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민화(愚民化)’, 백성을 바보 취급하거나 바보로 만드는 일은 비겁한 정치인들이 나라를 다스릴 때 암암리에 쓰는 수법이다. 국민을 개돼지로 아는 나라나 시민을 눈 아래로 깔보는 지자체, 주변 주민을 사람취급하지 않는 공·사기업들이 사람의 눈을 가려놓고 제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때 우민화라는 말이 적용된다. 대표적인 우민화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우리 국민에게 가한 식민지사관과 우리말 금지, 내선일체사상, 대동아공영권 같은 것이 있고 해방 후 독재정권들이 사용한 3선 개헌과, 유신개헌, 독재 옹호 교육과 자본력을 앞세운 거대기업들의 독점자본논리가 모두 그에 해당한다. 지난 17일 이원희 씨의 페이스북에 오른 ‘한수원과 핵산업계의 워딩’에 관한 포스팅은 원전을 운영하는 정부와 한수원,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우민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다. 이원희씨는 방사선 피폭사고, 누출사고 등의 표현에 대해 핵산업계가 사고라는 말 대신 ‘기능 이상’이라는 말을 쓴다고 꼬집는다. 노심손상 같은 중대하고 노심손상과 같은 아주 중대하고 심각한 상황은 분명히 사고인데 이를 기능이상이라고 표현하고 그런 사고를 다 무시한 채 버젓이 무사고 1500일이라 주장하는 핵산업을 비웃는다. 2011년 월성원전에서 사용후핵연료(이 역시 고준위 방사선 폐기물이라고 써야 하지만) 낙하로 인한 손상이 있었고 노동자가 처리과정에서 피폭되는 사고가 있었지만 이 역시 기능 이상일 뿐이라 단정했다고 힐난한다. 비슷한 이유로 고리원전에서 사용후핵연료 습식저장조에서 화재가 난 것도 사고가 아닌 것처럼 위장됐다. 2017년 한빛원전 4호기 증기발생장치에서 발견된 cm의 손망치는 이물질로 표현되었다고 지적한다. 일상에서 시민들이 느끼는 이물질은 작은 오염물질에 불과한데 손망치를 이물질로 표현함으로써 사고의 의미를 대폭 축소시킨 것이다. 마지막 사례로 최근 월성원전에서 발생한 원전삼중수소누출 사고다. 이것을 원전에서는 사고라는 용어대신 ‘비계획적 누출’이라는 말로 사고 자체를 희석시켰다고 지적한다. 절차에 따라 배출하지 않는 모든 것은 사고밖에 없다. 그 사고를 사고라고 하지 않고 비계획적 누출이라고 표현하면 사고사실을 은폐하고 조작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신뢰를 받기는 애당초 어렵다. 한수원이나 원전관련 기업은 물론 연구소나 해당 정부부서까지 경주시민이나 국민을 바보나 개돼지로 취급한다면 모를까 이런 얄팍한 용어들은 앞으로 쉽게 바꿔야 한다. 자기네들끼리 쉬쉬하다가 호미로 막을 걸 포크레인이 와도 못 막는 사고가 될 것이다.
경주시 건천읍 조전리에 새롭게 단장한 광산정사(光山精舍)를 들어서면, 사우(祠宇) 상의(尙義)·강당 이선(貳善)·서재 강마(講磨)·삼문 경절(敬節) 등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광산정사는 의병장 오산(鰲山:청도)백씨 부암(傅巖) 백이소(白以昭,1557~1597)를 모신 공간으로 훼철된 것을 2011년 후손 백수청(白水晴)씨가 주관해 다시 건립하였다. 「연보」에 의하면, 부암은 가학을 계승하였고, 효경·소학·사략 등을 배우며 학문에 뜻이 깊었다. 26세에 순천김씨 김언광(金彦光)의 따님과 재혼하면서 장인이 사위의 뛰어난 기력을 보고 활 쏘는 법을 익히도록 권면하였다. 30세에 광지산 아래에서 준마를 얻었고, 부암산 아래에 집을 짓고 아우 백이정(白以貞)과 함께 날마다 낮에는 활 쏘는 법을 익히고, 밤에는 경서와 사략을 읽었다. 이후 36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해 붓을 던지고 집안과 나라를 위해 몸을 던졌다. 특히 왜란 당시 건천 주사산과 열박재 등에서 왜적을 막아 공을 세웠고, 사후 1786년에 유림의 공의로 광산사(光山祠)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순조실록』에 의하면, 순조 14년(1814) 9월 5일, 예조에서 경외에서 의정부에 장보한 충신ㆍ효자ㆍ열녀에 대해 분등하여 초계하며, 경주의 고(故) 봉사 백이소,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한 자로 인해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그의 행적이 담긴 『부암실기』는 권1의 「연보」와 「문천회맹록」, 권2의 「유사」와 「교지」, 권3의 「축문」과 「묘갈명」 등 총 3권으로 구성되며, 경주 의병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된다. 연보는 백수장(白受章), 행장은 조종영(趙鍾永,1771~1829), 묘갈명은 김이익(金履翼,1743~1830), 묘지명은 후손 백수장의 요청으로 치암(癡菴) 남경희(南景羲,1748~1812) 등이 지었다. 병절교위 훈련원 봉사 백공 묘지명(秉節校尉訓鍊院奉事白公墓誌銘) - 치암 남경희 아! 충신이 어느 시대인들 있지 않으리오? 섬 오랑캐의 오랜 전쟁을 당해서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던 신하들은 대부분 도망쳐 숨어 살기를 도모하였지만, 비분강개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국가의 위급에 목숨 바치며 비록 죽어서도 후회하지 않던 사람은 바로 초야(草野)에 있었다. 매번 동경야승(東京野乘)을 읽으며 우리 고을에 충의지사가 많다는 것을 탄식하였고, 그 가운데 한 분이 봉사 백이소(白以昭) 공이 있다. 백이소 공의 자는 융원(隆遠)으로, 그의 원조(遠祖)는 당나라 백우경(白宇經)이다. … 증조부는 진사 백구(白球), 조부는 백문절(白文節), 부친은 기자전 참봉 백희(白熹)이고, 모친은 최씨이다. 공은 1577년에 고을 서쪽 부산리(富山里)에서 태어났다. 임진년에 왜적들의 공세가 매우 거세져 바로 수도를 범했고, 남은 무리들은 온 고을을 약탈하였다. 공은 어머니를 산중에 모셔두고 홀로 활을 가지고 적을 막았다. 적 30여급을 참수하니 적들이 감히 산으로 들어오지 못했고, 산중에서 적을 피해 있던 사람들이 덕택으로 모두 온전했다. 공은 기골이 웅걸하고 남보다 특출한 용맹함이 있었기에 노인들은 “부산(富山)의 깎아지른 듯 험준한 그 기운이 실로 이 사람에게 모였다”고 하였다. 갑오년(1594)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가 되었고, 정유년(1597) 적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 공은 발분하여 적과 싸우다가 총탄을 맞았다. 영천 창암의 전장으로 달려가고자 할 때 절도사와 고을수령이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만류하였으나, 공은 개연히 “신하가 국난을 당해 전장에서 죽는 것이 당연한데 어찌 살 생각을 하겠는가!”하고 끝내 스스로 군사를 모아 창암 전쟁터로 달려가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니, 바로 9월 29일이다. 또 공은 준마가 있었는데 항상 전쟁터에서 그 씩씩한 준마의 도움을 받았다. 종 부기(富基)도 항상 말고삐를 잡고 따랐는데, 이번 전투에도 따라갔다가 군사가 패했어도 달아나지 않고 주인과 말과 함께 죽었으니, 참으로 충신의 노복이라 할만하다. 아! 국가에서 충신을 드러내는 일은 지극하다 말할 수 있고, 임진왜란에 죽은 신하는 전후에 걸쳐 증직(贈職)의 은전을 입고 정려 표창되었으니 무슨 한이겠는가마는 공만이 홀로 빠진 것이 어찌 드러나는 때가 있겠는가? 광산에 신주 모시고 제사 받드는 것은 가히 오랜 세월 의를 사모한 마음이 드러난 것이리라. 공은 순천김씨 김언광의 따님과 혼인해 백운붕(白雲鵬)·백운곤(白雲鵾) 두 아들을 낳았다. … 6세손 백수장이 묘지명문을 나(남경희)에게 부탁하였다.
