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종합자원봉사센터는 ‘2022 하반기 자원봉사 재능대학’ 수강생을 모집한다. ‘자원봉사 재능대학’은 지난 2013년부터 현재까지 진행해오는 프로그램이다. 자원봉사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분야의 재능 교육을 통해 보다 폭넓은 자원봉사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사회를 위한 재능 나눔을 실천할 재능봉사자를 육성하고 있다. 이번 프로그램은 △제과제빵 △수지침 △바리스타 △정리수납 등 총 4개 강좌, 65명의 수강생을 모집한다. 정리수납 강좌는 자격증 취득이 가능하다. 교육일정은 오는 9월부터 11월까지 매주 1회씩, 총 10회 운영된다. 다만, 코로나19 감염예방을 위한 수강인원 축소, 교육장 입장 전 열 체크 등 생활 방역 체계를 준수하며 교육을 진행할 예정이다. 모집기간은 이달 26일까지며, 만 18세 이상 경주시민이면 누구나 신청 가능하다. 수강신청은 경주시종합자원봉사센터 홈페이지에서 신청서를 다운받아 작성 후 방문접수 및 이메일(gyeongju1365@hanmail.net) 통해 신청 할 수 있다. 기타 프로그램에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경주시종합자원봉사센터로 문의하면 된다.
행복은 언제나 가깝게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억지로 구하려고 무리하다 보면 오히려 행복은 멀리 도망가고 불행과 불운이 닥쳐든다. 최근 서점가를 뜨겁게 달구는 화제의 소설 ‘불편한 편의점(김호연 작 / 나무 옆 의자)’은 얼핏 편의점 알바생들을 위한 작품쯤으로 짐작되기 쉽다. 편의점을 배경으로 했고 작품 전체가 편의점의 일상을 다룬 것은 분명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편의점은 단순한 도구일 뿐 실상은 팍팍하고 무정한 가족들을 분해해서 옮겨 놓은 삶의 축소판이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성공을 위해 질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돈이면 돈, 출세면 출세, 오로지 자기 일에만 매달린 채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만 덩그러니 놓인 채 가족들은 자신과 전혀 딴 세상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면 심지어 그렇게 질주하는 자신들을 원망하고 경멸한다. 그들이 그것을 눈치챘을 때쯤 이미 돌이키기 힘든 자신에 대한 의문과 위태로운 외로움에 빠져 조금씩 자신을 죽여간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공상과학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이곳에 등장하는 편의점은 ‘날조된 파라다이스’다. 책 속 편의점은 언제 문 닫을지 모를 절망적인 상태다. 낙후된 서울역 근처의 낙후된 어느 동네, 위치마저 좋지 않아 사양길에 접어든 데다 근처 재개발된 지역의 시설 좋은 편의점들의 과도한 경쟁에 제대로 대응조차 못 할 상태의 시한부급 편의점이다. 그러다 보니 물건도 제한적이고 시설도 형편없어 심지어 편의점 전자레인지까지 고장 날 정도의 제목 그대로 ‘불편한 편의점’이다. 당연히 고객들도 별로 없다. 그런 현실에 비해 성품 좋은 편의점 점주 사장님이 등장하고 모든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현명하고 듬직한 알바 아저씨가 이 편의점을 지킨다. 이 편의점을 공상과학소설로 표현한 것은 일상의 편의점들이 가지고 있는 팍팍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이다. 책 속에도 분명히 묘사되어 있듯 대부분 편의점들은 점주들이 알바들의 주휴수당을 아끼기 위해 주5일 근무를 교묘히 회피하는가 하면, 알바들은 의무감보다는 시간 때우고 자리를 지키는 것에 급급하다. 많은 알바들이 유통기한이 넘은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듯 인터넷에 소개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편의점은 알바 모두가 주5일제이고 유통기한 지난 것은 미련 없이 버린다. 점주 사장님은 알바들에게 기한 내 도시락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알바들이 성공해 더 나은 삶으로 진출하는 것을 응원하고 돕는다. 반면 이 편의점에 일하는 알바들은 어쩌면 훨씬 실존에 가깝다. 주인공 알바의 전임자인 퉁퉁하고 인심 좋은 아저씨는 일찌감치 직장에서 떨궈 나와 마지막으로 편의점에 기대 살고 있다. 지방대를 나와 취업에 실패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20대 후반의 여성은 불만에 가득 차 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삶의 의미를 아들의 성공에만 기대고 사는 50대 아주머니는 아들마저 이상한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악만 남았다. 그들이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편의점인 만큼 모두 절박하고 불편하고 어두운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은 마치 헬조선을 곱씹으며 취업난에 허덕이는 요즘의 젊은이들과 위에서 치이고 아래에서 들이 받쳐 꼼짝 못하는 어중간한 50대 중년 남성들, 파괴된 가정을 이끌고 홀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대한민국 50대 여성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옮겨 놓은 듯싶다. 이들과 맞닥뜨리며 이야기의 여러 축으로 등장하는 고객들 역시 불안하고 힘든 삶에 찌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한 번 손에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뗄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이런 공상이 현실과 교묘하게 맞붙어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쾌감을 진득하게 주어서일 것이다. 불편한 편의점에 루저라고 할 만한 편의점 알바들, 그들만큼이나 하찮아 보일 수 있는 단골 고객들이 작은 계기, 고된 현실 속에서 잊고 살았거나 감춰져 있던 근원적 깨달음을 통해 자신들을 가두고 있던 고치를 뚫고 나비로 비상하는 모습은 매우 현실적이고 감동적이다. 행복은 결코 멀리 있지 않고 자신 속에 단단히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이 단순한 사실을 편의점 군상들의 실례들을 통해 가르쳐주는 ‘불편한 편의점’은 편의점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의 인생 책인 동시에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슴으로 읽을 만하다.
만엽집 <15번가>는 한반도어로 읽히고 있다. <15번가>는 왜국의 제명 천황 장례식 때 그녀의 아들이 어머니의 일생을 회고하며 눈물로 지은 향가였다. <15번가>를 해독하면 다음과 같다. 渡 津 물을 건너가는 나루 海 乃 豊旗 雲 尒 바다 에 에끼 구름 이 (끼어 있구나). 伊 理 比 沙之 그대는 다스림에 나와 나란하삿지. 今 夜 乃 오늘 밤 에 月 夜 淸 明己 曾 달이 밤 깊도록 맑아 (길을) 밝히겠지 한자로 써놓고 한반도어로 읽고 있다. 누가 보아도 명백히 한반도어로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다음의 구절들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海乃 바다에 雲尒 구름이 比 沙之 나란하삿지(나란하다+사지) 夜乃 밤에 明己曾 밝히겠찌(밝다+기+찌다) <15번가>가 고대 한반도어로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선 작자 중대형 황자가 한반도어를 구사하였을 수 있다. 이는 일본 천황가가 백제 왕족과 혈족 관계를 갖고 있다는 일각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황증거가 될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고대 한반도어로 된 향가를 누군가가 암송하면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뜻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현대 한국의 사찰에서 천수경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깨끗하구나, 깨끗하구나, 아주 깨끗하구나, 묘하게 깨끗하구나, 모든 것이 원만하게 성취되리라)’를 낭송하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뜻을 모르고 있듯이. 고대 한반도어로 표기되어 있기에 한국어를 모르는 일본인들은 만엽집을 해독하는데 있어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만엽집이 고대 한국어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일본인들은 지난 천 년간 만엽집 해독에 주력했으나 아직도 완독해낼 수 없었다. 이 점은 앞으로도 일본인들을 크게 좌절시킬 핵심 포인트이다. 만엽집이 고대 한국어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은 만엽집을 우리의 고문학으로 볼 수도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근대 이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프레임으로 우리의 역사와 한일 관계사를 일방적으로 재단해 왔다. 그러나 이제 거꾸로 우리의 프레임으로 일본의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만엽집을 자기 민족의 정체성이자 마음의 고향으로 일컬어 왔다. 더 나아가 만엽집을 국서라고까지 추앙해 왔다. 그러한 만엽집이 한민족의 언어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제 우리는 민족의 언어로 만엽집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인문학적 영토를 넓힐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인문학 연구자들의 책임이 막중해진다. 필자가 본 칼럼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향가의 세계다. 그곳에 가보니 충격적 사실들이 가을 들판의 가창오리떼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가장 놀라운 사실 중 하나가 만엽집이 한반도어로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다. 원주민과 앵무새가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 것처럼 <15번가>가 향가의 세계를 다녀왔다는 증거물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여러분들을 천년 망각과 전설의 세계로 초청한다.
