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가 외국인을 교육한 후 일손이 부족한 농촌현장에 투입하는 외국인 계절근로자 사업 추진이 순항 중에 있다는 소식이다. 주낙영 시장과 경주시의원 등 일행은 지난 17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서헹쑤어(Heng Sour) 노동부 차관과 외국인 계절근로자 도입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협약은 캄보디아 노동부가 우수 인력을 지원하고, 경주시는 이들의 거주 및 근무여건 조성 등을 지원하고, 농업기술을 전수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앞서 경주시는 지난달 28일 필리핀 GMA시와도 ‘외국인계절근로자’ 도입을 위한 MOU를 체결한 바 있다. 외국인 계절근로자 프로그램은 극심한 농촌일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전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도다. 하지만 국내로 들어온 외국인들 중 일부가 무단이탈, 불법체류 등으로 이탈자가 발생하면서 논란이 되는 등 제도의 국내 정착이 쉽지 않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주시는 한국에 거주하는 결혼이주여성 가족과 국제구호단체 ‘(사)나눔재단 월드채널’이 운영하는 캄보디아 초등학교 학부모 등을 연수 대상자를 한정했다. 이들에게 사전 농업연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계절근로자로 연계하는 방식이다. 경주시가 이 같은 시도를 통해 외국인 근로자의 이탈을 방지하고 부족한 농촌일손 문제를 해결한다는 계획이다. 외국인을 활용한 농촌 인력부족 문제 해결의 성공사례를 만들어 보겠다며 경주시만의 특화된 정책을 마련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다. 경주의 농촌은 고령화로 일손부족에 허덕이고 있고, 인건비도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농민들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경주시가 추진하는 외국인 계절근로자 도입이 가뭄 속 단비 역할을 하길 바란다.
3년째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은 글로벌 공급망을 붕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까지 겹쳐 ‘고물가·고금리·고환율’ 3고 현상으로 전 세계가 신음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9월 소비자물가지수는 108.93으로 작년 같은 달보다 5.6% 상승했다. 지난 6월과 7월엔 각각 6.0%, 6.3% 올라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11월(6.8%)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나타냈다. 전국의 농촌과 공장에서도 치솟는 물가상승으로 유례없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는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물가고로 존폐마저 우려되는 곳이 있다. 무료급식소다. 무료급식소는 매일매일 홀로 사는 노인, 노숙인 등 취약계층에게 따듯한 한 끼를 제공하는 곳이다. 최근 들어 물가가 오르면서 무료급식소를 찾는 이용객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 경주에서는 경주시종합사회복지관, 이웃집, 성림무료급식소 등 3개소가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웃집과 성림무료급식소는 일평균 200여명이 이용하고 있고, 경주시종합사회복지관은 최근 일평균 이용자가 600여명에 이르면서 이용자 연령을 제한해 400여명 정도로 줄인 상황이다. 코로나19 이후 늘어난 이용객과 후원 감소 탓에 무료급식소들은 급등한 식자재 가격을 감당하기에는 지극히 어려운 상황이다. 무료급식소로 지원되는 보조금은 현재 한끼당 3000원이다. 그마저 대체급식을 하는 경우 포장비 등을 제외하면 한끼 식사를 제공하는데 지원받는 예산은 2200원에 불과하다는 것이 급식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무료급식소 운영기관에서 사비를 내가며 유지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올해 경북도가 무료급식소로 지원한 예산은 4억7000만원이지만 가파르게 오르는 식자재 가격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어 추가 지원이 절실하다. 무료급식소는 우리 사회 소외된 취약계층들에게는 최후의 복지서비스나 마찬가지다. 고령의 어르신, 위기로 벼랑 끝에 내몰린 소외계층들에게 따뜻한 한끼로 이웃의 정을 나누는 곳이다. 지금의 경기침체가 지속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인 상황을 감안하면 더 이상 선의의 후원에만 맡겨둘 수도 없다. 정부, 경북도, 경주시가 나서 취약계층의 기본 식사를 지속적으로 챙겨줄 수 있는 방안을 서둘러 찾아내야 할 것이다.
공감을 원하지도 동의를 구하지도 않는다. 각자가 개성이 있고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란 게 있기에 사람마다 생각과 가치의 기준이 다르기에 그래서 “이런 사람도 있어요” 하고 피력해 본다. 얼마 전 기사를 접하다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었다. 세계 국가별 행복 지수에서 한때 1위를 차지했던 부탄이 95위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십수년전에 국가별 행복 지수를 발표했는데 부탄이 1위라고 하여 ‘부탄이 어떤나라일까?’하고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 기억이 생생하다. 인구 80만명 정도의 소국, 1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최하위! 여러 가지 지표에서 열악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인데 행복지수는 단연 세계 1위였다. 국왕에 대한 믿음과 충성이 대단해 나름 정치가 안정된 나라! 순수하고 유순한 국민들로 구성된 나라! 범죄가 거의 없고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는 국민이 대다수인 나라! 이러한 것들이 행복지수 1위로 만들었을 것이다. 부탄으로 인해 행복에 대해 새로이 인식을 하고 느끼는 계기가 된 것이다. 대다수가 가난했고 힘든 노동을 수반하는 농업에 종사했지만, 그것으로 얻은 수확물로 배고픔을 달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만족했던 이들에게 개방의 물결 속에 바깥세상을 알게 되고 돈을 알게 되면서 빈부가 생기고, 자본에 의해 삶의 질이 다르게 되는 등 비교 거리가 생기게 되면서 불행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돈의 편리함과 위력을 알게 되면서 사회는 더욱 분열화되기 시작했고,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욕심이 수반되고 그 욕심으로 인해 범죄가 증가하면서 사회는 각박해지고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아지게 된 것이다. 돈을 몰랐을 때는 행복했었는데··· 행복에 대한 이유와 조건이 많아졌고 나는 ‘왜?’라는 의문도 생기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말 그대로 격변의 세월이다. 우여곡절의 세월을 딛고 경제적으로 세계 정상의 국가로 발돋움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영화·음악 등)에서도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알아준다. 특히 동남아에 가면 뿌듯함을 느낄 정도로 대한민국을 알아준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주시민으로 살아가면서 행복을 크게 체감하지 못했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사는데도 만족할 수가 없다. 비교가 되고 욕심을 지울 수가 없다. 대통령이 누구여서 시장이 누구여서 국회의원이 누구여서···. 불만의 내용도 전보다 다양해졌다. 정치는 어느덧 우리 생활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서 이웃끼리도 다투게 하고 심지어는 가족 간에도 다툼이 일어나게 한다. 지지하지 않는 것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지역 간 분열과 다툼이 숙제였는데 이제는 세대 간, 남·여간 분열 등도 보태졌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편이 갈라지게 되고 그것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데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형국에 심해지는 빈부의 격차는 국민들의 분열을 더욱더 조장하게 만들었다. 돈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버린 듯한 대한민국 사회! 돈에 대한 욕심으로 천륜·인륜까지도 저 버리게 만드는 뉴스가 판치는 사회! 소득은 전 보다 훨씬 더 많아 졌는데 삶은 더 팍팍해진 사회! 그러다 보니 결혼을 미루게 되고 육아 비용부담 때문에 출산도 미루게 되는 등 대한민국사회의 기초마저도 흔들리게 됐다. 출산율 세계 꼴지로 국가의 존립마저도 걱정하게 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경주사회도 여러 가지 이유로 대립이 극대화되는 등 얼마나 분열이 되었는가.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바뀔 것이다. 격변의 세월을 거쳐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저력을 가진 현명한 국민이어서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는 마음가짐, 만족할 줄 아는 마음가짐이 넘치고 그것을 바탕으로 화합하는 사회풍토가 형성되어야 한다. 몇십년전 못 배운 사람이 태반이고 많은 식구들로 인해 끼니를 걱정하는 배고픔이 많은 세월이었지만 그래도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행복했던 시절이었고, 그때는 가족 간 이웃 간 정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대한민국의 그때 그 시절과 비슷하게 살아가는 동남아 아주 낙후된 나라! 그곳으로 가려 한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듯이 시계를 몇십년 거꾸로 돌린 생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추억을 되새기고 마음 수행을 하며 배울 것이다. 정치는 불안하고 부정부패가 난무하지만 아직은 돈을 몰라 행복지수가 높고, 차 경적 소리 한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양보와 배려심이 많은 나라여서 분명 배울 것은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욕심을 버리는 생활을 실천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마음가짐과 사소한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마음가짐을 배워 내 삶의 터 경주로 돌아와 더 윤택하고 보람된 삶을 살아보려 한다. 그리고 배움과 수행이 충분하다면 내 이웃들에게도 말해 줄 것이다. “행복은요··· 이렇더라고요”하면서···.
