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a gold crown from the Silla Dynasty found in Cheonmachong Tomb. Cheonmachong had been called Gyeongju Ancient Tomb No. 155, but through excavation in 1973, many relics such as gold crowns and bracelets were discovered along with Cheonmado (Painting of Heavenly Horse on a Saddle Flap), so it was called Cheonmachong.
This pagoda was discovered at the former site of Goseonsa Temple where Wonhyo, one of the greatest Buddhist monks, served as head monk. It was moved to its present location at the Gyeongju National Museum in 1975, when the area occupied by the Goseonsa Temple Site needed to be flooded for the cons..
As it is an astronomical observatory of the Shilla Dynasty, which used to observe the movement of celestial bodies, it is about 9m tall with a wine bottle-shaped cylindrical part placed on the stylobate, which serves as a stand, and a pound button(井)-shaped top placed on top.
This stele was first raised in front of the Tomb of King Taejong Muyeol, the 29th ruler of Silla, in 661. Steles built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were influenced by China’s Tang Dynasty, and so they usually consisted of a tortoise-shaped pedestal with an ornamental capstone in the form of a dragon. The Stele for King Taejong Muyeol is an example of one of the first monuments to display this style.
It is the largest bell remaining in Korea and is one of the three complete bells of the Unified Silla Dynasty remaining in Korea, along with the Bronze Bell of Sangwonsa Temple (National Treasure) and the Bronze Bell (Treasure) excavated in Uncheon-dong, Cheongju. The height is 3.66m, the mouth diameter is 2.27m, and the thickness is 11~25cm, and the weight was confirmed to be 18.9 tons by precise measurements at the Gyeongju National Museum in 1997.
The building of Seokguram Grotto was started in the 10th year of King Gyeongdeok of Silla (751) by Kim Dae-seong, who was one of the highest officials titled ‘Daesang’ at the time, and completed in the 10th year of King Hyegong (774). At the time of its construction, it was called Seokbulsa Temple. King Gyeongdeok was a king of the mid-Silla Dynasty, and during his reign (742-765), Silla's Buddhist art reached its peak. In addition to Seokguram Grotto, many cultural assets such as Bulguksa Temple, Dabotap Pagoda, Three-story Stone Pagoda, and Hwangnyongsa Temple Bell were built at this time.
Bulguksa Temple was built at the request of Kim Dae-seong in the 10th year of King Gyeongdeok's reign (751) of Unified Silla. It is the place where the spiritual world of the people of Silla, who wanted to realize the utopia—the Buddhist Elysium where the past, present, and future Buddhas live, is well revealed. According to 『Samguk Yusa』, Kim Dae-seong built Seokguram Grotto for his parents in his previous life and Bulguksa Temple for his parents in his present life. However, he could not finish building it until he died in December of the 10th year of King Hyegong’s rule (774), and after that, it was completed by the Silla Dynasty and used as a temple to pray for the blessing of the country.
Bulguksa Temple was built at the request of Kim Dae-seong in the 10th year of King Gyeongdeok's reign (751) of Unified Silla. It is the place where the spiritual world of the people of Silla, who wanted to realize the utopia—the Buddhist Elysium where the past, present, and future Buddhas live—is well revealed. According to 『Samguk Yusa』, Kim Dae-seong built Seokguram Grotto for his parents in his previous life and Bulguksa Temple for his parents in his present life. However, he could not finish building it until he died, and after that, it was completed by the Silla Dynasty and used as a temple to pray for the blessing of the country.
공고번호 : 경북-경주시-2023-0901 9월 6일 경주시 산내면 오봉로 129-31 인근서 구조 순하고 귀여운 보슬보슬 털뭉치 믹스 / 남아 / 1차 접종완료 / 중성화x / 3개월 / 2kg 입양문의 054)760-2883 ※반려동물이 실시간 입양됐을 수 있으니 확인 전화바랍니다.
