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인 여행트렌드 중 하나가 워케이션이다. 워케이션은 일과 휴가의 합성어로 직장근무지에서 벗어나 관광지나 휴양지에서 여행과 일을 함께하는 개념이다. 당일치기나 1박2일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오랜 기간 체류하면서 일과 휴가를 함께하기 때문에 고부가가치 여행 산업으로 부각되고 있다. 워케이션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서 값어치를 올리기 시작했고, 유연근무제 등 노동환경 변화와 MZ세대의 경제활동 증가로 향후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최재필 의원은 지난 5일 제277회 경주시의회 임시회 제1차 본회의에서 5분 발언을 통해 경주지역의 체류형 관광 활성화를 위한 워케이션 산업 발굴과 육성방안을 제안했다. 최 의원은 빅데이터를 통해 경주 관광객의 체류시간을 분석한 결과 당일여행은 전국 평균보다 48분 길게 머물지만 숙박일 수는 1.6일로 평균보다 0.2일 짧았다고 설명했다. 또 관광객 소비패턴 분석 결과 당일여행 6만4000원 지출, 숙박은 22만4000원을 지출해 3배 이상 차이가 난다고 밝혔다. 체류시간에 따라 관광객 소비가 비례해 증가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체류형 관광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경주시가 가진 자원과 연계해 워케이션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 발언의 핵심이었다. 또 공유오피스로 적합한 장소로는 경주화백컨벤션센터, 화랑마을, 수운기념관 등을 들기도 했다. 워케이션은 그 사업성이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라인 등 국내 IT기업들이 국내외 관광지와 연계한 워케이션을 도입하고 있고, 젊은 층들 사이에서는 여가와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을 중시해 향후 시장성도 밝다는 평가도 있어서다. 따라서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경주는 4개 해수욕장이 있는 바다와 산 등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관광인프라가 뛰어난 만큼 최상의 비즈니스 환경을 갖춘다면 워케이션 중심도시가 되기에 충분하다. 경주관광산업이 워케이션을 통해 도약하려면 과감한 투자를 통해 불편함 없이 일할 수 있는 사무기반을 갖추고, 워케이션 관광객이 오래 머물 수 있는 환경을 갖춰야 한다. 경주시는 지금부터라도 지역 내 역량을 모아 매력적인 워케이션 도시 육성을 위한 정책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워케이션 산업이 지역경제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전략도 함께 만들면 더욱 좋다.
지난달 소비자물가가 1년 전보다 3.4% 상승하면서 3개월 만에 다시 3%대로 뛰었다. 폭우에 이어 폭염, 그리고 태풍으로 농산물 가격이 급등했고, 국제유가 상승으로 경유와 휘발유 가격도 상승세다. 추석 연휴를 앞둔 서민들의 걱정이 커질 수밖에 없다. 경주지역 채소와 과일 값이 우려했던 대로 치솟고 있다. 8월 기준 채소가격은 무가 전달보다 60.9%, 배추는 41.8% 오르는 등 농산물 가격이 상승하고 있다. 과일 가격 역시 뛰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산물유통정보에 따르면 지난 4일 사과 도매가격은 10㎏에 8만4800원으로 1년 전보다 59.9%, 배는 15㎏에 5만6780원으로 27.4% 급등했다. 그동안 물가 안정에 기여해왔던 유가도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는 추세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 오피넷에 따르면 9월 첫째 주 경북도내 평균 휘발유 1리터 가격은 1744원으로 전월(1688원)보다 3.3% 올랐다. 경유가격은 리터당 1627원으로 전월(1506원)보다 8.0% 상승했다. 유가는 지난 7월부터 7주 연속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생활물가 역시 줄줄이 인상됐다. 전기요금은 이미 올랐고, 지역 내 도시가스 요금도 지난달부터 2.24% 인상됐다. 여름 폭염에 에어컨을 틀었다가 지난해보다 큰 폭으로 오른 전기요금 고지서를 보고 놀란 가정이 적지 않았다. 이젠 다가오는 가을, 겨울엔 난방비 걱정을 해야 할 지경이다. 당장에야 추석 물가부터 잡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지갑 사정이 얇은 서민들은 앞으로가 더 큰 문제다. 지난달 러시아가 흑해곡물수출협정 중단을 선언해 밀, 옥수수 등 국제 곡물가격이 오르고 있고, 유가 인상이 더해지면 물가가 안정 국면에 접어들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기 때문이다. 장마와 폭염, 태풍 등 기상이변과 국제상황 등으로 물가가 오른 측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정부와 지자체가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물가 상승은 가뜩이나 움츠러든 소비를 더욱 위축시킬 공산이 크고, 결국 지역경제가 침체 위기에 빠질 수 있다. 농수축산물 수급 불안을 해소시키기 위한 대책과 함께 추석 전과 후까지 미칠 영향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최적의 물가 대책을 수립해 서민들의 주름살을 펴주길 바란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남긴 바 있다. 이런 전제를 갖게 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현상들에 대한 나의 심리적 경향성은 어떤지 확인해볼 필요가 생긴다. 나의 심리적 경향성을 확인한다는 것은 내 마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외부에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타인들에게 어떻게 비쳐지는 지를 확인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나는 왜 외부의 정보에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나는 저 사람과 왜 의견이 다른 것인가 혹은 저 사람과는 왜 불편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다. 하워드 가드너 박사가 다중지능이론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지능 중에 자기이해지능이라는 것이 있다. 자기이해지능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가에 대한 인지적 능력이다. 자신의 주관적인 현실과 객관적인 현실을 잘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해서 자기존중감을 높여주고 자신이 처한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흔히 자기이해지능이 높아야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이해지능이 높으면 자기 자신에 대한 논리적 신념이 선명해 이른바 자기도식이 명확해지는 효과가 있다. 자기도식이 명확하다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영향을 적게 받으면서 자신을 독립된 존재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독립된 존재로서 자리매김을 한 사람은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이를 과감하게 행동에 옮긴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거나 혹은 외적으로도 성공하는 이에게 흔히 보이는 특성이다. 자기이해지능은 자아존중감과 회복탄력성과도 연동된다. 자기이해지능이 높으면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자신의 목표를 잘 이해하기에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꾸준히 정진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자아존중감이 잘 갖추어진다. 게다가 게다가 살면서 곧잘 문제에 부닥쳐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도 충분히 생기게 한다. 자기이해를 잘 한다는 것은 곧 자아존중감과 회복탄력성이 풍부하다는 의미가 된다. 현실에서 안타까운 점은 자기이해를 해보고자 하는 욕구조차 너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격이나 인지능력처럼 자기이해의 능력 또한 어느 정도는 선천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자기이해의 정도를 높일 수 있는 시도는 충분히 해볼 수 있다. 우선 일상 속에서는 학교나 가정에서 자기이해지능을 높이기 위한 훈련의 과정을 시행해볼 수 있다. 