한류가 전방위로 유럽을 휩쓸고 있다. 어느 몇 국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동일한 현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장르도 다양하다. 영화, 음악, 음식을 필두로 한국에 관한 모든 것들이 사람들의 관심영역에 지속적으로 진입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 이래로 ‘something Korea’ 즉 ‘한국에 관한 어떤 것’이 이렇게도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이유가 무얼까?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시각에서 적어 보자. 먼저 대한민국의 국력이 엄청나게 신장 되었다. 그 국력이란 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필두로 다양하다. 소위 BRAND KOREA가 이제는 어디를 가더라도 먹히는 형국이 도래했다 생각해도 크게 무리는 아니다. 두 번째로 그동안 꾸준히 지속되어온 정부의 ‘문화산업수출’에 대한 효과가 과실로 나타나고 있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문화는 절대로 역류하지 않는다. 즉 문화는 국력과 동일하게 인식되고 자국 밖에서도 그 국력만큼 인정받는 것이 상례다. 여전히 ‘SOMETHING AMERICA’는 누구든지 인정하고 좋아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나라가 아직 세계의 주류 국가에 편입이 되기 전에, 정부가 앞장서서 ‘한국문화 알리기’ 전략을 수립하고 지속적으로 이끌어 온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문화산업 수출에 대한 지표적 성과는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다. K-FILM, K-MUSIC, K-FOOD, 이 세 가지가 현재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국 문화 알리기의 대표적 효자들이다. 그리고 이들 3대 문화가 서로 주고받는 시너지 효과도 엄청나다. 예를 들면, K-FILM에 나오는 K-FOOD를 당연히 관람자들은 주목할 수밖에 없고, K-MISIC 에 등장하는 장소나 의상들을 젊은이들은 좋아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방문하고 싶은 나라 우선순위로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높은 인지도로 상승을 하는 것은 당연히 그 원인을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영국에 사는 필자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난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일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좋아하고 ‘social chat-사회적 담소’를 좋아하는 나의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더욱이 레스토랑 사업으로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한국에 대해 매일 영국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입장이다. 예전에는 내가 한국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영국 사람들이 먼저 내게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묻는 경우가 많다.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한국을 찾아가 봐야지 라고 하는 사람들이 내가 이야기하는 일반적인 영국 사람들의 연결고리이다. 이러한 영국 사람들에게 반드시 이야기하는 것이 내 고향 경주다. 특히 최근에는 경주에 대한 기사들이 외국의 신문과 잡지에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휴대폰에 캡처하고 경주 홍보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서울, 부산, 제주도 3곳을 가장 많이 방문하는데 경주가 상위로 자리매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경주를 다녀온 영국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경주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잘 알려 준다. 휴대폰을 열고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보여준다. 첨성대, 불국사, 동궁과월지, 반월성, 대릉원 등이 많다. 특히 전통가옥에서 숙박한 경험을 대단히 특이한 추억으로 자랑한다. 아쉬운 것은 그 어디를 봐도 ‘무엇을 먹었다’라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수백 장의 사진들을 보면서 ‘음식 사진 한 장 없다’는 것이 정말 가슴 아프다. 여행의 재미는 정말 다양하다. 장소에 대한 매력, 여행 중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 그 지역에서 먹은 맛있는 음식 등 여러 요인들이 당사자의 머리에 각인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홍보하는데 일조한다. 경주를 다녀온 사람들이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도 안 할 때, 음식에 관련된 학문을 전공하고 외식업에 종사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서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본지에서도 꾸준히 가능한 고향땅 이야기를 음식과 관련하여 적어 왔다. ‘보여준 장소’만큼이나 ‘먹었던 음식’ 이야기도 내 고향 경주를 다녀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하고 기대한다.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 남쪽 자락에 소담한 도봉서당(桃峯書堂)이 위치한다. 바로 평해(平海)황씨 황정(黃玎,1426~1497) 선생을 모신 도봉서당은 1545년에 추보재(追報齋)를 묘소 아래에 지었으나, 전란(戰亂)과 세월의 풍파에 훼손되어 1915년 후손들이 추보재 자리에 서원형식으로 중건하였다. 숭앙문(嵩仰門)·도봉서당·추보재·연어재(鳶魚齋)·상허당(尙虛堂) 등으로 구성되며, 류석우와 여강이씨 등 근대 문사들의 기문과 상량문이 걸려있다. 황정의 자는 성옥(聲玉), 호는 불권헌(不倦軒)으로, 『맹자』의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學不厭而敎不倦)’에서 뜻을 취하였다. 선대 황천부(黃天富)가 외삼촌 오도안렴사(五道按廉使) 오방우(吳邦佑,1313~1393)를 따라 순시하다가 경주에 머물면서 세거하였고, 조부는 황희석(黃希錫), 부친은 황상길(黃裳吉)로 경주부 남쪽 중리(中里)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인 월성손씨 슬하에 황용중(黃用中)·황처중(黃處中)·황택중(黃宅中)을 두었다.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1433~1484)와 동일 공간에 머물며 학문을 논하였고, 최진립(1568~1636)의 부친 최신보(崔臣輔)는 황정의 손녀와 혼인하는 등 지역 유림 간 혼반(婚班)으로 가까운 교류가 이뤄졌다. 황정 선생은 늦은 나이인 성종 5년(1474)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며 입신의 뜻을 이뤘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성종 17년(1486) 1월에 윤필상 등을 시관으로 삼아 경사(經史)를 외우게 하였고 으뜸을 한 황정에게 말 1필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영사(領事) 윤호(尹壕,1424~1496)가 혜빈서(惠民署) 교수 황정을 경술(經術)에 매우 정통하고 또 효행이 있으니 쓸 만한 사람이라며 추천하자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에 제수되었다. 2월에는 선교랑(宣敎郞) 수(守)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3월에는 소인 임사홍(任士洪)ㆍ박효원(朴孝元)ㆍ김언신(金彦辛)은 죄가 무거우니, 직첩(職牒)을 도로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고, 『주서(周書)』 경명편(冏命篇)을 인용해 암송(暗誦)하며 정성을 다해 풍간(諷諫)하여 마침내 명을 돌이켜 강석경을 체임시켰으니, 그의 강직함을 알만하다. 이후 1493년 7월 8일, 곧은 성품으로 낮은 관직에 오래도록 침체되어 생활하기에 녹봉이 부족하였고, 왕자군교수(王子君敎授)가 되었지만 정중히 사직을 청하고 귀향하였다. 1493년 4월 1일의 실록기록을 보면, “요즘 국학(國學)이 쇠퇴해져서 유생들이 오로지 독서(讀書)에 전념하지 않으니, 매우 걱정스러워 이를 진작시키려 생각하고 있다. 듣기에 그대가 청수(淸修)ㆍ염퇴(廉退)하고, 학문이 정숙(精熟)하여 사표(師表)로서 꼭 합당하므로 이번에 성균관 전적(典籍)을 제수하였으니, 빨리 올라와서 직사(職事)에 나아가도록 하라”명하였고, 논평하기를, “황정은 경주에 살면서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겼는데, 과거에 합격하고서도 노모 봉양을 위해 벼슬하지 않고 본 고을의 교관(敎官)이 된 지 10여 년이 되었다. 그리고 모친이 돌아가시자 비로소 출사(出仕)하여 정언(正言)과 경상도사(慶尙都事)를 역임하였다. … 사람됨이 마음이 즐겁고 편안하며 넉넉하고 화평하여 명성과 이익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향리(鄕里)에 살면서 일찍부터 관부(官府)에 들어가지 않고, 생도(生徒)를 교회(敎誨)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다가 10년 만에 졸하였다”전한다. 이렇듯 황정은 늦은 나이에 노모를 위해 과거에 합격해 진사에 올랐으나, 효행의 봉양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머문 진정한 학자의 행실을 보였다. 모친 사후에 여러 관직을 제수 받았지만 역시 그리 오래지않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양성에 매진하였으니, 그의 행적을 연구하기에 사적(事績)이 부족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감사(監司)로서 역마타고 경주에 이르러 추정석전(秋丁釋奠)의 초헌관(初獻官)으로 왔다가 공이 머무는 불권헌에 이르러 황정 교관과 술잔을 나누며 시를(次不倦軒韻贈黃敎官玎) 주었는데 光, 塘, 傍, 祥, 觴 운에 맞췄다. 이후 이 시는 경주 유림의 다수가 차운하며 거듭 회자되었는데, 훗날 황정의 후손인 황백양(黃伯陽)이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1687~1760)에게 자신의 선조 정언공(正言公) 황정 점필재증별시를 보여주며 화답시 2수를 요구한 적도 있었다. 조선시대 경주를 무대로 활동한 선비들이 많았지만, 모두가 문집을 간행하거나 사적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직간접적으로 주변의 인물과 글을 연구하다보면 해당 인물에 대한 정보가 조금씩 드러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니, 이 역시 경주의 조선스토리를 연구하는 즐거움이라 생각한다.