접두어로 사용되는 개는 욕을 표현하는 비속어와 가짜, 질이 떨어지는 저급을 나타내는 의미로 통용된다. 우리나라의 개에 대한 어원은 15세기에는 ‘가히’로 사용하다가 16∼18세기에는 ‘ㅎ’이 탈락한 후 음절이 축약된 ‘개’가 되었으며, 19세기에는 개가 ‘가이, ’으로 사용되었다. ‘개새끼’라는 어휘는 ‘개+새끼’의 합성어로 개의 새끼, 즉 강아지라는 의미이며, 어원적으로는 ‘가히+삿기’, ‘개+삿기’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접두어 ‘개-’의 뜻은 야생의,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 것, 헛된, 쓸데없는, 정도가 심함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개’자를 앞에 붙여 ‘가짜다’, ‘안 좋다’, ‘∼ 인 척하다’, ‘진실되지 못하다’, ‘좀 아니다라 생각된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 ‘개-’가 붙은 낱말을 좋은 뜻으로 쓰이지 않는다. ‘개살구’나 ‘개떡’처럼 사물을 가리키는 말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맛이 없거나 언짢은 것을 비유하는 말로 더 흔히 쓰이고 있다. 즉 접두어 개의 의미는 욕설 또는 가짜다, 안 좋다, 중간급인 이류 (二流)의 뜻으로 사용된다. 이번 글에는 ‘가짜다’, ‘안 좋다’, ‘본이 아니다’, ‘바르지 못하다’, ‘흡사하지만 다른 것’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접두어 ‘개’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접두어 ‘개’는 ‘야생 상태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 의미로 사용된 개복숭아, 개살구, 개머루, 개나리, 개꽃, 개망초, 개오동, 개비름, 개흙, 개차반, 개떡’ 등이며, ‘쓸데없는’, ‘헛된’, ‘가치 없는’의 뜻을 의미하는 개소리, 개수작, 개나발, 개꿈, 개똥철학, 개망신, 개망나니, 개판, 개다리, 개죽음 등이며, ‘정도가 심한’의 뜻으로 상스러운 욕으로 표현된 개잡놈, 개병신, 개막장, 개놈, 개새끼, 개자식, 개망나니 등이 있다. 개복숭아, 개살구에서 쓰인 개-는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야생에서 자란 과일을 말하며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개-머루는 포도과의 낙엽 활엽 덩굴나무로 머루와 비슷하나 먹지 못한다. ‘개나리’는 ‘나리’에 접두사 ‘개-’가 붙은 것이고 나리꽃보다도 작고 좋지 않은 꽃이라고 해서 ‘나리’에 ‘개-’를 붙인 것이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진달래를 ‘참꽃’이라고 하고 먹을 수 없는 철쭉꽃은 ‘개꽃’이라 한다. 개망초는 국화과의 망초속에 속하는 두해살이풀이며, 순수 토종은 망초이고, 외국에서 귀화된 종을 개망초, 민망초, 실망초라 한다. 개망나니는 예절에 몹시 어긋나는 행동을 하거나 성질이 아주 못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보리 개떡’에서 ‘개떡’은 보릿겨 따위를 반죽해서 둥글넓적하게 만들어 찐 떡을 말하며 질이 좋은 것은 아닌 떡을 말한다. ‘개꿈’은 꿈속에 개가 나온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내용도 없이 어수선하게 꾸는 꿈’을 말한다.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진 접두어 ‘개’가 왜 나쁜 의미로 쓰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마도 개를 천대시했던 시절에 만들어진 용어일 것으로 보고 있다. 접두어 ‘개’의 쓰임은 ‘참’(眞)과 ‘개’(犬) 두 글자로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여기에서 ‘참’은 한자어의 진(眞)의 뜻인 ‘참’, 즉 사실이나 이치에 어긋남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고 ‘개’는 한자어 견(犬)의 뜻인 짐승으로 우리가 기르는 개를 의미한다. ‘참’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개’라고 했다. 우리말에 먹을 수 있는 것엔 ‘참’이 붙고, 먹을 수 없는 것엔 ‘개’가 붙었다. 즉 좋은 것, 멋진 것엔 ‘참’이 붙고 볼품없는 것엔 ‘개’자가 붙는다. MZ세대의 언어로 알려져 인터넷상에 통용되고 있는 ‘개이득’, ‘개좋다’,‘개웃기다’, ‘개맛있다’ 등으로 통용되는 뜻과 다른 접두어 ‘개-’가 남용되고 있다. ‘정말, 진짜, 엄청, 대단히’등 다양한 우리말 어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이 알 수 없는 언어이며, 국어 문법에도 맞지 않는 언어는 피해야 한다. 유행어의 일종으로도 볼 수 있지만,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지 않은 신조어의 사용은 삼가야 한다. 최석규 경주개 동경이 혈통보존연구원장 경주신문 독자위원회 위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천년의 향기|선덕여왕의 길을 걸으며 경주는 천년고도로 역사의 시간이 멈춘 듯 묘한 느낌을 받는다. 탑을 찾고 능을 따라 걷다 보면 우연히 마주치는 사지들. 하늘을 바라보면 시간을 건네주는 바람, 공기를 타고 흐르는 알 수 없는 향기, 그 향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라인들의 꿈을 상상하며 걷고 또 걸었다. 그들이 만드는 유물의 시공 사이로 그들의 품은 공기, 구름, 바람, 땅과 별이 느껴진다. 걷다 보니 한국사 최초의 여왕 제27대 선덕여왕에 시선은 멈췄고, 그녀의 행적을 찾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여왕의 발자취를 따라 오래된 공기, 천년의 향기와 선덕여왕의 업적을 생각하고, 문화적 향기를 느끼며 누군가와 공감하고 싶었다. 시간을 초월한 그 너머의 향기를 적외선 기법을 이용하여 그들과 교감한 꿈을 표현하였다.