매일매일 자신의 일상을 정리하고 계획하는 버릇을 들인다거나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는 정리의 시간을 가지는 것 그리고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꾸준히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지는 것 등이 그 실천 방법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부모나 교사 또는 멘토같은 조력자의 꾸준하고 집중적인 관심이 있어야 만족스러운 진전을 맛볼 수 있다. 이런 시도를 스스로 해볼 수 있는 이라면 이미 자기이해지능이 어느 정도는 갖추어져 있다고 봐야되니 스스로 시도해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조력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또 다른 방식으로 자기이해도를 높이는 방법은 다양한 심리검사를 통해서 자기탐색을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것이 널리 알려진 MBTI나 애니어그램같은 성격유형검사들, 다양한 종류의 진로검사들과 대인관계검사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믿을만한 조력자는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반드시 잊지 말아야 될 점은 자기이해를 위한 심리검사들은 결과지를 받아보는 것이 끝이 아니라 자기이해를 위한 시작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검사를 하고 결과를 받아보는 것은 시작 전 준비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심리적인 경향성을 정확히 해석받고 이를 토대로 꾸준하게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이어져야 비로소 자기이해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용후핵연료(고준위방사성폐기물)의 임시 건식저장시설인 월성원전 맥스터 추가 증설에 따른 보상금 중 150억원을 종잣돈으로 감포읍과 문무대왕면, 양남면 각 마을에 도시가스를 공급할 목적으로 경주시가 타당성 조사 용역을 시작했다. 정말 잘한 일이다. 1983년 경주시(월성군) 양남면에 중수로형 원자력발전소 월성 1호기가 상업가동 된 이래 원전과 관련된 지역특별지원금 7970억원이 지원되었다고 월성원전 맥스터 추가건설 찬반 논쟁 때 월성원전 노조에서 홍보유인물에서 주장했었다. 어떤 근거에 의해서 그렇게 많은 돈이 지원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중수로형 월성1~4호기, 경수로형 신월성1~2호기까지 지난 40년간 지원되었던 돈이니까 그 정도는 지원이 되었겠구나하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그 많은 돈이 경주시를 비롯하여 동경주(감포읍, 문무대왕면, 양남면)에 투입되었는데 지금도 동경주에 가보면 큰 대형병원이나, 사회복지회관, 쇼핑몰, 교육시설이 없거나 열악하다. 지난 2021년 7월 21일에는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에서 SMR을 연구할 ‘한국원자력연구원 문무대왕과학연구소’가 착공식을 했다. 이제 우리나라도 미래 혁신형 원자력 신기술 연구개발에 많은 관심과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정부는 올해 3월 경주시 문무대왕면에 미래 원자력산업을 주도할 SMR 국가산업단지 후보지로 최종 확정했다. 소형모듈원전(SMR)혁신원자력 국가산업단지가 문무대왕면 동경주IC 인근 150만㎡(46만 평)에 2030년까지 3966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조성된다. SMR 국가산업단지에는 원자력·전력산업, 원전해체, 연구개발서비스 등 핵심 23개 업종과 그린에너지, 소재부품, 전기설비 등 연관 29개 업종이 입주한다. 이처럼 역사문화도시 경주가 ‘첨단과학기술혁신’도시로 탈바꿈하겠다는 구상을 경주시가 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3년간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숙박과 요식업체 등 관광산업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경주경제가 심각한 상황을 겪고 침체가 되었다. 경주경제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 원자력 관련 산업이다. 지금 경주에는 원전 6기와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처분장, 양성자가속기, 한수원본사, 한국원자력환경공단이 있고, 2025년에는 한국원자력연구원 문무대왕과학연구소가 문을 연다. 2030년 SMR 국가산업단지가 완공되고 많은 원전 관련 연구자와 기업체가 입주하게 되면 경주에 획기적인 변화가 예상된다. 문제는 많은 연구진과 근로자들이 경주지역(동경주)에서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데 사회적 인프라와 편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질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요즘 중소도시들은 인구감소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왜 사람들이 대도시로 수도권으로 떠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일자리, 교육, 정주여건이다. 그래서 경상북도와 경주시가 많은 대책을 세우는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 원자력에 특화된 미래 자족도시를 조성한다는 ‘테크노폴리스’ 조성 업무협약을 한국수력원자력, 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원자력환경공단과 경상북도, 경주시가 함께 했다. 동경주 지역의 열악한 교육, 문화, 정주 환경을 개선하고 첨단산업과 원자력관련 종사자들의 연구와 근로환경 개선과 복지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업무협약이다. 문제는 동경주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우리 경주시민들의 절대적 협조이다. 소지역주의와 편협한 배타주의를 버리고, 지역 연고주의와 학연, 혈연, 지연을 버려야 경주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한수원 자사고(自私高)가 예산도 있었고 방폐장 유치 공약이었는데도 왜 폐지되었는가, 경주지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된 특정 고등학교의 동창들의 반대가 주요 요인이었다는 이야기가 정설이다. 지역의 우수한 인재들이 역외로 빠져 나가는 데는 경주지역의 비평준화가 문제이고,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나 특수목적의 고등학교(원자력 공기업을 중심으로 기업형 자율형사립고)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자사고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있다. 교육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병원이다. 동경주에 대형종합병원이 있어야 한다. 최첨단 의료설비와 우수한 의사들과 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정주여건이다. 교통과 문화, 환경, 난방 등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사람들이 주거 공간으로 선택을 할 것이다. 문무대왕과학연구소가 감포에 왔으니 무조건 감포에 살아라, SMR 국가산업단지가 문무대왕면(양북면)에 왔으니 국가산업단지 입주 종사자는 무조건 문무대왕면에 살아라, 중수로해체연구센터가 양남에 왔으니 양남에 살아라, 이렇게 단순하게 윽박지르고 요구할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주거의 자유가 있는 나라다. 문제는 살지 말라고 해도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중에 경주시민(동경주주민)들의 친절과 애정어린 관심이다. 인간이 어찌 사랑만 갖고 살겠는가. 요즘 같이 기후변화로 인해서 전기료와 난방비가 주거환경에서 엄청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런면에서 경주시의 동경주지역의 도시가스 공급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동경주에는 오지마을이 많아서 경제성 분석에서는 마이너스 요인이 많겠지만 문무대왕과학연구소, 월성원전 사택, SMR 국가산업단지 등 미래를 보면 반드시 도시가스가 필요하다, 오지 마을과 같이 도시가스 배관이 못들어가는 지역에는 ‘액화석유가스 저장탱크’(LPG)를 설치하여 공급하는 분산형에너지(분산에너지활성화특볍법)정책도 도입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경주시가 많은 예산이 필요하겠지만 경주시의회의 대승적 결단을 통해서 동경주지역에 도시가스 공급을 기대한다.
