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가 14일까지 공영주차장 주차 징수시간 단축과 설 명절 기간 일부 주차장을 전면 개방한다.시는 설 연휴기간인 11일부터 14일까지 4일간 지역 25개소 공영주차장에 대해 주차요금을 전면 감면하고 무료 개방한다. 다만 대릉원(황남지구) 공영주차장은 이 기간 동안 징수시간만 단축하며, 성동시장은 11일을 제외한 3..
경주시가 코로나19 장기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 농업인을 위해 금융지원 대책을 시행한다고 9일 밝혔다. 경주시와 농협중앙회 경주시지부, 12개 지역 농·축협은 지난 4일 불국사농협에서 농업인의 금전적 부담 완화를 위해 융자금 이자를 지원하는 ‘농업경영활성화사업 이자지원사업’ 업무협약을 체결했다.이는 신..
경주시는 오는 19일까지 각 읍면동 행정복지센터에서 육묘상토, 육묘처리제 지원사업 신청을 받는다.이는 본격적인 영농철에 대비하고 고품질 쌀 생산을 위해 시행하는 사업이다. 지원 대상자는 경주시에 주소를 두고 농업경영체 등록을 한 농업인으로, 지역 소재 농지만 해당되므로 신청자격요건을 잘 확인한 후 신청해야..
경주범죄피해자지원센터(이사장 이상춘, 이하 경주범피)는 7일 설날을 앞두고 범죄피해자 가정을 방문해 위문금품을 지원하는 ‘설맞이 사랑나누기’를 실시했다.민족 최대 명절이지만 코로나19로 가족, 친지들이 모두 함께 할 수 없는 힘든 상황에서 범죄피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명절의 의미를 되새기고..
새로찾은 경주최부자댁 근현대 기록물 학술심포지엄이 열린다.(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원장 박방룡)은 새로찾은 경주최부자댁 근현대 기록물의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오는 19일 오후 1시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300C호에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지난 2018년 경주 최부자댁 곳간에서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
시간을 기록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은 늘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단 하루 한 시간 일분 일초도 같은 시간은 없다. 그 시간들 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은 싸락눈처럼 소리 없이 쌓이고 쌓여 역사가 된다. 뽀글이를 통해 시간을 기록한다. 나와 우리의 시간을. 박선유 작가 010-2514-8996 / mei0714@naver.com 현) 한국미술협회, 경북창작미술협회, 한일작가교류회 회원, 개인전 14회 한국수력원자력갤러리 초대 개인전, 한수원갤러리(경주, 2020) / 갤러리 봉봉 초대개인전, 갤러리 봉봉(경주, 2021) / 갤러리 알뮤트1917 초대개인전, 갤러리 알뮤트 1917/서울(2022) 갤러리 하루 초대개인전, 갤러리 하루(제주, 2023) / 갤러리 플랫 아우라 초대 개인전-‘집오리 고소공포증 극복기’(서울 등, 2024) 국내외 초대 단체전 100여회, 청춘열전 (하슬라아트월드,강릉,2015) / 예술, 기술을 만나다展 (대백프라자갤러리 A관/ 대구, 2016) / Happy virus (설미재 미술관/가평,2017) / 상상만화방 (충무아트센터/서울,2018) 등
노천박물관, 문화재와 자연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천년고도 경주가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인정받고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경주를 코로나19 위기 극복 후에 가볼만한 세계 최고 여행지 중 한 곳으로 선정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테마여행 10선’에도 이름을 올려 우리나라 대표 관광도시로서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또 최근에는 문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대한민국 대표 관광명소 ‘2021~2022 한국관광 100선’에 경주의 대표 관광 명소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5년 연속 포함됐으며, 동궁과 월지·첨성대를 포함한 대릉원 일원도 2015년에 이어 4회 연속 그 가치를 인정받아 경주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는 지난해 11월 경주를 코로나19 위기 극복 후에 가볼만한 세계 최고의 여행지 중 한 곳으로 선정했다. ‘세계 최고의 여행지 2021’ 목록에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것이다. 지오그래픽은 추천 여행지를 모험, 역사문화, 자연, 가족, 지속가능성 등 다섯 가지 카테고리로 나눴는데 경주는 이중 ‘역사문화’ 범주에 올랐다. 지오그래픽은 경주를 ‘벽이 없는 박물관이란 별명으로 유명하다. 한반도 남동쪽에 있는 이 도시는 고대왕국 신라의 천년 고도였다’고 소개했다.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실시간 온라인 여행상품 15종(내국인용 6종, 외국인용 9종) 가운데 경주 상품이 3종이나 올랐다. 이중 내국인용으로는 ‘아이들을 위한 경주 역사 기행’과 ‘요즘 경주’ 등 2개 상품이다. 이는 경주의 빼어난 문화유산과 핫플레이스 황리단길 등이 조화를 이루면서 여행의 묘미인 감성공간으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하겠다.