영국의 수 많은 왕들 가운데 후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장 인상깊게 남겨둔 왕들 중 한 명은 바로 헨리 8세이다. 그 이유는 그가 생전에 많은 이야기들을 후세사람들에게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는 사랑 이야기, 정치 이야기, 종교 이야기, 음식 이야기 등등 아주 다양하다. 헨리 8세는 말년에 엄청나게 비대해서 혼자 힘으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뚱보였다. 그 이유는 과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도 많았고 그 병마로 인해서 고생 또한 엄청나게 많이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젊은 시절의 헨리 8세는 정말 건장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몸을 잘 관리한 젊은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운동을 좋아했고 사냥 또한 그의 대단한 취미 중 하나였다. 어느날 가까운 측근들과 함께 런던 서쪽의 레딩이라는 곳으로 사냥을 간 헨리 8세는 길을 잃고 말았다. 이러저리 헤매던 헨리 8세 일행은 간신히 이곳에 있는 수도원을 발견하게 되었다. 수도원 원장은 젊은 국왕 일행이 수도원에 도착했으니 반갑게 맞이한 것은 당연지사이다. 한창 나이의 젊은 국왕인 헨리 8세는 사냥터에서 에너지도 소진했고,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던 차라 배가 무척 고팠다. 식사를 요청한 젊은 국왕에게 수도원 원장을 맛있는 소고기를 대접했는데, 그 소고기가 바로 등심이었다. 알다시피 등심은 소고기 부위가 정말 맛이 있고 양도 그리 많지 않다. 우리 말에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도 있듯이, 배가 고플 때 먹었던 이 등심이 헨리 8세에게는 대단하게 맛있었다. 식사를 마친 헨리 8세는 수도원 원장에게 물었다. “짐이 먹은 이 고기가 도대체 무엇이오?” 그러자 수도원장이 “전하께서 드신 그 고기는 바로 등심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헨리 8세는 그 자리에서 국왕의 어도로 그 등심에게 바로 작위를 내렸다. “지금부터 이 등심을 ‘Sir Loin – 등심 경’이라 칭하노라”라고 하면서. 오늘날 고급 레스토랑에서 아주 비싸게 팔리고 있는 ‘Sir Loin Steak’는 이런 행운을 타고 태어났으며, 척박하다 알려진 영국의 음식문화라 세간에 알려진 이 영국음식 가운데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음식이 되었다. 헨리 8세 이후 제임스 1세 또한 영국 중부 렝카셔에서 대신들과 맛있게 연회를 마친 후, 맛있게 먹은 이 ‘등심 경’에게 다시 한 번 작위를 수여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 두 번째 작위는 선대의 왕이 남긴 이 재미난 이야기를 다신 한 번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요즘으로 치면 ‘탁월한 마케팅의 기회’가 되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사실 육식을 좋아 하는 서유럽 사람들에게 상류 사회, 그것도 왕이 직접 작위까지 수여했다는 이 역사적 스토리는 금상첨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나 또한 개인적으로 고기를 잘 먹지만 레스토랑에서 이 최고의 등심 ‘Sir Loin Steak’를 먹을 때마다 이 섬나라 영국의 왕들이 부럽기도 했다. 특히 유머와 위트를 잘 구사하는 ‘사교적 문화’에 대해서 나름의 고민과 분석을 해 보는 것이 또한 나의 취미이자 직업본능이기 때문에, 이 스테이크를 대할 때마다 생각이 좀 많다. 사실 잘 살펴보면 모든 음식에는 다 한 자락 정도의 이야기는 분명히 있다. 그 이유는 음식이 바로 사람들이 먹는 ‘문화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상사에 이야기 없는 인간사가 대체 어디 있을까 말이다. 당연히 ‘긴 역사는 더 많은 이야기가 응당 있어야 한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적 근거를 우리는 쉽게 인지할 수 있다. 고향 땅 경주는 ‘천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유구한 역사적 현장이다. 더욱이 경주는 그 천년 역사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수도’가 아닌가. 왕들이 살았고 귀족들이 즐비하게 살았던 긴 역사는 더 많은 이야기가 응당 있어야 한다. 고향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당연한 논리적 근거를 무시하게 될 때 우리 모두는 마음속 애향심에 대한 ‘관계성의 직무유기’를 범하는 셈이다. 본지에서 꾸준히 고향땅 경주에 관련하여 음식에 관련된 나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의도적으로 빼지 않으려고 노력한 부분이 바로 ‘역사 도시, 문화 도시, 관광 도시, 브랜드 경주’ 등과 같은 ‘경주의 정체성’이었다. 관심을 가지고 찾아본다면 ‘음식문화 경주’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필자 또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꾸준히 고민하면서 숙제처럼 마음에 담고 있다. 밖에서 보면 더 정확히 보인다. 우리 모두 한 마음이 될 때 해결할 숙제는 더 쉬워지지 않을까.
신림동 서울대학 근처에 있는 막걸리집에 친구들이 모였다. 그때 어느 하나가 슬픈 목소리로 상사병을 호소하였다. 술 한 잔 마신 김에 모두 호기를 부리며 그 여성의 집에 찾아가자고 하여 우르르 나섰다. 그 여성 이름의 발음에 빗대어 우리는 ‘조총련’이라고 불렀다. 조총련 학생의 집 앞에서 우리는 소란을 벌였다. 그때 그 여성의 아버지가 나와 엄히 훈계하는 사이에 조총련 학생도 나와 분하다고 눈물을 흘리다,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어머 박진 씨가 여기 웬일이에요?” 진이는 대학재학 중 그룹사운드를 이끌었는데, 이대나 다른 대학 축제가 되면 원정을 자주 갔다. 그러면서 둘은 알게 된 모양이다. 갑자기 코메디처럼 분위기가 반전되었는데, 어쨌든 참 시시하고 초라했고 별 볼 일 없던 청춘의 한 때가 남긴 잔상이다. 그런데 진이는 열심히 공부해서 재학 중 외무고시에 합격하였으나, 상사가 장발을 자꾸 지적하자 때려치우고 나와버렸다고 한다. 그만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 뒤 영국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김영삼 정부의 의전비서관으로 발탁되어 돌아왔다. 내가 말한 이야기로도 박진이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잘 알겠으나, 그가 가진 많은 장점 중 하나는 영어가 유창하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이냐 하면, 방한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훌륭한 영어구사라고 칭찬했을 정도다. 내 소견으로는, 클린턴의 구사언어는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 최고라고 본다. 그런 클린턴이 박진을 칭찬한 것이다. 박 장관은 얼마 전 아세안 관련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하고 왔다. 보도를 통해 듣는 그의 말은 믿음직스럽게 대단히 논리적이고 치밀했다. 그리고 그는 이 자리에서 중국의 까다로운 왕이 외교장관과 일본의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외교장관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런데 사진에 나타난 3인의 표정으로 보기에는, 그가 주역이고 중, 일의 외교장관은 들러리처럼 만들고 있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중국과 일본에서는 자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외국인보다 영어를 잘하는 외국인을 좀 더 존중하며 받들어준다. 박 장관의 유려하고 거침없는 영어구사에 아마 중, 일 외교장관은 부러움의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말의 신빙성을 강하게 하기 위해 부득이 내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과거 한국헌법학회장 재직시 중·일을 포함한 아시아 헌법학자들의 리더가 되어 ‘아시아헌법포럼’을 창설하였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중국과 일본의 대학에서 영어로 강연한 것이었다고 본다. 어느 쪽이건 강연 후 나에 대한 태도가 확 달라졌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난 문재인 정부는 외교안보라인이 대단히 허약하였다. 한국의 대통령이 중국에 가서 혼밥을 하고, 중국 주재대사를 중국어 한 마디 못하는 사람으로 보내는 것 따위에서 그 단면을 잘 엿볼 수 있다. 요즘 드러났으나, 흉악범이라는 추정으로 귀순 북한주민을 북송하여 사형당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무능이 빚어낸 참사였다. 그때의 외교라인 구성의 면면과 지금 박진 외교부를 비교해보라. 어쩌면 비교의 대상이 될 수도 없을 정도이다. 월초에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방한했을 때 윤석열 대통령이 면담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비난하는 견해가 있다.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이 부족한 소치이다. 우리 측으로 봐서 미국은 가장 높은 단계의 가치동맹국이고, 세계의 험한 파고를 넘어가는데 미국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한반도는 미국, 일본과 같은 해양세력과 중국의 대륙세력이 맞부딪히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는 점을 어느 때건 잊을 수 없다. 정부의 조직체계상 아마 박 장관이 조언했을 것이다. 이 조언을 수용한 윤 대통령과 박 장관의 조합이 참으로 든든하다. 그런데 2025년 한국에서 열릴 APEC 정상회의에 우리 경주도 뜻을 내고 있다. 지금 인천, 제주, 부산이 우리와 경합하고 있다. 개최지로 결정되는 경우 경주의 미래를 확실히 구축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그래서 경주시나 경북도에서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 결정의 주무부처가 바로 외교부다. 박진 장관은 부디 지역균형발전의 차원에서 경주를 낙점해주길 기대한다. 그리고 그때 오시는 분들에게 확실한 한국의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경주가 제일 낫지 않을까 한다.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박 장관의 뚜렷한 면모가 이번에 확실히 드러나길 기다린다.