경주역 3만2000평 부지를 한 눈에 가늠해 볼 수 있는 육교가 있습니다. 준철도 기념물인 경주역 급수탑과 함께 시작해 성동시장과 경주시내로 바로 연결되는 이 육교는 경주역 육교입니다. 또 다른 경주의 숨은 명소죠. 성동동과 황오동을 이내 가로지를 수 있는 육교를 처음으로 걸어보았습니다. 싸락눈이 흩날리는 날이어서 감성 또한 배가 되었는데요, 왜 늘 소중한 일을 미루기만 했을까요? 오래된 계단을 하나씩 오르다보면 미묘한 설레임이 다가옵니다. ‘경주스카이웨이’라는 별칭이 이해되는 대목이었죠. 나지막하고 고즈넉한 황오동에서 육교를 지나자 바로 성동동 도심의 시끌벅적한 대로가 나타나 판이하게 분위기가 달라지더군요. 이제 경주역이 그 역할을 수행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기차가 멈춘 경주역은 상상하기 싫지만 이제라도 육교를 걸으면서 기관차의 굉음과 플랫폼의 사람들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육교 위에서는 경주역 구내가 훤히 내려다보입니다. 정말 부지가 넓고 규모가 크다는 것을 새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객차들과 기관차가 보이고 역 구내 부속건물들과 함께 경주기관차사무소도 건재합니다. 직선으로 쭉 뻗어있거나 커브가 심한 여러 선로가 휘감기듯 교차해있는 철로는 시원하게 뻗어있고 대기 중인 기차들이 가쁜 숨을 ‘쉭쉭’ 내쉬고 있지요. 경주역의 속살과 스케일을 고스란히 내려다 볼 수 있어서 더욱 즐겁습니다. 육교에는 낡은 가로등이 설치돼 있는데 가로등에는 각기 관리번호가 매겨져있어 자주 점검하는 것 같습니다. 경주역 철로를 가로지르는 이 육교는 길이만 200여 미터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육교는 크게 휘어져있는 형태로 아마도 경주의 육교들 중에서 가장 길 것 같았습니다. 육교의 폭은 그리 넓지 않습니다. 두 팔을 벌리니 약간의 여유가 있을 정도니까요. 육교 끝 주변 골목은 매우 낙후돼 있고 좁아서 도무지 같은 하늘 아래의 경주가 아닌 1970년대 어디쯤에서 멈춰 있는 듯 했습니다. 육교를 지나니 도심 상권과 멀리 경주읍성 향일문이 보이는 북성로입니다. 이 육교도 경주역과 그 명운을 함께 할 것 같아 왠지 더 측은해집니다. 도시재생사업에 포함돼 있으니 정체성은 잘 보존하되 깔끔하게 정비되길 바라봅니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 다시 한 번 이 육교를 천천히 걸어볼까 합니다. 글=선애경 문화전문기자 그림=김호연 화백
오페라는 원래 비극이다. ‘오르페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해피엔딩은 없다. 그러나 상인 등 평민계급이 극장에서 당당히 오페라를 소비하게 되자 상황이 변한다. 사실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를 소재로 하는 초기 오페라는 평민들이 공감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극장에 오페라 구경을 갔다가 하품만 하고 나오는 일이 잦아진다. 이러다간 관객감소로 극장이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있다. 바로 막간극이다. 막간극(intermezzo)은 오페라 속 오페라다. 평민들의 일상을 담은 무겁지 않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결혼하면 여자가 돈을 헤프게 쓸까봐 무서워서 결혼을 하지 못하는 구두쇠 노총각의 이야기, 뭐 이런 내용이다. 그런데 막간극은 의외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심지어는 본 오페라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장르로 탄생하게 된다. 바로 오페라 부파(opera buffa), 우리말로는 희가극이다. 당시만 해도 세상의 모든 오페라는 비극이어서 굳이 비가극이라 부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오페라 부파의 등장으로 비가극은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라고 불리게 된다. 오페라 부파는 베네치아로부터 오페라의 주도권을 넘겨받은 나폴리에서 18세기에 유행한다. 당시 나폴리는 매우 가난한 도시여서 지친 일상으로부터 위안이 되는 오락거리에 관심이 많았다. 오페라 부파의 선구자는 단연 페르골레시(G.Pergolesi/1710-1736)다. 그의 작품 ‘마님이 된 하녀’(1733초연)는 비가극에서 독립한 대표적인 막간극으로, 가장 오래된 오페라 부파로 꼽힌다. 이어서 파이지엘로(G.Paisiello/1740-1816)가 ‘세비야의 이발사’(1782초연)를,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비롯한 다 폰테 3부작을, 치마로사(D.Cimarosa)가 ‘비밀부부’(1792초연)를, 로시니(G.Rossini/1792-1868)가 ‘세비야의 이발사’(1816초연)를 작곡하여 오페라 부파의 계보를 이어간다. 파이지엘로의 세비야의 이발사는 러시아 초연 이후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오늘날 세비야의 이발사의 작곡가로 기억되는 이는 로시니뿐이다. 파이지엘로는 당대의 오페라 거장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로시니가 초연을 하자 바로 사망한다. 사람들은 점점 파이지엘로를 잊고, 젊은 감각의 로시니에 매료된다. 그 후 로시니는 꽃길을 걸으면서 세계적인 오페라 작곡가로 도약한다. 오페라 부파는 신화나 영웅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친근한 소재와 작은 규모의 공연으로 대중들의 접근성을 높였다. 특기할 만한 것은 유럽에서 자국어 오페라가 발전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프랑스에서는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가, 독일에서는 징슈필(Singspiel)이 일반대중을 위한 오페라로 자리 잡게 된다. 모차르트 작품이라도 다 폰테가 이탈리아어로 쓴 피가로의 결혼은 오페라 부파이고, 친구인 쉬카네더가 독일어로 된 마술피리는 징슈필이다. 