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우중골에 김유신(金庾信) 전설이 서린 단석산(斷石山)이 있다. 산 능선에 4개의 바위가 둘러싸인 천연굴 상인암(上人巖:탱바위)이 있고, 바위굴 속에 불상을 새기고 그 위에 지붕을 덮은 신선사(神仙寺:단석사)가 자리한다. 화랑들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고,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큰 뜻을 품고 무술을 연마하며 바위를 칼로 베었다고 전한다.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오악(新羅五岳)은 동쪽 토함산, 서쪽 선도산, 남쪽 함월산, 북쪽 소금강산 그리고 단석산은 신라의 중악(中嶽)으로 가장 우뚝하고, 단석산에서 발원한 물은 동남쪽으로 흘러 울산부의 남쪽을 지나 동해바다로 들어가는 태화강의 근원이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21권,「경상도·경주부」에 의하면, “단석산은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하며,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전하기를, “신라의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神劍)을 구해 월생산 석굴 속에 숨어 들어가 검술(劍術)을 수련하였다. 칼로 큰 돌들을 베어서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1855년(철종6) 울산부사(蔚山府使)로 임명된 학음(鶴陰) 심원열(沈遠悅,1792~1866)은 울산 및 경주 여러 지역을 두루 탐방하고 「계림옥적기(鷄林玉笛記)」·「처용무서(處容舞序)」·「경주고도기(慶州古都記)」 등 많은 시문을 남겼다. 학음은 노론 시파의 선봉 은파(恩坡) 심낙수(沈樂洙,1739~1779)의 손자로, 문장이 빼어났으며, 주로 시파계열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안타깝게도 벽파에 의한 조부의 삭탈관직으로 가세가 기울어 고단한 삶을 살았고, 44세(1835년) 늦은 나이에 선공감 감역을 시작으로 경조부주부(京兆府主簿)·청양현감(靑陽縣監)·광흥창수(廣興倉守)·고양군수(高陽郡守)·공주판관(公州判官) 등을 역임하였지만 유배도 수차례 당하였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저서 『학음산고(鶴陰散稿)』는 소중한 지역학 연구자료로 평가받는다. 학음은 울산부사로 있을 때 일생산(단석산)을 유람하고 「일생산기(日生山記)」를 지었는데, 일생산은 월생산과 동일한 공간으로 보인다. 글을 통해 마검굴(磨劍窟)에서 10년간 수도한 효험과 비법 그리고 삼국통일 위업의 연관성을 언급하였고, 한편으로 김유신의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조선의 문인들에게 단석산은 김유신과 연관되어 망국의 신라가 아닌 전성기 통일신라의 대업을 이룬 김유신에 대한 칭송의 문장이 주를 이룬다. 경주문인으로는 동곡(東谷) 이공상(李公祥,1787~1856)과 약남(藥南) 이헌락(李憲洛,1718~1791) 등이 단석산의 장관을 글로 남겼다.일생산기(日生山記)경주부 서쪽 20리에 ‘일생산’이 있다. 일생산은 높은 봉우리 위에 있어서 편평한 들판이 10리쯤 된다. 그 위에는 천인탑(千人塔)이 있고, 그 아래에는 단석암(斷石庵)이 있으며, 신라장군 김유신이 기도하던 곳이다. 또 마검굴(磨劒窟)이 있는데, 수천 년이 지나도 오히려 그대로이다. 김장군은 단석암에 있으며 목욕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하늘에 기도하며, “적국이 무도(無道)하여 우리 땅을 침범하여 소란케 하니, 주제넘게 일개의 작은 신하가 맹세컨대 화란을 깨끗이 없앨 것입니다. 오직 천신께서 강림하여 살피고 수단을 빌려주시어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한 노인이 와서 “이곳에는 독충과 맹수가 많은데, 귀소년(貴少年)이 혼자 어찌 이곳에 있는가?”라 하였다. 김장군은 재배하며 방술(方術)을 알려주기를 간절히 청하였고, 노인은 비결을 주며 “삼가 망령되이 전하지 말고, 의롭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라 하였다. 말을 마치자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김장군은 고구려·백제·말갈족이 번갈아 가며 우리 땅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평정할 뜻이 있었다. 밤마다 병서를 읽어 군대의 일에 밝아졌으니, 노인이 준 책 덕분이요, 또 칼로 큰 돌을 자른 것은 무용(武勇)을 익힌 덕분이었다. 돌이 잘린 자취가 지금도 그곳에 남아있으니, 사람들이 마검굴이라 불렀다. … 일찍이 듣기에, 김장군의 묘소 앞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는데, 이곳을 지나는 사람 가운데 말에서 내리지 않는 자는 말의 다리가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 모두 신기하게 여겼고, 김장군의 묘소를 지나는 사람들은 감히 말을 타지 못하고 내려서 지나갔다. 훗날 어떤 과객이 타던 말을 죽여 그 피를 김장군의 묘소에 뿌리고 나서부터 신기한 현상이 없어졌으니, 귀신은 말의 피를 가장 꺼린다고 하였다. 나 역시 김장군의 묘소를 지나며 두려운 마음이 없지 않았고, 하마비의 자획이 아직도 마멸되지 않았다. 김장군의 자손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떠났으며, 미약하여 떨치지 못하고 일반 백성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황제나 요순의 성인도 그 후예들은 오히려 씨족의 자손들을 보호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김장군의 후손은 오죽하겠는가? 김장군을 생각하니 매우 애석하였다. … 내(심원열)가 울산부에 있을 때 진양목(晉陽牧:진주)에 거주하는 김장군의 후손들이 뜰에 와서 하소연하며 군안(軍案)에서 제외시켜줄 것을 청하는 사람이 10명 가운데 8, 9명이었다. 나는 김장군의 일에 감탄하여 아울러 군역을 덜어주고, 양반 가문을 지키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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