2008년 한 영화가 개봉되었다.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바보>. 차태현 주연의 영화는 관객의 호평으로 꽤나 좋은 흥행 성적을 보였다. 나는 영화가 개봉되기 전 만화를 먼저 보았다. 아마도 서점에서 내 돈으로 산 첫 번째 만화책이었을 것이다. 만화가 인문 도서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은 건 단 한 문장 때문이었다. “그 많던 동네 바보는 다 어디 갔을까?”(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의미는 같다) 생각해 보니, 어릴 적 우리 동네에도, 골목에도 조금은 우리와 다른 오빠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지 않았고 그들은 잊혀졌다. 요즘 서울 지하철에서 시위하는 장애인들의 뉴스가 나온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어디에 있다가 나오는 것일까? 엄마가 되어, 아줌마가 되어 아이들에게 편견 없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평소에 했다. 그러나 책이나 영화에서도 쉽게 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뉴스에 등장했을 때, 아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른들의 반응은 또 어떨까? 사람이나 동물이나 본능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것에 경계심을 품는다. 엄마가 되어 장애아들에 대한 편견을 우리 아이들에게 심어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인위적인 만남보다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생각했지만,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없었다. 장애인 통계를 살피면 30만 명이 넘는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그들을 만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던 중 교육에 관한 관심으로 찾아가게 된 곳에서 장애인 교육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을 알게 되었고 그분들을 통해 사회 적응 훈련 중인 친구들이나 장애아들을 만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모임을 통해 하나둘 접하게 되면서 어른인 나보다 아이들은 편견 없이 그들과 어울렸다.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우리와 시간이 다른 친구(아이들의 그들을 표현한 단어)”들을 인정하고 배려했다.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모습에도, 그건 난동이 아니라 기다려주는 시간이라고 아이들은 인지했다. 잠시 고함을 지르는 아이를 한 번 살펴볼 뿐, 다른 행동이나 불편하다는 표시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시끄럽지 않았어? 불편하지 않았어?” 하고 묻자 세 아이는 그냥 “그 친구는 자기가 하고픈 것이 따로 있나 봐” “그 친구는 더 하고 싶은데, 못 하게 하니까 싫은 거야. 너도 지난번에 아이클레이 더 하고 싶다고 엄마한테 소리 질렀다가 혼났잖아” “아니야. 그 언니는 밥 먹는 것보다 노는 게 더 좋아서 그런 거야” “그래도 언니가 너무 소리를 크게 지르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 참기 힘들었을 텐데, 참아줘서 고마워라”라는 내 말에, 아이는 쿨하게 답했다. “속상한 기분을 진정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거야. 사람은 다 다르잖아. 그 친구는 우리랑 시간이 좀 다른 거야” 편견 없이 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장애인 활동 지도사 교육을 받은 나는 오히려 반성했다. 책이나 교육으로 배우는 것보다, 시간이 우리랑 좀 다른 그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더 많이 배웠다. 결국 함께 하는 사회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함께 공존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삼십 년 전, 우리가 사는 집 골목 안쪽에 몸이 조금 불편한 이모가 살았었다. 조카들이 우리집에 놀러와서 동네 꼬마들과 아주 신나게 놀고 있을 때였다. 마침 그 이모가 아이들 곁을 지나가는데 골목 아이들과 함께 조카가 다리를 저는 이모의 모습을 따라하는 것을 보고 혼을 낸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조카의 잘못보다 나의 잘못이 더 컸음을 인정한다. 그 이모는 아마도 아이들이 뒤따르며 자신을 흉내 내는 것을 알았으리라. 거기에 당황해서 혼을 내는 나의 모습도. 지금 우리 사회는 삼십 년 전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쇼팽은 리스트의 소개로 조르주 상드(G.Sand/1804-1876)를 만난다(1836). 상드는 신(新)여성이었다. 공공장소에서 남성복(바지)을 즐겨 입고, 시가를 물고 다녔다. 유명 소설가로 사교계에서는 마당발로 통했다. 또한 1남 1녀를 둔 이혼녀이면서 많은 남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이런 여성이 보수적인 성향의 쇼팽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겠는가? 쇼팽보다는 쾌걸 리스트에게 맞는 궁합일 것이다. 쇼팽도 처음에는 이런 상드가 마음에 없었다. 하지만, 6살 연상의 능수능란한 모성애는 실연에 빠진 폐결핵 환자를 비교적 쉽게 굴복시켰다. (사실은 상드도 실연을 겪고 난 직후에 쇼팽을 소개받았다.) 쇼팽의 건강은 계속 나빠졌다. 상드는 마침 아들 모리스의 휴양이 필요하여 쇼팽에게 마요르카(축구선수 이강인이 소속된 스페인 라리가의 팀 이름이기도 하다)에 함께 가자고 제안(1838)한다. 쇼팽이 이를 수락하는 것은 상드와의 사이가 매우 깊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소심한 쇼팽에게는 큰 고민거리였다. 파리에서 하던 일(고액레슨 등)들을 모두 중단해야 하는 부담도 있었다. 결국 쇼팽은 상드 그리고 그녀의 아들, 딸과 함께 마요르카에서 휴양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2년을 보낸다. 유명한 빗방울 전주곡(15번)이 여기서 만들어진다. 이후 상드는 자신의 고향인 노앙과 파리를 오가면서 쇼팽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한다. 10년 가까이 교제를 이어간 쇼팽과 상드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원인은 딸 솔랑주 때문이었다. 상드는 자신과 너무나 닮은 솔랑주를 끔찍이 싫어했다. 반면, 솔랑주와 의붓아버지인 쇼팽은 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결정적인 건, 쇼팽이 상드가 솔랑주 부부에게 불허한 마차를 빌려준 사건이다. 쇼팽이 상드와 솔랑주의 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지만, 상드는 쇼팽이 솔랑주의 편을 든 거라 생각하고 쇼팽에게 이별을 고한다. 상드는 냉정했다. 주위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다신 쇼팽을 찾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상드와의 이별은 쇼팽에게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쇼팽은 여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피아노 레슨을 받던 제자이자 스코틀랜드 출신의 부유한 상속녀인 제인 스털링(J.Stirling/1804-1859)이 상드의 빈자리를 대신했다. 스털링은 상드와 동갑이었지만, 둘은 판이했다. 조그맣고 다소 통통한 체형인 상드와는 달리 스털링은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다. 그리고 상드는 호탕한 성격이었지만, 스털링은 내향적인 여성이었다. 쇼팽은 스털링을 연인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스털링도 이를 알았지만, 쇼팽이 죽을 때까지 극진히 보살폈고, 모든 장례비용을 댔으며, 쇼팽사후 1년 동안 검은 상복을 입었다고 한다. 스털링의 제안으로 영국투어(1848)를 간 쇼팽은 병이 더욱 악화되어 돌아왔고, 이듬해 39세의 나이로 영면한다.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대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었다. 몸은 페르 라세즈(파리 도심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심장은 따로 적출하여 바르샤바 성(聖)십자가 성당에 안치했다. 21살에 폴란드를 떠나 단 한 번도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쇼팽은 죽어서야 비로소 심장 한 조각으로 돌아왔다.
