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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윤의 절터기행[5] 경주 황복사 터

낭산 자락 지키는 석탑과 가릉<假陵>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633호입력 : 2024년 05월 02일
↑↑ 황복사 터 삼층석탑은 1962년 국보(제37호)로 지정되었다.


신라시대 낭산은 어떤 역할을 했나

경주에 도착하니 바람이 거칠다. 산골짜기 골짜기에서 누런 송홧가루가 피어오른다.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로 시작하는 박목월의 시『윤사월』이 절로 읊어지는 계절이다. 낭산(狼山)은 해발 108m로 부드러운 능선을 그리며 남북으로 누웠다. 낭산은 멀리서 보면 누에고치를 닮았다. 신라 실성왕 12년(413)부터 성역으로 여기며 신성시 여긴 진산 중의 진산이다.

‘왕이 낭산에 상서로운 구름이 서린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신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곳이니 당연히 복을 주는 곳이다. 이제부터 낭산의 나무 한 그루도 베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낭산의 성역 사업은 7세기부터 본격화되었다.

선덕여왕(신라 제27대 왕, ?~647)은 자신의 죽을 날을 예언하고 도리천에 묻으라며 유언했다. 신하들은 도리천을 찾던 중 낭산이 신라의 도리천이라고 여겨 여왕의 무덤을 조성했다. 낭산엔 선덕여왕의 능이 있고, 국가수호 사찰인 사천왕사 터,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 바위에 부처를 새긴 마애불, 구황리 삼층석탑 등 굵직한 유적이 있다. 
신라는 국가 제사를 중요도에 따라 모셨다. 낭산은 산천제사의 큰 제사를 지내던 곳이기도 했다. 남산이 백성들의 산이었다면 낭산은 귀족들만의 산이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화엄종의 창시자 의상이 출가한 사찰 황복사

진평왕릉 숲에서 쭉 뻗은 농로를 따라가면 길이 끝나는 곳과 낭산의 동쪽 끝이 만난다. 그곳에 그리 넓지 않은 물웅덩이가 있고, 낭산 기슭엔 삼층 석탑이 하나 서 있다. 황복사 터다.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에 ‘황복(皇福)’, 혹은 ‘왕복(王福)’이라는 글자가 발견되었고, 경주 낭산 동쪽 기슭에 황복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만큼 이곳이 황복사 터일 것으로 확신한다.

삼국유사 제4권 의상전교(傳敎)에는 신라 진덕여왕 6년인 652년 ‘의상(義湘, 625~702)이 서울(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상은 한반도에 처음으로 화엄종을 일으킨 승려다.

650년(진덕여왕 4년) 의상은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가다 요동 변방에서 첩자로 오인되어 잡혔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육로가 위험하다 여겨 661년 바다를 통해 중국에 가던 중 어느 무덤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큰 깨달음을 얻는다. 670년(문무왕 10년)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부석사를 세우는 등 여러 사찰을 세우고 제자들의 교육과 교화 활동을 펼친다.

의상이 황복사에 있을 때 제자들과 탑돌이 할 때 늘 허공으로 걸어 오르고 계단을 밟지 않았으므로 탑에 계단을 만들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제자들이 3자쯤 떠서 허공을 밟고 돌아가는데 의상이 돌아보고 이르기를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괴이하다 할 것이니 세상에는 가르칠 수 없다’고 하였다.

의상은 부석사에서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해 40일간 문답하고, 황복사에서 〈화엄일승법계도〉, 태백산 대로방(大盧房)에서 행경십불(行境十佛),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90일간 〈화엄경 華嚴經〉 등을 강의했다. 의상의 강의를 듣기 위해 3천여 명의 제자가 운집했다고 한다.


↑↑ 황복사 터에 미완의 석재들이 놓여있다. 저 멀리 진평왕릉이 있는 숲이 보인다.