공고번호 : 경북-경주시-2022-00775 황성동 스타벅스 근처에서 8월 3일 구조 활발하고 애교가 많으며 사람을 매우 좋아함. 믹스 / 여아 / 3개월 / 2kg / 1차 접종 완료 / 중성화x 입양문의 054)760-2883 ※반려동물이 실시간 입양됐을 수 있으니 확인 전화바랍니다.
사실 이육사는 옥룡암으로 내려오기 전 가혹할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폐결핵으로 6개월간 성모병원 입원 후 퇴원하였으며, 부친의 죽음과 큰형 이원기의 죽음이 연이어 있었다. 그리고 의열단 혁명동지 윤세주의 전사(戰死)가 있었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곳 옥룡암에서 병약한 시인으로서 한적함을 즐겼을지 모르나, 한편으로는 독립운동가로서는 뜨거운 가슴은 멀리 대륙의 독립운동하는 동지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몸이 좋아지면 달려가리라 그렇게 마음을 세우고 있었으리라. 그의 생애에서 옥룡암의 시간들은 몸을 추스르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음을 기다리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육사의 수필 ’계절의 표정’ 가운데 마지막 부문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벗들이 나를 달랬다. 전지 요양을 하란 것이다. 솔깃한 말이라 시골로 떠나기로 결정을 했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갈 곳이 어디냐? 한 번 더 생각해 보지 않 수 없었다. 조건을 들면 공기란 건 문제 밖이다. 어느 시골이 공기 나쁜 데야 있을라구. 얼마를 있어도 싫증이 안 날데라야 한다러면 경주로 간다고 해서 떠난 것은 박물관을 한 달쯤 봐도 금관, 옥적(玉笛), 봉덕종(奉德種), 사사자(砂獅子)를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날 까닭은 원체없다. 그뿐인가, 어디 일초 일목(日草一木)과 일토 일석(一土一石)을 버릴 배 없지마는 임해전(臨海殿) 지초(支礎)돌만 남은 옛 궁터에서 가을 석양에 머리칼을 날리며 동남으로 첨성대를 굽어보면 아테네의 원주(圓柱)보다도, 로마의 원형 극장보다도 동양적인 그 주란 화각(朱欄畵閣)에 금대 옥패(金帶玉佩)의 쟁쟁한 옛날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거기서 나의 정신에 끼쳐 온 자랑이 시작되지 않았느냐? 그곳에서 고열로 인해 죽는다고 하자. 그래서 내 자랑 속에서 죽는 것이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냐? 이렇게 단단히 먹고 간 마음이지만, 내가 나의 아테네를 버리고 서울로 다시 온 이유는 시골 계신 의사 선생이 약이 없다고 서울을 짐짓 가란 것이다. 서울을 오니 할수없어 이곳을 떼를 쓰고 올밖에 없었다. -수필 ‘계절의 표정’ 일부 아테네 로마보다 더 좋은 경주를 두고 약 때문에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는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폐허 같은 고도 경주의 모습을 그는 망국의 마음을 읽었으리라. 무너진 유적을 둘러보며 떠올렸던 쟁쟁하게 울려오는 옛 소리는 아마도 선인들의 외침이거나 민족부흥의 종소리였을 것이다. 그의 마음 한가운데 자리한 것은 독립과 민족성 고취였을 것이다. 그 옛날 화랑들의 기개가 그리웠을 것이다. 일제 식민통치가 그래서 그는 이곳에서도 몸을 추스르며 벗을 그리워하며, 쉽게 시가 써지지 않는 고심을 하며 한편으로는 멀리 중국 대륙의 의열단 동지들이 생각하며 그리웠을 것이다. 이렇듯 경주 남산 옥룡암은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곳이다. 이육사는 이곳에서 3개월 정도 머물다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신석초와 나들이하면서 중국으로 가야만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1943년 초봄에 북경으로 갔다가 그해 4월 귀국했다 6월에 체포되어 다시 북경으로 압송되어 감옥에서 40세로 생을 마감했다. 옥룡암은 외지의 문인들이 경주에 오면 많이 찾는 곳이다. 올해만 해도 몇 차례 안내자를 자청해서 동행한 적 있다. 시인, 작가들이 이곳을 찾는 까닭은 무엇일까? 절 구경도 구경이지만, 이육사의 시 정신과 문학적 향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절은 자꾸만 쇠퇴해져 가는 느낌이다. 태풍에 상처 난 흔적들은 개보수하면 되겠지만, 스토리텔링이 가득한 옥룡암을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발굴하고활용하지 못함이 아쉽다. 이곳에다가 민족시인 이육사의 시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문학적 창작공간으로 꾸며 보는 것도 좋겠다. 더군다나 옥룡암은 한때 지역의 인재들이 고시 공부를 하던 명소로 유명하다. 지금도 공부방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기에 잘 활용하여 문학 레지던스(입주작가 창작촌) 공간으로 변화를 모색해보면 어떨까? 아니면 시비(詩碑)를 세워 육사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것도 뜻 깊은 일일 것이다. 이곳에서 육사 백일장, 과 육사시 시낭송대회 등 어떤 형태로든 뜻을 기리고 추모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작은 암자에 사람들이 붐빌 것이다.