어릴 때부터 막연한 바람은 사람이 태어나서 책 만권은 보고 죽어야지 생각했다. 책 욕심은 많아 돈 버는 실용서 빼고는 여러 종류의 책들을 골고루 보아왔다. 그래서 딱 한 권을 고르라면 난감해진다. 지난달에도 모문학지에서 <작가의 삶과 문학>의 글을 부탁하면서 좋아하는 시도 포함돼있어, /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 맘 놓고 갈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의 함석헌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를 써주었지만 좋아하는 시가 많아 난감했었다. 또 기행전문가라고 경주에서 제일 좋아하는 문화유적 한군데 추천해 달라면 역시 난감하지만, 절터로는 삶이란 무엇인가의 의미를 던져주는 깊고도 슬픈 무장사지, 드라마틱한 아름다움을 가슴에 안겨주는 용장사지 3층 석탑, 왕릉으로는 낭만이 흐르는 흥덕왕릉, 석양과 어우러진 왕릉으로는 진평왕릉, 쓸쓸한 비애감이드는 민애왕릉 이런 식으로 말해준다. 영화도 중학교 때 단체로 의무적으로 보는 반공영화는 별 뇌리에 없고, 자연을 배경 삼아 말 달리는 서부영화 <황야의 무법자>, <징기스칸>, <벤허> 이런 종류의 영화를 좋아했다. 명색이 책 쓰는 기행작가라 어떤 책이 좋을까를 생각해보면 아무리 줄 그어가면서 정독을 했어도 세월이 흐른 뒤에 단 한 구절이 뇌리에 박히면 그 책은 좋은 책이다. 흔히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로 압축하는데 책 많이 읽는다고 격이 있거나 향기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됨의 바탕과 균형 잡힌 가치관이 없으면 오히려 문자욕(文字慾), 서권독(書卷毒)이 될 수 있다. 세상 살면서 가진 자 못 가진 자 누구라도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 보이지 않는 행복은 무엇인가. 헬렌 켈러는 『행복의 문』에서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 그러나 우리는 닫혀진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고 했고, 중학교 때 보았던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에서 “행복 하려면 여러 가지 취미를 가져라. 이것이 싫증 나면 다른 것을 하라”는 이 한 구절은 기억해 다양한 취미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행복을 생활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짜 복은 무엇인가. 조선시대 백과사전인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의 이운지 편에서 답을 찾아 내 가슴을 짜릿하게 울렸다. 성인에게 네 사람이 한 가지 소원을 말한다. 첫 번째 사람은 3정승 6판서 즉 권력을 갖고 싶다 했다. 흔쾌히 그렇게 하라 한다. 두 번째 사람은 금은보화에 부자되기를 바라니 그도 하라 한다. 세 번째 사람은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다 하니 어렵다 하면서 꼭 하고 싶다면 하라 한다. 마지막 사람은 자기 이름 석 자는 쓸 수 있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임원(林園)에 살면서 교양을 쌓으며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다 하니, 성인은 다른 소원은 다 들어주어도 그것은 청복(淸福)이라며 안 된다 한다. 책을 많이 읽다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문장을 문득문득 느낄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문화를 알리고 지키는 삶을 살아오면서 문득 이 책에서 말한 청복이 내가 살고 있는 삶이었구나! 결국 어디에 살던 자신만의 무릉도원을 꿈꾸며 잔잔한 여유와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게 바로 청복이 아니겠는가? 바람 고요히 흐르고 푸르다 못해 시린 하늘과 흰 구름에 마음을 맡기면, 지나온 삶의 애환이 아련히 밀려와 누구나 시인이 되는 가을날, 우리 모두 청복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지 않겠는가?
지통천황이 702년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사망하였다. 그녀의 공을 말할 때 향가의 대중화에 대한 업적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향가는 지통천황에게 종교에 해당되었다. 향가는 앞서 하늘로 떠난 아들을 보호하여 주었고, 상처받은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었다. 지통천황은 전국에서 향가를 잘 짓는 사람들을 찾아 불러들여 그녀의 곁에 두고 다량의 작품을 만들도록 하였다. 향가의 힘을 일본 각계에서 믿도록 했고, 적극 수용되도록 했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향가가 그녀의 후원에 힘입어 봄날 화단의 꽃처럼 일본 땅에 화사하게 만개하였다. 향가는 황실을 주변으로 구성원들의 개인적 소원을 이루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수도 건설과 같은 국가적 토목사업의 성공을 위하여서도 향가가 가진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향가를 아름답게 만개시킨 지통천황을 ‘만엽향가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가 불러 일으킨 향가의 꽃바람이 일본을 뒤덮었다. 현재 일본에 전해지는 4516장이나 되는 대규모 향가집의 모태가 되었다. 그녀가 사망하게 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그녀의 영혼을 환송하기 위해 수많은 눈물가를 만들어 바쳤다. 그중 몇 작품을 선별해 감상해 보도록 하자. <66번가> “천무천황의 큰 반려이셨던 높으신 스승께서 물가로 가신다. / 저승배들이 베틀의 북처럼 들락날락하더라도 / 배에 타지 않고 바닷가에 누워 편히 주무실 것이다. / 굳센 분이셨다” *지통천황은 운명의 힘에 의해 정쟁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게 되었다. 남편 천무천황과 함께 일본 고대사 최대의 난이라고 하는 임신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여러 명의 비 중 유일하게 남편 천무천황을 따라가 승리에 힘을 보탰다. 천무천황의 공이 50%라면 그녀의 공이 50%라는 말까지 있다. 그래서 본 작품에서는 지통천황을 천무천황의 큰 반려라고 하는가 하면, 매우 굳세었던 분이라 하고 있다. <73번가> “우리의 세상물정 모르시는 분께서 아들에게 가려고 새벽에 나가신다. / 물가에 바람이 부는데도. / 왜국의 유순한 백성들이 울고 있다. / 아버지와 어머니가 묘에 계시니 나는 아무리 추워도 손에 입김을 불지 않으리. / 지통천황이시여, 서두르지 마시라” * 지통천황이 외아들 초벽황자에게 가려고 바람이 부는데도 새벽 일찍 길을 나섰다. 새벽에 길을 나서지 않아야 하는데도 세상물정을 모르기에 길을 나섰다. 되돌아 올 수 없는 저승길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데 서둘러 갔다고 탄식하고 있다. <75번가> “등원경 건물 사이 산에서 불어오는 새벽 바람이 차다. / 여행길 사람들이 옷이야 응당 빌려주겠지만 / 세상 물정 모르는 여인이시여, / 남이 옷 빌려 준다고 오래 여행하시지 말고 곧 돌아오셔야 하리”