경주시의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이 전국 평균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청의 ‘2022년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경주지역 자살사망자는 80명으로 전년보다 14명(17.5%) 증가했다. 인구 10만명당 자살사망률도 32.0명으로 1년 전보다 5.7명(17.8%) 증가했다. 전국의 자살사망자는 1만2906명으로 전년보다 446명 감소(3.3%)했고, 인구 10만명당 자살사망률도 25.2명으로 0.8명(3.2%) 감소한 반면 경주지역은 오히려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경주지역 최근 5년간 인구 10만명당 자살사망률은 2018년 32.5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19년 27.9명, 2020년 27.7명, 2021년 26.3명으로 감소세를 보였다가 지난해 급상승했다. 경북 평균은 26.8명으로 경주시가 5.2명 많았으며, 도내 23개 시·군 중에서는 상위 7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지난해 감소했지만,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통계청에 따르면 자살 주된 요인 가운데 정신적 문제가 39.8%로 가장 많았다. 이어 경제생활 문제(24.2%), 육체적 질병 문제(17.7%)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경주지역에서 자살사망자가 늘어났다는 것은 정신건강문제와 더불어 경제적인 문제가 더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자살은 경제적으로 연간 수십조의 손실을 발생시킨다. 자살로 인한 우리나라의 사회적 비용은 암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여기에 자살자의 가족과 친구, 이웃은 표현하기 힘든 고통을 겪는데다 사회적 낙인까지 더해진다. 이는 경주지역 자살사망자가 늘어난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이다. 경주시가 생명안전망을 강화하면서 시민의 정신건강 문제에 적극 대처해야 할 시점이다. 더 이상의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경주시는 다각도의 자살 예방사업을 추진하고 범사회적 예방 환경 조성에 나서주길 바란다. 그래야만 사회적 비용을 감소시키고,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난해 경주지역 인구 자연감소가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 자연감소도 마찬가지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한해 경주지역 출생아수는 981명으로 역대 최저치로 1000명선도 무너졌다. 반면 지난해 지역 내 사망자수는 2713명으로 통계청에서 확인할 수 있는 1998년 집계 이래 최대치다. 사망자가 출생아수 보다 많은 자연감소는 1732명으로 이 또한 최대 기록을 갈아치웠다. 인구감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자연감소는 매년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앞으로가 더 큰 문제다. 매년 출생아 수는 줄고 사망자 수는 늘어 인구 자연감소는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경주시의 인구 감소는 무엇보다 저출산과 고령화의 심화와 관련이 깊다. 연간 출생아수는 지난 2003년 2681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11년 1961명으로 2000명 선이 무너졌다. 이후에도 매년 100여명 이상 감소해오다 지난해 1000명대 이하로 떨어졌다. 합계출산율 역시 매년 감소하고 있다. 합계출산율은 여성 한 명이 가임기간(15~49세)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수다. 최근 5년간 경주지역 합계출산율은 2018년 1.036명, 2019년 0.942명, 2020년 0.971명, 2021년 0.951명, 2022년엔 0.893명으로 감소세를 보였다. 저출산과 맞물린 고령화 역시 문제다. 노인 인구는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출산율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초고령화 사회는 불가피하다. 이로 인해 인구문제에 대한 반전은 앞으로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다. 당장 기업을 유치하고 고용을 증가시킨다고 해서 풀릴 문제는 아니다. 경주시의 문제를 넘어 우리나라 전체 지역이 겪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앞서 10여년 전부터 정부나 각 지자체들이 급격한 인구감소로 인한 경제·사회적 문제가 대두되자 출산 장려를 위한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추진해오고 있다. 그러고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현재 인구감소 추세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실제로 인구감소와 저출산·고령화 사회는 경주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당면한 위기가 됐다. 인구문제는 수치로 보이는 것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당장은 뚜렷한 피해가 없어 보여 심각성을 간과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순간이 와서야 인구문제 해결에 나서는 오류를 반복해 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일회성·단편적 정책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미세한 정책까지 모두 동원해야 한다. 그리고 지자체들은 수치에만 매달리지 말고 현재의 인구를 안정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시급하다. 우선 일자리의 다양화와 삶의 질을 높이는 공동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부터라도 모두가 노력하지 않으면 암울한 미래를 맞을 수밖에 없다.