전복(全鰒)은 복어(鰒魚)·구공라(九孔螺) 등으로 불리며 최상급 해산물로 분류되어 임금에게 진상하는 귀중한 공물이었고, 껍데기 담갔던 물로 눈을 씻으면 눈이 밝아진다며 석결명(石決明)으로 불린다. 귀한 전복은 한양으로 보내질 만큼 그 가치가 높아졌고, 그로 인해 지방의 전복 채취와 공물을 위한 폐단이 발생하기도 하였는데, 중추원사(中樞院使) 기건(奇虔,1390~1460)은 제주 안무사(按撫使)가 되어 백성들이 전복 채취에 매우 괴로워하자 자신은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고, 정조년간 울산 병영의 군사들이 부산 기장으로 넘어와 무단으로 전복을 채취한 일을 금하고 방비한 전복월경채취금령불망비(全鰒越境採取禁令不忘碑) 등이 이 일을 뒷받침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복ㆍ연어ㆍ넙치ㆍ은어ㆍ대구ㆍ홍합ㆍ청어ㆍ방어ㆍ황어ㆍ홍어ㆍ김·미역·농어ㆍ문어ㆍ송어 등이 경주부의 토산물로 언급되며, 지금도 감포항 일대의 전복은 최상급으로 높은 가격에 판매된다.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은 『동경유록(東京遊錄)』에서 “1580년 5월 19일. 가랑비가 아직도 뿌리고 구름이 어제와 같이 어두웠다. 또 소봉래로 가는 길이 막혀 우리 두 사람은 이부자리에서 급히 아침밥을 먹고 도롱이를 걸치고 감포로 향하였다. … 미시(未時:오후1~3시)에 우진(右鎭)에 이르니 진장(鎭將) 정군응(鄭君應) 시중(時仲)이 우리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헌(軒)에 자리를 펴고 기다리고 있었다. … 함께 배에 올라 바다 어귀에서 몇 리쯤 들어가서 해척(海尺:어부)을 불러 전복을 찾았다. 그 사람은 발가벗은 몸으로 물에 뛰어들었고, 선회하는 물살과 함께 들어가 물결을 차고 수영을 하면서 번갈아 물속을 들어갔다 나오며 백여 개를 잡았다. 회로 먹고 구워 먹기도 하였는데, 그 맛이 매우 좋았다” 우와(寓窩) 이덕표(李德標,1664~1745)는 1704년 가을에 『수승록(搜勝錄)』에서 “바다 가운데 기이한 바위가 솟아올라 흰 돌이 선명하니, 세속에 전하길 ‘대왕암’이라 하였다. 해가 이미 저물기에 촌사(村舍)에 들어가서 묵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생선을 익혀서 반찬으로 내어놓았다. 다음날 … 사공을 불러서 술을 들고 함께 배에 올랐다. 중간쯤에서 돛을 달아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마시니, 마음은 가벼워져 마치 바람을 타고 신선이 되어 하늘을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또 잠수 잘하는 몇 사람들을 골라 함께 배에 탔다. 물속에 들어가 전복을 따게 하니, 앞장서서 물에 들어가는 모습이 가벼운 물오리와도 같았고, 박[부표]에 의지해서 숨을 쉴 때는 긴 휘파람을 부는 것 같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볼거리였다. 대왕암 곁에 배를 대고 모가 난 바위에 기어올라 잠깐 배회하였다. 층층으로 모가 나 위험하여 실족할까 두려웠다.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1808~1858)는 1857년 늦봄 「남유일기(南遊日記)」에서 “4월 27일 저녁에 동해창(東海倉)에 도착하였다. 만파정(萬波亭) 앞은 끝없이 넓은 바다가 가까이 있고, 바닷물은 바람도 없이 절로 물결쳤다. 파도는 그치지 않고, 잔잔한 바람이 겨우 스쳤다. 물이 솟구쳐 뒤집히고, 벼랑에 서로 세게 부딪혔으며, 서해와 비교해 갑절이나 위험하다고 느꼈다. … 다음날 어부에게 그물로 물고기를 잡게 하고, 나가서 그 광경을 보았다. 여러 사람이 배에 타고 바다에서 그물을 펼치고는 큰 새끼줄을 양쪽 언덕 끝에 연결하고, 언덕 위의 여러 사람이 함께 힘써 끌어당겼다. 그물이 물가에 이르자 물고기가 팔딱 튀어 나왔으니, 또한 하나의 볼거리였다. 또 전복을 채취하는 자는 긴 밧줄 한 두(頭)로 가볍고 물에 뜨는 나무껍질 몇 줌을 묶고, 나머지 밧줄을 길게 풀어 놓고 벌거벗은 몸의 허리에 묶었다. 작은 칼을 가지고 물에 들어가 전복을 따내고는, 물에 떠 올라 묶은 나무껍질에 의지해 가슴에 걸치고 휴식하다가 또 물에 들어가 전복을 채취하는데, 매우 위태롭고 두려워 보였다. 이상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경주 감포를 유람하며 고기잡이와 전복을 채취하는 모습을 생생히 기록한 글이다. 지금이야 다이빙 장비가 발달해 안전하게 물질을 할 수가 있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엉성한 생명줄과 부력이 약한 나무껍질 등에 의지해 억지 숨을 참고 숨비소리를 내며 귀중한 전복을 땄다. 사람이 생계를 도모하는 그 방식에 어떠한 한계가 있겠는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삶을 연명하였으니, 어찌하여 사람들이 전복 채취를 생계로 삼았겠는가? 지금도 감포의 해녀는 생계를 위해 물질을 놓지 못하고 있으니, 예나지금이나 세상이 이익을 좋아하고, 영화를 탐내는 것 또한 무엇이 이와 다르겠는가?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가진 대한민국의 명성은 자자하다. 미국 한인 지역에서 ‘학원’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고 수학 학원이 성행할 정도였으니 두말하면 입만 아프다. 그런 대한민국이 이상하다. 대가족 시스템에서 자연스럽게 익혔던 예의범절이 사라지고, 외국 문화의 유입으로 세대 간의 의견, 문화의 격차가 확대되고, 주택에서 아파트로 삶의 터전이 옮겨가고, 낮은 출산율로 중국 못지않은 귀하게 자란 아이들로 인해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놀이터에서 터널 미끄럼틀 위로 올라간 남의 집 아이에게 ‘조심하라’라는 말 한마디가 더 조심스러워진 세상이다. 그런데 이런 놀이터나 식당 같은 공공시설에서 느껴지는 아이들의 행동은 더 예의 없어지고, 비상식적인 부모가 더 늘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학교에서 제대로 교육을 못 해서? 공교육이 무너져서? 아니다! 가정 교육의 부재가 문제다. 요즘 대다수 유아는 어린이집을 다닌다. 빨리 보내는 경우 걸음마부터 어린이집에서 익히기 시작한다. 아이가 태어나서 발달과정에서 여러 과정이 있는데, 24~36개월 사이에 아이들은 기저귀 떼기와 의사 표현 시기에 벌어지는 고집을 피운다. 이런 과정은 기본적으로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어린이집에서는 집에서 시작했으니 연장선상의 하나로 부탁을 드리는 정도다. 그런데 요즘 엄마들을 보면 아줌마가 생각해도 답이 없는 경우가 있다.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까지. 모든 것을 일임하는 부모들을 보곤 한다. 기저귀 떼 주세요. 한글 익히게 해주세요. 받아쓰기해 주세요. 애가 스트레스 안 받게 책 읽어주세요. 요즘 우리 아이가 컨디션이 안 좋으니 큰 소리를 내지 말아주세요.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그냥 놔두세요. 집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데요? 기저귀 떼는 것도, 한글을 익히는 것도, 받아쓰기를 하는 것도, 아이의 인성 교육도 모두 가정에서 해야 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모범을 보이며 아이에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 보육시설은 부모의 부재로 인한 돌봄의 공간이지 교육의 공간은 아니다. 물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되지만, 실제적인 교육은 모두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 역시, 그 쓰임의 올바른 가치관을 집어 넣어주는 대상은 부모다. 아줌마의 아들 녀석은 용돈 교육을 하는데, 처음에는 받자마자 쓰더니 이제는 무조건 아끼기만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줌마는 아들에게 돈이 삶의 최우선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돈이 최우선 가치가 된다면 도둑이 되거나 사기꾼이 되면 되는 것이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어느 정도 필요하기에 용돈 교육, 경제 관념을 가르쳐주는 것이다라고 용돈 교육이 이유를 넌지시 알려주었다. 모든 아이는 다 다르다. 아줌마의 세 아이도 다 다르다. 아이의 성향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적절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것은 가정에서, 부모가 해야 하는 일이다.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아이의 시점에서, 친구의 시점에서, 선생님의 시점’에서 같은 이야기를 나눠본다. 그러면 마냥 억울하지도 않고, 타인의 생각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야 함도 알게 된다. 이런 것도, 모두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요즘 부모들을 보면 아이에게 놀 시간은 주지 않고 머릿속에 지식만 가득 넣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곧잘 보곤 한다. 그런데 아는가? 외국 명문대 학생들, 우리나라 인서울 상위대학 친구들의 학창 시절을 물어보면, 모든 시간을 공부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잘 놀고 잘 공부한다. 잘 놀았기에 집중해서 잘 공부할 줄 아는 것이다. 우리 아이를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으로 만들려는 것이 목표인가? AI 시대에? 가정에서 우리 아이들은 기본적인 것을 배워야 한다. 공공장소에서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은, 모두 가정 교육이 부재로 인한 것이다. 가정 교육의 부재는 각종 사회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절대 가정 교육의 의무를 저버리지 말자.