경주도자기축제가 21일부터 30일까지 10일간 황성공원 실내체육관 앞 광장에서 열린다. 경주에서 도자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번 행사는 각종 도자기와 생활 공예품들을 직접 보고 만지고 소장할 수 있다. 그간 도자기축제는 코로나19 영향으로 지난 2년간 행사가 취소됐었다. 올해로 20회째를 맞아 ‘다시~ 세상속으로’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축제는 지역 도예가들이 예술혼과 열정을 담아 빚은 신라토기부터 청자, 백자, 현대자기까지 전통성과 실용성을 갖춘 1만여점의 다양한 도자기를 만날 수 있다. 유명도예 작가들의 퍼포먼스와 도자기를 굽는 제작 과정을 볼 수 있는 라꾸가마 시연(21~23일, 28~29일), 물레성형 및 도자기 만들기 체험이 펼쳐진다. 또 한가족도자기 만들기 대회(23일), 어린이 다도(22일) 및 도자기 만들기(29일) 대회, 초벌구이 그림 그리기 체험 프로그램 운영으로 가족단위 방문객들을 유도한다. 특히 이번 축제는 단순히 도자기를 전시하고 판매하는 것을 넘어 이색 이벤트도 선보인다. 행사장 내 무대에서는 이색적인 문화공연과 민속놀이가 상시 열리며, 평소 갖고 싶던 도자기를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는 ‘만원의 행복(24~28일)’, 고유의 이색 찻잔을 이용한 다도시연 및 체험 등 직접 보고 즐길 수 있는 이벤트도 풍성하게 열린다. 경주시 관계자는 “예로부터 경주는 신라토기를 탄생시킨 도예문화의 산실이며, 현재까지 금속공예, 목공예, 석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준 높은 공예문화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며 “이번 지역 도예가들이 현대적 또는 창의적으로 재해석한 도자기 걸작을 직접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이번 축제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뮌헨에서 자동차를 반납하고 포르투칼에서 빌린 이 자동차는 스페인,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을 거쳐, 8월 16일 독일 뮌헨 공항 근처에 있는 자동차 렌트 회사까지 왔습니다. 이제 유럽여행이 끝나가면서 빌렸던 자동차를 반납하기 위해서죠.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든 렌트할 수 있고 또 일정따라 어디서든 반납할 수 있도록 렌트회사끼리 연결이 돼 있어, 관광객은 사용 후 어려움 없이 되돌려 주면 되어 편리합니다. 큰 탈 없이 수십 일 동안 안전하게 잘 달려준 차를 돌려주니, 다행스럽고 고맙지만 한편 섭섭하기도 합니다. 차와 이별하는 순간,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릅니다. 지난 7월 25일 스위스의 호반 도시인 레만호에서, 그곳 집시족의 소행으로 짐이 차에서 도난당한 사건입니다. 호반에 있는 ‘시옹성’을 구경하고 돌아오니, 주차장에 세워둔 차량 한쪽 유리창이 박살이 나고, 여권 4개를 포함한 트렁크가 없어진 일이죠. 순간 황당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그곳 경찰서에서 조사도 받고, 우리 스위스 대사관에 가서, 해외에서 여권발급을 받아보는 등 시간이 지나면서 이 차에 묻어있는, 특이한 추억거리로 우리 여행 한 페이지에 영원히 좋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뮌헨의 대형 맥주홀, 아우구스터너(Augustiner) 브로이에서 뮌헨에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맥주 양조장이 3개가 있습니다. 그중 가장 오래 되고, 큰 맥주홀인 이곳에 들렀어요. 중앙역에서 20여분 동안 걸어 넓은 출입문을 지나, 나무숲 사이로 통과해 대형 홀에 들어섰습니다. 넓은 광장에 둥글게 생긴 반원형의 지붕 아래 펼쳐진 큰 홀이 작은 운동장만큼이나 넓었어요. 손님 좌석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실내가 많은 사람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500CC 퉁겔 4잔에, 안주로 부드러운 돼지족발, 감자와 닭다리를 넉넉하게 주문했어요. 애들에게 우리나라 음식처럼 조리된 눈익은 고기를 넉넉하게 먹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뮌헨에서 가장 오래된 이 맥주 양조장은 1328년 아우쿠스틴 수도원에서 만들어졌는데, 1829년 바그너 가문에 인수되어, 현재까지 700여년간 이어 온다고 합니다. 맥주의 나라, 독일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맥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어요. 맛있고, 톡 쏘고, 쓰지 않고 시원한, 그 환상적인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으며, 안주 또한 부드러운 식감에 별미 중 특미였습니다. -숲속 야외 대형 공용 화장실 이곳엔 실내 홀도 크고, 많은 손님으로 복잡해서인지, 야외 화장실 또한 특이합니다. 밤에만 이용할 수 있는 이곳은 숲속에다 시멘트로 길게 U자관을 만들어 놓고, 흘러가는 소변기 대용으로 볼일을 봅니다. 실내 화장실이 턱없이 부족해 야외에다, 남자들만 서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노천화장실입니다. 어두컴컴한 나무숲 곳곳에, 조명등을 설치해 놓아 손님들이 옆으로 줄을 서서 시원스럽게 배설을 할 수 있도록 편하게 잘 만들어 놓았어요. 이곳 맥주 맛도 기막히지만, 실내 체육관 같은 큰 맥주 홀과 야외 대형 노천화장실!, 독일여행을 생각할 때는 이 두 가지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지증왕(智證王)은 신라 제22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00~514년이며, 재종형인 소지 마립간(제21대, 재위 479∼500)이 후계자 없이 죽자 64세에 왕위에 올랐고, 우경을 시행하여 농업생산력을 높였고, 502년(지증왕 3)에 순장(殉葬)을 법력으로 금지했다. 503년에는 그 동안 사라(斯羅)·사로(斯盧)·신라(新羅) 등으로 사용되던 국명을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新者德業日新 羅者綱羅四方之義).’는 뜻을 가진 신라(新羅)로 확정했으며, 왕호를 방언인 마립간에서 중국식인 왕으로 바꾸었다.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에 78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시호(諡號)를 지증(智證)이라 하였고, 아들이 제23대 법흥왕이다. 『三國史記』권4 신라본기 지증마립간조에 따르면, 왕은 체격이 매우 컸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智度路)라 하였다. 『三國遺事』기이(紀異第一)편에 음장이 장대한 지증왕의 배필을 찾아준 개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지증왕의 배필을 찾아준 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三國遺事』권 제1, 제1 기이(紀異第一)에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1자 5치(一尺五寸)이나 되어 훌륭한 배필을 구하기가 어려워 사신을 삼도(三道)에 보내 배필을 구하였다. 사신이 신라 수도에 있었던 6부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牟梁部)에 이르렀는데, 동로수(冬老樹) 아래에서 개 두 마리가 크기가 북만한 커다란 똥 한 덩어리를 양쪽에서 물고 다투는 것을 보았다.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어떤 소녀가 고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모량부 상공(相公) 성이 박씨인 이찬 등흔(登欣)의 딸(연제부인)이 이곳에서 빨래를 하다가 은밀히 숲속에 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집을 찾아 그녀를 보니 신장이 7척 5촌이나 되었다. 이 사실을 왕께 갖추어 아뢰자 왕은 수레를 보내 그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 들여 황후로 삼았고, 군신들은 모두 경하했다’ 『三國遺事』권 제1, 제1 기이(紀異第一) 지철로왕(智哲老王) > 지증왕(智證王) 三國遺事, 智哲老王 第二十二智哲老王. 姓金氏. 名智大路. 又智度路, 諡曰智證. 諡號始于此. 又鄕稱王爲麻立干者. 自此王 始. 王以永元二年庚辰卽位.王陰長一尺五寸. 難於嘉耦. 發使三道求之. 使至牟梁 部冬老樹下. 見二狗嚙一屎塊如鼓大. 爭嚙其兩端. 訪於里人. 有一小女告云. 此部相公之女子洗澣于此. 隱林而所遺也. 尋其家檢之. 身長七尺五寸. 具事奏聞. 王遣車邀入宮中. 封爲皇后. 群臣皆賀. 又阿瑟羅州 東海中. 便風二日程有于陵島. 周迴二萬六千七百三十步. 島夷恃其水深. 驕傲不臣. 王命伊喰朴伊宗將兵討之. 宗作木偶師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不降則放此獸. 島夷畏降. 賞伊宗 爲州伯. 『경주의 신화 전설집성』(문경현, 최재영, 2008) 49쪽에도 지증왕의 음장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 제22대 지증왕은 지철로(智哲老), 지도로(智度路), 지대로(智大老)라 하고, 지증왕(智證王)도 당시의 음(音)으로 지등왕이다. 