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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로 가는 저녁
정윤천
발해에서 온 비보 같았다
내가 아는 발해는 두 나라의 해안을 간직하고
있었던 미쁘장한 한 여자였다
마을에서는 유일하게 자전거를 다루어 들을 달리던
선친의 어부인이기도 하였다
학교 가는 길에 들렀다던 일본 상점의 이름들을
사관처럼 늦게까지 외고 있었다
친목계의 회계를 도맡곤 하였으나
사 공주와 육 왕자를 한 몸으로 치러 냈으나
재위 기간 태평성대라곤 비치지 않았던
비련의 왕비이기도 하였다
막내 여동생을 태우고 발해로 가는 저녁은
사방이 아직 어두워 있었다
산협들을 연거푸 벗어나자
곤궁했던 시절의 헐한 수라상 위의
김치죽 같은 새벽빛이
차창에 어렸다가 빠르게 엎질러지고는 하였다
변방의 마을들이 숨을 죽여 잠들어 있었다
병동의 복도는 사라진 나라의 옛 해안처럼 길었고
발해는 거기 눈을 감고 있었다
발목이 물새처럼 가늘어 보여서 마침내 발해였을 것 같았다
사직을 닫은 해동성국 한 구가
아직 닿지 않은 황자나 공주들보다 먼저 영구차에 오르자
가는 발목을 빼낸 자리는
발해의 바다 물결이 와서 메우고 갔다
발해처럼만 같았다
-재한 일본인 처의 죽음을 바라보는 한 시선
경주 나자레원은 재한 일본인 아내를 돌보는 시설이다. 그곳에는 아직 아홉 분의 일본인 할머니들이 살아계신다. 그분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조선인을 만나 결혼해 한반도로 건너왔지만 대부분은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해방 직후 한국인 남편을 따라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 여성이 5000명이 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녀들은 그동안 ‘가해국민’이라는 마음의 짐을 가지고 죄인처럼 살아왔다.
‘발해’(발해는 두 나라 해안을 간직한 이쁘장한 여성으로, 발목이 물새처럼 가늘어 붙인 이름)라는 상징을 가진 그녀가 그렇다. “마을에서는 유일하게 자전거를 다루어 들을 달리던” 한량, 선친의 아내였던 그녀는 아마 식민지 시절 일본에 유학을 갔거나, 공장 노동자로 근무하던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고 해방 후 이 나라에 따라 왔던 모양이다. 그녀의 일생은 “비련의 왕비”로 표상되듯 고통 그 자체였다.
“학교 가는 길에 들렀다던 일본 상점의 이름들을”을 노년까지 기억할 정도로 강렬한 향수를 간직했지만 그곳에 가지도 못했고, 6남 4녀(“사 공주와 육 왕자”)를 낳았으나 곤궁한 시절을 보냈다. 병원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고도 그녀가 영구 차에 오르기까지 몇몇 자녀는 도착도 않았다. 이 가련한 죽음의 통보를 받고 찾아가는 저녁의 풍경이 이 시에는 있다. 이 시는 상징과 반어가 돋보인다, 그녀가 ‘왕비’로, 그녀의 주검이 ‘해동성구’로 표현된 반어를 살펴보는 것도 이 시의 덕목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나 재한 일본인 처의 문제는 식민지 강점과 전쟁이 만들어낸 산물의 양면이다. 그분들은 모두 전쟁의 피해자들이고 우리가 껴안아야할 현실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시점에서 재한 일본인 처의 아픈 일생을 담고 있는 시편을 만나는 아픔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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