한편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은 오페라 코미크로 분류된다. 비가극에 대해서는 어느 나라든 그냥 오페라(세리아)라고 부르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코로나19(COVID19)로 일컬어지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2019년 말 중국 우한에서 발생하여 현재까지 전 세계를 강타한 채 대유행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구촌 전체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을 힘겹게 싸워가고 있다. 이제는 어느 나라에서 몇 명의 확진자가 발생하였고 몇 명이 사망했다는 수치는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있다. 이처럼 코로나19는 우리의 생활 패턴을 일순간에 바꾸어 놓았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이동과 만남 자체를 제약하다보니 ‘집콕(집에 콕 박혀 있음)’이니 ‘나생(나혼자 생활함)’이란 신조어가 익숙해져 가고 있다. 지난해 9월 모 TV방송에서 ‘호모 언택트(Homo Untact)’ 다큐를 방영했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문명을 만들어야 살아 남을 수 있다’고 하였다. 바로 신인류시대의 도래를 예고한 것이다. 두려운 오늘, 막연한 내일! 다들 코로나 이후의 생활도 그 전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코로나가 종식되거나, 코로나 종식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를 뜻하는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19)’ 이후가 걱정이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은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라 하였다. 걷는자를 의미하는 이 말은 ‘여행하는 인간’이란 뜻이다. 사람은 끊임없는 여행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발이 묶이어 여행 금단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나라 대표 관광지인 경주는 포스트 코로나에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코로나가 종식되면 그전으로 돌아가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면지금 당장 생각을 고쳐야 한다. 신인류시대를 논하지 않더라고 패턴의 변화에 따른 경주관광을 미리 마련하고 대안을 세워야 할 것이다. 관광을 구성하는 3요소는 관광주체(관광객:수요)와 관광객체(관광지:자원,지역,권역), 그리고 관광매체(관광사업체:교통,숙박,음식)이다.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잠잠해 질려면 백신 접종이 완료되고 면역체계가 완성 되어야 하는 만큼 해외여행은 언제쯤이나 가능할지 막연하다. 그런 면에서 억제되었던 내국인들은 우선 우리나라부터 관광할 여지가 아주 높다. 따라서 잠재 관광객은 더 많이 대기하고 있는 샘이다. 포스트 코로나의 경주는 관광객이 넘쳐날 것으로 믿어진다. 두 번째, 관광지로서의 경주는 볼거리가 다양하다. 신라 천년의 도읍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와 바다, 관광단지, 놀이시설 등이 잘 갖추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관광사업체 측면에서 자고 먹고 즐길거리는 대폭적인 혁신이 요구 된다. 코로나를 경험하면서 잠자리의 패턴을 보면 가족단위의 관광객이 호텔이나 콘도미니엄 같은 다중 숙박업소는 피하고 단독형 농어촌민박(팬션)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즉 가급적 접촉을 피하면서 검증된 가족 중심으로 독채로 된 숙박시설로 몰린 것이다. 1박에 50~60만 원대의 풀빌라 펜션은 오히려 호황을 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패턴은 포스트 코로나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 시설의 개보수나 부대시설의 확충을 위해 제도를 완화하거나 개선비용을 저리로 대출받을 수 있도록 알선하는 것도 대안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먹거리를 보면 비대면으로 식사를 할 수 없는 만큼 칸막이를 한다거나 식탁의 위치 조정 등에 비용 지원을 하여 안전이 보장된 경주의 음식점이 된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경주 관광은 밝을 것이다. 호모 비아토르! 울산 울주 천전리에는 신석기시대 암각화와 더불어 신라 지증왕 14년(513)과 법흥왕 12년(525)에 이곳을 방문(여행)하고 새겨 놓은 명문이 있다. ‘을사년(乙巳年)에 사탁부(沙喙部)의 갈문왕(葛文王)이 찾아 놀러와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 또 신라 혜초(慧超)는 4년(723-727)간 중국 광저우를 출발하여 중인도로 들어가 당시 5개 인도를 여행하고 실크로드 육로를 따라 돌아온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정조 4년(1780)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 축하하사절로 간다온 여행기를 ‘열하일기(熱河日記)로 남겼다.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24세 때인 순조 10년(1810)에 아버지 김노경의 사신행렬에 자제군관으로 따라가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되고 이후 큰 업적을 보였다. 이처럼 여행은 한 사람의 감흥을 넘어 역사적인 사료로 남기도 하고 큰 가르침을 배우게도 한다. ‘여행하기 좋은 곳! 경주!’, 지금부터 코로나 이후를 대비한다면 침체된 오늘을 극복하는 제 2의 도약기를 맞는 관광경주가 될 것이다.
