단절 위기에 놓인 여성 공연예술인들에게 너울무용단이 작게나마 용기와 힘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서로를 응원하며 함께 성장해 가고 있는 멋진 그녀들의 삶을 함께 응원한다.
△설비기술처장 직무대행 최헌규 △설비기술처 근무 김선복 = 6월 5일자
경주농협(조합장 최준식) 조합원들이 큰마디큰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경우 혜택이 제공된다. 지난 4일 경주농협과 큰마디큰병원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경주농협 조합원들에게 다양한 의료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힘쓰기로 했다. 이번 업무협약의 주요 내용으로는 ▲예약진료, 예방접종, 채용신검, 종합건강검진 제공 등을 포함한 일반 진료사업 ▲안전사고 및 질병 발생 시 신속하고 정확한 대응을 위한 구급차·응급진료 지원 ▲개인보험 가입에 따른 안내 및 편의시설 제공 등이 포함됐다. 큰마디큰병원 이길호 원장은 “코로나19로 힘든 상황 속에서도 경주지역 가장 큰 경주농협과 상생하는 기회를 갖게 돼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경주농협이 조합원들을 위해 노력하는 만큼 큰마디큰병원도 경주농협 조합원들에게 최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경주농협 최준식 조합장은 “조합원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큰마디큰병원에 감사를 드린다”며 “경주농협 사업의 모든 혜택은 기본적으로 조합원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업무협약도 조합원에 혜택을 제공하기 위한 사업 중 하나로 이번 협약을 통해 경주농협과 큰마디큰병원이 상생하는 또 다른 기회가 되길 희망한다”고 답했다.
‘문천 시내 흘러흘러 태평양 가고/ 신라시조 오릉 송림 앞을 가리며/ 천경림 맑은 바람 향기 뿌리는/ 아름답다 우리 고향 국당이로다/ 이하 하략// -‘국당마을 노래’ 정남수’. 마을이나 골목을 찾아 머물렀던 길 위에서의 시간들은 얼마였을까요? 마을마다 골목마다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전하는 동안에도 경주의 마을들은 변화하고 있겠습니다. 이번호에선 경주관광의 일번지인 황남동 황리단길 바로 지척에 있으면서도 3~4년전 만해도 낙후돼있던 ‘국당마을’엘 다녀왔습니다. 북적북적한 황리단길에서 오릉 근처 문천교에 이르는 포석로에 접해 있는 마을로, 황남동 고분군을 마주하고있는 마을에 닿았습니다. 문천교를 따라 뚝방길이 새로 조성돼 있고 그 아래로 바로 연접해 있는 마을이기도 하고요. 문천교 아래 뚝방길을 따라 한 참 걸었습니다. 신축한 2층 주택들은 기존의 마을 풍경에 자연스레 스며 들어있었고 맞은편에는 오릉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몇 발자국 차이로 그간 황남동의 ‘영광’에 비해서는 빛을 보지 못했으나 지금은 마을의 판도가 달라졌습니다. 역사문화미관지구로 지정돼 마을은 깨끗하게 정비되어 단정해졌고 신축공사들이 진행되고 있었죠. 그러나 새로이 각광 받고 있는 국당 마을은 여전히 차분했습니다. 초여름 극성스런 더위를 피해 저녁 무렵 찾은 국당마을은 더욱 운치있었구요. -‘菊堂’, ‘國堂’ 여러 설 전하는 ‘국당’...‘사라호 태풍 때 폐허 되었던 마을 다시 일으켜 세워’ ‘경주풍물지리지’에서는 ‘ ‘국당’은 서천과 남천이 만나는 곳에 있는 마을로 본래 ‘물구디이(구덩이)’를 메우고 세운 마을이라 하여 ‘구디이 마을’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菊堂’, ‘國堂’이 되었다고 한다. 또 ‘굿당’이라며 나라에 제사를 지내는 당이 있었다고도 하고, 국화를 재배하던 집이 있어 ‘국당’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앞각단’은 국당의 앞쪽 남천 옆에 있는 마을로 거랑가에 있어 ‘거랑각단’이라고도 했으며 ‘뒷각단’은 국당의 뒤쪽 흥륜사터 뒤에 있는 마을을, ‘숫각단’은 국당의 동쪽 숲속에 있는 마을로 천경림 숲의 일부가 남아 있던 부근의 마을이다’고 전한다. 