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국내 관광이 대부분 중단된 상황에서 경주도 방문객이 60% 이상 감소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옥석이 구분된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은 경주관광의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 관광 기회가 줄어들면 상대적으로 선택적 목적지를 정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경주는 충분히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진정되고 해외 관광길이 열리면 경주의 대외 관광 신인도와 매력은 준비 여하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경주 관광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길 기대한다.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2주 연장에 따라 경주시도 1일 0시부터 14일 24시까지 2주간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연장됐다. 종교시설은 마스크 착용, 거리두기 등 방역수칙 준수 하에 정규 예배·미사·법회 등 좌석 수 20%까지 대면 진행이 허용된다. 종교시설 주관의 모임·식사·성가대와 특히 기도원·수련원·선교시설 등에서는 정규 종교 활동 외 모든 모임·행사가 금지되며 시설 내 숙식이 금지된다. 5명 이상 사적모임 금지 및 특별방역 조치도 연장됐다. 이번 조치에 따라 5인 이상이 모일 수 없어 설날 보고 싶었던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없게 됐다. 식당, 카페, 주점, 노래방 등의 경우 기존 오후 9시까지 영업시간 제한을 늘려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기존 시간 그대로 시행하기로 해 업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설 명절을 앞두고 지역 재래시장도 시민들의 발길이 확연하게 줄어 큰 타격을 받고 있다. 경주지역에서는 지난해 2월 22일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발생한 후 지난 3일 현재 227명의 확진자가 발생해 7명이 사망했다. 지난 1년여 동안 경주지역 코로나 확산 유형을 보면 교회나 요양시설 등 집단시설 확진자들이 n차 확진으로 이어졌다. 최근 전국적으로 보더라도 지난 1년 여 동안 코로나 재확산은 교회를 비롯한 집단모임에서 시작됐다. 이번 설 연휴 코로나 확산 여부가 향후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여부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을 보여 진다. 따라서 경주시도 설 연휴 코로나 확산 예방을 위한 철저한 관리가 요구된다. 그동안 경주지역 확진자 발생 시작이 대부분이 집단시설이나 집단 활동과 관련 있었다. 종교 활동을 예의주시하고 학원, 다중이용시설, 사회복지시설 등 감염 취약시설에 대한 상시 점검과 방역 등을 철저히 해야 한다. 정부와 전문가들도 이번 설 명절이 코로나 확산의 분수령이 될 수 있다며 가족 모임 자제를 호소하고 있다. 그동안 국민들이 정부의 코로나 확산 예방을 위한 조치에 적극 협조했기 때문에 확산세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장기간 계속된 사회적 거리두기 실시로 국민들은 상당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세밀하지 못한 영업제한 등으로 자영업자들은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방역 당국은 이번 설 연휴가 끝나면 그동안 확산 유형을 분석해 획일적인 관리보다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보다 세밀하고도 안전한 코로나 대응 지침을 마련한 것도 적극 검토해야 할 것이다.
객지 생활을 한지 어언 40년이 넘었다. 물론 국토가 비교적 좁고 현대에 들어와서 교통이 발달하여 연고지 경주에 대해 내왕이 쉬워져서 경주를 언제든 들여다볼 수 있는 시대와 생활이 되긴 했지만 주생활 무대는 늘 객지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간 경주도 많이 변해왔음을 객지에서 늘 지켜봤었다. 그나마 전국이 산업화에 물들어 지난 문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지역이 많은데 경주는 왕릉과 한옥주택을 필두로 해서 시각적으로 40년 전의 경주를 큰 변함없이 들여다 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외관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는 점은 경주가 가지는 꿋꿋한 지조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면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궁금해지면서 경주시민의 살림살이에 대해서도 관심이 간다. 한 가지 객지생활을 하면서 자주 들은 얘기인데, 경주가 고향이라고 말하면 으레 ‘경주의 음식이 맛이 없다’는 얘기이다. 솔직히 그런 얘기를 들으면 부정도 하고 싶고 은근히 좀 화도 났었다. 개인적인 사례만 하더라도, 우리 집은 음식을 맛나게 해먹었는데... 경주 음식이 맛이 없다니, 언필칭 경주라는 지역에 둘러싸여 나 역시도 맛없이 먹고 자란 사람이 되어버린 셈이다. 우리 집은 장맛이 좋았고 엄마는 겨울 백김치는 물론이고 김치도 맛나게 담으셨던 기억이다. 그 유전자를 물려받은 경주 누나의 된장을 이웃에 나눠주면 최고라는 소리를 듣는다. 엄마는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된장, 간장과 김치뿐만 아니라 음식을 만들 때도 그야말로 육해공군이 총출동하는 산해진미를 만들어 내실 줄 알았고 우리는 철마다 풍부한 음식과 간식을 먹고 자랐다. 