경주의 꽃은 어떤 꽃일까? 신라시대 국제도시인 경주의 가을에는 어떤 꽃이 피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경주의 가을을 기억나게 할까? 최근 지인으로부터 경주를 방문한 이야기를 들었다. 1박 2일 동안 경주의 멋과 맛을 즐긴 후 경주 방문을 적극 추천하는 지인으로부터 감동까지 받았다. 지인의 대화 중 특히 지인의 가슴 속에 강하게 각인된 경주의 몇 컷이 첨성대 야경과 그 근처 핑크뮬리 및 야생화 꽃단지였음을 알 수 있었다. 나도 가본 적 없는 야경과 첨성대 주변의 아름다움을 설명해주는 지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경주 출신인 내가 경주의 가을과 밤을 제대로 모르고 있기에 반성하는 마음으로 경주다운 꽃에 대해 자문해보았다. 신라시대 꽃에 대한 기억은 선덕여왕과 모란꽃에 대한 것이 전부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함께 나오는데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3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꽃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온 것을 보고 꽃에 나비가 없다는 이유로 선덕여왕이 향기가 없을 것이라 말한 내용이다. 그런데 모란꽃은 정말 향기가 없을까? 아니다. 모란꽃은 향기가 있다. 모란꽃에는 나비도 찾아든다. 화투 6월에 나오는 꽃이 모란꽃이고 거기에는 두 마리의 나비도 날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14년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宮內穿池造山 種花草 養珍禽奇獸)’라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그때 동궁과 월지에 심은 화초는 무엇이었을까? 외래종인 핑크뮬리는 분명 당시 경주의 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핑크뮬리가 2023년 경주의 가을을 대표해야 할 수 있을까? 보이는 자체로만 평가하면 핑크뮬리는 가을을 맞아 정말로 아름답게 군락을 이루며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문제는 이를 선택한 사람들이 핑크뮬리를 제대로 알고 가꾸었는가이다. 핑크뮬리는 꽃 한 다발에 씨앗이 약 7만∼8만 개 들어 있어 그 번식력은 놀랍다고 한다. 또, 한 번 뿌리 내리면 제거도 어려워 토종 생태계에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엄청난 번식력이 우리 고유의, 경주의 풀, 야생화를 없애는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을까 두렵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환경부는 2019년 핑크뮬리를 생태계 교란에 따른 위해성 2급 식물로 지정했고 일부 지자체는 핑크뮬리 군락지를 제거하고 동백나무 등으로 대체하는 실정이다. 물론 핑크뮬리는 아무런 죄가 없고 핑크뮬리를 탓할 생각도 전혀 없다. 많은 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핑크뮬리를 심어 주민에게 즐거움을 주고 관광객을 유치하려 노력하는데 그것 역시 탓할 생각이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 고유의 꽃만 고지식하게 고집하는 국수주의자가 될 생각은 더더욱 없다. 단지, 무엇을 하더라도 전략과 핵심가치, 비전과 미션을 먼저 구체화하고 이와 연계해서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시행하였으면 한다. 그 옛날 동궁과 월지를 조성하고 희귀한 화초를 찾아 심을 때 어떤 분명 명확한 원칙과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경영지침에 정책 선택 시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로 ‘유행에 휩쓸리지 말라’는 것이 있다. 다른 나라, 다른 회사에서 한다고 전략, 핵심가치, 비전, 미션과의 정합성을 파악해 정체성을 명확히 하지 않고 그냥 따라 하거나 훅 쓸려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많은 지자체에서 핑크뮬리 군락지를 만들었다가 다시 없애는 것을 보면서 왜 이 같은 우를 반복할까 하는 안타까움이 인다. 그렇다면 신라의, 경주의 백화방초(百花芳草)는 고유성과 세계성을 함께 하고, 오늘을 사는 사람과 내일을 살 사람들이 즐기며 관광자원으로 승화되는 꽃이어야 할 것이다. 서울의 경리단길을 벤치마킹하면서도 차별화된 경주의 황리단길을 만들어 경주의 특성을 살리면서 국내외 명소로 자리매김했듯이 경주의 가을꽃 군락지도 그런 특성을 안기 바란다. 그때는 내게 경주를 되새겨주신 지인분을 모시고서 경주의 꽃길과 밤길을 함께 거닐게 될 것이다.
유난히 비도 많이 내리고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결실의 계절 가을이 왔다. 수확이라는 기쁨 뒤에 농촌에는 많은 양의 영농폐기물이 배출된다. 농촌의 고령화와 수거시설 부족으로 인해 늘어나는 영농폐기물로 농촌이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해 영농폐기물 수거량은 20만3510톤으로 전년 대비 895톤 감소했고, 처리량은 18만409톤으로 전년 대비 1만6418톤이 줄었다. 그 결과, 재고량은 지난해 기준 9만5970톤으로 전년의 7만2873톤 대비 31.7%나 증가했다. 영농폐기물 수거장은 수요에 비해 그 수가 부족하고, 몇몇 곳은 최대수용량을 넘어선 실정이다. 환경부의 ‘영농폐기물 수거사업소 현황’ 자료에 따르면 전국 36개소 수거사업소 중 9개소에서 최대수용량을 초과한 재고량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영농폐기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모든 기관과 농업인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먼저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폐비닐과 농약병 정도로만 지정해놓은 영농폐기물의 종류부터 다시 검토하여, 영농폐기물의 종류를 발생량이 많은 영농형 부산물과 폐기물로 확대적용 할 필요가 있다. 물론 늘어나는 수거량을 처리하기 위해서 분리배출장과 수거차량 및 운행횟수도 늘어나야 하고, 수거관리를 위해 전문인력 배치확대 또한 고려해봐야 할 부분이다. 농촌에서도 영농폐기물처리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동참할 수 있도록 관련 농업인 교육도 확대되어야 하겠다. 농촌이 안전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곳으로 계속 기능할 수 있도록 지자체의 협력과 관련인원 확충, 정부의 지원, 농촌의 인식변화 등이 절실하다.