“창업을 고민한다면 청년창업지원 프로그램 적극적으로 활용하길 바랍니다. 다양한 지원프로그램이 있어서 첫 창업이라면 꼭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꽃별새 스튜디오 서수민 대표의 말이다. 서 대표는 ‘마크라메’라는 아이템을 가지고 지난 2018년 ‘꽃별새 스튜디오’로 창업을 했다. 마크라메는 서양식 매듭공예로, 뜨개질과는 달리 다른 도구없이 오로지 손을 이용해 끈으로 매듭을 엮어 작품을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디자인을 전공했던 서 대표는 전공을 살려 디자인과 관련된 직장으로 취업을 했다. 취업을 했지만 생각보다 직장 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던 서 대표는 취미로 시작했던 마크라메로 창업을 결심하게 된 것. “전공을 살려서 디자인 회사, 건축사무소, 한복집 등 다양하게 취업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복잡한 서울과 회사생활은 저와 맞지 않았고, 매일 퇴근길 어머니와 통화하며 힘들다고 푸념하기 일수였습니다. 그러던 중 직장 생활을 관두고 외할머니댁이 있는 경주로 내려오게 됐습니다” “당시에 취미로 하던 마크라메를 가지고 창업지원을 받아서 창업을 해보란 권유를 받게 되면서 창업을 결심했습니다. 창업을 결심하면서 관련 자격증도 취득하고, 창업지원사업에 대해서 알아보며 정말 정신없이 준비하게됐습니다” 창업지원사업과 자격증 취득 등 약 1년의 창업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고 2018년 창업하게 된 서 대표. 당시에는 마크라메라는 공예가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자리를 잡기까지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힘들었습니다. 얼핏 뜨개질이랑 비슷해 보여서 쉽게 들어왔다가 공방에 전시해놓은 작품을 훼손하는 사람들부터 시작해 처음으로 하는 제 사업이다 보니 익숙치 않은 상황에 대처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단순 판매부터 강의 프로그램 기획까지 혼자해야 하다보니 많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디자인을 전공했던 경험을 살려 여성스러운 디자인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지금은 지역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창업을 선택하고 자리를 잡기까지 힘들었지만, 그래도 창업을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다는 서 대표는 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창업을 두려워말고 정부지원사업을 최대한 활용해라고 강조했다. “저도 처음에는 창업에 대해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청년들을 위한 정부지원사업에 대해 알아보던 중 다양한 지원사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세금신고부터 업체명을 만드는 법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용했기에 큰 부담없이 창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직장 생활과는 달라서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지만, 시간의 활용도나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도전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양주에 위치한 대가농원은 3차산업을 중심으로 한 농가주도형 6차산업화를 이루어 냈다. 농작물판매가 아닌 대가농원이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살려 체험농장으로 고부가가치를 실현한 것이다. 대가농원은 수도권에 위치해 있으며 서울과 30분 거리, 상수원보호구역인 다산유적지내에 위치하고 있어 제한이 많지만 그만큼 청정한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대가농원은 이성준, 장복순 씨 부부가 운영하고 있으며, 이들 부부는 1983년 3만여평 땅을 임대해 농사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농사로 수익을 올리기가 쉽지는 않았다. 유통단계를 거치면 소득이 적어 수확한 농작물을 직접 팔아보기도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때문에 키우는 작물을 다양화 해보기도 했지만 수익이 쉽게 나지 않았다고 한다. “농사만을 해서 수익을 내기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편도 저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농작물을 이것 저것 바꿔서 키워봤지만 판매만으로는 수익이 좀처럼 오르지 않았죠”, “그러던 중에 다산유적지를 찾은 방문객이 저희 농가를 둘러보고는 농가체험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한 말에 귀 기울였죠. 그때 체험학습농장을 시작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오게 됐습니다” #체험농장에 특화 체험학습농장을 시작하면서 대가농원은 본격적으로 농작물 판매가 아닌 체험학습에 집중하게 된다. 직접 재배한 농산물 딸기를 100% 체험사업에 활용함으로써 기존 대비 3배 이상 고부가가치를 실현했다. 체험학습농장을 시작하면서 체험프로그램, 운영방식 등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했던 부부는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는 생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특히 체험프로그램의 경우 방문객들의 의견을 100% 활용해 운영했던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남편과 둘이서 프로그램을 만들었죠, 시작할 프로그램은 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이후에 생겨난 모든 체험프로그램은 방문객들의 의견을 100% 반영했어요. 따로 설문조사를 한 것도 아니고, 방문객들이 흘려 이야기한 작은 의견을 그대로 학습프로그램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사실 대가농원을 방문해주신 분들이 만든거나 다름 없습니다” 이렇듯 농작물을 재배해 판매하는 것보다 체험사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많다 보니 대가농원은 재배하는 농산물의 100%를 체험사업에 활용하고 있다. 체험사업을 시작한 2002년부터 대가농원은 지속적으로 성장했으며, 수도권 인근에서는 체험농장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친환경 유기농 농작물 재배 대가농원에서 생산하는 대표 농작물은 딸기로,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유기농 재배를 고집하고 있다. 특히 최근까지 한강에서 토종물고기의 생태계 보호를 위해 잡아들이고 있는 외래어종 베스를 수매해 유기농비료로 활용함으로써 생태계보호와 진정한 친환경농업을 실현하고 있다. “현재는 베스를 매입하는 업체들이 생겨서 하고 있지 않지만, 처치 곤란한 베스를 저희가 받아 이를 비료로 만들어 인근 농가에 무료로 나눔을 했습니다. 베스로 만든 비료가 냄새는 많이 나지만 특정 작물에 쓰임이 좋아 나눔을 받은 농가들도 만족했습니다” “체험학습농장이기 때문에 유기농을 고집하는 것도 있지만 건강한 작물을 만들기 위한 신념이기도 합니다. 이런 신념을 끝까지 가지고 유지할 수 있었기에 지금의 대가농원이 있는 것입니다” #년간 체험객 2만명 방문 대가농원은 100% 체험위주로 운영되는 농장이다. 농장주 부부가 10여년간 노력한 끝에 지금은 수도권의 대표적인 체험농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가농원에는 2012년 이후 매년 약 2만명 이상의 방문객을 기록하고 있다. 방문객 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매출 또한 4억원 가량을 기록하는 등 성공적인 체험농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체험농장으로 바뀌고 나서 해마다 꾸준히 방문객이 늘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현재는 방문객이 조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방문객이 많을 때는 하루 200명 이상이 올 때도 있습니다. 이제는 체력이 달려서 하루 방문객에 제한을 두는 것을 계획 중에 있습니다” 대가농원은 농장체험 프로그램에 이어, 다산 유적지를 활용해 교육프로그램도 진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유적지와 인접한 지리적 이점을 교육적으로 활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각종 규제와 체험사업의 어려움을 극복 체험사업을 시작한 뒤 체험객들을 위한 휴식공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대가농원이 위치한 남양주시 조안면은 상수원보호구역인 동시에 다산유적지가 있어 문화재보호법 등 각종 규제로 건물하나 짓기 힘든 실정이었다. 