한편, 윤대용 씨가 쓴 국당마을 안내에선 ‘1959년 9월 17일 추석날 닥친 사라호 태풍 때 거의 폐허가 되었던 마을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당시 마을은 평균 1미터 가량의 물이 차올라 드러나는 땅이라곤 흥륜사터 돈대밭(흥륜사터의 법당자리에 감나무밭을 일궈 돈대밭이라 했는데 지금은 흥륜사 경내에 있다)만 남아 있었다. 당시 국당마을엔 120여 호가 살았는데 주택이 유실되고 완파, 반파된 집이 80여 채를 넘었다. 그리고 천경림의 일부라고 알려져있던 ‘황남숲’의 소나무가 몇 그루만 남은 채 쓰러졌고 거랑가에 있던 수백 년 된 왕버들도 모두 뽑히고 말았다’라고 적혀있다. 또 ‘예로부터 씨름하는 장골이가 많이 배출됐으며 비옥한 구들들과 흥륜들이 에워싸고 있어 마을이 부유할 뿐 아니라 사질 양토의 밭이 많아 고등채소단지로도 유명하다. 이는 부농을 향한 주민들의 꿈이었다. 국당은 흥륜사, 효열각, 국당 노래비 등 자랑거리가 많은 마을’이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조선말기에는 사정, 앞사정, 뒷사정, 국당을 통틀어 사정(沙正)으로 불렀다. 1986년 법정동인 사정동, 탑동, 율동을 묶어 행정동인 탑정동으로 운영했으며 2004년 국당마을은 탑정동 10통, 11통으로 개편됐다. 2009년 행정동 탑정동과 황남동이 황남동으로 통합 운영되고 있다. -“국당마을은 220여 가구에 주민들은 400여 명 살고 있고 국당마을의 온전한 경계성 회복되기를” 국당마을 일을 도맡아 하고있는 박성진 통장은 “현재 국당마을은 220여 가구에 주민들은 400여 명 살고 있습니다. 어르신 거주자가 많습니다만 새로운 입주자도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새로운 입주자의 비율은 대략 10% 정도 됩니다. 우리 마을이 한옥만 지을 수 있는 고도육성지구로 지정되면서 최대 1억원까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건폐율도 기존의 20%에서 40%로 확대되면서 부동산 기대 심리도 상승하고 있지요. 그런데 흥륜사터 건너편 경주IC 가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17채의 가구가 살고 있는 동네도 국당리입니다. 도로가 생기기 40~50년 전에는 하나의 동네였습니다만 도로 건설 이후 마을이 물리적으로는 나눠졌고 이 17채의 국당마을은 여전히 자연녹지지구로 묶여있어 이 마을도 고도육성지구로 지정해주기를 주민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라고 했다. 아직도 마을 주민들은 도로를 건너 서로 교류하고 농사도 짓고 살고 있다고 하니 속히 이 문제가 해결돼 원래 국당마을의 온전한 경계성이 회복되기를 바라본다. -원주민 살던 자연부락에서 이제는 다양한 삶의 형태 수용하고 발전해가는 국당마을 경주IC 가는 도로와 포석로 등 큰 도로를 양쪽으로 끼고 있으면서도 마을 안은 금새 소음이 잦아들며 평범하고 조용한 동네로 급변하는 듯했다. 원주민들만 살던 자연부락에서 이제는 다양한 삶의 형태를 수용하고 발전해가는 마을이었다. 마을 한 복판에는 사정동 제1공영 주차장이 따로 마련돼 있었고 국당안길, 국당1길, 국당2길, 국당3길, 국당동길, 효문길 등의 도로명을 가지고 있다. 대로변 첫째 집인 국당1길 1집을 시작으로 마을은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컸다. 제법 깊숙하고 긴 골목길을 여럿 가진 마을이었다. 그런가하면 여느 도시 골목처럼 느끼다가도 시골 농촌의 골목과 같은 정취가 배어 나오기도하는 마을이었다. 갓 수확한 양파나 마늘을 마당에서 말리는 풍경에서나 집들 사이에 있는 모내기를 마친 무논의 풍경에서는 시골을 연상시켰고 마을의 규모나 주민들의 구성에서는 도심의 어느 동네 같았기 때문이다. 