서산류씨 광풍정파(光風亭派) 류윤렴(柳允濂)의 현손인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 1687~1760)은 17·18세기 경주의 큰 유학자로 경주부 남쪽 신계리에서 부친 오암공(鰲菴公) 류기서(柳起瑞), 모친 학성이씨 이정의(李廷義) 따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약남(藥南) 이헌락(李憲洛,1718~1791)이 지은 「행적(行蹟)」을 보면, “1687년에 경주부 남쪽 신계리 집에서 태어났으며, 류태서(柳泰瑞) 공에게 입양되었다. 자질이 돈후하고 기개와 도량이 크고 넓었다. 5세에 독서의 경지를 알았고, 10세에 경사(經史)에 밝았다. 13세에 큰사람으로 우뚝이 성장하였고, 부모를 모시고 어른을 섬기며 공경함을 다 하였다. 지조 있게 자신에게 처하는 법도가 있었다. … 문장이 크게 떨치었고, 비록 공무를 따르더라도 마음에 개입하여 득실이 없었다. 1717년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1732년에 부친상을 당해서 슬픔이 제도를 벗어나 피눈물을 흘려 실명하였다. 오히려 초상에 임해 스스로 힘으로 죽을 먹고 자리에 눕기를 3년을 하루 같이하였다. 병이 나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고, 초상을 마친 후 해를 넘겨 두 눈이 다시 보였다”라 하였다. 이헌락의 부친 이신중(李愼中)은 우암(寓庵) 남구명(南九明)에게 글을 배웠다. 이헌락은 김이안(金履安)·안정복(安鼎福) 등과 교유하였고, 화계의 사위인 활산(活山) 남용만(南龍萬,1709~1784)과 그의 아들 치암(癡菴) 남경희(南景羲,1748~1812)는 우암의 후손으로 혼반을 통해 약남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화계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1760년 경주부윤을 지낸 정존겸(鄭存謙.재임1759.09~1760.07)의 보고 덕분이었다. 그리고 화계는 『古易』 2권을 적어 괘효단상(卦爻彖象)의 뜻을 완상하고, 「讀易疑義卦變疑」 등을 저술하는 등 주역과 학문 깊이가 있었는데, 이는 화계의 고조부 류정기의 사위가 괴천(槐泉) 박창우(朴昌宇,1636~1702)로, 박창우는 주역에 능통하였고, 『괴천문집』 2권 1책과 『주역집해』 3권이 있으며, 그의 학문이 화계로 계승되었다. 화계는 양자로 가 있으면서 1713년 자신을 낳아준 부모와 아우가 전염병으로 죽자 큰 슬픔에 빠졌고, 1717년 모친상을 당해 그 슬픔이 극대화된다. 1730년 44세에 비로소 화계서당을 짓고 강학을 시작하였고, 1732년 부친상을 당하며, 뜻을 이루기 위해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 결과 1735년 49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본래 그는 늙도록 과거장에 달려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늦은 나이에 급제 이후 부친의 권유로 사마소(司馬所)에서 들어가 결심을 내지 않고 매일 성품을 기르고 저술하는 것으로 일삼았다. 하지만 가계는 점점 가난해지고 처자식이 매번 그것을 걱정하였으나, 공은 태연하게 “빈부는 명에 달렸거늘, 어찌 입과 배를 채우는 것으로 나의 즐거움을 바꾸겠는가? 옛사람도 군자삼락(君子三樂)과 거문고 연주로 스스로 이것을 즐거워하였거늘, 너희들 또한 본받아서 하나의 경서를 읽는 것으로 삼생(三牲:소·돼지·양)의 좋은 음식으로 봉양함을 바꾼다면 이는 우리들의 즐거움이거늘 어찌 근심으로 여기는가?”라 하였으니, 그가 가난에 대처하는 마음이 참으로 애달프다. 중국의 정현(鄭玄,127~200)을 사숙(私淑)하고, 당나라 한유·두보의 학풍과 산수관의 풍류를 계승하였으며, 「괘변의의(卦變疑義)」등 심오한 학문과 저서 『화계집(花溪集)』을 남겼다. 그의 학문은 경주를 비롯한 여러 문인의 귀감이 되었으며, 약산 오광운·송국재 이순상·시옹 임화세·훈수 정만양·병와 이형상·안재 이덕현·우와 이덕표·학고 이암·동고 이덕록 등 뛰어난 학자들과 깊이 교유하였고, 목재 황곡 그리고 보문리의 활산 남용만·양동의 손사걸·남산동의 임만첨 등 사위이자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를 제자로 둔 스승이기도 하였다. 그는 내남면 화곡에 화계서당을 짓고 지역인재발굴에 힘썼으며, 평소대로 학행과 효행을 크게 드러내었다. 특히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며, 화곡의 아름다운 산수를 벗 삼아 고향에 머물며 유유자적 참된 선비의 길을 걸으신 처사문인의 한 선비였다. 지금도 그의 명성과 업적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으며, 내남면 고거산(高居山) 박달4리 윗고사리의 묘소에 오르면 공경을 일으키는 듯 여전히 파릇하다. 필자는 『화계집』을 번역해 가면서 그의 행적과 인물됨에 대해 종종 생각에 잠겼다. 그는 어떠한 삶을 살았고, 그가 남긴 시문학과 학문의 영향은 어떠하였는지?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다녀왔는지? 등등 궁금점이 많아졌다. 그리 큰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경주 유림의 중심에 화계 선생이 있었고, 경주 선비의 학문적 계보를 그리다 보면 화계의 존재감이 놀랍도록 크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화계 류의건 선생을 들여다보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며, 그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지길 희망해 본다.
