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최종편집:2020-09-28 오후 07:19:02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
INTERVIEW 종합 출향인소식 SNS는 즐거워 학교소식 인사 경주 동아리 탐방
뉴스 > INTERVIEW > 셔블&서울,경주사람들

신라인면와당의 왕경도 선생 !-‘신라의 미소’ 얼굴무늬 수막새 최초로 상품화

“신라의 미소는 우리 조상님들의 얼굴이자 우리의 얼굴이지요.
손으로 상품화 한 것은 평생 잊지 못할 자랑이지요”

박근영 기자 / 1455호입력 : 2020년 09월 10일
↑↑ 직접 만든 신라인면와당을 들어보이는 왕경도 선생.

지난 7월 22일 국립중앙박물관에 뜻 깊은 전시물이 초대됐다. 9월 27일까지 진행되는 특별전 ‘새 보물 납시었네’에 ‘신라의 미소’라 일컬어지는 ‘얼굴무늬 수막새’가 주인공이었다. 얼굴무늬 수막새는 선덕여왕 대에 지어진 사정동 영묘사지(靈廟寺址)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영묘사지는 이전에는 흥륜사지로 잘못 알려진 곳이다.

얼굴무늬 수막새는 일제강점기 경주 공의(公醫)로 활동하던 ‘다나카 도시노부(1905~1993)’라는 인물이 소장하고 있다가 그가 일본으로 돌아간 1940년 경 자취가 사라졌다. 이것을 전국립경주박물관장이던 박일훈(1913~1975)선생이 경주공립보통학교(계림초) 스승으로 조선총독부 박물관 제3대 경주분관장을 지내며 최초로 ‘신라의 미소’를 세상에 소개한 ‘오사카 긴타로’라는 인물을 통해 기증반환 받은 사실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다.

이 수막새를 보기 위해 경주고도보존회 등 출향인 단체들이 박물관 나들이를 계획하는 등 서울로 온 고향 유물을 보러갈 기회를 만들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얼굴무늬 수막세감상은 ‘광화문집회’ 후폭풍으로 코로나19가 다시 창궐하면서 박물관들이 다시 문을 닫아 걸며 수포로 돌아갔다.

신라의 미소는 박물관 개장에 소장되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으나 이를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낸 장본인이 왕경도 선생이다.

“그때 ‘먹고 살려고’ 토기로 토산품을 만들었지요. 신라의 와당이나 신라 유물의 특색을 지닌 토기 같은 것을 상품으로 만들어 팔았는데 마침 신라의 미소가 나온 겁니다. 그때는 ‘인면와당(人面瓦當)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마침 박물관에 전시된 인면와당 그림을 그린 것이 계기가 되어 ‘옳다 이거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선생은 즉시 석고로 틀을 만들고 신라 때의 작법으로 틀에 찰흙을 넣은 후 일일이 손가락으로 눌러 와당형태를 만들고 이를 다시 가마에 구워 ‘신라인면와당’이란 이름의 토기제품을 만들었다. 이것을 본 경주시청 등 여러 기관에서 불티나게 주문하기 시작했다.

“그게 그렇게 잘 팔릴 줄 몰랐지요. 한때 직원이 20명쯤 될 만큼 일이 밀려들었지요. 그때는 단체 주문제작을 주로 했는데 만들기 바빴어요”

왕 선생은 당시 신라의 미소는 새로운 경주를 알리는 ‘완전히 새로운 관광상품’으로 각광받았다고 술회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새로운 활력을 줄 관광상품이 필요한데 그 당시 국민적 감성에 신라의 미소가 딱 들어맞았던 것. 그렇게 몇 년 동안 인면와당은 경주를 알리는 트레이드마크로 경주 기념품의 최상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왕경도 선생의 인면와당은 경주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 있지 못한 채 해가 지날수록 잊혀졌다. 대신 ‘인면와당’ 하면 으레 ‘고청사’를 떠올리게 되었다. 고청사는 향토사학자이자 전통인형연구가인 고청(古靑) 윤경열 선생(1916~1999)의 공방이름이다.

“혹시라도 이에 대해서 오해가 없길 바랍니다. 고청선생님은 당대 훌륭한 예술가이시고 향토사학자로 경주의 큰 어른이셨지요. 무엇보다 개인적으로는 저의 스승님이시기도 합니다”

왕 선생은 당시에는 저작권이나 지적소유권 같은 것이 없을 때인 만큼 인면와당을 만드는 데도 특별히 누구의 등록 상품 같은 개념이 없었다고 술회하며 더군다나 스승님이 인면와당을 만드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고 술회한다. 그러면서 윤경렬 선생과의 인연을 길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가 지금은 어린이 박물관학교 1기생이었어요. 그때도 선생님은 저명한 향토 사학자에 인형 제작가셨지요. 인형이란 것이 그냥 장난감 개념이 아니고 선생님의 인형은 예술품의 가치로 인정받을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어요”

↑↑ 왕경도 선생이 만든 각종 기념품들.

-윤경렬 선생 제자… 다수 경주 문화재들 상품으로 만들어, 새마을 운동 지도자 등으로 사회적 공헌, 대통령 표창도…!