농장주 부부의 살림집을 지으면서 휴게공간을 확보했고, 치유농장 지원사업을 통해 교육장 새롭게 지어 확장했다. “앞으로는 체험이 아니라 치유의 영역으로 농업의 트렌드가 바뀔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농업을 치유의 목적으로 활용하는 곳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치유쪽으로 초점이 맞춰질 거라고 예상합니다”, “이번에 새로 확장하게 된 휴게공간 역시 치유농업 지원사업을 이용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앞으로는 농가도 정부의 정책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귀농·귀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대가농원 장복순 대표는 귀농·귀촌을 계획하고 있는 이들에게 ‘최소한 5년은 고생해야 할 각오를 해야한다’, ‘정부의 정책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대가농원이 있기까지는 아무래도 바뀌는 농업 정책에 맞추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업도 농사만 지어서는 살아남기가 힘듭니다. 변화의 시기에 잘 맞춰서 나가야 농업으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귀농·귀촌을 계획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농업을 쉽게 생각하면 안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최소한 5년은 고생해야 합니다. 뭐든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대가농원도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가공제품을 개발하는 등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농업을 쉽게 생각하고 귀농을 하려한다면 저는 말리고 싶습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부동산 가격 폭등, 미국 주식 활황, 비트코인 폭등 등 여기저기서 높은 수익이 났다는 것이 날마다 뉴스에 나왔다. 그러더니 요즘엔 모두가 폭락 관련 뉴스다. 거기에 인플레이션이 등장하더니 스테크 인플레이션(물가상승+경기침체)이란 단어도 심심찮게 나온다. 이런 타이밍에는 저축도 재테크도 모두 하기 싫어진다. 한 마디로 힘 빠지는 시기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꼭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재테크 능력을 키우는 아주 유용한 시간이었음을 아줌마는 경험으로 안다. 오늘은 경험으로 깨우친 아줌마 재테크 요령, 기초 3단계를 풀어놓는다. 첫째, 악착같이 종잣돈을 만든다. 쓰고 남은 돈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생활비만을 남기고 남은 건 모조리 모아야 한다. 적어도 쓸데없는 지출이 없는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 주변에서 재테크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 투자 수익률을 자꾸 묻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높은 수익은 절약이다. 무엇에 투자하든 자본이 있어야 그에 비례해서 수익이 발생하는데, 절약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최고의 투자 방법이다. 그로 인해 종잣돈의 볼륨이 커지고 이것은 시간에 의해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만든다. 쉽게 말해서 20년 동안 일정 규모의 종잣돈을 모은 횟수는 몇억 자산의 개수를 의미한다. 투자 기간을 30년으로 확대하면 종잣돈을 모은 횟수는 더 엄청난 차이를 의미하게 된다. 그러니 악착같이 모아라! 재테크를 하려면 경제를 알아야 한다. 둘째, 금리라도 알고 재테크를 시작하자. 요즘 뉴스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금리 인상이다. 그런데 나와 더불어 재테크 좀 하는 친구들은 이미 금리 상승을 뉴스보다 일찍 예측했고 그에 맞춰서 투자 비중을 움직였다. 금리 관련 도서를 한두 권 읽고 관련 유튜버 동영상을 보면 기초는 알게 된다. 책을 안 읽고 유튜브 방송만을 보면 결과만 알게 되고 그렇게 되는 원인과 과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다. 그러면 매번 상황에 따른 금리 변동과 투자환경에 대한 결론을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금리 상승기와 하락기가 있었다. 기본적인 원인과 결론은 규칙적이지만 변칙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도 있는데 그 변칙은 원인과 과정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 일반인들이 뉴스를 보고 따라 하면 이미 늦은 것이다. 그래서 굳뉴스에 팔고 배드뉴스에 사라는 주식 격언도 있는 것이다. 한국 금리를 알려면 미국 금리를 알아야 하고 그러면 FOMC 회의나 연준위, 점도표 등 뉴스에서 일상으로 나오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내용을 알게 된다. 한국 금리와 미국 금리를 예측하는 유튜브 동영상도 있던데, 사실 예측이라는 말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FOMC 회의록, 위원들의 발언 등으로 누구나 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나의 현 상황을 알아본다. 언제까지 수입 활동을 할 수 있는가? 또는 할 것인가? 수입과 지출을 낱낱이 살펴 새는 구멍을 확인하고 더불어 자산과 부채를 체크한다. 부채가 있는 경우 종잣돈을 모아서 부채를 먼저 갚아야 하는지 아니면 그보다 나은 수익으로 이어질 투자할 곳이 있는지, 내가 그걸 운용할 능력이 있는지 체크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채가 없다면 종잣돈 모으는데 집중하고 종잣돈을 가지고 투자할 곳을 지금부터 알아보는 것이다. 물론 이에 앞서 금리와 경제 공부가 먼저다. 종잣돈을 모으고 그때 공부하는 것은 늦다. 그러니 종잣돈을 모으면서 이 시기에 공부에 집중하는 것을 추천한다. 아줌마는 불후한 노년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위의 3단계를 거치며 종잣돈을 모았고 투자 관련 책과 경제 관련 도서를 파헤쳤다. 결과론적으로 다양한 분야에 투자했고 자산이 많이 불었다. 금수저가 아니더라도 자산을 늘릴 기회가 세상에 널려있다. 미리 포기하지 마라!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기회들이 널려있으니 그 기회를 볼 수 있는 선구안을 키우자!
신라 신문왕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에게 수성(守城)의 보배로 얻은 대나무로 피리를 만든 만파식적(萬波息笛)있으며, 강력한 왕권의 상징으로 천존고(天尊庫)에 소장되었다. 고려 충렬왕이 원나라에 가서 세조를 알현하고, 세조가 망한 송나라의 보기(寶器)인 봉병(鳳甁)과 옥적(玉笛) 등 90가지와 채백(綵帛)을 하사하였다고 전하지만, 이후 옥적은 알 길이 없다. 훗날 조선 숙종 18년(1692)에 경주의 동경관(東京館)에서 옥적이 발견되었고, 만파식적으로 추정하지만, 신빙성이 약하다. 많은 문인의 기록에 옥적이 언급되지만, 이는 설화와 기록의 혼동 그리고 역사의 상징화에 따라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옥유당(玉蕤堂) 한치윤(韓致奫,1765~1814)의 『해동역사』「악제(樂制)와 악기(樂器)」에 의하면, 조선에 옥적이 있는데, 길이가 1장 9촌이며, 소리가 맑고 밝다. 해동의 용이 바친 것이다. -소엄겸(蘇彦謙)의 『조선지(朝鮮志)』: 살펴보건대, 옥적은 신라 때의 적(笛)으로 지금 경주부에 있다. 세속에 “북쪽으로 조령(鳥嶺)을 넘어가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남쪽을 유람할 때 그것을 보니, 길이가 과연 1장 9촌이었으며, 위는 말라 죽었고 아래는 살아 있었으며, 대나무의 색깔 그대로였다. 임진년 병란 때 왜놈들이 이를 부쉈는데, 쇠로 부서진 부분을 때웠다. 훼손을 당한 뒤로는 그 소리가 맑거나 밝지 않다”고 하였다. 이는 이전의 기록을 토대로 단순 경주의 옥적 길이와 대나무 등 형태에 대해 기술하였다.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1805~1865)의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에 “밤이 되자 황옥적(黃玉篴)․청옥적(靑玉篴)을 보고는 불어볼 것을 부탁하였는데, 청옥적은 더욱 청량(淸亮)하여 가늘고 긴 알운(戛雲)의 울림이 있었다”고 전한다.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1808~1858)의 남유일기(南遊日記)에 “정형과 함께 옥적을 부는 두 사람을 거느리고 봉황대에 올랐다. … 옥적은 푸르고 누른 것이 각기 하나씩이고, 옥을 다듬은 것이 대나무 형태 같고 매우 기이하였다. 그 소리가 맑고 깨끗하여 대나무보다 나았지만, 곡조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은 마치 대나무만 못하였다”라며 대나무가 아닌 옥으로 만든 피리를 언급한다. 강와(剛窩) 임필대(任必大,1709~1773)의 유동도록(遊東都錄)에 “향사당(鄕射堂)에 들어가서 옥적을 가져오게 해 살펴보니, 짙은 푸른빛이 아롱지고, 소리는 매우 청량하였는데, 동해의 용이 바친 것이라 하였다. 고려왕이 명하여 가져가 조령을 넘는데, 소리가 나지 않아서 옛 부(府)로 돌려주었다고 하니, 물건의 신기함이 이에 지극하다”라며 짙푸른 빛의 옥적을 언급하였다. 당주(鐺洲) 박종(朴琮,1735~1793)의 동경유록(東京遊錄)을 보면 구체적인 설명이 등장한다. “옥적은 길이가 1척 9촌이고, 푸른 옥으로 만들었으니, 곧 신라의 옛 유물이다. 민간에서는 동해의 용이 바친 것이라 한다. 11월 18일 밤에 금학헌(琴鶴軒)에 앉았다가 나아가게 하여 들으니 그 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지는데 흡사 나라 잃은 한이 서린 듯하였다. 쌀쌀한 날씨 고요한 밤에 관아의 촛불은 꺼지지 않는데, 소리는 더욱 아득히 퍼지니 사람으로 하여금 옛일 회상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게 하였다. 