불과 16개월 어린 나이에 아동학대로 숨을 거둔 정인 양의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가운데 경주시가 아동학대 예방과 피해아동 보호 등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적극 추진하기로 해 주목된다. ‘경주시 아동학대 피해제로 종합대책’은 경주시가 그동안 추진해 왔던 유니세프 아동친화도시 인증을 위한 실천 의지로 보여 지며 제대로 된 시행과 정착이 요구된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이번에 경주시가 아동학대 예방과 피해아동 보호를 전담하는 ‘아동보호팀’을 신설하기로 했다. 그리고 ‘법적 제도적 보호체제’ ‘아동 세이프 콜 신고체계’ ‘피해아동 치료 보호 강화’ ‘시민공동안전망’ 등 4대 과제를 골자로 한 ‘경주시 아동학대 피해제로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아동학대 피해건수 제로로 만들겠다고 했다. ‘법적 제도적 보호체제’ 정비를 위해 ‘경주시 아동학대예방 및 피해아동조례’ 제정, 유니세프가 인증한 아동친화도시 조성, ‘경주시 영유아보육조례’ 일부 개정, 아동보호전담팀 신설과 읍면동 아동학대전담공무원 확대 배치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 ‘아동 세이프 콜 신고체계’는 주거 밀집지역과 대형마트에 익명성을 보장하는 아이쉴드 신고함 설치, 경주 아이 지킴이 지정하고 협조체계 구축, 포상금 제도 실시, 영유아검진 건강이상아동 통보제도 등을 시행하기로 했다. ‘피해아동 치료 보호 강화’를 위해서는 학대피해아동쉼터 확대, 안심진료비 지원, 다함께돌봄센터 확대, 피해아동 임시보호 공간 확보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 시민모니터링단 구성, 부모교육 강화, 아이 스마일캠페인 전개 등 ‘시민공동 아동안전망 구축’을 통해 지역사회 전반에 아동학대 근절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로 했다. 유니세프가 인정하는 아동친화도시는 만 18세 미만의 모든 아동이 생존과 보호, 발달, 참여 등 4대 권리를 보장받으며 살 수 있는 도시를 말하며 경주시도 그동안 이를 인증을 받기 위해 노력해 왔다. 시는 지난 2019년 말부터 유니세프 아동친화도시 인증을 위해 유관기관과 업무협약을 맺었으며 지난해에는 아동친화도시 조성 일환으로 ‘아동친화예산서’를 제작해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경주시가 아동학대 제로를 위해 제도를 마련하고 건강한 사회 및 가족 분위기를 정착시킨다면 우리 아이들이 사회의 보살핌 속에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아동학대 사건 대부분은 제도적 미비와 사회적 관심 부족과 관계기관의 소극적인 대처 때문이었다. 경주시에는 최근 3년간 총 399건의 아동학대신고가 접수 됐으며 그중 263건이 아동학대로 판명될 만큼 빈번했었다. 경주시의 이번 ‘아동학대 피해제로’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지역사회에 잘 정착하길 바라며 결코 ‘사후 약방문’이 되지 않길 바란다.
코로나19 장기화와 한파로 연초부터 치솟는 밥상물가가 설 명절 물가까지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돼 경주시의 적극적인 대책이 요구된다. 경북도 물가관리 시스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올해 초 밥상물가는 식재료를 중심으로 지난해보다 크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통시장과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주요 농축수산물 모두 1년 전보다 큰 폭으로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전통시장의 경우 쌀, 쇠고기, 명태, 양파, 고추 등 밥상물가 14개 품목의 가격이 1년 전보다 평균 9.2% 상승했다. 대형마트에서는 고추를 제외한 13개 밥상물가 품목의 가격이 9.3% 올랐다. 이는 지난해 전국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0.5%)을 크게 웃도는 수치라고 한다. 시민들이 많이 소비하는 계란은 고병원성 AI영향을 받아 30.7%나 올랐으며, 특히 양파의 경우 대형마트는 무려 95.5%나 치솟은 것으로 나타났다. 밥상물가 상승이 코로나19 장기화와 한파 등으로 인한 집밥 소비가 늘어난 것으로 분석되지만 곧 다가올 설 명절을 물가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경주시는 매년 명절과 휴가철을 앞두고 물가 안정을 위해 행정력을 투입해 왔다. 시는 이번 설 명절에도 서민물가 안정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해왔지만 올해는 예년과 달리 물가 상승이 예사롭지 않은 만큼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여 진다. 경주시가 치솟는 물가를 잡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 기회를 노려 불법, 부당하게 폭리를 취하는 상행위는 막아야 한다. 또한 원산지나 정량을 속여 판매하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지역경제기반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 일부 업종은 이미 휴업을 했거나 폐업을 하려는 영세소상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전통시장의 경우 코로나19이후 시민들의 이용이 크게 줄어들면서 크게 위축돼 있다. 이번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통시장이 대형마트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것으로 조사된 만큼 설 명절 꼭 필요한 물품은 전통시장을 이용하는 것이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여 진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기술, 산업, 서비스(기능) 등이 서로 간의 경계를 넘어 결합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융합(convergence)시대이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에 정보통신기술(ICT)이 교량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디지털컨버전스의 열풍에도 ‘갬성’이란 단어로 포장된 아날로그적인 감성도 같이 가고 있다. 즉,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될 것 같던 컨버전스 흐름 속에 다양한 분화 현상을 일컫는 디버전스(divergence)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컨버전스와 디버전스는 서로 상호전제가 되는 상호보완적인 연결선상에 있는 순환적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관광공간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포스트코로나 혹은 ing코로나, with코로나 시대에 관광산업의 미래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논의가 필요할까? 관광 소비는 감소했는가 아니면 다른 형태로 전환해 가고 있는가? 이동성이 막히거나 스스로 막은 시대의 관광산업에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이고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똑같은 공간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고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없다면 의미가 있는 사람이나 장소, 감동을 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늘려 나가야 하는가?. 경주라는 도시는 신라천년의 삶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는 문화유산이자 최초의 관광공간으로 지속되어 왔다.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같은 문화유산은 건축물과 그 공간이 가지는 역사성의 가치와 강요로 인해 닫힌 관광공간으로 구조화되어버렸다. 즉, 경주에는 시간적으로 신라만이 아닌 고려와 조선, 그 후 백년 안의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만의 역사 공간으로 약속된 지각공간이 되어왔던 것이다. 역사가들은 도시를 ‘고유’의 기록물로 보고 있으며 경주는 그 중에서도 두께가 꽤나 두꺼운 역사적 기록물이다. 그런 만큼 경주의 문화자원이 갖고 있는 최초의 지각공간들이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관점의 스토리텔링과 공간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사실 공간들은 일정한 의미에서 만들어졌거나 의도적으로 생산된 것일 수 있다. 더구나 관광산업을 위한 공간일수록 더 그러하다. 실질적으로 역사성과 교육에만 의존하지 않는 경주만의 독특한 관광공간, 독특하지 않더라도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매력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관광공간이 지역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인정받게 되면 새로운 장소성이 만들어지고 관광자원으로 전환될 수 있다. 장소의 관광자원화 전략은 경주의 문화자원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현대적인 관점으로 변화를 꾀하고 그 변화대상에 새로이 긍정적인 장소의 특성을 가미하여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경주문화자원의 관광공간창출은 바로 공간스토리텔링과 직결되며 SNS 등 디지털매체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스토리들이 전달되고 소통됨으로써 새로운 문화관광 공간으로 정착되고, 점진적인 관광수요를 유발할 수 있다. 공간스토리텔링을 통해 장소성의 관점에서 내제된 가치를 끄집어내고, 디지털기술을 매개로 소통하고 거기에 아날로그적인 감성인 ‘갬성’으로 소비까지 일어날 수 있도록 한다면 관광공간텍스트가 공간스토리텔링으로 전환되어 지역민과 관광객이 관광공간의 장소관광자원화를 실현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라는 장소가 역사문화유산만이 아니라 다른 공간적인 매력도 충분히 끌어 낼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은 황리단길의 예에서 알 수 있다. 문영미 교수가 쓴 ‘디퍼런트(Different)’의 표지에는 ‘넘버원을 넘어 온리원’이라는 말이 쓰여 있다. 정체성과 차별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 여겨진다. 정체성의 개념은 인간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해 있는 문화와 살고 있는 장소에서도 발견되며, 명사형처럼 굳어진 것이 아니라 동사형처럼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모든 중립적인 ‘장소’를 의미로 가득 찬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인간들이 발을 들이고 만지기 이전에 장소는 단순한 물리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장소는 인간에 의해 가공되고 변형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런 점에서 모든 공간은 인간에 의하여 ‘생산’ 혹은 ‘재생산’된다. 이것이 앙리 르페브르가 말하는 ‘공간의 생산’ 혹은 ‘공간적 실천’이라는 개념이다. 결국은 사람이다.