어느 날 유적지 답사 나갔다가 윤경렬 선생이 나누어준 도화지에 타다 남은 숯검정으로 그림 한 장 그린 것이 윤경렬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왕경도 학생이 그린 그림을 보고 감탄하던 윤경렬 선생이 답사 간 다른 학생들이 밥 짓고 청소하는 동안 옆에 꼭 앉혀놓고 그림만 그리라고 명하셨다는 것.

“나도 모르는 소질을 선생님께서 알아보시고 그쪽으로 큰 격려를 해주셨지요”

이렇게 인연을 맺은 왕경도 선생은 13살 때부터 윤경렬 선생의 공방을 드나들며 조각을 배웠고 군대 제대 이후에도 별다른 생각 없이 윤경렬 선생의 공방에 ‘일 거들러’ 나가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왕 선생은 타고난 예술감각과 고청사를 오가며 익힌 기술로 1960년대 중반, 마침내 인왕동 반달마을에 ‘고려토산품’이라는 공방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선생의 작품을 시중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신라 관련 토산품들이 인기를 끌며 선생의 공방은 쉴 사이 없을 만큼 성업이었다고. 특히 인면와당은 크기와 색깔, 쓰임을 달리하며 목걸이용, 메달용, 벽걸이용 장식, 건물외벽 장식 등으로 다양하게 제작되어 경주를 대표하는 기념품으로 자리 잡았다.

“인면와당을 고청 선생님 상품으로 생각하는 분들은 선생님의 명성을 익히 아셔서 그럴 겁니다. 그에 대해서는 일절 개의치 않습니다만 그때도 알만한 분들은 모두 제가 이 상품을 처음 제작했다는 것을 익히 알고 계셨어요”

왕 선생은 마침 인터뷰를 위해 찾아두었다며 오래 된 신문 스크랩들을 꺼내 놓았다. 그 중 대동일보 1994년 4월 8일자 신문에 ‘신라여인의 해맑은 웃음재현 한평생’이란 제목으로 큼지막한 기사가 실려 있다. 당시에는 신라의 미소를 ‘여인’으로 단정하고 있었다는 자료가 재미있다. 이렇듯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기보다 스승의 명성에 누가 될까 염려하는 선생의 마음이 오히려 아름답다.

선생은 이와 함께 고 최용주 선생, 김윤근 선생 등 신라문화동인회 인사들의 젊을 시절 기고문과 인터뷰들이 실린 오래된 스크랩들도 보여준다. 그러면서 당대 문화인사들, 경주의 공방들을 이끌며 선생과 함께 경주의 토산품시장을 살찌운 선후배들과 지금도 서로 소통하며 지내는데 코로나19로 이마저도 최근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한숨이다.

선생은 비단 신라의 미소뿐 아니라 안압지에서 출토된 쌍조문(雙鳥紋)수막새, 신라시대 만들어진 보상화문, 귀면와 등을 상품으로 제작하여 경주의 역사문화를 알리는데 앞장섰다. 특히 1975년 미국자유의 종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계 각국이 자국의 기념물을 보낼 때 선생이 제작한 보상화문전을 보낸 것을 아직도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꼽는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조선시대 시집가는 딸 성교육으로 사용되었던 성생활 체위를 묘사한 풍월설화별전(風月雪花別錢)을 페넌트로 제작하는 등 시대를 뛰어 넘는 과감한 시도도 구사하며 소비자들의 취향을 맞추어냈다.

“안타깝게도 소비성향변화와 특히 중국에서 값싼 기념품들이 제작되어 들어오면서 경주의 전통 공방들이 다 죽었어요”

선생 역시 2000년대 들어오면서 급격히 수요가 줄어들어 공방을 그만 둔지 오래다며 애석해 한다. 대신 최근까지 경주문화재 발굴단에서 현장감독을 맡아 활동하며 또 다른 삶의 보람을 찾아 왔다고 술회한다.

선생은 한때 우리나라 지역발전에도 지대한 공을 세운 장본인이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 시작되던 60년대 초부터 34년 동안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했고 경주지회장으로도 활동했다. 구 인왕동 통장활동과 경주월성지구 반공연맹총회장 등 다수의 사회적 역할도 장기간 맡아서 했다. 이런 공로로 1982년에는 대통령 표창도 받은 바 있다.

“경주사람들, 특히 나이 먹은 노인들이 너무 꽉 막혀 있어요. 후배들은 그러지 말아야지 싶은데 그게 쉽지 않겠지요? 좀 넓은 생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경주가 발전하지요”

80대 초반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형형한 눈빛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지닌 선생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흔든다. 선생의 집을 나서는데 한쪽에 붙여놓은 선생의 작품 ‘인왕상’이 눈길을 끈다. 선생은 어쩌면 경주의 문화공방을 마지막까지 지켜온 인왕상 아니실까? 그 명맥이 끊어진 것이 아쉽기만 하다.
박근영 기자 / 1455호입력 : 2020년 09월 10일
- Copyrights ⓒ경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INTERVIEW
문화·행사
금요연재
포토뉴스
형산강! 물길따라, 이야기따라
사설
칼럼
가장 많이 본 뉴스
방문자수
어제 방문자 수 : 31,738
오늘 방문자 수 : 19,190
총 방문자 수 : 3,506,817,338
상호: 경주신문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69 / 발행인·편집인 : 손동우 / 발행인 : 정학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손동우
mail: gjnews21@hanmail.net / Tel: 054-746-0040 / Fax : 054-746-0044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024
Copyright ⓒ 경주신문 All Rights Reserved. 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