꿈이란 무엇일까? 꿈이란 반드시 이루어야 가치 있는 것일까? 더 근원적으로 꿈을 꾸는 것은 꼭 어리거나 젊을 때에 국한된 것인가?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꿈을 잃게 된다. 어릴 때 거창했던 꿈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오그라들고 초라해진다. 이것을 조금 미화시켜 표현하면 ‘현실화’라 할 수 있다. 어릴 때의 막연했던 거창한 꿈이 자신의 능력과 현실을 알고 다양한 한계를 만나면서 구체화 되는 것이다. 어떤 꿈을 꾸었건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그 꿈은 어지간해서는 다시 꿀 수 없게 된다. 태어난 환경이 가난하거나 어려울수록 꿈은 일찌감치 더 먼 곳에 있다. 생존은 꿈보다 훨씬 가까운 문제고 심지어 꿈을 꿀 시간조차 사치스러운 것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다행히 운이 좋아 그런 환경을 피할 수 있었고 학교나 직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꿈이 반영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만 대부분 인생은 백화점에서 느긋하게 명품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불편한 채 몸을 뒤틀면서 걸어가는 것이다. 여기에 결혼과 가족은 꿈과 멀어지는 또 다른 원인을 제공한다. 삶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꿈꾸기보다는 안주하기를 바라고 어느샌가 자신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조차 잊어먹게 된다. 꿈꾸는 것은 무모하고 꿈이란 것 자체가 허황되다는 자기변명도 이때 생긴다. 이쯤 되면 꿈은 더 이상 가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의 반복이 깨지지 않기를 바라는 꿈의 박제가 일어난다. 다행인 것은 그렇다고 그게 딱히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나 비슷한 길을 가기 때문에 비교대상조차 없는 현실은 대부분의 꿈을 꿈(夢)으로만 한정시키고 만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일까? 위 세 가지 질문의 무의미함과 현실적인 한계를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통쾌한 영화가 있다. 브리티시 오픈의 유령(2021/크레이그 로보츠 감독)은 중년의 남성이 자신의 꿈을 찾아 불굴의 의지로 도전하는 과정을 그린 명작이다. 더구나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주인공 모리스 플릿크로프트(마크 라일런스)는 조선소 크레인 작업자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은 모리스는 사생아를 둔 여인을 만나 결혼해 다시 쌍둥이 아들을 둔다. 자연스럽게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이 무슨 꿈을 가졌는지조차 모른 채 ‘조선소의 소모품’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만46세 되던 1975년, 모든 상황이 바뀐다. 아니, 상황이 바뀐 것이 아니라 똑 같은 상황에서 아내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권유를 받게 되며 꿈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가족들을 위해 헌신했으니 이제 자신의 꿈을 펼치며 살아 보세요” 그러나 이때쯤의 모리스는 자신이 오래전 어떤 꿈을 가지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다 우연히 TV에서 골프경기를 본 모리스는 골프야말로 자신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꿈임을 확신한다. 그리고는 무턱대고 1976년에 열린 브리티시 오픈에 도전장을 내밀고 당당히 우승을 노린다. 참가신청서에는 프로골프라 허위로 썼고 공식 스폰서까지 자신이 근무하는 조선소를 넣어서 쓴 모리스의 참가신청서를 받은 브리티시 오픈 주최측은 골프라고는 생판 모를 초보자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한 채 프로골프라 거짓으로 꾸민 신청서를 대충 보고 참가를 허락한다. 그때부터 모리스는 연습을 시작하지만 클럽에 등록도 하지 않았고 레슨도 받지 않은 채 대충 골프 클럽을 장만하고 대충 옷을 사입고 대충 골프화를 사서 연습을 시작한다. 그래도 연습만큼은 혼신을 다해서 한다. 과연 모리스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이번 호에서는 이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매듭을 짓겠다. 참가허락서를 받아든 채 ‘이제 프로가 되는 것은 눈앞이다’며 ‘연습은 완벽에 가까워지는 길이다’고 외친다. 이 무모한 도전이 가져올 후폭풍을 즐기는 것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다. 영화를 통해 우리 누구나 모리스 플릿크로프트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인생이 훨씬 풍요로워질 것이다. 꿈은 누구가 꿀 수 있고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고 꼭 어리거나 젊을 때가 아니라도 좋다는 확신을 이 영화를 통해 배워보자. 분명한 사실 하나, 브리티시 오픈에는 분명히 유령이 나타나 모든 골퍼들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경주시가 오는 22일까지 ‘2024년 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 참가자 10여명을 모집한다. <사진> 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는 방과 후 돌봄이 필요한 청소년들에게 학습지원, 체험활동 등 종합서비스를 제공해 청소년의 건강한 성장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지원 서비스는 △학습지원(국어·영어·수학) △체험·역량강화(악기, 체육, 창의과학) △생활지원(급·간식제공, 상담, 귀가차량 지원) △특별지원(보호자교육, 운동회, 캠프) 등이 있다. 신청 대상은 방과 후 돌봄이 필요한 예비 중학교 1학년으로, 전화상담 후 청소년수련관에 방문해 접수하면 된다. 이어 등록이 완료되면 내년도 1월 개원식부터 참여할 수 있으며, 참가비는 무료다. 경주시 관계자는 “청소년들이 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에서 다양한 활동을 체험하며 자기계발 강화를 통해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더욱 내실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고 전했다.