철(哲)자도 털 자였다. 사달부 갈문왕으로 있다가 달부 매금왕(寐錦王)이 된 왕이다. 왕의 음경이 거대하여 5치였다. 음경(陰莖)은 옥경(玉莖), 양물(陽物) 이라 칭하고 신라어로 ‘좆’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의 신화 전설집성』에 『三國遺事』권 제1, 제1 기이(紀異第一)편의 지증왕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국왕의 음경이 너무 커서 그에 걸 맞는 배필을 구하지 못하여 온 조정이 걱정 거리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이에 배필을 구하기 위하여 전국에 사신을 파견했다. 사신이 모량부(牟梁部/모달부)의 동로수 나무 밑에서 두 마리의 개가 거대한 똥자루를 서로 물고 싸우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신이 똥 굵도 큰 대빵인데 놀라워했다. 동네에 들어가 물어보니 한 계집애가 말하기를 “이 부(部)의 상공(相公) 즉 높은 벼슬아치의 딸이 이곳에 서답을 빨려고 왔다가 똥이 마려워 숲속에 숨어 누고 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래 사신이 상공 댁에 찾아가 그 집 딸을 만나보니 거인이었다. 아마존이었다. 사자가 궁중에 들어와 왕께 보고했다. 왕은 매우 기뻐하여 수레를 보내어 그 아가씨를 궁궐로 맞아들여 왕비를 삼으니 만조백관이 기뻐 하례했다” 개는 사람과 함께 한 가장 오래된 최초의 축양동물이다. 고대 이집트의 개는 신화에 나오는 아누비스 Anubis로 신격화된 신이다. 태양신 라(Ra)의 넷째아들이며, 후대에는 오시리스(Osiris)와 네프티스(Nephthys:세트의 아내)의 아들이다. 저승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죽은 자를 오시리스의 법정으로 인도하며, 죽은 자의 심장을 저울에 달아 살아생전의 행위를 판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죽은 자를 심판하는 신이었다. 또 왕의 미라(mirra, mummy)를 보관한 묘곽의 장식으로 아누비수(개 모형)를 만들어 왕의 무덤을 지키는 신격화된 동물이다. 삼국시대 고구려, 신라의 개도 벽사의 의미로 길사와 흉사를 미리 알려주는 영리한 동물이었다. 고구려 석실 고분인 안악3호분, 덕흥리, 송죽일, 각저총, 무용총, 장천1호분에 그려진 개 벽화는 죽은 자의 시신을 수호하는 진모견(鎭墓犬)으로 수호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동서양에서 흔하게 내려온 개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과 늘 함께한 결과일 것이다. 최석규 경주개 동경이 혈통보존연구원장 경주신문 독자위원 이 기사는 지역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1400여 년 전 어느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김유신이 김춘추와 함께 공을 차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깃을 밟아 옷고름을 찢어 여동생 문희에게 꿰매게 했다. 그런 인연으로 김춘추와 문희의 만남은 시작됐고, 문희는 임신까지 하게 됐다. 김유신은 그날 이후 임신한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겠다고 온 나라에 소문을 퍼뜨렸다. 어느 날 선덕왕이 남산으로 행차하는 것을 본 김유신은 뜰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피워 연기가 치솟게 했다. 선덕왕이 이를 보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신하들이 답했다. “김유신이 처녀인 누이동생이 임신한 것을 알고 불에 태워 죽이려는 것입니다” 선덕왕이 다시 물었다. “그것이 누구의 짓인가?” 때마침 가까이에서 왕을 모시고 있던 김춘추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선덕왕은 조카의 소행임을 알고 크게 꾸짖은 후 “어서 가 김유신의 누이동생을 구하라”고 명했다. 김춘추는 선덕왕의 명을 받고 달려가 왕명을 전하고 화형을 중지시켰다. 그 후 두 사람은 혼례를 치렀다. 김유신의 막내여동생 문희가 언니 보희의 꾼 꿈을 사서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 김춘추(재위 654~661년)의 왕비가 된 이야기다. ‘삼국유사’의 ‘태종 춘추공’조에 실린 내용으로, 선덕왕의 남산 행차 길이 배경이다. ◆옛 문헌 속 신라 왕의 남산 행차 신라 왕의 남산 행차와 관련된 ‘삼국유사’ 기록은 더 있다. 쥐와 까마귀의 도움으로 신라 소지왕이 목숨을 구한 ‘사금갑’(射琴匣) 이야기가 그 중 하나다. ‘거문고 갑을 활로 쏘아라’라는 뜻의 사금갑은 ‘둘 죽이고 하나 살리기’, ‘오곡밥 먹는 유래’라는 옛 이야기의 원형이기도 하다. 이 사금갑 설화의 배경이 된 곳은 남산 동쪽 자락 서출지(書出池)다. 신라 21대 소지왕 재위 10년(488년) 정월 보름날 천천정(天泉亭) 행차 때의 일이다. 소지왕 앞에 까마귀와 쥐가 몰려와 울더니 쥐가 사람처럼 말했다.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을 살피시오” 소지왕은 장수에게 명해 까마귀를 뒤쫓게 했다. 장수가 남산 동쪽 기슭 한 연못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이 봉투를 들고 나타나 왕에게 전하라고 말했다. 봉투 겉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이 봉투를 전해 받은 소지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열어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점을 치는 일관(日官)은 “두 사람은 보통 사람, 한 사람은 왕”이라고 해석했다. 결국 일관의 뜻을 따라 봉투를 열어 보니 ‘거문고 갑을 쏘아라’고 적혀 있었다. 왕은 궁으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향해 활을 쐈는데, 그 안엔 왕비와 정을 통하던 승려가 있었다. 소지왕은 왕비와 승려를 함께 처형하고 죽음을 면했다. 이 일 이후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전해준 못을 서출지라 부르고, 정월 보름은 오기일(烏忌日)이라고 해서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다는 게 ‘삼국유사’가 전하는 내용이다. 남산 서편 자락 포석정에 얽힌 설화도 있다. 통일신라 말기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년) 때였다. 왕이 포석정에 행차하자 남산의 신이 나타나 춤을 췄다. 그런데 신은 좌우의 신하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오직 왕에게만 보였다. 왕은 친히 신의 춤을 추어 보여줬다. ‘삼국유사’ ‘처용랑과 망해사’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의 배경이 된 남산은 신라에서 신성시되던 산이었다. 신라인들은 남산을 ‘불국토’인 수미산쯤으로 여겼다. 옛 신라인들은 남산의 단단한 화강암을 쪼아 부처를 새겼고, 평평한 둔덕마다 불탑을 세웠다. 그렇다고 민초들만 남산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통일 이전의 왕부터 천년 왕조의 끝자락 경애왕까지 수많은 신라 왕은 남산을 즐겨 찾았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왕궁이 있던 월성에서 신궁으로 추정되는 나정, 그리고 그곳을 좀 더 지나 포석정까지는 행차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당시는 정치보다 제사에 더 큰 의미를 뒀던 때였고, 남산, 특히 서남산 쪽은 왕이 직접 행차했던 대표적인 제의 공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신라 왕 숨결 품은 서남산 둘레길 경주시가지 남쪽에 있는 남산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북쪽의 금오봉(金鰲峰, 466m)과 남쪽의 고위봉(高位峰, 494m) 두 봉우리를 잇는 산과 계곡 전체를 남산이라고 부른다. 남산엔 골짜기를 따라 수십 갈래 답사 코스가 나있다. 이 길을 통해 많은 이들이 남산에 오르며 수많은 유적을 만난다. 