물론 내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여 경주음식 맛이 나쁘다는 인식이 생겼으며 이런 인식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를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화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의식주 중 식문화는 장구한 역사와 문화가 풍부한 지역에는 당연히 풍성하기 마련인데, 천년 수도 역할을 해왔고 한 때는 백만 인구가 숯불로 음식을 해먹을 정도로 풍성한 도읍지였던 경주의 음식 맛이 없다는 말은 좀 어처구니없는 일 아닌가? 문화가 풍성한 데는 음식문화도 발달할 수밖에 없다. 문화의 근간을 의식주라 이르는 이유이다. 신라천년 음식의 위용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경주는 바다를 끼고 있고 태백산맥 끝 줄기에 해당하는 산이 발달해 있으며 형산강이 도심 가운데로 지나가며 주위로 평야도 발달되어 있어서 음식의 기반이 될 만한 물산이 풍부한 곳이다. 우리 엄마표의 음식에서도 기억하건데 다양한 음식이 있었다. 들에서 나는 각종 채소류는 물론이고 산나물에다 특히 풍부한 해산물을 많이 먹은 기억이다. 철마다 다른 해산물이 상위에 다양하게 올라왔고 해물로 이루어진 국과 찌개며 구이와 찜 등이 빠질 날이 없었다. 경주 음식은 해방 후 관광지화 되는 과정을 거치며 어느 순간부터 음식조차 ‘관광지 음식’으로 전락하여 상업화되고 뜨내기들의 돈과 교환되는 단순한 먹거리가 되고 말았다. 황광해는 그의 저서 ‘한식을 위한 변명’에서 한국의 음식은 봉제사접빈객의 정신에서 유래한다고 했다. 유교가 발달한 경주에서 제사음식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격조 높은 음식은 사라지고 관광지 음식으로 전락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한편 산업자본 형성이라는 시대적 명분 아래 강조된 노동이데올로기는 관광을 ‘놀고먹는 가벼운 것’, ‘천박한 것’쯤으로 인식하여 궁극적으로 관광을 폄하하게 되었다. 더구나 철저하지 못했던 초기 관광접객문화는 경주 음식을 일회성 싸구려 음식으로 도배시켜버린 것이고 그런 영향이 ‘경주에 음식 맛없다’는 일반인의 인식 수준을 만들고 말았다. 그런 반면 관광지에선 관광객의 문화나 음식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어 그것을 맞추지 못한 경주가 결국 부정적인 음식문화 형성에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없는 집에 음식 맛 난다’고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잘난 경주에 맛난 음식을 인지해줄 턱이 없다. 시대가 변했다. 바야흐로 문화의 시대, 관광의 시대라고 한다. 이미 그러하리라고 믿지만, 혹시라도 경주의 시세가 자꾸만 정체 또는 열악해져가는 듯해 한 마디 붙이면 ‘경주시민부터 인식을 바꿔야 할 때’다. 이제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만큼 관광에도 자부심을 가지는 경주시민이었으면 한다. 우리의 긍지 높은 문화를 보러 오는 관광객을 당당하게 맞이하는 관광도시 시민으로 누구나 관광에 긍지를 가지고 관광산업에 보람을 가졌으면 한다. 긍지나 자부심은 자기발전의 강한 희구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런 욕구가 맛나고 수준 높은 경주음식을 만드는 힘이 될 것이다. 오랜 문화의식에 어울리는 긍지 높은 경주만의 음식문화가 만들어질 것을 기대한다.
황리단 길을 거닐어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과거 문화재 보호라는 미명 하에 이 일대 주민들은 많은 불편과 재산권 침해를 당하며 살아야했다. 건축행위 제한이 너무나도 엄격하고 중첩되어 주민들은 헌집을 제대로 수리도 하지 못한 채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고통스럽게 지냈다. 냄새나고 허물어져 가는 집들이 황남동 주택가 길에서 받는 인상이었다. 상전벽해가 딴 말이 아니다. 황리단 길 주변이 바로 그것이다. 당국이 문화재 보호에 관한 현실적인 접근을 하여 주민들의 주거환경 개선에 눈을 돌리고,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이에 호응하였다. 차츰 경관이 개선되더니 지금은 전국의 관광지 중 핫 플레이스가 되고, 각지의 젊은이들이 꿈을 찾아 이곳에 가게를 내고 있다. 황리단 길을 중심으로 하여, 황남동, 사정동, 인왕동 일대 등이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경관지구, 그 중에서도 특화경관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특화경관지구는 문화적 보존가치가 큰 건축물 주변의 경관 등 특별한 경관을 보호 또는 유지하거나 형성하기 위하여 지정된 지구를 말한다. 그 외에도 고도보존육성법 상의 건축행위제한이 무겁게 작용한다. 황리단 길은 대부분 보존육성지구에 해당하는데, 지역고도보존심의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건축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런데 황리단 길에 들어서는 건축물을 규제하는 역할을 하는 지역고도보존심의위원회나 경관위원회 등의 심의가 과연 올바른 역할을 하는지 조금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 황리단 길과 그 주변에 세워지는 건물들 외관이 그 위원회들이 취하는 규제의 결과로 매우 정형화되어 있는 점에 관해서다. 값비싼 목조의 건물, 그리고 그 지붕에 또 값비싼 골기와를 덮는 건축물 외에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규제는 부당한 재산권 침해의 성격을 갖기도 한다. 