꿈 드넓은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는 지구에서 가장 큰 동물인 흰수염고래와 나비를 주제로 꿈을 표현한다. 원색의 색감으로 화려하게 나타내며 행복한 꿈, 자유로움에 강렬함을 더한다. 꽃님 작가 010-9664-5790/silver5790@naver.com 경주여고 졸업, 동국대 미술학과 졸업, 개인(초대)전 4회, 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 서울조형아트페어 참여 한국미술협회전, 남부워터칼라페스티벌, 경북수채화페스티벌,한국미술협회전,한국예총전,경주수채화협회전 등 단체전다수 경북미술대전, 신라미술대전, 뷰티풀환경미술대전 수상 현 한국미술협회,경주수채화협회,생각미술학원 운영
경주시가 다음달 1일까지 자동차세 연납신청을 받는다.자동차세 연납제도는 매년 6월과 12월 부과되는 자동차세를 납세자가 연세액으로 신고 납부하면 세액 일부를 공제해주는 제도다. 지난해는 1월 연납 시 연세액의 10%를 공제했지만, 2021년부터는 1월분을 제외한 2~12월 간 10%를 공제해 실질적 공제액은 연세액의 9.15..
경주동궁원 내 동궁식물원이 온라인 통합이용권을 구입하면 최대 33%까지 할인해주는 ‘통 큰 할인’ 행사를 시작했다.지난해 12월 경주세계자동차박물관과 연계해 온라인 통합이용권 판매를 시작한 경주동궁원이 이번에는 ‘키덜트뮤지엄’까지 연계한 통합이용권을 출시했다.온라인 통합이용권을 구매하면 ‘동궁식물원-..
경주시는 건설공사 조기발주를 통해 코로나19로 침체된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로 했다. 시는 지역 주민이 꼭 필요로 하는 사회기반시설의 조기완공을 위해 신속한 공사설계와 심의 등 건설공사 조기 발주를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올해 조기발주 대상사업은 도로를 비롯해 치수, 주민숙원사업, 농업기반, 상·하..
경주시가 무분별하게 버려지는 아이스팩 폐기물을 줄이기 위해 ‘아이스팩 재사용 시범사업’을 추진한다.고흡수성 폴리머(Super Absorbent Polymer, 물을 강력히 흡수하는 고분자물질로서 미세플라스틱의 일종)를 함유한 아이스팩은 미세플라스틱이 함유하고 있어 하천으로 흘러 들어가면 해양 생태계 교란으로 인류의 건..
바람 그 옛날 신문왕의 바람을 실은 저 석탑은 아비를 향한 사랑과 존경인가 감은사터 위로 많은 이의 바람을 실은 풍등이 바람에 나부낀다 나의 바람도 저 풍등에 실어 보낸다 김락현 작가 / 010-8590-4237/ ddanjung1@hanmail.net 개인전 4회, 단체전 및 해외교류전 다수 한국미술협회 경주지부, 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 회원(문화재기능인 5070호) 전통미술연구소 붓담 운영
월성원전부지 곳곳에서 삼중수소가 검출됐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안전성 확보를 위한 후속 조치는 뒷전으로 밀리고 정치적 이슈만 부각되고 있는 것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여·야 정치권이 이번 삼중수소 검출을 두고 월성1호기 조기폐쇄를 둘러싼 각자의 논리만 들이댈 뿐 정작 안전문제는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삼중수소 검출과 관련, 월성원자력본부 측은 한수원 자체 조사에서 2019년 4월 월성원전 3호기 터빈건물 하부 지하수 배수로 맨홀에 고인 물에서 리터당 71만3000㏃(베크렐)의 삼중수소가 검출됐다고 했다. 그리고 배수관로에 고인 물을 액체방사성폐기물 처리계통으로 모두 회수했으며, 이후 유입된 물의 삼중수소 농도는 기준치(4만Bq/L) 이내인 약 1만㏃/L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삼중수소가 검출된 고인 물을 모두 회수했고 이를 정부규제 기관이나 민간환경감시기구, 주민들에게 알렸다고 했다. 원전 전문가들 중에는 일본 후쿠시마 사고 탓에 삼중수소에 대한 우려 때문에 논란이 커진 것도 있지만 외부유출문제는 우려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지역 반핵단체들은 방사능이 ‘어디에서 새는지? 얼마나 새는지? 지하수를 타고 어디로 흐르는지?’를 한수원이나 규제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도 모르고 있다고 주장하며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민간합동조사위원회’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앞으로 조사를 둘러싼 논란은 불가피해 보인다. 문제는 월성원전부지 내 삼중수소 검출로 정치권이 더 요란스럽다는 것이다. 정치권의 행동을 보면 경주시민들의 안전에는 문제는 없는지, 앞으로 더 누출우려는 없는지는 중요해 보이지 않아 보인다. 원전가동의 안전성 확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경주시민들은 한수원이 철저하고, 투명한 원전관리를 통해 국가 에너지정책을 이끄는 공기업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월성원전부지 내 삼중수소 검출로 한수원 뿐만 아니라 정부도 정작 우리나라 원전관리에 중요한 것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되짚어 보아야 할 때다. 정치권은 원전문제만 나오면 유·불리를 따지며 정쟁거리로 만들어선 안 된다. 무엇보다 국가에너지를 책임지고 있는 공공기관을 소문이나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어 평가절하하는 것은 없어야 한다. 한수원은 삼중수소 부실 관리에 대한 문제는 마땅히 질타를 받아야 한다. 한수원으로 인해 일어나는 각종 논쟁 때문에 천년고도 경주의 이미지가 훼손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경주시가 농어촌지역의 고질적인 생활쓰레기 배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마을단위 생활쓰레기 공동 집하장’을 설치하기로 해 실효성 있는 운영이 기대된다. 시는 이달부터 12개 읍·면을 대상으로 마을단위 생활쓰레기 공동 집하장 22개소를 설치하고 시범운영하겠다고 했다. 경주는 면적이 넓을 뿐만 아니라 읍면동마다 단위부락이 많아 그동안 생활쓰레기를 분리수거가 용의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부 농어촌의 경우 생활쓰레기 뿐만 아니라 각종 농업관련 폐기물이 집 마당이나 논밭 주변에 방치돼 주민들의 주거환경을 저해하고 환경오염에 원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특히 일부 마을에서는 생활쓰레기 소각으로 화재 위험도 있었다. 공동 집하장은 가로 5.5m, 세로 2.3m 가량 규모의 공작물로 생활쓰레기를 포함한 플라스틱·병·캔 등 11종의 분리수거함이 설치된다. 특히 그동안 농·어촌 지역에서 분리수거가 어려웠던 폐기물 등도 별도분리배출 품목으로 수거할 계획이라고 한다. 