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천 시내 흘러흘러 태평양 가고/ 신라시조 오릉 송림 앞을 가리며/ 천경림 맑은 바람 향기 뿌리는/ 아름답다 우리 고향 국당이로다/ 이하 하략//  -‘국당마을 노래’ 정남수’. 마을이나 골목을 찾아 머물렀던 길 위에서의 시간들은 얼마였을까요? 마을마다 골목마다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전하는 동안에도 경주의 마을들은 변화하고 있겠습니다. 이번호에선 경주관광의 일번지인 황남동 황리단길 바로 지척에 있으면서도 3~4년전 만해도 낙후돼있던 ‘국당마을’엘 다녀왔습니다. 북적북적한 황리단길에서 오릉 근처 문천교에 이르는 포석로에 접해 있는 마을로, 황남동 고분군을 마주하고있는 마을에 닿았습니다. 문천교를 따라 뚝방길이 새로 조성돼 있고 그 아래로 바로 연접해 있는 마을이기도 하고요. 문천교 아래 뚝방길을 따라 한 참 걸었습니다. 신축한 2층 주택들은 기존의 마을 풍경에 자연스레 스며 들어있었고 맞은편에는 오릉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몇 발자국 차이로 그간 황남동의 ‘영광’에 비해서는 빛을 보지 못했으나 지금은 마을의 판도가 달라졌습니다. 역사문화미관지구로 지정돼 마을은 깨끗하게 정비되어 단정해졌고 신축공사들이 진행되고 있었죠. 그러나 새로이 각광 받고 있는 국당 마을은 여전히 차분했습니다. 초여름 극성스런 더위를 피해 저녁 무렵 찾은 국당마을은 더욱 운치있었구요.  -‘菊堂’, ‘國堂’ 여러 설 전하는 ‘국당’...‘사라호 태풍 때 폐허 되었던 마을 다시 일으켜 세워’ ‘경주풍물지리지’에서는 ‘ ‘국당’은 서천과 남천이 만나는 곳에 있는 마을로 본래 ‘물구디이(구덩이)’를 메우고 세운 마을이라 하여 ‘구디이 마을’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菊堂’, ‘國堂’이 되었다고 한다. 또 ‘굿당’이라며 나라에 제사를 지내는 당이 있었다고도 하고, 국화를 재배하던 집이 있어 ‘국당’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앞각단’은 국당의 앞쪽 남천 옆에 있는 마을로 거랑가에 있어 ‘거랑각단’이라고도 했으며 ‘뒷각단’은 국당의 뒤쪽 흥륜사터 뒤에 있는 마을을, ‘숫각단’은 국당의 동쪽 숲속에 있는 마을로 천경림 숲의 일부가 남아 있던 부근의 마을이다’고 전한다. 한편, 윤대용 씨가 쓴 국당마을 안내에선 ‘1959년 9월 17일 추석날 닥친 사라호 태풍 때 거의 폐허가 되었던 마을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당시 마을은 평균 1미터 가량의 물이 차올라 드러나는 땅이라곤 흥륜사터 돈대밭(흥륜사터의 법당자리에 감나무밭을 일궈 돈대밭이라 했는데 지금은 흥륜사 경내에 있다)만 남아 있었다. 당시 국당마을엔 120여 호가 살았는데 주택이 유실되고 완파, 반파된 집이 80여 채를 넘었다. 그리고 천경림의 일부라고 알려져있던 ‘황남숲’의 소나무가 몇 그루만 남은 채 쓰러졌고 거랑가에 있던 수백 년 된 왕버들도 모두 뽑히고 말았다’라고 적혀있다. 또 ‘예로부터 씨름하는 장골이가 많이 배출됐으며 비옥한 구들들과 흥륜들이 에워싸고 있어 마을이 부유할 뿐 아니라 사질 양토의 밭이 많아 고등채소단지로도 유명하다. 이는 부농을 향한 주민들의 꿈이었다. 국당은 흥륜사, 효열각, 국당 노래비 등 자랑거리가 많은 마을’이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조선말기에는 사정, 앞사정, 뒷사정, 국당을 통틀어 사정(沙正)으로 불렀다. 1986년 법정동인 사정동, 탑동, 율동을 묶어 행정동인 탑정동으로 운영했으며 2004년 국당마을은 탑정동 10통, 11통으로 개편됐다. 2009년 행정동 탑정동과 황남동이 황남동으로 통합 운영되고 있다. -“국당마을은 220여 가구에 주민들은 400여 명 살고 있고 국당마을의 온전한 경계성 회복되기를” 국당마을 일을 도맡아 하고있는 박성진 통장은 “현재 국당마을은 220여 가구에 주민들은 400여 명 살고 있습니다. 어르신 거주자가 많습니다만 새로운 입주자도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새로운 입주자의 비율은 대략 10% 정도 됩니다. 우리 마을이 한옥만 지을 수 있는 고도육성지구로 지정되면서 최대 1억원까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건폐율도 기존의 20%에서 40%로 확대되면서 부동산 기대 심리도 상승하고 있지요. 그런데 흥륜사터 건너편 경주IC 가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17채의 가구가 살고 있는 동네도 국당리입니다. 도로가 생기기 40~50년 전에는 하나의 동네였습니다만 도로 건설 이후 마을이 물리적으로는 나눠졌고 이 17채의 국당마을은 여전히 자연녹지지구로 묶여있어 이 마을도 고도육성지구로 지정해주기를 주민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라고 했다. 