여기에 참고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서울의 북촌과 서촌의 한옥마을이다. 1920년대에 강한 민족의식을 가졌던 정세권 선생이 사라지는 우리 전통가옥을 안타까이 여겨 삼청동, 가회동, 익선동에 한옥마을을 건축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새로이 왕성하게 수입되던 일본, 서양의 가옥구조 문물을 받아들여 과거의 한옥을 수정한 개량한옥이었다. 기존의 대형 한옥이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들어선 ‘중정식’이라면, 그는 마루 개념의 거실을 중심으로 방들이 모여 둘러싸는 ‘중당식’을 구현했다. 이것은 소형의 면적으로 집을 지을 수 있는 구조이며, 생활에 편리한 형태이다. 화장실이 한옥의 내부로 들어오고, 부엌은 입식구조로 바뀌었다. 대청마루는 외부 덧문을 추가해 내부 공간인 거실로 바꾸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그가 당시 취한 혁신이 한옥의 표준이 됐다. 그런데 지금 북촌, 서촌 마을의 한옥 형태는 경주시의 건축에 관한 위원회들이 유도하는 한옥의 형태보다 훨씬 다양하다. 왜 우리는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그 기본적인 이유는 북촌, 서촌 마을에서는 목재 외에도 벽돌 같은 건축소재들을 자유로이 사용해 건물의 창의성을 구현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황리단 길 한옥은 복고적이고 고식적이다. 개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무려 백 년 전 선각자에 의해 형성된 한옥 건축물조차 따라갈 수 없는, 다양성이 부인된 한옥으로 채워지고 있다. 왜 벽돌이나 유리 같은 다양한 소재가 한옥에서는 허용되면 안 되고, 또 골기와에만 집착해야 하는 것일까? 경주시의 건축에 관한 위원회들은 여기에 관한 해답을 제시해주었으면 좋겠다. 한국민이 자랑스러워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창덕궁 안에서도 유리 온실이 고즈넉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왜 황리단 길 주변에서는 온실에도 골기와를 덮어야 한다는, 그래서 온실을 짓게 할 수 없는 따위의 고루한 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일까? 시대는 변한다. 변화하는 시대의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요구된다. 백 년 전의 기준에도 따라가지 못하는 복고의 고리타분한 틀에 황리단 길을 가두어서는 안 된다. 이래서는 미래의 생명력이 없게 된다. 발상의 전환을 하자. 백 년 후에 황리단 길 한옥이 새로운 한옥의 표준으로 들어설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창의와 혁신의 정신을 황리단 길에 부어보자. 황리단 길 건축행정에 일대전환이 있기를 바란다.
양동마을 출신의 매호(梅湖) 손덕승(孫德升,1659~1725)은 1706년 벼슬을 버리고 안강읍 대동소류지 북쪽의 대동마을에 매호초당을 짓고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고, 훗날 1944년 매호정(梅湖亭)으로 중건하였다. 부친 손건(孫鍵)과 모친 안동권씨 대은(臺隱) 권경(權璟,1604∼1666)의 따님 사이에서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난 매호는 어려서부터 외숙 송천자(松川子) 권득여(權得輿:權璟의 次子)에게 글을 배우며, 그의 사상과 학문에 영향을 받았고, 또한 가학을 바탕으로 학문을 이뤘다. 26세 1684년에 반궁 별제에 합격하고 다음 해 식년 문과에 병과 3등을 하였으며, 예조·병조 좌랑 등 여러 요직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으며, 영남학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의 심법(心法)을 따르고, 『근사록』과 『심경』 등을 중시하였다. 7대조 양민공 손소(1433~1484)는 사림파 점필재 김종직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증조부 손노(1578~1649)는 한강 정구(1543~1620)와 여헌 장현광(1554~1637)의 문인이었고, 우재 손중돈(1463~1529)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의 외삼촌이자 스승이었다. 특히 권경은 성호학파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의 문하생으로 학문과 행실이 모두 뛰어났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을 양성하였고, 권득여 역시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가난한 선비로 어렵게 살면서 후학양성에 애썼으니, 매호의 행보와 매우 유사한 점들이 많다. 매호는 자희옹(自喜翁) 최치덕(崔致德,1699~1770) 등을 비롯한 많은 후학을 두었고, 지역문사 우암 남구명(1661~1719), 화계 류의건(1687~1760), 송국재 이순상(1659~1725), 시옹 임화세(1675~1731), 훈수 정만양(1664~1730), 병와 이형상(1653~1733) 등과 왕래하였고, 안재 이덕현(1648~1707), 우와 이덕표(1664~1745), 학고 이암(1641~1696), 동고 이덕록(1677~1743) 등 회재의 후손들과도 많은 교유를 하였다. 그 가운데 치암 남경희의 부친 활산 남용만[화계의 사위]은 최치덕과 동문이며, 남경희의 증조부 우암 남구명과 매호 손덕승이 막역한 사이라 언급하였고, 당시 영덕을 기반으로 활동한 남구명과 경주의 류의건[치암의 외조부]은 양동의 문인들과도 활발한 교유가 있었고, 그 가운데 매호는 영천의 이형상과도 긴밀한 교유가 있었다. 이렇듯 경주지역 학문의 중심 역할을 매호가 담당하였다. 