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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이의민과 경주

경주사람으로 신라 부흥운동 도모
두두리라는 토속신앙 경주지역에서만 존재

경주신문 기자 / 1582호입력 : 2023년 04월 20일

↑↑ 이의민이 의종을 시해한 장소로 추정되는 곤원사지(탑동 정수장 내)

고려역사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을 꼽으라면 이의민(~1196년)을 들 수 있다. 고려의 500년 역사 중에 무신정권(1170∼1270) 100여년은 암흑기이다. 혼란과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후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비난받을 사람도 있다. 경주 출신 이의민도 그중 한 명이다.


그의 아버지 이선은 형산강 소금장수였고, 어머니는 옥련사 종이었다. 아버지 이선의 꿈에 어린 아들 이의민이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 구층탑으로 올라가는 꿈을 꾼 뒤 분명 귀한 사람이 될 거라고 예감했다 한다. 이는 신분 상승을 통해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으로도 보인다.


젊은 시절 8척 장신 거구에 힘이 장사였던 이의민은 형들과 더불어 나쁜 짓을 일삼던 깡패 건달이었다. 안찰사 김자양에게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다가 두 형은 죽었지만 이의민은 살아남았다. 강건한 몸을 가진 그를 김자양이 경군(京軍)으로 천거하였다. 경군으로 들어간 그는 힘이 세고 수박(手搏)을 잘해 의종의 눈에 띄었고,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등 연이어 공을 세우다 보니 상장군까지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문신들에게 푸대접과 홀대를 당하던 무신들이 주도한 무신정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쫓겨난 의종을 경주 곤원사에서 술 한잔 올린 다음 허리를 꺾어 시해하고는 시체를 연못에 던져버렸다. 의종은 자신을 키워주고 총애한 왕이었지만 출세와 권력을 위해서는 이일 저일 가리지 않았다. 의종을 역사상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임금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대한 기록은『고려사』와『동경잡기』에 그 내용이 전해진다. 비극의 현장인 곤원사지는 현재 경주 탑동 정수장 근처로 추정하고 있다.


왕정 복귀를 꾀하는 경대승이 집권하자 위기를 감지한 이의민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경주로 내려와 은거하며 숨 고르기를 했다. 경대승이 병으로 급사하자 명종은 두경승을 견제할 목적과 혹시 난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이의민을 다시 개경으로 불러올렸다. 이후 그는 권력을 장악한 후 13년간 무신정권 최고 권력을 누렸다.


↑↑ 기원정사(왕룡사)에서 본 형산강과 포항시 전경.

1193년 청도 운문 김사미의 난과 울산 초전의 효심의 난이 일어났는데 진압에 나선 관군이 계속 패했다. 이유는 토벌군 대장으로 나선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이 민란세력과 내통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민심이 고려 왕조에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이를 최대한 역이용해 최종적으로는 이의민 본인이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꿈꾸기도 했다.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씨를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운다는 이른바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을 혹신하며 은근한 야망을 품었다. 이런 흔적들은『고려사』권 128 이의민 열전에 나온다.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은 먼저 일어난 이자겸의 난과 나중에 발생한 이성계의 난도 무관하지 않다.


이의민의 이런 헛된 야망은 최씨 형제에 의해 하루아침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발단은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은 데서 비롯되었다. 최충헌 형제가 이의민을 기습하여 제거하고 그의 세 아들은 물론 경주에 기반을 둔 삼족(三族)을 멸해버리자 경주의 민심은 더욱 나빠졌다.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동경민란 즉 신라 부흥 운동이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이전에 발생했던 김사미의 난과 효심의 난도 이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 이의민의 모친이 노비로 있었다고 전해지는 절(현재는 욍룡사에서 기원정사로 절이름이 변경된 상태).(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의민은 경주지역에서 널리 믿던 두두리(豆豆里) 또는 두두을(豆豆乙)이라고도 하는 신을 믿었다. 집에서 신당을 차려두고 모실 만큼 두두리를 신봉했다. 이의민이 패망할 무렵 두두리 신이 울면서 신당을 떠났다고 한다.


두두리는 목랑(木郞), 목매(木魅)라고도 한다. 나무 도깨비란 뜻이고, 도깨비방망이란 말로 이어져 왔다. 경주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의 토속 민간신앙으로 조선 시대까지 기록이 전해졌지만, 현재는 그 어디에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두두리 신앙은 신라 진지왕과 비형랑 설화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비형랑과 도깨비들이 만들었다는 ‘귀교’ 그리고 ‘길달’이라는 인물 등이『삼국유사』에 등장한다. 두두리를 제사 지낸 왕가수(王家藪) 숲을 비롯해서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이 모두 월성 남쪽 지역과 형산강으로 연결되는 점이 특이하다.


이의민의 어머니가 노비로 있던 옥련사도 형산강 주변에 있는 절이다. 절은 형산 왕룡사로 불리어지다 몇 년 전부터 기원정사로 절 이름이 변경되었다. 형산 정상부에 있는 이 절은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목각 문인상과 무인상을 두고 있다. 왠지 두두리 신앙과도 연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경순왕과 마의태자를 모시고 있는데 형산강 물길 개척과 관계된 이야기가 전해지며, 신라부흥 운동과도 연결된다. 절에서 보면 포항시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형산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사진 명소로 손색이 없다. 더군다나 스토리텔링이 가득한 절임에도 불구하고 절 지붕이 무너져 내리며 쇠락해 가고 있어 안타깝다.


절 아래 부조 마을은 바다의 해산물들을 육지로 내다 팔던 보부상들이 드나들던 큰 장터였다. 구한 말까지 장이 섰지만, 지금은 나루터와 장터도 사라지고 없다. 대신 공원을 조성하여 당시를 추억하고 있다. 반월성 뒤 남천을 거슬러 오르면 보리사가 있는 마을 이름이 갯마을이다.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니 그 옛날 형산강은 경주의 중요한 교역로였음을 알 수 있다.


↑↑ 일제시대 왕룡사 목각인형(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인기리에 반영되었던 드라마『무신정권』은 많은 배우들이 등장했지만, 이의민 역할을 한 이덕화가 실제 주인공과 다름없었다. 그만큼 이의민은 드라마틱하고 삶이파란만장했다. 다른 무신들이 대대로 무신 집안이거나 정상적 코스를 밟아가며 권력을 잡았고 허수아비 왕을 내세워 자신의 권세와 영화를 누린 스타일이었지만 이의민은 달랐다. 일자무식 노비 출신이었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욕망을 가졌던 점이 대조적이다. 한마디로 촌놈이 주먹 하나로 고려를 휘어잡은 셈이었다. 흑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지만 그래도 경주사람으로 신라 부흥운동을 도모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장군과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이 말은 노비 만적이 노예 해방과 평등한 세상을 부르짖으며 한 말이다. 이 말의 실제 모델이 바로 이의민이었다. 만적의 난은 천민출신 이의민의 집권과 무관하지 않다. 신분과 계급사회에 벽을 무너뜨린 자로 미화시켜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덕이 부족했고 지혜도 부족했다. 한 시대의 리더가 가져야 할 철학과 사상도 없이 모두 칼로 이룬 일들이었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말을 절실하게 알려준 인물이다.


하지만 경주 출신 이의민을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패망한 신라를 복원하고자 민란들이 일어났고 두두리라는 고유의 토속신앙이 경주지역에서만 존재했다는 것과 형산강이 교역의 중심역할을 했다는 사실 정도는 21세기 오늘날 경주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 번쯤 뒤돌아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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