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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윤의 절터 기행[6-2] 경주 황룡사 터(下)

허허로운 벌판의 풀이여, 사라진 신라여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637호입력 : 2024년 05월 30일
↑↑ 초석과 심초석이다. 토단엔 사방으로 모두 8개의 초석이 흙과 풀 사이에 가지런히 박혀있다. 초석들 중 심초석(心礎石) 하나만 토단에 우뚝 올라 있다. 심초석에서 동판 기록물인 ‘황룡사찰주본기’가 나왔다.

여왕 선덕 구층탑을 세우다
황룡사 터는 8800여평에 달한다고 한다. 불국사의 8배나 된다는데 내 안목으로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1976년부터 시작된 황룡사 터 발굴은 1983년 11월까지 8년간 진행되었다. 절터에 형성된 민가 100여호를 매입하여 철거한 뒤 본격 조사가 시작되었다. 발굴에 동원된 인원만도 연인원 7만8000명에 달했다. 그만큼 광대한 범위였다.

황룡사 이야기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서 어렵기 않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이목을 끈다. 진흥왕 때부터 진평왕, 선덕왕에 이르기까지 약 100여 년에 걸쳐 완공된 대사찰이기도 했다. 신라 불교의 심장이자 자부심이었다. 백제나 고구려보다 불교를 늦게 받아들인 신라는 이차돈 순교 후 불교를 공인했고, 어느 나라보다 성심을 다해 불교의 꽃을 피웠다. 그도 그럴 것이 신라 왕경에는 가섭불이 임했던 일곱 땅이 있었다. 그중 한 곳이 황룡사였다.

황룡사에는 신라삼보(신라를 지키는 3개의 보물. 황룡사장륙상·천사옥대·황룡사구층탑) 중 두 개가 있을 만큼 중요한 사찰이었다. 절터의 면적만 보더라도 ‘신라 중심 사찰’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석가여래좌상과 두 협시보살 입상이 포함된 장륙상과 제자상이 서 있던 금당 터를 내려와 구층탑이 있던 토단에 오른다. 토단엔 사방으로 모두 8개의 초석이 흙과 풀 사이에 가지런히 박혀있다. 자로 잰 듯 일정한 간격이다. 가로 세로 1m 남짓한 초석들 중 심초석(心礎石) 하나만 토단에 우뚝 올라 있다. 매우 투박하며 둔탁하지만 매우 육중한 모습이다. 초석을 토단까지 올리려고 드잡이공이 꾀나 고생했을 것이다.

636년이었다. 선덕왕(신라 제27대 왕)이 즉위하고 5년째 되던 해(정관 10년 병신년)다. 자장법사가 중국으로 유학 갔다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불법을 전수받을 때, 문수보살이 자장에게 일렀다.

“그대 나라의 왕은 천축 찰리종(刹利種, 인도 신분 계급 가운데 왕과 왕족에 속하는 부류)의 왕으로 이미 후생에 부처가 되라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인연이 있으니 동쪽의 오랑캐나 지방 흉포한 종족과는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산과 천이 험준한 탓으로 성품이 거칠고 어그러져 미신을 많이 믿는 편입니다. 때로는 천신이 재앙을 내리지만, 법문 지식이 많은 승려들이 나라 곳곳에 있으니 군신이 편안하고 모든 백성들이 평화롭습니다”

자장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후 자장은 신비로운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곳에 어찌 오시었소?”

“불타에 이르는 지혜를 얻기 위함입니다”

자장의 말을 듣고 그가 다시 물었다.

“그대의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소?”

“우리나라는 북으로는 말갈과 잇닿아 있고, 남으로는 왜국과 인접해 늘 위태롭습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수시로 국경을 침범하고 있으니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자장의 걱정에 그가 말했다.

“그대의 나라가 여자를 왕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여왕은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어 이웃 나라들이 얕잡아보는 것입니다. 그대는 지금 당장 본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살피시오”

자장이 고국으로 돌아가 무슨 일을 해야 이롭겠느냐고 물었다.

“황룡사를 호위하는 용이 나의 장자입니다. 천축(인도) 바라문교 최고의 신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 절 안에 9층 탑을 세우도록 하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아홉 나라가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입니다. 그리고 탑을 세운 뒤에는 불교 의례인 팔관회를 열고 죄인을 사면하십시오. 그러면 외적들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오. 또 나를 위하여 서울(서라벌) 남쪽 바다 언덕에 절을 지어 나의 복을 빌어 주면 나도 역시 덕을 갚을 것이오”

642년(선덕왕 11년), 정관 17년 계묘년 자장은 당나라 황제가 내려 준 불경과 불상, 가사, 비단을 가지고 신라로 돌아왔다. 자장은 황룡사에 탑을 세워야 하는 이유를 왕에게 아뢨다.

↑↑ 황룡사 9층탑 건립부터 소실까지의 과정을 담은 3D 영상의 한 장면이다. 황룡사 9층 탑은 신라를 중심으로 주변 9개 국가를 제압한다는 의미에서 9층이다.