매호집 행장을 보면, 매호초당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경주의 서북쪽 무릉산(武陵山) 아래 금강(錦江) 위에 큰 골짝이 있는데 언덕과 집은 고요하고 들판은 넓었다. 그곳을 좋아한 매호는 언덕 위에 몇 칸 집을 짓고 매호초당(梅湖草堂)이라 편액하고, 글을 지어 스스로 처사(處士)라 하였다. 온갖 꽃과 나무를 심되 각각 구역을 나누고, 매화가 심겨진 곳이 3푼을 넘을 정도로 매화를 가장 좋아하였다. 또 무덤과 가까운 동남쪽 모퉁이에 작은 집을 짓고 띠로 지붕을 덮고 창과 기둥은 모두 대나무를 이어 만들고는 소헌(素軒)이라 편액을 붙였고, 기문이 있으며, 작은 못을 파고 좌우에 연꽃을 심고 못 주변에는 아름다운 꽃을 심었다. 지팡이 짚고서 초당과 소헌을 오가면 정신이 펴지고 흥에 겨웠다. 당시 이름난 문사들이 시축을 품고 술을 싣고서 오는 자들이 서로 이어졌고, 손님들이 떠나가면 작은 방에 바르게 앉아 선현의 책을 읽었다. 고을의 빼어난 선비들이 책을 끼고 배우길 청하고 책을 보내와 경전의 의심나는 것을 묻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이렇듯 매호는 매호초당과 연못을 조성하고, 선대의 묘소 주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는 이따금 초당과 소헌을 유유히 산책하며 호연지기를 펴고 시상(詩想)에 젖곤 하였으며, 가까운 친구가 술을 가지고 오면 속세 밖을 담론하고 선현의 책을 읽었다. 매화를 사랑한 매호선생은 매화의 고결함을 통해 자신의 곧은 의지를 투영하였고, 『매호집』 곳곳에 그의 기상이 넘쳐 흐른다. 사위 이복후(李復厚)에게 쓴 답서(答書)에 “나는 어려서부터 독서하면서 일찍이 특정한 문정(門庭)에 이름을 부탁한 적이 없고, 또한 논설(論說)로 뜻을 과장하는 것과 여항몽사(閭巷蒙士)의 선비들이 와서 항렬을 묻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선생과 제자의 명목으로서 가탁하려하면 번번이 사양하며 피했고, 어떤 경우에는 문자나 사설을 청해 훗날의 계책으로 남겨 놓으려는 자가 있을 때는 붓을 대려하지도 않았다. 이는 하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감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몇 해 전에 그대(李復厚)가 나에게 증행(贈行)의 글을 요청했을 때 역시 사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를 보면, 사위의 부탁조차 거절한 일과 자신의 신념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는 평생을 세속의 이속을 따지는 선비를 멀리하였고, 진정한 학문을 닦는 것을 우선으로 형세에 휩싸이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곧은 지조를 갖고 행동을 실행으로 옮기는 강직하면서도 매화같은 고결한 학자였다.
복작복작 빼곡히 동서양의 잡다한 장식품과 생활소품들이 들어차 있는 골동품 가게가 진현동에 있습니다. 봄이면 겹벚꽃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불국사 인근 진현동에는 수 년 전부터 작고 예쁜 카페들과 밥집, 체험형공방, 서점, 갤러리형 카페, 복합문화공간 등이 하나씩 생기고 있습니다. 경주 불국사를 찾는 이들에게 회자되면서 알려지고 있는 이 동네는 높다란 기와들이 웅장하게 줄지어 이어져있는 처마들의 다양한 선들이 일품인 동네지요. 이 골동품가게는 이 동네에 잘 어울리면서도 색다른 콘텐츠로 정착하고 있는 듯합니다. 특이한 모양을 한 물건들과 오래된 잡동사니로 넘쳐나는 이곳은 조심해서 움직여야 할 만큼 골동소품들이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연대가 ‘좋은’ 우리 고유의 물건들에선 추억이 묻어나고 일본과 중국 등의 생활민속품에선 이국적인 향취가 그득하죠. 호롱등불, 옥스퍼드 자수, 커다란 우체통, 생활도자기, 램프, 스테인드글라스 조명등, 장기판, 무쇠솥, 돌확, 옛 책걸상 등 그야말로 잡동사니 천국입니다. 그것이 고가의 진품이든 중국제 저가의 물건이든 각기 개성만점의 물건들은 제 몸에 맞는 가격을 달고 있어 부담 없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흔히 골동품은 상당한 고가인줄 알고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데 비해 이곳은 주인의 쾌활한 ‘유혹’탓인지 문턱이 낮은 가게입니다. ‘100만원 가져오면 잘 골라서 한 트럭 사갈 정도’라고나 할까요? 한 번쯤 들러서 하나씩은 ‘건져’갈 수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겁니다. 누군가는 ‘보물찾기’라는 표현으로 이 가게의 정체성을 대변해 줍니다. 헤집어서 고르면 보물을 찾을 수도 있는 이곳은 비교적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일 것 같습니다. 뒤섞여 있을 땐 눈에 띄지 않지만 나에게로 와서는 소중한 보물이 되는 추억의 저장소 같은 곳이죠. 이 동네 주변의 상가들이 하나씩 들어설 즈음, 주인장은 원래 빈 상가였던 이곳에 입점해 이제 3년째지만 단골손님 확보가 만만치 않습니다. 서글서글하게 잘생긴 듯 예쁜 주인은 시원시원하게 물건을 권하고 안목 또한 탁월한 듯합니다. 최근의 트렌드를 잘 일고 바로 생활인테리어에 활용할 수 있는 물건들을 공급해주기 때문이죠. 그래서일까요?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꾸준하게 이어집니다. 다양한 콘텐츠들이 진현동 이 골목에 하나씩 채워져가는 일은 환영할 일입니다. 개성만점의 가게들이 가지는 자생력이 결합되면 그것이 유인력을 지니기 때문이죠. 쉽게 구경할 수 있고 한 번 찾게 되면 다음을 기약하게 되는 이곳에서 봄꽃 한 송이 꽂을 수 있는 작은 화병 하나 ‘건져’가세요. 글=선애경 문화전문기자 그림=김호연 화백