결혼 삼 년 만에 쌍둥이를 임신했다. 쌍둥이의 태명은 오드리, 헵번이다. 나는 연예인을 동경하지 않았다. 연예인을 향한, 요즘 말로 표현하면, 입덕을 스스로 제어했다. 그들의 무대 위 화려함을 동경하기보다는, 인간적으로 배울만한 어른을 찾았다. 생업에 바빠 부모님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던 나에게, 동경하고 배우고 싶은 어른은, 무대 위의 화려함보다는 인간적으로 훌륭함, 배우고 싶은 인격, 그런 것이 더 중요했다. 이런 까다로운 기준으로 인해, 그 흔한 연예인을 향한 팬심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때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아프리카 친구들을 돕는 오드리 헵번은, 올바른 어른의 모습이었다. 명화극장 <로마의 휴일>의 아름다운 여자, 엄청난 인기를 경험했음에도 흔들리지 않은 가정생활, 훌륭한 여인이자 어른의 모습, 거기에 나이가 들어서도 부를 과시하기보다는 낮은 곳을 찾아 봉사하는 모습 그 자체는 내가 찾던 어른의 표본이었다. 그래서 우리 쌍둥이의 태명은 올바른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 ‘오드리’, ‘헵번’이 된 것이다. 내 인생의 첫 멘토였던 오드리 헵번은, 내가 대학생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인터넷이 지금처럼 활성화되기 전이라서 그녀의 이야기는 책이나 언론을 통해 본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스무 살의 어린 대학생은, 어느새 세 아이를 둔, 반백 년을 살아온 아줌마가 되었다. 어릴 적 반백의 아줌마를 보면 세상을 다 알고, 인생을 다 산 것처럼 보였는데, 내가 막상 반백(물론 염색의 힘으로 까만 머리나 갈색의 머리를 유지하지만)의 아줌마가 되어보니, 여전히 나는 배우는 중이고, 아직도 많이 모자람을 안다. 우리 아이들도 엄마와 아빠를 보면 모든 것을 알 것이라고 믿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들키기보다는, 미리 자수를 선택했다. 어른이라고 모두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도 모르는 게 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모르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님을, 모르는데 아는 척하는 것이 더 큰 부끄러움임을 매번 이야기한다. 너희가 세상을 산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단순히 지식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삶도 배우면서 너희들도 나이를 먹어가고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그러나 정작 그 말은 아이들이 아니라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라는 것을 아줌마는 깨달았다. 자식을 낳아야 진짜 어른이 된다는 말이 이거구나 싶었다. 자식에게 가르쳐준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한다는 말이, 정작 나 역시도 정답을 모르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아줌마는 오드리 헵번 이후, 다양한 멘토들을 만나게 되었다. 대부분 책을 통해 그들을 만났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연예인 중에서 훌륭한 가치관과 행동을 보이는 어른들을 만나게 되었다. 글로벌 아이돌 그룹의 한 멤버는, 엄마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많다는데, 그 친구가 평소에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참 멋진 친구구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고 싶을 정도였다. 어떤 연예인은 인기를 먹는 연예인으로서 타국에서 홍보 일정 중, 양국에 다소 민감한 질문을 받게 되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질문한 기자에게 다가가 펜을 뺏고서 “당신의 기분이 어떠십니까?”라는 질문으로 답을 대신했는데, 기자는 곧 사과했다. 평소에 그의 연기력은 인정했지만 별로 관심이 안 가던 사람이었는데 그 일화 하나로,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평소에 개성 있는 연기로 좋아했던 배우가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받았다. 엄청난 스포트라이트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예능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말들은 나를 이미 매료시켰었다.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배우, 윤여정 님. 한때 목소리가 이상하다느니, 이혼녀를 TV에서 보고 싶지 않다는 항의 전화가 방송국으로 오게 했던 사람이,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이 되었다. 아줌마는 고백한다. 아줌마는 나이만 먹은 어른이다. 아줌마는 누구의 멘토가 될 정도의 그릇도 철학도 갖고 있지 못하다. 단지 없는데 있는 척 안 하고, 모르는데 아는 척 안 하며 십 년 전보다, 오 년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조금이라도 성장했거나 노력 중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어떤 작가의 말처럼,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익어가는 것이다. 아줌마는 오늘도 열심히 익어가고 있다.