주민들의 생활여건이 바뀌면서 농어촌에도 폐비닐 등 합성수지폐기물과 반드시 분리수거해야 할 폐형광등·소형폐가전·폐건전지 등이 많이 나오고 있다. 시는 사업 시행을 위해 지난해 마을 별 수요조사를 마쳤고, 이달 내로 설치지역 현장을 확인한 후 마을별 전담 관리자를 정할 계획이다. 마을단위 생활쓰레기 공동 집하장을 잘 운영하면 주민들의 생활환경 개선뿐만 아니라 분리수거를 통해 재활용 자원 확보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진다. 무엇보다 마을단위 생활쓰레기 공동 집하장 설치와 함께 마을사정을 고려한 운영이 요구된다. 농어촌지역은 대부분 노령자가 많아 쓰레기를 한 곳에 모으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관리 및 처리를 제대로 해야 설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시는 이번에 관리를 위해 마을별 전담자를 둔다고 했다. 현재 시는 마을가꾸기 사업 등을 통해 어르신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들을 잘 운용하면 관리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호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선 공동 집하장에 생활쓰레기를 모은 뒤 제때에, 제대로 처리하는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 특히 계절에 따라 쓰레기 종류와 배출양이 다르기 때문에 이에 따른 쓰레기 처리 방법도 함께 마련해야 할 것이다. 경주는 읍면지역마다 수십 개가 넘는 단위부락이 있다. 이들 단위부락마다 모두 공동 집하장을 설치하는 것은 어려운 만큼 마을마다 배출되는 생활쓰레기를 공동 집하장을 통해 잘 관리한다면 주민들의 생활환경을 더욱 좋아질 것이다.
경주시는 작년 2월부터 형산강과 북천을 잇는 동해선의 하나인 동해남부선 철도변 완충녹지 2.5km, 폭 40m, 면적 13만7594제곱미터를 2022년 이후 철도가 폐선된 이후 철길을 걷어내고 공원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철길을 공원으로 만드는 경우는 경주가 처음은 아니다. 서울의 경의선 철길 6.3km, 광주~담양 간 전남선 철길을 숲길로 만들면서 새로운 도심 재생, 환경 친화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서울의 경우 멋진 철길공원에 젊은 예술가와 수공예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가게가 생김으로 새로운 도시 기능을 하고 있다. 철길로 인해 단절되었던 도시가 회복되는 것이다. 경주도 택지 개발과 공장용지 조성을 피해 철도 부지를 공원화 하는 계획을 세우게 되어 참 다행스럽다. 이 기회에 경주만의 독특한 관광전략이 가미된 공원이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경주를 관통하는 철도 역사는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다. 1918년 하양~포항간 철도, 1919년 포항~항산간이 개통되었고, 본선의 서악역에서 분기하여 동래에 이르는 지선은 1918년에 서악~경주, 1919에 경주~불국사, 1921년에 불국사~울산간이 순차적으로 개통되었다. 이 철도는 KTX역이 통과하는 신경주역사가 생기기 이전까지 경주로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철길의 기능을 다했으나 이제 모든 철도는 신경주역으로 통합된다. 돌이켜 보면 이전까지 경주 도시계획은 주거지를 확장하고 공업 용지를 확장하는데 더 큰 가치를 부여해 왔다. 눈에 띄는 생산과 경제적 가치를 우선하다보니 생태적 공간을 확장하여 조금 더 사람이 살만한 도시로 만드는 선진적 가치에는 소홀했던 면이 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성동동과 북부동을 지나가던 철도 부지는 일반적인 도로를 만들고 토지는 시민에게 분양하면서 도심에 필요한 녹지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그때 만약 도시민을 위한 환경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어 철도 폐선부지를 공원화 했다면 경주시민의 삶의 질이 훨씬 좋아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에 공원화 되는 황성동 철길 부지는 경주에서 경치가 빼어나기로 소문난 백률사와 소금강산의 경관과 연결되는 역사 경관과도 가까이 있어 공원화 계획이 더 긴요해 보인다. 그런 한편 아직도 경주 역사부지에 대한 활용에는 아직도 논란이 많아 보인다. 경주시가 가지고 있는 로드맵이 분명히 있을 법하고 특히 경주역사를 관장하는 국토교통부와의 합의도 있을 법한데 정치시즌만 되면 정치권 사람들을 중심으로 갑론을박이 공공연히 일어난다. 황룡사탑을 거기에 복원하자고 하는가 하면 첨단 과학을 동원한 현대식 랜드마크를 만들자는 안도 난무한다. 다 좋으나 이제는 관광과 생산성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온전히 경주시민의 삶 그 자체를 존중해서 활용방안을 만들어주면 좋겠다. 코로나로 인해 관광패턴도 달라지고 있다. 멀리 다니던 관광이 집주변으로 바뀌고 SNS를 통해 과밀화된 호텔이나 장소를 피해 한산하고 조용한 곳으로 예약하고 움직이는 관광으로 바뀌고 있다. 경주 시민들 역시 관광객을 맞는 데서 그치지 않고 관광을 직접 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에게도 시대현실에 맞은 새로운 문화와 휴식의 공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경주는 삼국과 통일신라를 관통한 우리나라의 가장 오랜 고도(古都)다. 그만큼 경주는 우리나라 문화의 원류이자 한민족의 정신을 만든 정신적 수도다. 이 같은 양갈래의 축은 무한한 스토리텔링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차제에 단장될 황성동 철길 공원이 경주가 가진 이런 역사성과 문화적 특성을 살릴 수 있다면 철길을 공원화한 다른 지역, 다른 나라 어느 도시보다 특별한 공원으로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고 경주시민들에게도 새로운 삶의 활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철도이설지는 시민들과 동떨어진 개발이 아닌 숨 쉬고 소통하고 함께 즐기는 명소가 될 수 있다. 황리단길과 성건시장, 성동시장, 경주읍성을 연결시키고 경주 역사와 황성동 폐철도를 연결시키면 자연스럽게 그 연장선이 금장과 동국대로 함께 연결될 것이다. 이 일은 큰 돈을 들이거나 거대한 프로젝트가 동원될 일이 아니고 시민의 삶을 생각하는 긍정적인 상상력만 있으면 가능한 할 것이다. 폐철부지를 활용한 좋은 선례를 만들어 시민들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발판으로 삼으면 좋겠다.