18세기 나폴리에서 오페라 부파가 생겨나고 유행하더니 페르골레시의 히트작인 ‘마님이 된 하녀’는 월드투어에 나서게 된다. 1752년 프랑스 파리에서 륄리의 오페라 막간에 이탈리아 가수들이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논쟁이 일어난다. 오페라 부파에 대해 상반된 반응 때문이다. 이를 부퐁논쟁(Bouffon's Quarrel)이라고 하는데 부퐁은 ‘부파’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전통 오페라를 옹호하는 국왕파와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를 지지하는 백과전서파는 매우 격렬히 다투어 ‘전쟁’을 방불케 했다. 전자는 루이 15세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과 음악가 집단, 특히 라모(J.P.Rameau/1683-1764)가 중심인물이었다. 한편, 후자는 왕비와 루소, 디드로, 달랑베르 등 계몽주의자들이 전면에 나섰다. 특히 루소(J.J.Rousseau/1712-1778)는 자국 오페라를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를 찬양하여 국왕파의 미움을 샀다. 그럼 결과는 어땠을까? 당시 프랑스에는 서정적 비극(Trag die lyrique)이라고 불리는 프랑스식 오페라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루이 14세의 음악 멘토이자 프랑스 오페라의 아버지라 불리는 륄리(J..B.Lully/1632-1687년)가 프랑스 전통 연극과 발레를 결합시켜 만든 새로운 장르였다. 프랑스는 17세기의 이런 독창적인 전통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이탈리아의 오페라, 그것도 나폴리의 오페라 부파를 선뜻 받아들이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절대국가 시대에 국왕의 뜻을 거스르긴 힘든 법이다. 결국 18세기 부퐁논쟁은 국왕파의 승리로 일단락되었고, 이탈리아 공연단은 프랑스에서 철수하게 된다. 하지만 이탈리아 오페라가 프랑스에 남긴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식 희가극인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의 탄생을 도왔다. 앞서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를 찬양했던 루소는 우리가 사회계약론을 쓴 사람으로 기억하는 루소가 맞다. 루소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마을의 점쟁이’(Le devin du village/1752초연)라는 오페라 작품을 작곡하여 흥행시키기도 했다. 이 작품이 바로 오페라 코미크에 속한다. 그리고 한 세기 뒤에는 희대의 걸작 ‘카르멘’이 프랑스어 오페라로 정점을 찍게 된다. 카르멘 역시 오페라 코미크로 분류된다.
매일 아침 코로나 확진자 수를 확인하며, 때로는 안도의 한숨을, 때로는 걱정과 우려의 한숨을 쉬며 2020년 한 해를 보냈다. 특히, 작년 12월부터 확산된 지역 감염으로 의료기관과 병상 부족이 사회적으로 대두되는 가운데 전염병 대응을 위한 공공의료를 확충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2019년 기준 우리나라 공공의료기관은 총 221개소로 전체 의료기관의 5.5%, 병상은 9.6% 수준으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낮다. 의료보험 제도가 도입된 1977년 이후 44년간 건강보험 등 공공재원은 계속 증가했으나 공공병상 비중은 감소하고 그 자리를 민간의료가 담당해왔다. 그동안 경제적 논리 속에서 공공의료를 민간의료의 보조적 수단으로 인식해온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한국의 공공의료기관은 OECD 평균 10분의 1수준으로 사회보험방식의 의료보험제도를 가진 독일(40.7%), 프랑스(61.5%)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치다. 심지어, 공적 의료보장이 취약하다고 평가받는 미국(23.0%)보다도 낮다. 민간이 의료 공급을 주도하는 구조에서, 병원은 대도시에 집중되고 지방은 필수 의료서비스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연일 대규모의 확진자가 나오는 상황에서는 의료 인프라가 가장 잘 갖춰진 수도권에서조차 확진자가 병상 대신 집에서 사망하는 사례가 발생하는 실정이다. 공공의료기관 확충은 감염병 대응을 위해, 병상확보가 소위 돈벌이가 되지 않는 사회적 취약계층의 치료, 시민의 건강증진사업과 지방 중소도시의 필수의료 제공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사실 공공의료의 필요성은 2013년 진주의료원 폐쇄,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사회적 논의의 중심에 있었지만 메르스의 종식과 함께 흐지부지 되다가 이제 코로나19를 겪으며 다시 반복되고 있다. 공공의료가 활성화 되면 사람들은 어느 지역에 살든지 필수의료 서비스를 적기에 받을수 있고 지역 간 의료서비스의 격차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의료기관의 시설·장비 개선 등을 통해 국내 의료산업 발전과 보건의료 분야에서 정보통신기술(ICT) 또한 활성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공공의료 활성화로 의료서비스 시장 내 영향력이 높아지면 그 지역의 민간의료기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침은 물론 정책집행 비용의 감소와 국민의료비의 절감을 가져올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해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고 국민건강증진에 이바지할 공공의료 확충에 과감한 투자가 있기를 기대한다.