반면, 경주시가 2010년에 접어들며 조성한 ‘남산 둘레길’은 아는 이가 많지 않다. 남산 둘레길은 남쪽의 고위봉과 북쪽의 금오봉을 잇는 남북 능선을 축으로, 동쪽의 ‘동남산 가는 길’과 서쪽의 ‘서남산 가는 길’ 등 2곳으로 나뉜다. 이들 두 길은 몇몇 유적을 찾아가는 길에 짧은 오르막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남산 자락을 에둘러 가는 평지다. 남산의 낮은 곳을 연결해 걸으며 마을과 들판 곳곳에 있는 문화재를 만나볼 수 있다. 차량이 다니는 도로와도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 마음 놓고 주변 풍광을 구경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길이 갈라지는 곳마다 이정표가 서 있어 한두 곳을 제외하면 길을 이어가는 데 어려움이 없다. 다만 동남산 쪽은 주능선까지 이르는 거리가 서남산 쪽에 비해 짧고 경사도 훨씬 가파른 탓에 ‘동남산 가는 길’에선 남산 주능선을 보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길 막바지인 통일전 근처를 지나면서부터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남산 능선을 바라볼 수 있다. 동남산 가는 길은 교동 월정교 남단에서 출발해 인왕동 사지(인용사지)~춘양교지~상서장~고청 윤경렬 고택~불곡마애여래좌상~남산탑곡마애불상군~미륵곡 석조여래좌상~경북산림환경연구원~화랑교육원~헌강왕릉~정강왕릉~통일전~서출지~남산동 동·서삼층석탑을 거쳐 염불사지로 이어진다. 거리는 10㎞ 정도로 대다수 구간이 평지라 체력적으로 힘들지는 않다. 쉬엄쉬엄 걷더라도 4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서남산 쪽 둘레길인 ‘서남산 가는 길’은 신라 왕의 주요 행차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의 길’로 불릴만한 길이다. 서남산 가는 길이라는 이름 외에 ‘삼릉 가는 길’로도 불리는데, 이정표나 안내도에도 주로 ‘삼릉 가는 길’로 표기돼 있다. 길은 동남산 가는 길과 마찬가지로 월정교 앞에서 시작한다. 천관사지~오릉~김호 장군 고택(월암종택)~남간사지 석정~일성왕릉~양산재~나정~남간사지 당간지주~창림사지 삼층석탑~포석정~지마왕릉~태진지~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삼릉~경애왕릉으로 이어진다. 월정교 남단에서 천관사지와 오릉을 거치지 않고 도당산으로 난 산길을 따라 화백정과 도당산 터널을 지나 김호 장군 고택 앞으로 합류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다. 전체 거리는 동남산 가는 길과 비슷한 10㎞ 정도로 4시간 정도 걸린다. 삼릉 가는 길은 숲길이 대부분인 동남산 가는 길과 달리,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로 이어져 있다. 걷는 내내 남산을 조망하며 고즈넉한 농촌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특히 가을에 걷기 좋은 길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경북도는 지난 13일 도청에서 자동차산업 대전환 수퍼클러스터, 경북형 일자리 산학관 인력양성 협력체계 구축, 지역 상생과 ESG 경영실천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사진> 이날 협약은 경북도의 미래차 대전환 상생형 지역일자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협약은 경주, 영천, 경산 지역에 소재한 에코플라스틱, 다스, 신영, 한중엔시에스, 화신, 대영전기, 아진산업, 건화이엔지, 일지테크 등 지역 기업 9개사와 경북도, 경주, 영천, 경산시가 주체로 나섰다. 먼저 산학관 인력양성 협력체계 구축 협약에는 지역 내 특성화고인 경북기계금속고, 경북휴먼테크고, 경주공고, 신라공고와 지역 대학인 경북대, 동국대 와이즈캠퍼스, 영남대, 위덕대, 한국폴리텍대학 로봇캠퍼스가 협약기관으로 참여했다. 지역 자동차 부품기업이 산업환경 변화에 신속히 대응할 성장 동력을 마련하고, 청년 고용기반을 조성해 수도권 유출 방지, 지역 기업에 취업연계 등을 위해 상호 협력·지원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산학연관 전문인력 양성과 인턴십 프로그램 등을 마련해 민관 협력으로 경북도가 미래 자동차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기술혁신 주도형 인재를 확보할 방침이다. 이어 진행된 지역 상생과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실천 업무협약은 지역 사회적경제기업협의회와 지원기관인 경북사회적기업종합상사협동조합, 지역과소셜비즈가 함께 했다. 경북도가 추진하는 프로젝트는 광역과 기초를 연계한 협력 거버넌스를 조성하고 산업-노동-지역사회 간 상생으로 동반성장을 지향하는 산업대전환 수퍼 클러스터를 구축할 예정이다. 이에 지역사회 문제해결에 기여하는 사회적경제와 네트워크 형성과 일자리 연계 등 기업의 ESG 경영실천으로 지역 내 자원의 선순환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경북은 지난해부터 미래차 전환 산업혁신 일자리 전략을 수립하고 자동차 대전환 수퍼 클러스터 구축을 위한 경북형 일자리 프로젝트를 본격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오는 11월에는 산업통상자원부 주관 공모사업에도 참여할 계획이다. 이영석 경북도 일자리경제실장은 “경북 자동차산업이 대한민국 자동차산업을 이끌어 가는 대표주자로 도약할 수 있도록 도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경북도는 2018년 이후 4년 만에 도청에서 국정감사를 받았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감사2반이 지난 17일 진행한 이번 국정감사는 국민의힘 이만희(영천) 반장을 포함한 11명의 감사위원이 참석했다. 국민의힘은 이만희·정우택·김용판·조은희 의원, 민주당은 김교흥·이성만·임호선·조응천·이형석·최기상 의원이 참석했으며 기본소득당의 용혜인 의원도 참석했다. 이날 감사는 제11호 태풍 힌남노로 인한 피해 원인과 복구상황, 주민피해보상 문제에 대해 질의가 이어졌다. 또 경북도에 밀집한 원자력 정책과 대구경북통합신공항, 그리고 지방시대를 위한 정책과제에 대한 질의가 있었다. 조은희 의원의 경북의 변화와 메타버스 정책에 대한 질의를 시작으로 태풍 힌남노 피해 관련해서는 이성만 의원이 재난지원이 수도권에 비해 적은 이유에 대해 질의했다. 김교흥 의원은 포항 냉천 치수사업 관련된 경북도의 조치사항에 대해 질의했다. 이철우 도지사는 태풍피해복구를 위해 경직된 의연금 제도 손질이 필요하다는 점과 정부가 경북에 추가지원을 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특히 통합신공항과 관련된 군위편입문제에 대한 여러 의원의 질의가 이어졌고, 이철우 도지사는 “공항은 대구경북의 새로운 역사로 팔을 하나 떼 주는 아픔이지만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며 행정안전위 의원들의 협조를 부탁했다. 복지 관련된 질의들도 이어졌다. 정우택 의원은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의료격차와 균형발전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최기상 의원은 경북도의 공공의료원 위탁운영 문제에 대해 집중 질의했다. 이철우 도지사는 “비수도권은 의료진을 구하기 어렵다”며 “공공의료원을 경북대병원과 함께 운영해 지방의 열악한 의료서비스를 높일 수 있는 모델이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소방과 관련해서는 김용판 의원은 소방청사 사고지 유해가스 배출장비 설치 문제를, 이형석 의원은 원전 관할 소방서의 방사능보호복의 내구연한 초과를 지적했다. 또 복지시설과 직장 내 갑질 등에 대한 질의에서는 도지사가 직접 현장에 가보고 직원들을 만나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어보고 판단하겠다고 답했다. 끝으로 이만희 감사반장은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 농업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당부를 했으며, 이철우 도지사는 규모화를 이룩한 네덜란드 농업 사례를 소개하면서 지주를 주주로 만드는 경북도의 농업대전환 프로젝트에 관심을 부탁했다.