이 유물이 신라왕의 풍류와 전성기의 음악을 몇 번이나 거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랜 세월의 변화에도 부서지지 않고 남아서 오늘날 우리들의 귀에 다시 들려오니, 이 어찌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피리는 조령을 넘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하니 또한 기이하다”라며 푸른 옥으로 만들었음을 강조하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계림옥적변(鷄林玉笛辨)에서 “경주에 옥적 하나가 있는데 신라의 옛 물건이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불면 소리가 나지 않고, 오직 경주의 공인(工人)만이 소리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소리를 잘 내는 공인이 하나가 있으면 다른 공인은 소리를 내지 못하였고, 그 사람이 죽은 뒤에야 그를 대신하여 소리를 낼 자가 나왔다고 한다. 나라에서 일찍이 이 옥적을 거두어 이것을 잘 불 수 있는 사람에게 주고 길에서 불게 하였는데, 그 소리가 크고 맑았다. 하지만 조령의 북쪽에 이르러 옥적이 갑자기 소리가 나지 않았고, 이미 서울에 이르러 많은 상금(賞金)을 걸고 소리를 내게 하였으나, 소리는 끝내 나지 않았다. 이것을 가지고 다시 조령의 남쪽으로 가서 불게 하자, 그 소리가 전과 같이 나왔다고 한다. 이것은 이른바 영험하고 기이하여 따질 길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거짓이라 생각한다. 그 옥적을 보면, 퉁퉁하고 구멍이 좁게 뚫려 소리내기 어려운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소리 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갑작스레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며, 경주의 사람은 아이 때부터 익히고 늙어서 전수하여 그 기예를 독차지하게 된 것이다”라며 옥적이 갖는 기이한 내력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였다. 즉 다산은 옥적의 소리를 듣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불기 어려운 옥적의 구조 때문이며, 귀한 옥적을 혼자만 독차지하려는 욕심 등을 지적하였다. 게다가 영험하고 기이한 옥적의 소문을 무작정 믿고 소리가 나는 이치를 궁구하지 않는 점도 지적하였으니, 역시 학자다운 논리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자유가 확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부르조아지(bourgeoisie)는 새로운 사회의 동력이 되었다. 예술가들은 문학으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그들의 감정을 분출시켰다. 절대왕정시대에는 어림도 없던 일이었다. 감정이 꿈틀거리는 그림, 실연의 아픔을 노래한 표제음악, 이런 것들은 이전 시대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낭만주의의 특징이다. 19세기는 낭만시대다. 바로크의 시작은 이탈리아였지만, 마지막은 독일이었다(비록 당시에는 국가의 개념이 미약했지만). 후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음악가인 바흐나 헨델을 보면 알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의 형식을 마련한 고전파의 대표음악가 역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독일계다. 베토벤은 고전파를 완성시키면서, 한편으론 낭만주의로 가는 길을 터놓았다. 독일 낭만파의 시조는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작곡한 베버(C.M. von Weber/1786-1826)로 알려져 있다. 이어서 슈베르트(1797-1828)가 예술가곡으로 독일낭만주의의 맥을 이었다. 이후 독일 낭만주의는 두 갈래의 길을 걷게 된다. 하나는 멘델스존(L.F.Mendelssohn/1809-1847)으로 대표되는 보수파(신고전파)이고, 다른 하나는 리스트(F.Lisz/1811-1886)와 바그너(R.Wagner/1813-1883)로 대표되는 진보파이다. 전자는 베토벤의 절대음악을 계승하고, 후자는 베토벤의 표제음악을 계승한다. 이들의 싸움은 극렬했다. 하지만 멘델스존의 요절로 균형이 급격히 기울어진다. 이후 브람스(J.Brahms/1833-1897)가 보수파의 바통을 이어받아 기대주로 부상한다. 그리고 바그너가 죽을 때까지 살벌한 논쟁을 이어간다. 마이어베어(G.Meyerbeer/1791-1864)는 독일인이다.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를 공부하고, 파리에서 일명 ‘그랜드오페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탈리아 낭만파 오페라의 선구자 로시니(G.A.Rossini/1792-1868)도 마지막 오페라이자 초대형 작품인 기욤 텔(Guillaume Tell)을 파리에서 론칭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프랑스인 베를리오즈는 로마대상을 수상하고, 실연의 아픔을 담은 환상교향곡으로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구자가 된다. 그는 오페라 ‘벤베누트 첼리니’를 만들어 마이어베어나 로시니 급의 오페라 작곡가가 되고 싶었지만, 흥행에는 실패한다. 당시 이탈리아는 벨칸토 오페라의 전성기였다. 로시니의 제자인 도니체티(G.Donizetti/1797-1848)와 벨리니(V.Bellini/1801-35)의 경쟁 속에, 이탈리아는 오페라 강국의 지위를 굳건히 했다.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와 벨리니의 ‘청교도’는 일명 광란의 오페라로, 낭만주의의 특징인 ‘광기’를 구현한 다분히 낭만적인 오페라다. 한편, 이탈리아에서 기악곡으로 유명한 작곡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클래식 음악의 주도권이 북쪽 독일권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책을 다 쓰고 나면 또 하나 고민되는 것이 있다. 바로 추천서다. 이것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책의 무게감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게감이란 것은 헛되게 폼이나 잡자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책이 가치 있는지를 그에 걸맞은 사람에게 진실감 있게 인증받자는 것이다. 추천서는 결혼식 주례사와도 비슷하다. 요즘 결혼식은 형식적인 주례를 과감히 생략하고 축제처럼 꾸미는가 하면 신랑신부를 가장 잘 아는 양가 어른들이 주례 대신 당부하고 인사하는 순서들로 채워지곤 하는데 확실히 보기 좋은 모습이다. 2000년대 이전, 과거 주례사는 주로 신랑 쪽 아버지가 친분 있는 지역 정치인이나 영향력 있는 사업가들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혹은 신랑이 나온 학교 교수나 고교 은사님에게 부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신랑과 관련 있는 교수·선생님이라면 정겨움이나 친근함이라도 있지, 정치인이나 사업가라면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고 그 틈에서 진심 어린 주례사가 될 턱도 없다. 추천서도 이런 것이다. 기본적으로 책을 쓴 저자 및 책 내용과 관련 있는 인사가 책을 제대로 읽고 추천서를 써야 한다. 만약 그 관련자가 사회적인 유명세나 권위가 있으면 더욱 좋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추천인이 유명하거나 권력이 많다고 추천서를 쓰게 하면 추천서에 진실성이 떨어지고 빈축만 살 뿐이다. 다시 나의 첫 책 ‘니, 꼬치 있나?’를 들먹이면 이 책의 추천서는 만화가 이현세 화백님이 써주셨다. 이현세 화백, 아니 현세 형님은 나의 경주고 선배님으로 동창회를 통해 이미 자주 만나 뵈었다. 이 책을 낼 때는 10년 넘게 집도 가까이 있어서 수시로 형님의 단골 술집에서 만나 담소도 나누었다. 더구나 형님은 온갖 만화작품에 경주 이야기를 녹여 내셔서 누구보다 경주 홍보에 열심인 분이셨다. 100% 경주 이야기인 내 책이 나왔을 때 책 전부를 읽고 흔쾌히 추천서를 써주셨다. 또 한 분, 나와 경주 고등학교 동기생인 YTN 김용섭 기자가 추천서를 써주었다. 친구와는 가족 간에도 잘 알던 막역한 사이였고 동기회 인터넷 카페에 올린 내 글을 거의 다 읽었으니 추천서가 술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친구는 특별히 자신이 근무하는 YTN에 일부러 내 책을 소개하는 보도도 내주었다. 이를테면 ‘니, 꼬치 있나?’는 진심과 권위와 홍보까지 환상의 조합을 이룬 추천서를 받은 셈이다. 그에 비해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는 추천인을 일부러 전부 뺐다. 당시 최염 회장님이 정치계의 유력 인사들을 몇 분 거론하시며 추천서를 받자고 하셨지만 조심스럽게 그럴 일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경주최부자 정신이 부침 심한 정치인들 추천서로 인해 혹여라도 정치적인 색깔을 띠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현시대 어떤 정치인도 12대 경주 최부자를 제대로 알고 추천서를 써줄 것 같지 않아서였다. 반면 이 책에 반드시 추천서를 받고 싶었던 분들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인물들이고 경주최부자와도 인연이 있었던 분들인데 공교롭게도 그분들의 공통점이 세상 어느 책에도 추천서를 써본 적 없다는 것이었다. 뒤에 몇몇 문화계 인사들과 학계 인사들을 떠올렸지만 경주최부자 정신은 경주최부자 자체로 숭고하다는 판단에서 추천서 없이 책을 내자고 결론지었다. 자서전은 아무래도 정치인들이 가장 많이 쓰다 보니 그들이 어떤 추천인을 선택하는지도 관심이 갈 것이다. 