능 안에 잠든 사람 일으켜 세우지도 못하고 천년이 흘렀다고, 솔바람이 귀 솔깃 홀기는 한나절이다. 솔숲을 삐져나온 햇살이 능 정수리에 고봉밥으로 수북하다. 겨울바람에 시달려 풀죽은 덤불로 납작 엎드린 그늘도 조금씩 주름을 편다. 바람으로 떠돌았던 낙엽들이 휑한 마침표를 찍어놓은 계절이다. 자질구레한 편린들을 내팽개치고 홀로 거닐고픈 심사일 때가 든다. 들키고 싶지 않는 마음을 풀어놓기 좋은 곳으로 신라의 능원은 품을 내놓고 있다.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번지 일대, 기세등등한 솔숲 원성왕릉이다. 솔숲을 배경으로 능묘제도의 완벽함을 따른 신라의 왕능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능이다. 양쪽 화표석 영역으로 서역석인상(西域石人像) 1쌍,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 1쌍, 석사자상(石獅子像) 2쌍이 도열된 형상으로 마주서서 반긴다. ⌜대숭복사비」 ‘돌아가신 해인 무인년(798) 겨울에 장례에 대해 유교(遺敎)하면서 인산(因山)을 명했다. 땅을 가리기가 어려워 절을 지목하여 유택(幽宅)을 모시려 하였다. 이때 반대가 있었다. “절을 뺏어 장사지내려는 것은 좋지 않다”하였다. 그러자 담당자가 나무라며 말했다. “절이란 자리하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며 어디에 짓던 복된 터가 되어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할 것이다” ‘절을 옮겨 지울 때 인연 있는 대중들이 솔선하여 옷소매가 이어져 바람이 일지 않고 송곳 꽂을 땅도 없을 정도였다’ ‘금성의 남쪽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산기슭에 숭복사(崇福寺)라는 절이 있다. 원성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다. 바위가 고니 모양이다. 왕이 돌아가신 70여년을 넘긴 아홉 왕이 바뀐 후인 경문왕(48대 861~875)대 조성 되었다’ 봉분 둘레는 회랑식으로 석주를 세우고 돌난간을 이었다. 현재 돌기둥은 모두 남아 있으나, 돌기둥 사이에 끼웠던 난간 살대는 거의 망실되어 새로 설치한 것이다. 호석은 목조건축의 석단과 같이 지대석 위에 판석으로 된 면석을 놓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렸다. 각 면석 사이엔 봉분 내부로 뿌리가 길게 뻗어 면석과 봉토가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탱석을 배치하였다. 전면보다 약간 앞으로 돌출된 탱석의 높이 83㎝ 너비 66㎝에는 두 칸 건너 하나씩 무복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12지상이 조각되어있다. 빙 둘러 서서 무복(武服)을 여미고 능을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는 12신상이다. 남쪽방향 영혼 승천을 호위인도 하는, 정면을 향한 오상(午像) 말을 중심으로 좌우 치우치고 있다. 당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신라로 놀러온 쥐(자子)⦁소(축丑)⦁범(인寅)⦁토끼(묘卯)⦁용(진辰)⦁뱀(사(巳)⦁말(오午)⦁양(미未)⦁원숭이(신申)⦁닭(유酉)⦁개(술戌)⦁돼지(해亥), 각자의 방위를 호위하는 수호신으로 깜찍하고 늠름한 표상이다. 12지신상은 위진남북조시대(578) 중국의 묘장제도에서 발생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왕릉 12지신상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어, 통일신라의 독창적 기법의 예술성으로 창조되었다고 보여 진다. 신라능묘에 등장한 것으로 성덕왕릉 둘레에 배치된 환조(丸彫)형 무복12상으로 추측하는 실정이다. 신라의 능묘에 12지상을 각인한 곳은 28대 진덕여왕릉, 33대 성덕왕릉, 35대 경덕왕릉, 38대 원성왕릉, 41대 헌덕왕릉, 42대 흥덕왕릉 대까지 이어진다. 김유신장군묘, 능지탑, 구정동방형분, 원원사탑기단, 박물관 야외전시장 등 에서도 볼 수 있다. 중국 당나라시절 문헌 속 12지 동물형태는 시간의 신(神)으로 해석 된다. 사신(四神)이 방위의 신으로 정립된다. 동(東): 토끼(묘卯)⦁서(西): 닭(유酉)⦁남(南): 말 (오午)⦁북(北): 쥐(자子) 십이시(十二時)는 당(唐) 중기에 사신과 연관을 지어 능묘에 배치된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에 유입된 신장상(神將像)을 적립하여 무덤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독창적으로 전개된다. 당의 능묘는 십이지가 용(俑)의 역할로 평복차림새로 부장했다. 신라는 불교의 사천왕상 복장을 십이지신상에 도용했다. 이진락 ⌜신라왕릉 십이지신상 호석성립과 변천과정의 새로운 해석⌟에는 ‘통일신라시대 왕릉 둘레에 조각된 12지신상은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독특한 석각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연원과 출현 시기에 대해선 연구자들 사이에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상의 연원에 대해서는 신라 자체에서 발생했다는 설.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설. 그리고 자생과 전래가 동시에 일어났다는 설 등 세 가지로 나뉜다’고 피력했다. 