베토벤은 고전파 작곡가로서 엄격한 음악 형식을 만들어 냈지만, 말기에는 그 형식을 스스로 깨고 낭만파로 가는 가교가 되었다. 5번 교향곡은 정해진 형식에 따라 음표들을 조합했을 뿐이다. ‘운명’이란 표제는 베토벤이 붙인 것이 아니다. 반면, 6번 교향곡에는 전원에서 느낀 감정이 실려 있고, 9번 교향곡은 아예 4악장에 실러의 시를 넣고 성악을 실었다. 음악 외에는 어떠한 예술적 장르가 혼재되지 않은 음악을 절대음악이라고 부른다. 미술로 치면 ‘무제(untitled)’인 셈이다. 고전파 작품들은 대체로 절대음악이다. 오늘날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2악장)은 ‘엘비라 마디간’이란 영화 덕에 사랑을 노래하는 곡으로 알려져 있지만, 모차르트는 사랑을 표현하려고 이 곡을 작곡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 의미 없는 아름다운 곡일뿐이다. 반면 낭만파에서는 음악과 타 예술장르(또는 인간의 감정)의 혼합을 시도한다.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에는 제목 그대로 작곡가 본인의 환상체험이 녹아져 있다. 리스트가 창시했다고 알려진 교향시도 음악과 시(문학)의 결합이다. 따라서 낭만파 작품에는 대체로 곡명이 있기 마련이다. 낭만파 음악을 표제음악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음악과 표제음악은 19세기 유럽 낭만주의 음악을 양분했다. 이는 베토벤의 양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베토벤 음악의 절대성과 표제성을 추종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전자는 멘델스존, 슈만, 한슬리크, 브람스 등 보수파가, 후자는 베를리오즈, 리스트, 브루크너, 바그너 등 진보파가 주요 인사다. 두 세력의 대표자는 브람스와 바그너였지만 이들이 직접적으로 대립하진 않았다. 브람스는 기악을, 바그너는 성악을 주로 다루어 장르 자체가 서로 다르고, 브람스는 20살 연상의 바그너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향곡 분야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브람스(Johannes Brahms/1833-1897)와 브루크너(Anton Bruckner/1824-1896)가 정면충돌했다. 브람스는 4개의 교향곡을, 브루크너는 9개(0번, 00번을 포함하면 11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둘 다 나이 40이 넘어서야 1번 교향곡을 냈다. 19세기 중반 이후에도 베토벤이라는 거인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 있었기에 베토벤을 계승하는 작품을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바흐(Bach)와 베토벤(Beethoven)의 뒤를 있는 세 번째 B가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브람스와 브루크너 모두 B로 시작되는 성을 갖고 있었기에 이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리스트의 사위이자 바그너의 제자로 진보파의 심장에 있다가 보수파로 전향한 한스 폰 뷜러(Hans von Bülow/1830-1894)는 브람스의 1번 교향곡을 베토벤 10번 교향곡이라고 했다. 브람스가 세 번째 B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반면, 낭만주의 교향곡의 전형을 보여준 브루크너는 베토벤과 말러 사이의 가장 영향력 있는 교향곡 작곡가로 평가받았다. 오페라 탄호이저에 감명 받아 바그너 빠로 입문하여 한슬리크를 비롯한 보수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았던 브루크너를, 바그너는 진정한 세 번째 B로 생각했을 것이다. 19세기 낭만주의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결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세기 말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던 바그너, 브루크너, 브람스의 연이은 죽음으로 보수파와 진보파의 싸움은 음악사의 한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류가 국가라는 집단을 만들면서부터 개인의 삶은 훨씬 종속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국가가 만들어진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거대집단의 강력한 힘을 통해 보호받으려는 다수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욕구가 성립했기 때문이다. 보다 강력한 지배체계가 존재함으로써 걸핏하면 일어날 수 있는 크고 작은 낯선 침입자들로터 안전을 보장받고자 하는 욕망이 씨족과 부족 사회를 거쳐 국가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 태평성대를 이룬 것은 지극히 일부일 뿐 국민들은 수시로 전쟁의 위험에 내몰리기 일쑤였고 그렇지 않으면 국가를 지탱하기 위한 세금을 내기 위해 뼛골 빠지게 일해야 했다. 다행히 개인이 그 국가에서 지배적 위치에 올랐다면 자신은 물론 후손들까지 국가의 덕을 보며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지만 반대로 피지배적 위치에 있다면 그 삶은 가난과 고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러나 국가나 지배적 위치의 사람들은 피지배적 위치의 대중들에게 대해 대놓고 지배적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국가의 존재가 안정과 희망을 줄 것이라 가르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고 여하한 경우라도 충성하라고 강조한다. 