경상북도 장애아가족양육지원사업을 위탁·운영하는 (사)가경사회서비스지원센터는 지난 11일부터 13일까지 장애아돌보미 10년 이상 활동한 돌보미 12명을 대상으로 제주도에서 장기 근속자 워크숍을 진행했다. <사진> 이번 워크숍은 만 18세 미만의 장애 정도가 심한 장애아를 양육하는 가정을 대상으로 돌봄서비스를 10년 이상 제공해 온 돌보미의 소진예방, 스트레스 해소 및 보다 질 높은 서비스 제공을 위한 역량 강화 지원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워크샵에 참여한 장애아돌보미들은 “돌봄 활동을 오랫동안 하며 낮은 처우로부터 소진이 컸었으나 워크샵을 통하여 보상받는 것 같다”, “10년 동안 같이 활동한 돌보미 선생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 더 뜻깊은 시간이였다”, “이런 워크샵이 지속적으로 진행돼 후배 장애아돌보미 선생님들이 보다 좋은 처우를 받으며 장애아돌봄서비스의 가치를 기억하고 오래 활동할 수 있길 희망한다”고 입을모았다. 강봉구 센터장은 “현장에서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애아돌보미들이 있어 경상북도 장애아동 양육 가정의 큰 도움이 되는 만큼 장애아돌보미들의 스트레스 해소 및 역량 강화를 위한 지원을 지속적으로 계획해 장애아돌보미의 처우를 개선하고 보다 더 전문적인 장애아돌봄서비스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경주시종합사회복지관은 올바른 인성과 창의력을 지닌 글로벌 기술인 육성을 목표로 하는 신라공고 전기사랑봉사단과 연계해 학생들의 전공을 살린 재능기부 활동을 진행했다. <사진> 신라공고 전기사랑봉사단 14명은 지난 7일 무선 부착형 LED센서등 50개, 건전지 50세트를 가지고 경주시종합사회복지관을 찾았다. 센서등 기기 및 작동법을 점검한 후 경주 지역 내 홀로 거주하는 어르신 15세대에 직접 방문해 가정 내 전기 관련 불편함을 점검하고 무선 부착형 LED 센서등을 직접 달아드렸다. 권기숙 관장은 “학생과 지역이 나눔으로 동반 성장할 수 있어서 고맙고, 물품 후원에 그치지 않고 직접 가정에 방문하여 전공과 연관된 재능을 기부하였기에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전기사랑봉사단 담당 교사는 “봉사단원들의 회의를 통해 후원 물품이 지정된 만큼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해주었고 어르신들이 댁내에서 안전하게 생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고 후원의 뜻을 전했다.
경북남부아동보호전문기관은 지난 12일 화랑마을 기파랑관에서 ‘건강한 가정을 위한 부모의 마음 챙김’을 주제로 한 명사 특강을 진행했다. 이번 특강은 아동학대 예방 및 긍정양육에 대한 캠페인 진행과 함께 연세대 상담코칭학과 권수영 교수를 초청해 ‘부모의 마음 챙김’이라는 주제로 진행 됐다. 권수영 교수는 마음 챙김에 기반해, 아이들의 내면 감정을 알기 위해 노력 하고, 비(非)판단적인 마음 챙김 대화법에 대해 강의하며, 아이들에게 보상의 의미가 아닌, 아동 자체에 대한 칭찬을 통해 아동의 자존감 회복 및 긍정적 소통을 강조했다. 강의가 끝나고 질의응답을 통해 가정 내의 사례를 듣고, 솔루션을 주며, 내 아이에게 하루에 12가지 이상 칭찬해주기를 실천해보는 것을 당부하며, 따뜻한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시민들은 “아이와 소통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강의였다”, “12가지 이상 칭찬이라는 솔루션을 받았지만, 그 이상으로 칭찬해 아이의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하겠다”,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했는데 이번 강의를 통해 칭찬을 통해 아이의 행동을 교정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입을 모았다. 김병구 관장은 “이번 특강을 통해 아이들과 올바른 정서적 소통기술의 중요성을 알리고 나아가 ‘학대피해 아동’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사회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참사랑재가노인통합지원센터는 지난 5일 센터 소속 재가어르신과 지역의 홀몸 어르신을 대상으로 경남 하동으로 가을나들이 행사를 가졌다. <사진> 화개장터 관람, 레일바이크 체험으로 이루어진 나들이 행사는 한수원(주)월성원자력(이하 한수원)의 후원과 황오적십자봉사단을 비롯한 지역 내 자원봉사자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행사는 코로나19 이후 집에 계시는 시간이 많아진 어르신들의 기분도 풀어 드리고, 정서적 교류가 부족한 어르신들의 욕구를 해소해 드리는 차원에서 진행됐다. 어르신들은 “그 동안의 스트레스가 싹 날아가는 기분이다”, “정말 재미있었다”, ‘오랜만에 멀리까지 외출하니 즐겁다“고 입을 모았다. 박경복 시설장은 ‘한수원이 이번 나들이에 후원금을 기부하여 큰 힘이 되었다. 한수원은 매년 본 센터에 후원금을 기부해 지역의 독거 어르신을 위한 사업에 도움을 주고 있어 늘감사하다’고 말했다.
경주고 졸업생으로 구성돼 매년 모교장학사업, 소회계층 지원사업, 지역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 화랑회가 태풍 피해지역에 지원물품을 전달했다. <사진> 화랑회는 지난 15일 태풍 ‘힌남노’의 피해가 큰 암곡 왕산마을과 불국 진티마을에 수재의원품을 지원했다. 왕산마을 75가구에는 150만원 상당의 생필품을, 진티마을 15가구에는 150만원 상당의 이불과 매트를 지원했다. 특히 이번 지원물품은 수해지역 각 마을 피해주민의 의견을 미리 수렴해 준비했다. 화랑회 최치훈 회장은 “태풍피해를 크게 입으신 암곡 왕산마을과 불국진티마을 주민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면서 “빠른 회복을 기원하고 따뜻한 겨울을 보내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화랑회 회원 전체의 마음을 담아 준비했다”고 전했다. 한편, 화랑회 회원인 정종문 시의원도 이날 지원물품 전달에 함께 자리해 지역구 주민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는 동시에 지원물품을 마련한 화랑회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