경주시가 ‘2023 가을학기 특기적성 교육과정’ 수강생 485명을 모집한다. <사진> 가을학기 프로그램은 △드론항공 △융합코딩 △뮤지컬 △창의력 멘사 △바이올린 △K-POP댄스 △토탈공예 △화랑문화탐방 등 43개 과정이다. 9월 23일부터 12월 22일까지 3개월 과정으로 진행된다. 참가대상은 지역 청소년 및 성인(화랑문화탐방에 한함)이다. 수강료는 3개월 간 청소년 3만원, 성인 6만원이다. 신청은 기초생활수급자와 시설아동 등 수강료 감면대상은 오는 13일부터 15일까지 청소년수련관 방문 또는 전화로 우선 접수한다. 이어 일반인들은 18일부터 20일까지 경주공공서비스예약(인터넷) 사이트에서 선착순 접수한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청소년수련관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참고하거나 아동청소년과 청소년활동팀에 문의하면 된다. 경주시 관계자는 “지역 청소년들이 특기적성 교육을 통해 청소년수련관에서 알차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청소년의 요구와 흥미를 반영한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어둠에 물든 경주의 밤이 저마다의 소원과 기대로 분주하다. (사)신라문화원은 지난 2일 비 내리는 가운데 월정교에서 ‘신라달빛기행’을 진행됐다. <사진> 이날 프로그램으로는 ‘소원 백등 꾸미기’와 ‘별자리 스킨 프린팅’, ‘셀프 포토존’ 등이 진행됐고, 지역 예술인들의 공연 버스킹 ‘별빛소리’, 전통주 부스 ‘달빛주막’, 선덕여왕과 요석공주의 인증샷 등 다양한 이벤트가 지역민과 관광객들을 매료시켰다. 투어 후에 펼쳐진 지역예술인들의 국악, 무용, POP 음악 등의 공연도 추가적인 즐거움을 선사했다. 신라달빛기행은 1994년 칠불암 달빛기행을 시작으로, 올해도 예외 없이 경주의 천년 고도 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지난 5월부터 5차례 진행했으며, 오는 10월 14일 마지막 회차만을 남겨두고 있다. 신라문화원 관계자는 “10월 행사에는 저녁에 진행되는 달빛기행에 앞서 오후 1시부터 선덕여왕릉, 진평왕릉까지 이어지는 황금들녘을 거닐고, 무열왕릉을 방문해 문화재 답사는 물론 서악동 삼측석탑 앞에서 진행되는 구절초 음악회의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면서 “야간에는 백등을 들고 문화해설사와 함께 월정교, 첨성대 등 신라왕경지역에서 운치를 만끽하며 프로그램이 마무리된다”고 설명했다. 올해 마지막 신라달빛기행은 신라문화원 홈페이지를 통한 사전 접수로 이뤄지며, 행사참가비는 2만원이다. 문의는 신라문화원 054-777-1950으로 하면 된다.
경주엑스포대공원에 가면 저녁 일몰 후부터 밤 10시까지 레이저 쇼를 감상할 수 있다. <사진> 야관관광 활성화 및 방문객에게 독특하고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경주타워 전망층에 레이져 쇼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필요한 장비와 시스템을 구축한 것. 보라와 초록색으로 이루어진 빛줄기들이 하늘과 대지를 가르며 휘몰아친다. 한 순간 경주엑스포대공원 경주타워는 은하수를 걷고 있는 듯한 황홀함을 선사한다. 타워 앞 주작대로와 왕경 숲에도 이 신비로운 빛들이 스며든다. 잔잔한 바람에 부풀어 오르는 나뭇잎 사이로 흐르는 빛줄기들은 숲을 동화 속 세계로 변화시킨다. 경주엑스포대공원 관계자는 “레이저 쇼와 함께 경주엑스포대공원에서의 추억과 감동의 빛줄기가 관람객들의 마음 속에 더 깊이 새겨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2023년 현재의 나정 경주시는 현재 나정 복원 사업 1차로 기단을 복원한 상태다. 향후 예산이 확보되는대로 우물과 정자 등을 복원할 계획이다. <사진: 이상욱 기자> 1930년대 당시의 나정 오릉에 동남쪽으로 바라보면 소나무 숲이 보이고 그 가운데 조그만 비각이 있다. 그 비각 옆에 있는 우물 ‘나정’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깃든 곳으로 사적 제245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시 탑동에 위치해 있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옥산서원 안강읍 옥산리에 위치한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조선 선조 5년에 경주부윤 이재민이 건립했다. 이 옥산서원 안에는 회재 선생의 글씨, 퇴계 선생의 글씨, 삼국사기 완전 1질 등이 보관되어 있어 학술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금척리고분군 경주군 건천읍 금척리 국도 좌우에 위치한 크고 작은 무덤 50여기가 금척리고분군이며, 사적 제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고분들 중 어느 한 곳에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중 하나인 金尺(금으로 만든 자)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있어 금척리라 동네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괘릉의 모습 광대한 능역 가운데 석조호석을 돌린 원형토분의 능침이다. 양각된 12지신상이 자유롭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석조기술의 능숙함을 맛볼 수 있으며, 전형적인 신라능묘제도를 갖춘 능으로 사적 제26호다. 1930년대 안압지(동궁과 월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정원으로 주목된다. 지난 1975년 3월부터 약 2년간 실시한 문화재관리국의 발굴조사에서 화려한 금은장식품과 궁중에서 사용하던 여러 가지 생활용구, 놀이할 때 사용하는 주사위, 나무배와 많은 기와 등 약 1만5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돼 통일신라시대 궁중생활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석굴암 본존불상 국보 제24호인 석굴암 석굴은 토함산 중턱에서 동남쪽으로 동해를 향해 화강암을 이용해 석굴을 건축하고,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주벽에 39체의 불상을 조각했다. 원숙한 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에 가까운 본존불상은 3.26m로, 한국불교조각의 대표라 할 수 있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백률사 경주시내 북쪽 소금강산 중턱에 자리 잡은 백률사는 신라 23대 법흥왕 때 불교공인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차돈의 목을 베었을 때 그의 머리가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지금의 소금강산에 떨어졌으므로 그 자리에 절을 세워 자추사라 불렀다고 한다. 백률사에는 현재 주춧돌, 석동옥개석, 바위에 새긴 7층 석탑과 조선시대에 세운 대웅전이 남아 있으며, 국보 제28호인 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도 이 절에 있던 불상이다.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경주여자정보고가 막바지 하계 혈액 수급 안정화를 위해 대한적십자사 울산혈액원의 버스에 100여명이 올랐다. 경주여자정보고는 2008년 이래로 꾸준히 헌혈사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평균 교사와 학생 등 100여명이 헌혈에 도움을 주고 있다. 헌혈에 참여한 학생들은 “헌혈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니 기쁘다”, “졸업할 때까지 헌혈을 하겠다”, “헌혈 버스가 아니더라도, 평소에도 헌혈을 자주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도금주 교장은 “꿈을 이룰 수 있는 학교, 따뜻함이 있는 머물고 싶은 학교가 우리 교훈이다”며 “이번 헌혈을 계기로 학생들에게도 교직원들에게도 나눔과 배려를 통한 소통과 실천 중심 인성이 함양됐으면 하고 세계 속에 큰 빛으로 뻗어나갈 소중한 학생을 위해 마음과 정성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헌혈의집 경주센터와 연계해 지속적으로 헌혈을 하고자 하는 단체, 기업 등은 울산혈액원 헌혈지원팀(052-210-8521)으로 문의하면 된다.
경주시 아이돌봄 지원사업 위탁운영 기관인 (사)가경사회서비스지원센터는 지난달 29일 코모도호텔에서 아이돌보미 153명을 대상으로 ‘행복한 동행 함께하는 우리’를 실시했다. <사진> 이번 행사는 아이돌봄 사업에 참여 중인 아이돌보미들이 한자리에 모여 활동 정보 및 경험 사례 공유, 소진 예방 프로그램 진행 등 돌보미들에게 동기부여와 함께 심리 정서적 안정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특히 참석한 돌보미들은 초빙강사의 가야금 연주가 아이돌보미들의 정서적 피로도 해소에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강봉구 센터장은 “아이돌보미의 노고에 항상 감사드린다. 지속적으로 집담회를 개최해 돌보미의 복지 향상과 역량 강화를 위해 기여하겠다”고 전했다 돌보미들 또한 “오랜만에 동료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다”며 “돌봄 전문가로서 만족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오래 활동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사)가경사회서비스지원센터는 2023년부터 경주시 아이돌봄서비스 제공 기관으로 선정돼 현재 241명의 아이돌보미가 양육 공백이 발생한 가정에 찾아가는 개별 맞춤형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아이돌봄서비스 이용을 희망하는 가정은 경주시 가경사회서비스지원센터 아이돌봄지원팀에 문의하거나 관할 행정복지센터 방문 또는 ‘복지로’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 가능하다.