참고로 내가 출간한 대부분 정치인들의 자서전은 오히려 정치계 인사들의 추천서를 받지 않고 출간했다. 책을 낸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에 영향을 줄 만한 상위의 정치인들을 추천했지만 역시 ‘진실성’ 면에서 끝까지 주장하지 않았다. 지역구 유력 인사라는 이유로 끝내 정치인들을 추천서로 넣자고 한 어느 광역의회 의원은 아예 정치인들로 일괄 추천서를 받은 경우였는데 이것은 다분히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대신 내 입장에서 저자들의 초등학교 선생님과 고교 은사님 같은 분들의 추천서를 즐겨 받았다. 이분들 대부분은 실제로 자서전에 등장하는 분들이어서 저자들의 성장과정에 매우 깊은 영향을 주신 분들이다. 그만큼 진실된 추천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정치인의 책에서 추천서를 대놓고 많이 받은 경우도 있었다. 어느 지방도시 시장의 책에서는 무려 100명 가까운 분들의 추천서를 받아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시장에게 그렇게 많은 추천서를 주문한 이유는 그가 그만큼 많은 분들과 진심으로 교감을 나누고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100명이나 추천서를 받다 보니 거기에는 전직 국무총리에 모당 대표를 지낸 인물도 있었고 어느 모로 보나 막강한 정치력을 가진 정치인들도 다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일체 가나다순에 의해 배열했다. 그러다 보니 동네 할머니 밑에 전직 국무총리가 들어가고 고명한 스님과 유명한 목사님이 부녀회 회원과 체육회 아저씨 밑에 들어가는 ‘대단히 멋진’ 상황이 자연스럽게 나열됐다. 그래도 대표할 만한 추천서 한 분은 따로 올려야지 싶어 원고 하나를 골랐는데 그것은 그 시장에게 항의해 단식을 감행했던 할머니가 직접 손으로 쓴 편지였다. 그 할머니가 단식할 때 그 시장 역시 할머니 옆에서 굶으면서 사흘 동안 대화를 나눈 끝에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냈고 그 일로 할머니는 그 시장의 열렬한 지원자가 됐던 것이다. 편지에는 바로 그 사연이 마치 일부러 부탁이라도 한 듯 정성스럽게 쓰여있었다. 드라마...,! 그 편지는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것이어서 그 추천서를 메인 추천서로 올리겠다고 주장했을 때 그 시장은 물론 누구도 반대의견을 내지 않았다. 뒤에 출판 기념회를 하면서 보니 그때 추천서를 보내주신 분들이 모두 자랑스럽게 자신의 추천서를 찾아 읽으며 책에 참여한 것을 뜻깊게 생각했다. 편지 쓴 할머니도 오셨는데 마치 내가 그 정치인이라도 된 듯 반가웠다. 추천인이 결정되고 나면 경우에 따라 추천인이 저자에게 추천서를 대신 써서 보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대필했던 어느 정치인도 그랬다. 그런데 그 추천서 당사자가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유명한 시인이었다. 정치인과 어릴 때 한 동네에 산, 정치인의 누나와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그런데 어렸을 때 헤어진 이후 자주 만나지 못해 감정을 어떻게 끌어올려야 할지 모르겠고 마침 몸도 불편해 정신을 집중해서 무얼 쓸 만한 사정이 못 된다며 필요한 내용을 써서 거꾸로 보내보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 정치인의 책을 대신 썼으니 당연히 추천서도 대신 쓸 수밖에... 급히 그 시인과 정치인의 관계, 정치인과의 어렸을 적 에피소드, 그 뒤의 인연 등을 상세히 조사한 후 그 시인이 쓴 여러 편의 수필까지 읽어본 다음 추천서를 써서 보내드렸다. 시인의 수필을 읽은 것은 그 시인의 글쓰기 패턴과 습성 등을 최대한 고려해서 쓰기 위함이었다. 며칠 후 그 시인이 놀라운 답장을 보내왔다. 누가 이렇게 자기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썼느냐는 것이다. 사실관계에 대한 두어 줄의 수정만 거친 후 그 원고가 그대로 추천서로 올라갔다. 글 쓰는 작업할 때 이런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프로 작가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상에서 보듯 추천서의 제일 관건은 책의 진정성이고 책을 소개하는 중요한 단초다. 위의 다른 예에서 보듯 정치인들에게는 또 다른 전략적 선택일 수 있다. 어느 쪽이 되었건 추천서는 저자 대신 책을 소개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자 몇 안 되는 마케팅 도구이다. 책을 쓰신 분들은 자신의 책을 열렬히 알려줄 특별한 지인이 있는지 찾아보자. 친할수록 좋고 유명할수록 좋고 책을 알릴 힘이 있으면 더더욱 좋다!
경북도와 경북문화관광공사가 주최하는 여행 프로그램으로 대구 시민과 울산시민, 경북도민을 제외한 전국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경북도내 각 지역을 둘러보고 특히 해당지역 전통시장을 반드시 방문하는 ‘고향사랑 전통시장 탐방’ 상품인 시티 패스(city pass)가 출시되어 주목을 끈다. 시티 패스는 1인당 3만원의 경비를 내면 3만원의 온누리 상품권을 도로 참가자에게 지급, 이를 해당 경북지역 여행도시의 상가나 전통시장에서 다시 쓸 수 있도록 조치한 관광상품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경북을 찾은 대중적 버스관광이 급격히 줄어든 시점에서 대구 및 울산 시민들과 전국 각 지역 국민들에게 경상북도 관광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관광지 상가와 전통시장의 지역 특산물을 판매하고 상가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한 일석이조의 상품으로 평가된다. 경주 금아여행사가 주관하는 이 관광상품은 20인 이상 모객됐을 때 출발하는 것으로, 매주 토요일 대구 ‘동대구역 제2 맞이방’과 울산 ‘태화강역 광장’에서 09시 30분에 출발하는 상품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8월 20일 울진과 영덕편을 시작으로 8월 27일 문경과 포항, 9월 3일 안동과 구미, 9월 17일 영천과 상주, 9월 24일 청송과 봉화편이 준비돼있다. 당일치기로 시행되는 이 상품은 교통비를 기본으로 일정에 포함된 입장료, 여행자 보험이 포함돼 있으나 중식은 불포함이다. 대신 참가비로 낸 3만원을 온누리상품권으로 되돌려 주므로 현지에서 사먹을 수 있다. 아쉽게도 이 두 상품은 대구와 울산에서만 출발한다. 만약 경상북도를 제외한 다른 도시에서는 출발할 20인 이상 단체가 있을 경우 별도로 문의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이번 관광상품에서 경북도민의 참여가 제한된 것에 대해 관계자는 “이 상품은 경북으로 타지역 여행객들을 유치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라 경북도민들이 제한됐다”며 도민들의 양해를 당부했다.(문의 : 금아여행사 054-742-7001)
화재 예방과 진압을 담당하던 소방관들이 응급구조대 역할을 맡게 된 것은 1971년 대연각 호텔 화재 참사를 계기로 특전사 출신 구조대를 편성하면서부터였다. 대형화재, 항공기 추락이나 대형교통사고, 지진 등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에서 인명을 구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응급구조대가 배치된 것은 88서울 올림픽을 전후해서이고 성수대교 붕괴참사(1994), 삼풍백화점 붕괴참사(1995) 등을 거치며 각 시 단위 소방서에도 응급구조대가 배치되기 시작해 2000년 전 지역 소방서에 119구조대가 배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119구조대가 벌집을 떼준 것은 언제쯤부터였을까? 소방방제청 소속 소방서들이 119안전센터를 발족한 것이 2007년이니 공식적으로 이때부터 뱀 퇴치, 멧돼지 퇴치, 말벌집 제거 등을 지원했을 것이다. 지금은 119안전센터에 생활안전구조대가 따로 설치돼있다. 지난 14일 엄필란 씨가 페이스북에 119구조대에 신고해 말벌 집을 제거한 소식을 올렸다. 오래 비운 농장에 오랜만에 돌아가 작업을 하려고 보니 전기박스 안에 무지 큰 말벌집이 있었다고. 엄필란 씨는 이런 일로 바쁜 119대원들을 부르는 것이 맞는 일인지 몰라 조심스럽게 전화했다. 그러나 엄필란 씨의 염려와 달리 119에 신고하자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119대원들이 달려와 순식간에 벌집을 제거해 주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그보다 앞서 9일에는 커피 명가 ‘얀’의 손인석 씨도 얀 주위에서 벌집을 발견, 119구조대에 신고해 벌집을 제거했다. 손인석 씨는 출동한 구조대원들이 고마워 과테말라 원두로 내린 아이스 커피를 대접했다고 썼다. 기자 역시 25~6년 전쯤 집 근처의 벌집을 제거하기 위해 119에 신고한 적 있다. 그랬더니 119대원들이 누가 그런 일을 119에서 처리한다고 했냐며 난감해했다. ‘미국 출장 가서 봤다’고 했더니 고맙게도 방화복으로 완전무장한 채 달려와 벌집을 떼주었다. 그때는 임무 외의 일을 해준 셈이니 지금 생각하면 고맙기 이를 데 없다. 최근 119소방관들의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SNS상에서 높아지고 있다. 온갖 사고와 재해,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는 119대원들을 위해 국민들이 나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당국은 반드시 소방공무원들의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공정한 주민참여 예산제가 되길…
작은 나무 조각이야기 나에게 가까이 있는 것들, 작은 것들, 귀여운 것들, 동물들, 사람들, 생각들, 나는 이것들을 조합하여 조각하고 그것들은 즐거운 이야기가 된다.