이 국가 이데올로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교육’이다. 유사 이래 교육은 개인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순기능적 매개체로 존재하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국가를 떠받치는 ‘세뇌’를 전담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교육의 주체가 국가이거나 그 국가와 함께 지배력을 공유한 기득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매우 당연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그 희생을 훌륭하고 아름답게 미화시키는 교육을 계속함으로써 지배자들을 위한 무지한 국민의 희생을 조장해왔다. 이런 국가주의에 가끔씩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따지고 보면 그들이 성인으로 추앙받는 대철학자나 종교의 태두들이다. 부처나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같은 이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짧은 노력은 절대다수 정형화된 교육을 받은 기득권자들에 의해 다시 악용되어 이번에는 국가는 물론 종교까지 국민과 신도들을 속이고 줄 세우기에 급급했다. 급기야 국가에 대한 과한 충성은 전체주의를 양산하고 과 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계급화된 거대종교를 만들었을 뿐, 피지배층들의 고난과 가난은 아직도 지구상의 절대다수의 국가에 고쳐지지 않고 있다. 따지고 보면 경주사람들은 이런 국가주의에 가장 자주 노출된 국민들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삼국통일의 대업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화랑 관창의 희생과 용맹에 매료되어 너나없이 화랑의 후예임을 자랑삼아 살았다. 그런 와중에 고작 15~6세밖에 안 된 어린 아이들을 사정없이 전쟁터로 몰아넣은 어른들의 파렴치는 털끝만큼도 비판되지 않았고 삼국통일로 인해 수십 년간 이유 없이 싸우다 죽은 수십만 병사들과 그보다 훨씬 많았을 백성들의 기구한 삶은 역사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그 무지렁이들이 국가와 왕을 위해 싸우다 죽을 때 과연 그 시대 국가와 왕은 얼마나 백성 개개인의 안녕과 안전을 지켜주었을까?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일이다. 그나마 신라왕조와 귀족들은 관창과 반굴을 영광스럽게 포장해 자손 대대로 칭송이라도 했으니 아직도 우리는 오로지 국가에 무조건 충성해야 한다고 믿은 채 살고 있다. 국가의 가장 숭고한 존재 이유인 ‘단 한 사람의 국민일망정 국가가 책임지고 지키고 살려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대전제는 잊어버린 채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맹신마저도 무너지게 되었다. 최근 군에서 일어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되는 것으로 결정 난 것은 ‘국가에 대한 개인의 숭고한 희생을 책임져주지 않는 국가를 위해 국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역설을 여지없이 일깨운 꼴이다. 이것이 영화 ‘봉오동 전투’를 제목으로 걸어두었을 뿐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않은 이유다. 다행히 이제는 그 많은 세뇌교육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삶이 국가에 우선한다는 의식을 가진 시민들이 많아졌다. 그 시민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전 가족을 희생한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를 반대하는 모습을 지금의 정권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경주시립도서관이 10월 한 달간 한글날 추천도서 목록 배포 등 다양한 행사를 운영한다. <사진> 먼저 한글날을 맞이해 지난 6일부터 31일까지 ‘한글 또는 우리문학 그림책’ 추천도서 목록을 배포한다. 또 오는 17일부터 31일까지 ‘TRICK OR TREAT! 책 읽었으니 간식 주세요’ 행사를 실시한다. 우리나라와 외국의 민속신앙, 상상속의 괴물 주제의 도서관 추천도서를 읽고 간식을 받아가는 행사다. 프로그램으로는 △할로윈 특별 영어그림책 활동 △할로윈 특별 체험형동화구연 등을 실시한다. 할로윈 특별 영어그림책 활동은 5~8세를 대상으로 영어 그림책을 배워보는 활동이다. 오는 29일 오후 2시부터 40분 동안 실시되며, 당일 11시부터 경주시립도서관 어린이자료실에서 현장접수로 활동 인원을 모집한다. 기존 운영되던 체험형 동화구연 프로그램도 할로윈을 맞아 할로윈 관련 그림책을 읽어주는 ‘할로윈 특별 체험형 동화구연 프로그램’으로 변경 운영 예정이다. 오는 28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40분 동안 실시되며, 이달 24일부터 27일까지 경주시립도서관 홈페이지를 통해 선착순으로 모집한다. 경주시립도서관 어린이실 10월 행사에 대해 보다 자세한 사항은 도서관 홈페이지를 참고하거나 전화로 문의하면 된다. 시립도서관 관계자는 “10월을 맞이해 경주시립도서관 어린이실의 변화를 기대해 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