경주시사회복지협의회는 (주)현대강업(회장 이상춘)이 후원하고, 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지원하는 ‘행복Dream투어’ 사업을 실시했다. <사진> 2015년부터 시행돼 올해로 9년차인 ‘행복Dream투어’는 통합사례관리 대상자 아동·청소년들에게 다양한 문화예술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서울특별시 일대 문화탐방 및 체험활동 프로그램이다. 행사는 1박 2일로 진행됐으며 지역 내 초·중학교 5개소, 사회복지기관 및 시설 2개소에서 대상자 및 관계자 등 22명이 참여했다. ‘드림투게더 사진찍기’, ‘밸런스 자기소개’, ‘드림투게더 in 한강(레크레이션)’ 등 다양한 활동과 새로운 친구들과의 관계형성을 통해 참여자들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 신체적·심리적 친밀감을 형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박경복 경주시사회복지협의회장은 “아동,청소년들의 균형적인 성장을 위해 문화예술활동이 필요한 가운데, 현대강업(주)에서 매년 아이들이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시야를 가질 수 있도록 후원해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며 “여행을 통해 문화감수성을 높여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창의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시간이 됐다”고 전했다. 한편, 경주시사회복지협의회는 복지 소외계층 발굴 및 지역사회 자원을 연계 지원하고 있으며, 다양한 사회복지 유관기관과 정기적인 통합사례회의를 실시해 취약계층들에게 필요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자연에는 원래 쓰레기가 없다. 자연에 나뒹구는 쓰레기는 오로지 무책임한 사람들이 버리기 때문이다. 최소한 자기가 가져간 쓰레기만 되가져 와도 우리의 산과 들, 강은 자연 그대로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보호는 거창한 행동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쓰레기는 자기가 되가져 온다는 아주 작은 실천만으로 아주 성공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데 정작 많은 이기적인 사람들은 이 작은 실천을 하지 못해 자연을 망치고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렇게 자연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자연을 아름답게 유지하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사람도 있다. 맨발걷기와 자전거 타기, ‘등산로 입구에 솔방울과 자갈로 만든 하트’ 등으로 본란에 자주 소개된 지연화 씨가 그 주인공이다. 지연화 씨는 옥녀봉을 오를 때마다 제법 큰 비닐 봉투와 집게를 약속한 듯 들고 나간다. 그 이유는 하나, 등산로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 오기 위함이다. 처음 기자의 눈에 띈 이 장면은 지난 3월 10일. ‘#줍깅’이라는 말과 함께 올린 사진에 비닐봉투와 쓰레기 수거용 집게가 보기 좋게 들어 있다. 그 후로 만 6개월이 꽉 차게 옥녀봉을 오를 때마다 지연화 씨의 손에는 비닐 봉투와 집게가 들려 있었다. 이렇다 보니 지연화 씨의 쓰레기 봉투에는 눈에 띄게 쓰레기 양이 줄어들었다. 갈 때마다 쓰레기를 줍기 때문에 옥녀봉 등산로가 깨끗해진 덕분이다. 그러나 유심히 보면 언제나 쓰레기가 들어가 있다. 누군가는 열심히 줍고 있는데 누군가는 몰래 버리는 일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연화 씨가 계속 옥녀봉을 오르는 한 이 등산로에 버려진 쓰레기는 거의 사라질 것이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산을 이롭게 하고 많은 등산객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는 지연화 씨는 그야말로 옥녀봉의 특별한 천사다. 지연화 씨를 봐서라도 자신의 쓰레기는 자신이 가져오는 시민 정신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최근 잇따른 무차별 범죄로 일상 속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자 서울시가 시민들의 안심귀가를 위해 ‘안심이앱’의 기능을 대폭 강화해 눈길을 끈다. ‘안심이앱’은 서울 전역에서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설치한 다양한 기능의 안전앱으로 이번에 그 기능이 한층 보강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안심이앱은 자치구의 고화질 CCTV와 스마트폰을 연결해 안심귀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시가 총괄하고 25개 자치구 CCTV관제센터와 스마트CCTV 8만여 대를 연결해서 긴급신고 대응, 실시간 귀가모니터링 등 안전귀가를 지원하며, 위기상황 시 경찰과 협력해 현장출동도 가능하다. 우선 7일부터 안심이앱으로 ‘긴급신고’를 하면 “긴급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경찰관을 연결 중입니다”라는 음성이 송출된다. 기존에는 사이렌(또는 진동)만 송출했다. 11월부터는 앱에서 서울 전역 2만3000여개 방범비상벨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안심이앱으로 이용자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비상벨 위치를 확인하고 비상벨을 누르면 자치구 CCTV 관제센터에서 파악 후 경찰출동을 지원한다. 12월에는 긴급신고가 다수 발생한 위험지역을 피하고 안심시설이 있는 보행길로 갈 수 있도록 안심경로를 제공하는 ‘안전지도’ 서비스를 시작하고, 스토킹피해자를 위한 영상관제 서비스도 제공할 예정이다. 이 안심이앱은 2018년 서울시 전역에 서비스를 시작한 후 지금까지 22만4600명이 내려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무차별 범죄가 발생한 7월 이후 내려받은 시민들이 평소에 비해 월등히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는 유튜브 방송을 통해 앞으로 안심보안관 동행, 개인안전비상용품 제공, 경광등과 디자인 조명장치 등을 적극 활용해 시민 안전을 지키겠다고 홍보했다.