신라는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 탑을 만들 장인을 보내줄 것을 청했다. 아비지(阿非知)라는 장인이 명을 받고 신라로 왔다. 이간(伊干) 용춘(龍春) 혹은 용수(龍樹)가 수하 장인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 아비지는 탑에 쓰일 나무와 돌을 다듬었다. 탑의 첫 기둥을 세우는 날 밤, 아비지는 백제가 멸망하는 징조의 꿈을 꾸었다. 아비지는 탑을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자 했다. 그때 땅이 진동하며 어둠 속에서 한 노승과 장정들이 금으로 된 문에서 나와 기둥을 세우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에 아비지는 크게 후회하고 탑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쇠받침 위로 높이가 42척이고 이하는 183척이다”고 찰주기(刹柱記)에 기록하고, 자장이 오대산에서 받은 사리 1백 개를 나누어 이 탑과 통도사 계단(승려가 계를 받는 제단) 및 대화사 탑에 봉안하여 용의 청을 들어 주었다. 탑을 세운 후 삼한이 하나가 되었고 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려다가 멈추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감히 범할 수 없다.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 탑, 그리고 하늘이 왕(진평왕)에게 내린 옥대(天賜玉帶)가 그것이다”

해동 명현인 안홍(安弘)이 찬술한 《동도성립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신라 제27대에 여자가 임금이 되니 도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이 침범하니, 만일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 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침략하는 재난을 억누를 수 있으리라’

황룡사 목탑을 세운 후 여왕의 위엄은 높아졌다. 황룡사 9층 탑은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 올린 여왕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했다. 신라 사람들은 지금껏 보아온 어떤 탑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술적 도전과 성취에 놀랐다. 또한 눈앞에 펼쳐진 걸작을 목도하고 여왕의 위엄에 손을 모았다. 9층 탑은 여왕이 이루어낸 놀라운 업적과 끊임없는 열정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지만 목탑은 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698년 효소왕 7년(제32대 왕) 6월, 탑에 첫 벼락이 떨어졌다. 868년 경문왕(제48대 왕) 때 두 번째 벼락이 떨어지고, 953년 고려 광종 5년 10월에 세 번째 벼락이 떨어졌다. 정종 2년 네 번째 벼락이, 1095년 현종 말년에 다섯 번째 벼락이 떨어졌다. 벼락이 떨어질 때마다 수리를 거듭하던 탑은 1238년 고종 16년 겨울, 몽골의 침략으로 화마에 휩싸이게 된다. 몽골의 침입으로 황룡사와 9층 탑, 장육존상과 제자상 및 모든 전각이 불에 타 사라지고 만다. 무려 29년간 진행된 몽골의 침입으로 흥왕사가 소실되고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는가 하면, 한반도 전역에서 수많은 문화재가 잿더미가 되었다. 동아시아의 중심이 되고자 했던 신라의 커다란 꿈과 희망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사라졌다.


↑↑ 황룡사 터 당간지주. 불화를 그린 당(幢)을 걸던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 좌·우에 세우는 기둥이다. 황룡사 터 회랑지와 담장지 사이에는 윗부분이 부서진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황룡사 대종 어디로 갔을까

몽골의 침입으로 사라진 유물이 또 하나 있다. 대종이다. 황룡사에는 큰 종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754년 경덕대왕(신라 제35대 왕) 13년에 효정이왕(孝貞伊王, 삼모부인의 삼촌)과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경덕왕에 의해 출궁되어 사량부인에 봉해진 삼모부인(三毛夫人)의 시주로 종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종을 만든 장인은 금입택 35채 중 한 곳인 이상택(里上宅) 집안의 하인이었다고 한다. 종의 길이가 1장(丈) 3치이고, 두께가 9치이며, 무게는 499만7581근이었다.

화마에 목탑이 전소되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종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국립경주박물관에 현존하는 성덕대왕신종보다 약 4배는 더 컸을 것으로 짐작되는 황룡사 대종은 어디로 갔을까?

경주 시가지에서 동해로 가는 길엔 ‘대종천(大鍾川)’이라는 큰 하천이 있다. 토함산 자락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시작해 감은사를 지나 동해와 만나는 물줄기다. 몽골군이 대종을 전리품으로 본국에 가져가기 위해 종을 배에 실었지만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대종천에 빠뜨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큰 비가 내리면 토함산에서 흘러내린 거센 물살에 대종도 동해로 쓸려갔다는 것이다. 감포 인근 주민들은 파도가 심한 날엔 바다 어디쯤에서 종소리가 난다고 한다.

대종을 찾기 위해 감포 앞바다를 여러 차례 수중 탐색했다. 어느 어민이 잠수 중 둥그스름한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제보를 했지만 대종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사라진 대종이 바다 속에 있다면 수중 초와 물고기들에게 신라의 이야기를 들려주겠지. 그러다 이 너른 초지가 그리우면 불쑥 나타나 이 너른 초지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지금 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처럼 힘차게 서라벌 초지에 울려 퍼지면 한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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