가족 중에 암 환자가 있다면 불안한 마음이 든다. 유전된다는데 어느 정도인지, 또 나 때문에 내 딸이나 아들이 암에 걸린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다. 엄마나 언니가 유방암으로 진단받으면 더욱 불안하다. 그러나 유방암은 유전적 요인이 10% 이내이고 진단과 치료방법이 눈부시게 발전해 정기검진만 잘 받는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20년도 더 된 일로 기억한다. 필자가 대학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는 20~30대 여성이 유방암으로 진단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몇몇 환자는 결혼을 포기하거나 파혼당하는 걸 보기도 했고, 그 후 젊은 유방암 환자들이 힘들게 치료하는 과정을 보는 내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힘든 사람은 어머니였을 것이다. 특히 본인이 유방암으로 진단받은 적이 있다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유방암의 특징과 예후를 설명하며 안심을 시키려 해도 유전에 관한 자료는 외국 데이터만 있던 시절이라 ‘유전이 되나요?’라는 질문에 ‘외국은 이러이러합니다’라는 설명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마음의 짐을 덜어드리기에는 부족했던 것 같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두 번도 넘게 변한 지금은 한국인에 대한 유방암 관련 연구 자료가 발표되고 있다. 그동안 임상 현장에서 받은 질문과 걱정을 ‘한국산’ 자료를 토대로 답을 해보자. Q. 엄마가 유방암에 걸리면 딸도 환자가 될 위험이 큰가요? A. 유전되는 경우는 5~10%입니다. 가족 중 유방암 환자가 있으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발병 위험이 2배 정도 높다. 유방암으로 진단받은 가족 수가 많거나 평균보다 젊은 나이에 진단되는 경우에도 그 위험이 크다. 쉽게 말하면 40대에 유방암 진단을 받은 어머니를 둔 딸이 60대에 유방암 진단을 받은 어머니를 둔 딸보다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더 높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핵심은 ‘유전’만이 원인은 아니다! 유방암의 원인은 크게 ‘유전’과 ‘생활환경’ 요인으로 나눌 수 있다. 지금까지 진행된 많은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의 유전성 유방암’은 전체 유방암의 약 5~10%를 차지한다. 어머니들의 걱정은 실제 10명 중 1명 미만의 경우에만 해당한다는 말이다. 또 유전자 검사를 하면 유방암의 위험성을 미리 확인할 수도 있다. 이러한 유전성 유방암은 미국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어머니는 난소암, 이모는 유방암으로 사망한 가족력이 있어 유전자 검사를 받았고 BRCA(BReast CAncer gene: 브라카) 유전자 돌연변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예방적 유방 절제술을 받았다. 물론 이 또한 오래전 일이라 현재는 이런 유방절제술을 바로 권하진 않고 다른 다양한 관리 방법을 협의하고 있다. 본래 BRCA 유전자는 암으로 변할 수 있는 손상된 DNA를 고치는 역할을 하지만 돌연변이가 생길 경우(약 400명 중 1명의 확률) 유방암을 막아줄 수 있는 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고 50% 확률로 남녀 구분 없이 자녀에게 전달될 수 있어 아들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유전자 이상이 있는 이런 경우는 전체 한국인 유방암 중 5~10% 정도만 해당된다. Q.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유방암 환자가 있으면 유전될 확률은 어느 정도인가요? A. 10% 미만입니다. 가족 중 유방암 환자가 있는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유방암은 크게 ‘유전성 유방암’과 ‘가족성 유방암’으로 나뉜다. 유전성 유방암은 유전자변이를 물려받은 것으로, 평생에 걸쳐 유방암 발생 가능성이 70~80%로 알려져 있다. 쉽게 말하면 자기 나이가 유방암 발생 확률이라 생각하면 된다. 유방암 외에 난소암, 남자의 경우 전립선암, 췌장암 등 다른 암의 위험성 도 올라간다. 하지만 전체 유방암 중 10% 미만이다. 가족성 유방암은 유전적 원인 없이 가족이 공유하는 생활환경적 요인으로 발생되는 경우이며, 전체 유방암 중 15% 정도가 해당된다. 이런 유전자 문제나 가족의 생활환경을 고려해도 부모로 인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유방암은 25% 미만이다. 이런 연구를 종합해보면 유방암의 원인은 유전적 특성이라기보다 사회환경적 원인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발병률이 높아지는 선진국형 암의 대표적인 예가 유방암이니 앞으로도 증가하는 유방암의 원인은 대부분이 환경요인일 것이다. 하지만 유전자 문제로 발생되는 경우 젊은 나이에 나타나거나 악성도가 높은 유방암이 생길 수 있어 대한민국 건강보험에서는 기준을 정하고 유전자 검사를 국가보험으로 일부 지원하고 있다. 아래 같은 경우는 유전적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 위 경우 환자 본인의 혈액을 통해 유전자변이가 있는지 검사한다. 혈액 20cc를 채취해서 3~4주 정도 지나면 유전자 이상 여부를 알 수 있고 정확도는 90% 정도이다. 이 결과를 기초로 가족들의 전반적인 건강관리 프로그램을 조정할 수 있으니 ‘유전이 되나요?’라는 질문에 더 정확한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위험요인들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젊은 여성 대부분의 생활 모습과 닮아 있어 바꾸기는 쉽지 않다. 자! 걱정을 만드는 유전적 원인은 10%이고 검사방법도 확실하게 있으니 대책을 세울 수도 있다. 90%를 차지하는 생활환경은 바꾸기가 쉽지도 않다. 빨리 결혼해 자녀를 많이 낳으라고 그 누가 마음 편히 말할 수 있을까 말이다. 다행히 20년 동안 유방암의 진단, 치료, 관리는 많이 발전해왔고 조기 진단만 된다면 생존율이 95%에 달할 정도로 어려운 병이 아닌 단계에 이르렀다. 따라서 규칙적인 자가검진과 병원 검진을 생활화한다면 유방암은 더는 어머니를 눈물짓게 만드는 병이 아닌 날이 올 것이다. 자료제공 : 한국건강관리협회 대구광역시지부 건강검진센터 글 : 이병길 한국건강관리협회 전북지부 건강증진원 과장 자료출처 : 한국건강관리협회 건강소식 발췌
권영석 봉화일보 회장이 최근 제19대 한국지역신문협회(한지협) 중앙회장에 당선됐다. 권 회장은 "앞으로 한지협 중앙회장으로서 풀뿌리 언론인 지역신문이 풀뿌리 민주주의인 지방자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한 "전국에 소재하고 있는 한지협 회원사들이 지역사회와 함께하고 지역민들과 상생하는 '공동체문화' 조성을 위해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전국 네트워크'도 강화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권 회장은 한지협 경북협의회 회원사인 봉화일보와 대구경북 일간지 경안일보를 경영하고 있으며, 임기는 올해 8월 1일부터 2024년 12월 31일까지다. (사)한국지역신문협회는 1991년 1월 지역민들의 알권리 충족과 지역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발족됐다. 전국 최초로 지역신문사 회원사들이 결성한 사단법인이다. 서울·경기협의회를 비롯해 전국에 시·도협의회를 두고 있으며, 각 시·군·구 200여 회원사들이 지역민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풀뿌리 언론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자연미 통해 휴식 제공하는 백자 다구 원리에 순응하는 자연스러움과 평화로움의 의미를 다구에 담아낸다. 전통 청화백자의 아름다움 위 현대적 감각으로 조색한 톤과 문양을 보태고 소탈함을 함께 다구에 담는다. 어린 시절 들에 핀 꽃잎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몰입하듯 하늘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에 마음 빼앗기듯 소탈한 백색 위 연꽃과 모란, 국화 등의 회화를 시문한다. 차 한잔 즐기는 동안 바쁜 생활 속 놓쳐버린 계절을 음미할 수 있는 매개로서 다구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