“새로 왔으면 고마 조용히 지내지 말라꼬 나무 아를 이래 뚜디리 팼노 말이다!” 대문을 밀고 들어온 어느 아주머니가 숨넘어가 가는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어머니는 그저 잘못했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뒤에서 형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내가 암만 가마 있을라 캐도 저노마 저게 맨날 한판 붙자 카는데 그라믄 우야는기요?” 우리가 처음 교촌에 이주해 갔을 때 어린 나는 문밖출입을 조심하라는 어머니의 말을 자주 들었다. 당시 교촌은 ‘교리’라는 말로 더 불렸는데 그 교리라는 명칭 뒤에 쉽게 따라붙은 말이 깡패였다. 돌이켜 보면 교촌이 깡패와 조합을 이룬 것은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교촌은 기본적으로 향교가 있는 마을이었다. 교촌이라는 명칭 역시 조선시대 관립학교인 ‘향교’의 교(校)에서는 나온 말이다. 더욱이 교촌은 영남일대의 거부 경주최부자와 그 가문 사람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마을이고 대대로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나눔을 실현해온 집안이다. 이런 마을이 깡패라는 끔찍한 말과 조합을 이루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조화다. ‘교리깡패’는 어린 시절 은근한 두려움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히려 다른 동네에 비해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런 말의 이면에는 절대적이라 할 만한 이유가 딱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요석궁의 존재 때문이었다. 요석궁은 경주 최부자댁 일가인 최모 회장님이 경영하는 곳이었는데 이 분이 젊은 시절부터 강단이 세고 용력이 남달라 오래도록 전국을 아우르는 건달들의 대부로 알려져 있었다. 요석궁은 당시 전국에 소문난 요정이었고 술을 파는 곳이다 보니 자연 이런 저런 소문에 휩싸였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때 직접 들었던 말로는 요석궁에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건달들이 다 찾아와 최모 회장님을 모시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누구도 함부로 하기 힘든 독보적인 건달들의 아성이 됐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 들었던 이 소문은 아주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가 경주최부자 책을 쓰면서 최부자댁 종손이신 최염 선생님께 여쭤본 바나 내 경험에 비추어 건달들이 떼로 몰려다닌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최염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요석궁 최 회장님이 도량이 넓어 곤궁에 처한 건달들을 잘 보살펴준다는 소문이 전국에 나 있었고 그 소문을 듣고 이름깨나 있는 건달들이 찾아와 몸을 의탁한 경우가 가끔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이 마을에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고 만약 있었더라도 누가 건달인지조차 구분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에게 은근한 두려움의 근원이었던 ‘교리깡패’라는 낙인과 달리 마을은 특별한 폭력사태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험악한 별칭 때문인지 타지에서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도 지레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요컨대 ‘교리깡패’가 유명했던 이유는 실제로 깡패가 횡행해서가 아닌 요석궁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이런저런 소문들이 부풀려져 생긴 말이었다. 물론 아주 냉정하게 따져보면 당시의 교촌에 사는 젊은이들이 다소 거센 면이 없잖아 있었다. 이전에 언급했듯 교촌 인근에는 최부자댁 일가들 이외에 놋전을 제외하고도 80여호의 인가가 있었고 젊은 사람들도 많이 살았다. 그런데 이들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다소 거칠게 대하는 면이 있었다. 아버지 형제분들이 교촌에 들어와 살 때만 해도 나보다 열서너 살 이상 차이 나는 내 사촌 형들이 먼저 터 잡고 살던 젊은이들과 적지 않게 신경전을 벌였을 정도였다. 다행히 우리 집안 형들이 체격이 크고 완력이 좋은데다 운동까지 잘해 삽시간에 마을을 평정하면서 텃세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형 역시 고교 시절 교촌으로 이사 오면서 동네의 또래에게 며칠이나 갈굼을 당한 끝에 대판 싸움을 벌여 상대를 묵사발 낸 적이 있다. 이 글 서두에 쓴 드잡이는 바로 그때의 일이다. 그렇듯 그 시대는 어느 지역이나 그 정도의 텃새와 그로 인한 사건이 흔하게 벌어지던 때였다. 교촌 말고도 바로 인근의 놋전깡패, 건천깡패, 안강깡패에 대한 소문이 나돌았는데 정작 그쪽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를 제대로 몰랐을 것이다. 오히려 교리깡패라고 불렀던 험악한 분위기에 비해서는 지극히 평화로웠던 마을이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다. 교리깡패가 다분히 과장된 말인 이면에 교촌은 묘하게 사람들이 나뉘어 사는 분위기였다. 내가 교촌에 살았던 것은 다섯 살 적부터 고교졸업할 때까지였고 그 후로도 집이 헐리기 한 해 전이었던 2007년까지 본가가 교촌에 있어서 누구보다 교촌의 최근 현황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최부자댁 일가 사람들을 거의 모른 채 고등학교 시절까지 보냈고 그 후로도 최부자댁 일가 사람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이 지냈다. 최부자댁 일가들은 마을 일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런 존중과 경외감의 대상이었다. 그럴 만했던 것이 최부자댁 일가 사람들은 마을 행사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마을 공동사업에도 나오지 않았고 반상회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되짚어보면 내 또래 연령대가 없기도 했지만 최부자댁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을사람들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당시 어머니가 부녀회 부회장을 하시면서 동네를 내집 드나들 듯 다니셨는데 온갖 집안 형편을 미주알고주알 꿰고 계셨으면서도 유독 최부자댁 사람들에 이르러서는 거의 정보가 없었던 것도 최부자댁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지 않았던 정황이다. 다만 어머니는 최부자 일가에 대해서는 반드시 어느 집을 지칭해 그 집 아들들의 이름을 붙여 ‘OO이 최선생댁’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 이유는 당시의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아주 늦게, 내가 교촌 최부자댁 일가들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알게 되었다. 당시 이미 경주 최부자댁 일가들은 교촌을 다수 떠나 있었다. 내가 모시고 책을 쓴 최염 선생님만 해도 젊은 시절에 할아버지이신 최준 선생님을 모시기 위해 대구와 서울에서 주로 활동하셨고 본가에서 지내신 일이 많지 않으셨다. 자제분들도 자연히 최염 선생님을 따라 경주를 떠나 살았으니 마을 사람들과 섞일 일이 없었을 것이다. 최부자댁 일가들이 살던 다른 집들도 비슷한 사정이었다. 내 또래 후손들은 교촌에 거의 없었고 최소한 4~5년 이상 선배들이 몇 명 남아 있을 뿐이었다. 중요한 최부자댁 일가였던 또 한 곳은 요석궁으로 상업지가 되어 역시 일가 사람들이 살지 않는 집이 되어 있었다. 그 외 몇 그러니 불과 이런 집들을 빼면 교촌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기와집 중 최부자댁 일가들이 사는 곳은 겨우 다섯 곳뿐이었고 그나마 젊은이들은 대부분 외지로 떠난 채였던 셈이다. 그나마도 원래 최부자댁 일가들이 살던 집 중 중요한 두 곳이 우리 아버지 형제분들이 사서 들어와 사셨다. 구새댁과 파훼댁이 아버지 형제분들이 살던 집이었다. 이렇듯 최부자댁 일가들이 교촌에서 조금씩 멀어져 살아가기 시작할 무렵 반대로 아버지 형제분들은 교촌에 대거 이주해 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5남1녀, 6남매 중 막내이셨는데 앞 회에서 말했듯 둘째 작은아버지와 함께 우리가 살던 최부자댁 권속인 구새댁을 사오셔서 작은아버지는 안채를, 아버지는 사랑채를 나누어 사셨다. 두 분 이외에 위로 고모님과 큰아버지, 셋째 작은아버지가 교촌에 이주해 사셨다. 이렇다 보니 원래 최부자댁으로 인해 최씨가 많이 살던 동네에 갑자기 박씨가 부쩍 늘어서 살게 되는 현상이 생겼다. 더구나 아버지 형제분들은 모두 6~8남매씩 자녀들을 두셨는데 내 사촌들만 30명에 이를 만큼 박씨가 복닥거리게 되었다. 그중에서 절대적으로 아들 비율이 많았던 우리 집안 특성으로 인해 어느 사이엔가 마을을 나서면 어디서나 사촌 형들이 나와 있을 만큼 우리 집안은 짧은 시간에 교촌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렇듯 교촌은 최부자댁 일가들이 조용하게 전통을 잇는 가운데 우리 집안을 비롯해 교촌으로 이주해온 새로운 구성원들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동네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조화의 바닥에는 존중과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당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최부자댁 일가를 자연스럽게 예우하고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존중에는 교촌의 터줏대감이자 경주의 가장 대표적 양반가인 최부자댁에 대한 존경심이 넓고 깊게 깔려 있었다. 