아직도 마을 주민들은 도로를 건너 서로 교류하고 농사도 짓고 살고 있다고 하니 속히 이 문제가 해결돼 원래 국당마을의 온전한 경계성이 회복되기를 바라본다. -원주민 살던 자연부락에서 이제는 다양한 삶의 형태 수용하고 발전해가는 국당마을 경주IC 가는 도로와 포석로 등 큰 도로를 양쪽으로 끼고 있으면서도 마을 안은 금새 소음이 잦아들며 평범하고 조용한 동네로 급변하는 듯했다. 원주민들만 살던 자연부락에서 이제는 다양한 삶의 형태를 수용하고 발전해가는 마을이었다. 마을 한 복판에는 사정동 제1공영 주차장이 따로 마련돼 있었고 국당안길, 국당1길, 국당2길, 국당3길, 국당동길, 효문길 등의 도로명을 가지고 있다. 대로변 첫째 집인 국당1길 1집을 시작으로 마을은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컸다. 제법 깊숙하고 긴 골목길을 여럿 가진 마을이었다. 그런가하면 여느 도시 골목처럼 느끼다가도 시골 농촌의 골목과 같은 정취가 배어 나오기도하는 마을이었다. 갓 수확한 양파나 마늘을 마당에서 말리는 풍경에서나 집들 사이에 있는 모내기를 마친 무논의 풍경에서는 시골을 연상시켰고 마을의 규모나 주민들의 구성에서는 도심의 어느 동네 같았기 때문이다. 포석로에서 바로 꺾어 들어오는 첫 골목 국당동길엔 한옥을 멋스럽게 리모델링한 ‘행복한 집’이라는 카페 겸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화가가 새로 입주하는 등 지역예술가들도 속속 이 마을로 이주하고 있다고 한다. 양파를 캐서 싣고 돌아오는 할머니를 골목에서 만났다. “포석로를 사이에 두고 황남과 국당으로 나눠져요. 우리마을에는 황남에 속하는 집이 몇 채 있거든. 황남경로당도 그렇지요. 우리는 오릉근처와 흥륜들에서 주로 농사를 짓고 살지” 한옥의 정원에서 마당의 꽃에 물을 주고 있는 한 주민은 “서울에서 경주 온지는 8년 됐는데 이 마을에 새로 집을 짓고 산 지 4년 됐어요. 이 근처 집들은 주거용 주택이 대부분입니다. 게스트하우스는 ‘오릉 한옥’ ‘란 게스트하우스’ ‘예원’ ‘경주 월정’ 정도예요. 그래서 더욱 조용하고 살기 좋아요. 도심이면서도 전원생활을 즐기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우장춘 박사의 실험 농장 있었던 마을, 걸출한 화가 지홍 박봉수 선생 배출하기도 국당마을은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황무지였던 우리나라의 육종학을 개척한 우장춘 박사(1898~1959)와 관련있는 마을로도 유명하다. 당시 이곳 국당마을에 우 박사의 실험농장이 있었다는 것에 연유해 체험장 및 추모관 개관식이 2016년 사정동 국당마을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현재는 우장춘 박사의 기념비가 내남면으로 옮겨져있으며 기념관 운영은 현재 유보 상태라고 한다. “우씨 집안사람 주택 이외에는 그 일대가 전부 농장과 밭이었는데 지금은 새로 이주해 온 이들이 살고 있어요. 주로 중장년층에서 새로 이주해오고 있지요. 예전보다는 이곳이 발전이 많이 된 거지요(웃음)” 이 동네서 태어나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한 어르신의 말이었다. 국당마을은 또 걸출한 화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1916년 사정동 국당마을에서 태어난 지홍 박봉수 선생이다. 자연과 신라전통에서 영감을 얻어 1950~60년대 경주예술학교 교수와 중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경주사찰과 고적을 답사하고 불상탁본 작업을 통해 미술소재를 찾아 국내외에 우리의 미의식을 널리 알린 화가였다. -사적 제15호 흥륜사 터, 월성최공열부오천정씨 효열비각 있어 지난 6월 2일 조계종 원로 비구니 보주당 혜해스님 영결식이 거행된 흥룬사도 이 마을 국당 3길 대로변에 연접해있다. 이차돈 성사 순교비가 흥륜사 경내에 있는 이곳은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 법흥왕 15년(528)에 불교가 공인된 뒤 544년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흥륜사의 터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곳에서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수습된 바 있어 선덕여왕때 건립한 영묘사 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흥륜사 맞은편 서편 도로에는 월성최공열부오천정씨 효열비각이 있다. 최진간과 열부 오천정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황남동 고분군, 교동 한옥마을, 월정교 등이 이웃해있고 최근들어 근린생활시설, 한옥촌, 게스트하우스 등이 들어서고 있어 신축과 입주가 활발한 모양새였다. 이제 국당마을은 최근 이 마을 진가를 알아보는 이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 ‘평화의 우리 국당 행복 국당’, 정남수 씨가 지은 ‘국당마을 노래’의 마지막 구절처럼 국당마을은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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