포석로에서 바로 꺾어 들어오는 첫 골목 국당동길엔 한옥을 멋스럽게 리모델링한 ‘행복한 집’이라는 카페 겸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화가가 새로 입주하는 등 지역예술가들도 속속 이 마을로 이주하고 있다고 한다. 양파를 캐서 싣고 돌아오는 할머니를 골목에서 만났다. “포석로를 사이에 두고 황남과 국당으로 나눠져요. 우리마을에는 황남에 속하는 집이 몇 채 있거든. 황남경로당도 그렇지요. 우리는 오릉근처와 흥륜들에서 주로 농사를 짓고 살지” 한옥의 정원에서 마당의 꽃에 물을 주고 있는 한 주민은 “서울에서 경주 온지는 8년 됐는데 이 마을에 새로 집을 짓고 산 지 4년 됐어요. 이 근처 집들은 주거용 주택이 대부분입니다. 게스트하우스는 ‘오릉 한옥’ ‘란 게스트하우스’ ‘예원’ ‘경주 월정’ 정도예요. 그래서 더욱 조용하고 살기 좋아요. 도심이면서도 전원생활을 즐기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우장춘 박사의 실험 농장 있었던 마을, 걸출한 화가 지홍 박봉수 선생 배출하기도 국당마을은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황무지였던 우리나라의 육종학을 개척한 우장춘 박사(1898~1959)와 관련있는 마을로도 유명하다. 당시 이곳 국당마을에 우 박사의 실험농장이 있었다는 것에 연유해 체험장 및 추모관 개관식이 2016년 사정동 국당마을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현재는 우장춘 박사의 기념비가 내남면으로 옮겨져있으며 기념관 운영은 현재 유보 상태라고 한다. “우씨 집안사람 주택 이외에는 그 일대가 전부 농장과 밭이었는데 지금은 새로 이주해 온 이들이 살고 있어요. 주로 중장년층에서 새로 이주해오고 있지요. 예전보다는 이곳이 발전이 많이 된 거지요(웃음)” 이 동네서 태어나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한 어르신의 말이었다. 국당마을은 또 걸출한 화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1916년 사정동 국당마을에서 태어난 지홍 박봉수 선생이다. 자연과 신라전통에서 영감을 얻어 1950~60년대 경주예술학교 교수와 중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경주사찰과 고적을 답사하고 불상탁본 작업을 통해 미술소재를 찾아 국내외에 우리의 미의식을 널리 알린 화가였다. -사적 제15호 흥륜사 터, 월성최공열부오천정씨 효열비각 있어 지난 6월 2일 조계종 원로 비구니 보주당 혜해스님 영결식이 거행된 흥룬사도 이 마을 국당 3길 대로변에 연접해있다. 이차돈 성사 순교비가 흥륜사 경내에 있는 이곳은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 법흥왕 15년(528)에 불교가 공인된 뒤 544년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흥륜사의 터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곳에서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수습된 바 있어 선덕여왕때 건립한 영묘사 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흥륜사 맞은편 서편 도로에는 월성최공열부오천정씨 효열비각이 있다. 최진간과 열부 오천정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황남동 고분군, 교동 한옥마을, 월정교 등이 이웃해있고 최근들어 근린생활시설, 한옥촌, 게스트하우스 등이 들어서고 있어 신축과 입주가 활발한 모양새였다. 이제 국당마을은 최근 이 마을 진가를 알아보는 이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 ‘평화의 우리 국당 행복 국당’, 정남수 씨가 지은 ‘국당마을 노래’의 마지막 구절처럼 국당마을은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