세상이 무척 어렵다. 촘촘히 네트워킹된 자본주의 시대에는 어느 한 부분이 잘못되면 멀리 떨어져 있는 곳까지 치명적인 여파가 있다. 지금은 어느 한 부분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총체적인 난국에 직면해있는 실정이다. 기업은 기업대로, 자영업자들은 자영업자대로, 가정과 개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다. 어려웠던 경제가 코로나사태까지 덮치면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35조 순이익을 달성했다는 삼성전자처럼 승승장구하는 기업의 소식 들으며 나는 무엇인가? 라는 자괴감에 빠져들기 쉽다. 돌아보면 이런 위기 속에서도 잘 헤쳐나가거나 오히려 더 성과를 얻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나만 어려운듯한 공포감에 빠지게 되면 자기 중심성을 잃고 군중심리에 섞여 타인과 세상비판에 뛰어들게 된다. 자기 중심성이란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 모습을 찾고 본인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세운다는 말이다. 지금 정치는 정치대로, 경제는 경제대로 마치 허공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듯한 위태로운 지경이다. 교수신문이 발표한 2020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아시타비(我是他非)’라고 한다. ‘내가 하면 옳고, 남이 하면 그르다’는 말 흔히 하는 말로 ‘내로남불’이라는 사자성어를 꼽았다. 없는 신조어를 한자성어로 만들어낼 만큼 신뢰를 잃어버리고 있는 사회라는 것을 실감한다. 모두가 이 사자성어에 동조를 하는 분위기가 2021년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我是他非’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 사회가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정치권도 마찬가지이다. 상대의 당이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비판하다가 소속된 당의 허점에는 입을 다물거나 변명을 하기 일쑤다. 자신이건, 타인이건 똑같이 적용한다면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더라도 부족한 만큼 국민이 보듬어 줄 수도 있는 문제이다. 불가항력일 때조차 내 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비난만 받다가 보면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잠재의식 속에 있다. 억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안을 제시하거나 도와주는 방법보다는 무차별적인 비난의 역풍을 날리는 것은 정치권의 정석인듯하다. 같은 자리에 올랐을 때는 어거지를 쓰면서 발뺌을 하는 모습과 반대로 날 선 공격으로 역풍을 날리는 세태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착잡하다. 착잡한 이유 중의 하나가 우리 마음과 말, 행동 속에 我是他非가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사회가 혹은 정치가 그대로 비춰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我是他非라는 사자성어를 통해 옳고 그름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논어의 자로편에서 보이는 다음 글귀가 연상이 되었다.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군자는 서로 다른 생각을 존중하며 화합을 하지만 똑같은 모습으로 움직이지 않고, 소인은 똑 같은 생각을 강요하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는 화합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해 본다. 군자란, 동양에서 훌륭한 사람의 표본이며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람이며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고 수용하며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군자인 사람들이 我是他非를 논하고 있는지, 소인인 사람들이 我是他非를 논하고 있는지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 글귀를 적용하고 있는가, 나에게 이 글귀를 적용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듯하다. 타인에게 잘못의 원인을 전가하는 我是他非는 가뜩이나 우울감과 상실감이 큰 코로나블루의 심리적 상황을 부채질한다. 타인에게 원인을 전가한다는 것은 타인이 바뀌지 않는 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我是他非는 희망이 없는 세상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가족내 코로나블루도 我是他非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만하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외부의 활동이 제한되고 있는 마당에 어린 아이들을 양육하며 학습까지 책임져야 하는 경우에는 부모들의 코로나블루의 수치가 무척 높아진다. 부모가 자녀들의 생각과 행동이 다른 모습들을 단점이라고 바라보고 있으면, 우울감이 더 심해진다. 나와 상대적인 가족과 자녀들의 생각의 다름을 알고 부모의 우울감의 원인을 이해한다면 군자의 눈으로 가족 구성원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가족과 사회와 정치를 보는 눈을 我是他非에서 我是他是로 바꾸어 보자. 다른사람의 생각이 옳고 수용할 만하다는 생각으로 화합을 모색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암울한 코로나블루를 코로나핑크로 바꾸는 방법이라고 본다.
마스크를 안 썼다는 이유로 2살짜리 꼬마가 비행기 탑승을 거부당했다. 미국에서 벌어진 해프닝이다. 지난 9월에도 기내에서 음식을 먹으려고 마스크를 내린 유아와 엄마가 비행기에서 내릴 것을 요구받기도 했다. 백신이 하나둘 등장하자 상황이 달라질 거라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다. 백신의 안정성과 부작용 등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그마저도 없는 우리는 마스크 한 장에 의존해야 할 처량한 신세다. 딱 지금 우리의 심정을 대변하는 책이 있어 소개한다. 김지호가 쓴 《코로나에 걸려버렸다》이다. ‘걸려버렸다’는 뉘앙스에서도 알 수 있듯 코로나는 숙주를 선택하지 않는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양성 판정을 받고는 ‘죄책감 비슷’한 걸 느껴야 했다는 저자도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책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날로부터 50일간의 격리 입원 생활과 회복 후 일상으로의 복귀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이렇다. 할머니 장례식엘 찾아와 함께해준 친구들에게 고마워 식사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걸려온 한통의 전화. “미안한데, 나 코로나 양성인 것 같아. 너도 밀접 접촉자로 분류될 것 같아. 보건소나 병원엘 가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어” 전화기 너머의 친구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어이가 없다. 억울한 기분마저 든다. 구급차가 멈춰 선 곳은 국립중앙의료원. 이름 석 자가 00번 확진자로 바뀌는 순간이다. 비닐로 된 간이 방호복을 입고 발에는 하얀 발싸개, 얼굴엔 마스크, 손에는 라텍스 장갑을 꼈다. 뒤에는 방역 담당자인지 내 뒤를 따라다니며 꼼꼼하게 소독액을 뿌린다. 도착한 병실은 1인실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창문과 연결된 커다랗고 시끄러운 음압기다. 