더욱이 백성을 아끼는데 누구보다 열의가 높았던 댁이 최부자댁이었으니 그 후손들일망정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최부자댁 일가분들이 마을 일에 직접 나서지 않았던 것은 그런 분위기를 알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을 편하고 자유롭게 존중하려는 배려였을 수도 있다. 5~60년 전만 해도 은근히 집안을 따지던 시대였는데 누구나 아는 최고의 집안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 사이게 섞이게 되면 그 자체로 분위기가 어색해졌을 것이다. 실제로 뒤에 교촌에 살았던 최부자댁 선배님들에게 이때의 일을 물어본즉 비슷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존중은 반드시 함께 해야 생기는 것이 아님을 이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교리깡패가 유명했던 것에는 최부자댁의 전통에 반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입방아에 오르면서 생긴 헤프닝일 것이다. 내 눈에는 교촌은 아주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불안이 몸으로 느껴질 때 항생제는 꼭 필요한 경우에는 약이 되지만 남용할 경우에는 독이 된다. 장내 미생물과 관련이 있어 소아비만 위험을 높이며, 성인의 경우 당뇨병, 치매와 알츠하이머병, 그리고 폐암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빈혈약 처방을 받으러 온 30대 여성이 진료실을 나가면서 묻는다. “아이가 감기 걸리면 항생제를 함께 먹여야 독한 감염이 예방돼서 좋지 않나요?” 세균성 감염이 의심되는 경우가 아니라 단순 바이러스 감염일 경우에는 반드시 항생제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니며, 항생제 남용은 항생제 내성균을 유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기 엄마는 그래도 항생제를 미리 복용하는 것이 세균 감염 위험을 줄여서 아이에게는 좋은 것 아니냐고 다시 묻는다. 슈퍼박테리아 문제는 남의 문제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항생제 남용이 내 아이의 건강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항생제 투여와 소아비만 우리 연구팀은 2008년부터 2012년 영유아건강검진을 받은 3만여명을 대상으로 생후 24개월 이내 항생제 투여가 소아비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놀랍게도 다양한 항생제를 사용할수록, 총 사용기간이 길수록, 생후 6개월 이내 항생제를 사용했을수록 추후에 소아비만이 될 위험이 높았다. 180일 이상 항생제를 사용한 경우 30일 이내로 항생제를 사용한 경우보다 소아비만 위험이 40% 높았으며, 생후 6개월 이내 처음 항생제를 처음 사용한 경우, 생후 18~24개월보다 비만 위험이 33% 높았다. 항생제 남용이 소아비만 증가로 이어지는 이유는 장내 미생물균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장에 존재하는 유익한 장내 미생물균이 항생제로 인해 손상을 입으면 유익하지 않은 균이 증식하게 된다. 이러한 불균형이 우리 몸의 소화 과정 및 물질대사 과정에도 나쁜 영향을 끼쳐 결국 소아비만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항생제는 사용에 따른 득실을 고려해 꼭 필요한 경우에 의료진과 상의해 처방 받아야 하며, 무분별한 항생제 복용은 소중한 내 아이에게 오히려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성인도 항생제 남용 주의 “항생제를 먹으면 감기가 빨리 낫는다고 하는데요, 성인이 항생제를 남용하면 어떤 영향이 있나요?” 소아뿐만 아니라 성인에게도 항생제 남용은 건강에 영향을 끼칠까? 우리 연구팀은 성인 20만명 이상을 대상으로 다시 연구를 수행했다. 분석 결과, 항생제 누적 처방 일수와 항생제 계열 수가 많으면 당뇨병 발생 위험이 높았다. 항생제를 90일 이상 사용한 그룹은 항생제 미사용 그룹에 비해 당뇨병 발생 위험이 16% 높았다. 또 항생제 누적 처방일이 91일 이상인 그룹은 항생제를 처방받지 않은 그룹에 비해 치매 발생 위험이 44%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치매 발생에 관련이 있는 다른 변수들을 통제하기 위한 성향 점수 매칭 분석 결과에서도 항생제 미처방 그룹에 비해 항생제 처방 그룹의 치매와 알츠하이머병 발생 위험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증가를 보였다. 꼭 필요할 때 정해진 기간 동안만 복용 항생제 남용으로 인한 장내 미생물 불균형은 비만, 당뇨와 같은 대사질환의 발생에도 영향을 주며, 치매와 같은 퇴행성 뇌 질환의 위험을 올릴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항생제와 암 위험은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최근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5년 동안 항생제를 처방받지 않은 군에 비해, 항생제 누적 처방일수가 365일 이상인 군의 폐암 발생 위험이 21%로 더 높게 나타났다. 장과 폐가 연결돼 있다는 장-폐 축(Gutlungaxis) 이론을 바탕으로 장 및 호흡기 내 미생물들의 불균형은 폐암을 포함한 폐 질환 위험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폐암을 유발하는 주요 인자는 흡연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번 연구 결과에서는 비흡연자에게서도 항생제 누적 처방일수가 증가할수록 폐암 발생 위험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경향은 폐암의 위험인자로 알려진 만성폐쇄성폐질환(COPD), 결핵, 천식을 진단받지 않은 대상자에서도 유지됐다. 이러한 국내 연구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항생제는 의료진의 지시에 따라 적응증에 맞게 적절한 기간 동안 신중하게 처방돼야하며 항생제 과다 남용을 경계해야 한다. 항생제는 꼭 필요할 때에 정해진 기간동안 복용하는 것이 나와 내 아이의 건강을 위한 가장 현명한 전략이다. 글: 박상민 서울대학교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자료제공 : 한국건강관리협회 경상북도지부(대구북부건강검진센터) 자료출처 : 한국건강관리협회 건강소식 발췌
부드러운 물감이 캔버스에 닿을 때마다, 작가는 그림 속 인물들의 얼굴에 마음을 담아낸다. 그리고 그만의 강력한 이미지를 만들어간다. 이 고요한 순간은 일상에서 느끼는 각종 감정을 표현하고, 이를 다시 드러내는 반복과 번복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화려한 색채 뒤로 숨겨진 마음을 위로하는 안교범 작가의 개인전 ‘나도 남들처럼’이 10월 10일까지 복합문화공간 로드22 내 갤러리미지에서 열린다. 작품은 사실적인 이미지를 섬세하게 그리는것에서 시작되며, 붓이나 나이프와 같은 도구와 함께 두터운 물감으로 이미지를 다시 덮어 버리며 완성된다. 이미지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새롭게 재구성함으로써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 안 작가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저의 정체성이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서 “그들이 만든 이미지 속에서 내 감정을 찾아내고, 그것으로부터 나를 찾아 나간다” 고 설명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변화와 형태소멸 과정 속에서 작가 스스로와 관람자 모두에게 ‘나’란무엇인지, 내 안에 숨겨진 감정은 어떠한 것인지 계속해서 질문하고 있다. 그는 “이전의 작품에 표현된 어그러지고, 흐르고, 할퀴어진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그날 이후 그들의얼굴에 부드럽고 촉촉한 물감으로 팩을 하며마음을 달래고, 화려한 색채감 뒤에 마음을 숨겼다”고 작품에 대해 부연했다. 사실적인 이미지 위에 다채로운 유화물감을긁어내거나 두텁게 발라 나간다. 작가는 사회에 적응하고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정체성 문제를 작품활동을 통해 탐색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여러 간접적인 감정들과 직면하며, 이를 이해하고 해소해 나갔다. 그의 작업은 단순히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보다 그의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며,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김미지 관장은 “안교범 작가의 생생한 감정탐구 여정을 통해 깊은 공감과 위로를 느낄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라면서 많은 관심과관람을 바랐다. 안교범 작가는 세종대 회화과를 졸업했으며동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03년 개인전 ‘짓이기다’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14회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국내외 단체전 및 아트 페어 참여와 드라마 작품 협찬 등으로 폭넓게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