아버지 신문왕을 기리기 위해 효소왕이 세운 탑

일제강점기인 1942년 삼층석탑을 수리할 때의 일이다. 2층 지붕돌을 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금동사리함이 나온 것이다. 사리함 뚜껑 안쪽엔 해서체로 새긴 황금 글씨가 빼곡했다. 1행에 20자씩 총 18행, 360글자와 99기의 탑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692년 신문왕의 왕후이자 효소왕의 어머니인 신목태후와 효소왕(신라 제32대 왕)이 승하한 신문왕(신라 제31대 왕, 효소왕의 아버지)을 위하여 삼층석탑을 건립하였고, 이후 신목태후와 효소왕이 승하하자 706년 성덕왕(신라 제33대 왕)이 불사리 4과와 순금 아미타불상 1구와 불교경전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안치하였다는 내용이었다.

탑 안에 무구정광경이나 99개의 흙 탑을 만들어 넣는 것은 참회하고 귀의하니 지옥의 고통을 벗어나 극락왕생하게 해 달라는 무구정탑(無垢淨塔)의 의미다. 황복사 터 삼층석탑엔 금동제 사리함에 99개의 사리탑을 새겨 넣은 것으로 대신했다. 황복사 터 석탑은 무구정경이 봉안된 최초의 석탑이기도 하다.

황복사 터 삼층석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기록상으로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또한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임을 밝히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로 인해 황복사는 왕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종묘 역할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십이지신상은 어디에서 가져왔을까

황복사 터 보축기단에는 십이지신상이 쓰였다. 십이지신상은 통일신라시대 왕릉에서 쓰던 것이다. 왕릉 석재를 사찰 기단에 사용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십이지신상은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학자들은 이곳이 가릉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곳에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만든 후 무슨 이유로 쓰지 않았고, 훗날 능이 아닌 사찰을 세우며 인근에 있던 석재를 썼을 것으로 본다.



가릉은 누구의 능이었을까

그럼 누구의 능을 준비하다 멈춘 것일까. 신문왕릉이라는 설, 성덕왕비인 소덕왕후, 혹은 효성왕비인 해명부인 김 씨의 능이라는 설, 황복사 목탑 터라는 주장도 있다. 발굴 조사 후 학계는 이곳이 효성왕(제34대 왕)의 미완의 무덤이라고 발표했다.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경덕왕의 형인 효성왕은 재위 5년 만에 병으로 숨졌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효성왕은 죽기 전 ‘무덤에 묻지 말고 화장해 동해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기록한다. 왕이 몸져누워 있을 때 능을 준비하다 화장하라는 왕의 유언에 따라 능 조성을 중단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그렇다면 지금 석탑이 서 있는 구황동 폐 능은 준비 중 시신이 안치되지 않고 멈춘 곳이라는 것이다.


↑↑ 잡풀이 우거진 황복사 터와 낭산 동쪽 기슭에 삼층석탑이 서있다.


국보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불상, 그리고 천년을 건너온 미완은 석재

낭산 끝자락, 구황동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1962년 국보 (제37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7.3m로 감은사 터나 고선사 터 삼층석탑보다는 작지만 형태나 보존 상태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삼층 지붕돌 위의 머리장식은 없어졌지만 머리장식 받침은 남아 있다. 풀밭에 우뚝 선 석탑은 흠잡을 데 없이 단정하고 묵직한 인상을 준다. 수리 당시 발견된 금동사리함과 금동불상 2구도 탑과 함께 국보로 지정되었다.

석탑에서 남쪽 풀밭은 경작이 이루어지던 논이었지만 지금은 석재유물(면석, 탱석 등)들이 놓여있다. 왕릉에서나 볼 법한 탱석, 면석, 지대석, 갑석 등 대부분이 미완의 석재들이다. 석재 주변으로 8~9세기 때 조성했을 법한 건물지와 담장, 회랑지, 도로 등과 함께 연화보상화문수막새, 귀면와, 신라 관청 이름으로 추정되는 ‘습부정정(習部井井)’, ‘습부정정(習府井井)’ 등 명문기와 300여점도 출토되었다.

경문왕의 화장을 황복사에서 치렀다고 하니 지위가 높은 사찰이었음을 짐작해 본다.
비가 온 후라 석탑 아래 절터로 이어진 농로는 물이 고이고 질척대 갈 수가 없다. 멀리서 묵정밭이 되어버린 절터를 바라본다. 풀이 무성하고 물이 고인 웅덩이엔 오리 떼가 노닌다. 한때는 국가 사찰로 사람들의 걸음이 끊이지 않았을 황복사 터에 이제는 풀들이 들어와 옛날을 이야기한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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