창문에는 못이 굳게 박혀 있다. 완치 전에는 절대 나갈 수 없다는 의미일까, 바이러스도 확진자도. 병실에는 냉장고, 환자용 침대, 혈압 측정기, 옷장과 서랍 정도가 갖춰져 있다. 격리된 병실에서 문자를 돌린다. 가족들과 회사에 처한 상황을 알린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빗발친다. 가족들은 식사와 접촉이 빈번했으니 우선 자가 격리 대상자다. 죄책감이 밀려온다. 자꾸 안 좋은 생각마저 든다. 지금은 빨리 관할 보건소에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우선이다. 가족들의 연락처를 알려줬으니 역학 조사관 연락이 곧 갈 거다. 당혹스럽고 죄송한 마음이다. 다음은 회사. 확진 판정이 나기 전부터 재택근무 중이었기 때문에 회사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지만 죄책감은 여전하다. 죄인은 아닌데 죄인이 되어버렸다. 가족에게 전염병을 옮기는 죄인, 지역사회에 누를 끼친 죄인이 되었다. 수화기 너머로 “어쩌냐?”, “조심하지 그랬어” 하지만 하나 같이 원망의 소리로 들린다. CCTV가 달린 독방에 방호복 입은 간호사가 규칙적으로 혈압과 산소포화도, 체온을 측정해 간다. 열이 나면 아이스팩을 겨드랑이에 끼우라고 조언한다. 목에서 점점 가래가 끓어오른다. 목 안은 따끔거리며 온몸에 열이 오르면 침대에 닿는 부위마다 아프다. 생활은 단조롭다. 7시에 아침 식사, 12시에 점심 그리고 혈압과 혈중 산소포화도 및 체온 체크, 오후 5시에 또 혈압 등 측정한 후 5시 30분에 저녁 식사로 이어진다. 샤워시설이 없어 물에 적신 수건으로 온몸을 닦는다. 다른 병원에 격리되었던 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검사에서 음성이 나왔다고, 내일 또 음성이면 퇴원한다고. 목소리가 가볍게 떨리고 있다. 그다음 날, 다시 양성이란다. 너무 화가 난다며 안 하던 욕까지 한다. 병실은 덥고 답답하며, 음압기 소리에 잠을 못 자고, 집이 너무 그립단다. 불평이 끊이지 않는다. 희망이 코앞까지 왔다 한순간에 사라지니 그간 쌓였던 감정이 폭발한 모양이다. 드디어 격리 해제. 언제부터 출근할지 묻는 전화에 팀장 목소리는 차분했다. “병원에서 고생하셨어요. 그런데 회사 사람들이 코로나에 옮을까 봐 두려워하네요. 일단 재택근무를 3주 정도 연장하는 게 좋겠어요” 어, 이건 뭐지? 회사 내 임산부들, 어린애들이 있는 사람들 핑계가 이어진다. 복귀하면 휴가를 가겠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긴 고민 끝에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완치된 줄 알았는데 코로나는 아직! 이었다. 사람이 경험하는 강렬한 고통과 그만큼의 기쁨은 역시 사람에게서 시작되고 완성되는 모양이다. 웃는 얼굴로 지금 울고 있을 그 사람에게 속으로 말을 건네 본다.
서라벌의 옛 터전인 경주에는 여러 성(城)이 있다. 도성으로 맨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금성을 비롯하여 오랜 기간 왕성이었던 월성을 비롯하여 신월성과 만월성이 있었다. 도성과 가까운 산성으로는 남산 신성과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남산 토성이 있고, 당시 월성과 가까이에 토성인 도당산성이 있다. 통일 이전 신라를 가장 괴롭힌 나라는 왜 즉 일본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록을 살펴보면 왜의 침입을 받은 횟수가 무려 30여회에 이른다. 따라서 통일 이전 경주 지역에 조성한 도성 외곽의 성은 대부분 일본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었다. 감포 쪽으로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명활산성을 쌓았다. 명활산성은 한때 왕성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영일만 쪽으로 들어오는 적을 대비해 북형산성, 울산만 쪽으로는 관문성을 쌓았다. 또 서형산성, 부산성이 있어 서라벌의 외곽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 외에도 건천에 작성, 안강에 토성인 귀성이 있었고, 고려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읍성, 감포에는 조선 중종 때 쌓은 영성이 있었다. 관문성은 경주시 외동읍 녹동과 울주군 범서읍 두산리 경계에 있는 두산저수지에서부터 국도 7호선 도로를 지나 울산광역시 북구 대산리와 경주시 양남면 신대리 경계에 이르는데, 전체 길이가 약 12km이다. 사적 제48호로 지정되어 있는 관문성에 대한 문헌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조에 처음으로 보인다. “21년(722) 겨울 10월, 대내마 김인일을 당에 보내 신년을 하례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모벌군성을 쌓아 왜적의 침입을 막았다” 또 『삼국유사』 「기이」편 ‘효성왕’조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개원 10년 임술 10월에 모화군에 관문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으로 경주 동남쪽 경계에 속하니, 곧 일본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둘레는 6792보 5자이고, 동원된 인부는 3만9262명이며, 장원(掌員, 감독관)은 원진 각간이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는 일부 오기가 보인다. 개원은 당나라 현종의 연호로 개원 10년은 효성왕 때가 아니고, 성덕왕 21년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다. 관문성을 『삼국사기』에는 모벌군으로 『삼국유사』에서는 모화군으로 각기 지명을 달리 기록되고 있으나 이는 같은 지역을 다르게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동경잡기』 「성곽」조에 ‘관문성은 부의 동쪽 45리 울산 경계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799척으로 지금은 만리성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고, 『동경통지』 권5 「성지」조에는 ‘부동(府東) 45리 울산 경계에 있는 석성이다. 성덕왕이 모벌군에 성을 축조하여 일본의 침입을 차단하고 그 후 경덕왕이 임관(臨關)이라 개칭하니 바로 이 성이 그것이다. 둘레가 6799척으로 사람들이 관문이라 부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이 성을 신라 시대에는 모벌군성, 임관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 관문성이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문성은 대부분 허물어졌으나 곳곳에 부분적으로 길이 약 20m, 높이 약 3m 정도 남아 있는 곳이 있다. 경주와 울산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7번 국도와 동해남부선 철길 사이, 그리고 철길 동쪽으로 200m 가량과, 울산광역시 북구 범서읍과 외동읍 녹동에 있는 두산지 부근 일부 구간이 복원되어있다. 성을 쌓는데 대략 20×40cm에서 30×50cm 크기의 다듬은 돌과 평평한 자연석을 별다르게 가공하지 않고 쌓았다. 위로 올라가면서 1-2cm씩 안쪽으로 줄여가는 물림쌓기 방식으로 석재를 5-6단으로 쌓고 그 위에 자연석을 쌓는 공법을 이용했다. 당초 성의 높이는 평균 4-5m가 되었지만 지금은 안쪽이 1.1m, 바깥쪽은 3.6m로 많이 허물어진 상태다. 현존하고 있는 남산성의 석축 성벽과 비교해 볼 때 관문성을 축조한 축성술이 더 발달된 방식으로 보고 있다. 인근 마을에서는 이 성의 석재를 가져가서 축대를 쌓고, 건축자재로 쓰기도 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철도를 건설하면서 이 석재를 분쇄하여 활용하였다는 지역 주민들의 증언도 있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이렇게 파괴해 왔다는 사실에 섭섭함을 너머 특히 일제가 자기네 조상들의 유산이라면 이렇게 했을까 하는 생각에 분노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