강우방은 ‘중국 당나라의 십이지상을 도입하되 모방과 창조를 통해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독특한 양식인 신라왕릉 호석 십이지상이 탄생되었다’고 보았다. 강우방 의견을 따른 이근직은 신라왕릉 능묘제도 변천과정을 정리하면서, 신라왕릉 외부호석 구조변화 속에 십이지신상 호석이 탄생하는 과정의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로 비교하며 피장자를 추정하였다. ‘신라능묘는 스투파처럼 능 자체에 견실한 호석을 두르고 난간과 회랑이라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 세부에 있어서 물론 다른 점들이 허가하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의도라 볼 수 있다. 난간과 회랑은 인도의 스투파를 모방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너무도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신라 12지 능묘는 그러한 스투파의 외형을 모방함으로써 ‘왕은 곧 부처’라는 관념을 표현하려 하였다고 본다’는 견해도 있다. 원성왕릉능묘의 십이지는 과시적 성향을 의도한 큰 규모로 호석 전체를 아우른다. 조선의 금석학자 김정희 선생이 제23대 순조 24년(1824)에 경주를 방문했다. 괘릉과 김유신묘의 12지신상을 탁본해서 청(淸)나라에 보냈다. 축소된 탁본과 김정희 선생의 발문이 『해동금석원』 상권에 실려 있다.
드론의 활용은 다방면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새로운 차원의 영상자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혁명적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영상촬영은 눈높이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눈높이를 높이려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공중에서의 촬영은 사다리차를 타고 올라가거나 비행기나 헬기 등 항공기를 타야 했다. 당연히 많은 비용이 들고 전문 작가가 탑승해야 하는 불편이 따랐다. ‘항공기로 본 도시의 영상’이 매우 중요한 관광 콘텐츠나 영상자료로 세계적인 호응을 얻었던 것은 그 영상이 그만큼 촬영하기 어렵고 귀해서일 것이다. 이런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 것이 드론이다. 드론에 연결된 무선 조정 카메라는 드론의 성능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까지 정면 위주로 촬영되고 개시되는 영상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즐거움으로 급격히 대처하고 있다. 건축으로 치면 정면도를 평면도로 바꾸어 보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관광지를 보는 시각의 다양성 자체로 향후 또 다른 관광지 홍보의 가능성이 열리기도 할 것이다. 지난 2월 1일 강정근 씨가 페이스북에 신형 드론으로 촬영한 사진을 올리며 앞으로 드론의 활용에 대한 즐거움을 소개했다. 경북관광공사 처장인 강정근씨는 앞으로 신형드론으로 경상북도의 관광지와 산천은 물론 전국의 구석구석을 새롭게 찍어 올려보고 싶다는 포부를 알렸다. 올린 사진도 눈높이 아닌 드론 높이로 훨씬 높아진 보문호수의 시원한 전경과 위에서 내려다본 자신의 사진을 올려 드론 촬영의 멋을 한껏 드러냈다. 드론으로 촬영한 보문호의 영상미가 마치 높은 산에서 촬영한 것처럼 시원하고 이를 보는 페이스북 친구들의 평가도 환호일색이다. 심지어 다른 지방 사람들이 미리 자신의 고장도 촬영해 달라며 때 이른 요구를 하기도 한다. 이처럼 드론의 활용은 지척으로 다가왔다. 다만 조심할 것은 드론이 자칫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뜻밖의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마땅히 드론 조정에 따른 충분한 기술습득과 드론 사용이 허락된 곳에서 날리는 공중의 수칙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목적지는 분명하나 갈급한 그 어떤 목적 없이 떠나는 기차여행은 뾰족한 역사(驛舍) 지붕을 마주하면서부터 이미 설렌다. 순식간에 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과의 교감은 유난히 시적으로 다가와 자질구레했던 일상의 번잡함을 금세 휘발시킨다. 경주 울타리 안이지만 낯선 동네로의 이동을 기차로 해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까지 승객을 기다리고 실어나르는 역은 지역 내 5개 역(경주역, 안강역, 서경주역, 불국사역, 건천역) 뿐이다. 오래된 침목들 위로 얼마나 많은 기차들이 지났을까. 수많은 기차가 지나간 흔적은 모두 애틋하다. 철커덩 거리는 적당한 흔들림 속에서‘떠나왔다’는 해방감과 ‘다다랐다’는 안도감을 교차시키는 객차에서 우리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지도 모른다. 미뤄서 해악이 되는 일이 더러 있다. 그 중 하나가 아날로그의 대명사로 상징되는 ‘무궁화’호 타고 떠나는 기차여행이다. 하물며 그 이용기간이 한시적임에랴. 혼자만의 여행이라면 Sarah Vaughan의 ‘A Lover's Concerto’ 같은 음악을 들으며 출발해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경주의 철도는 1900년대 초 중앙선 개설로 최초 개통됐으나 어언 100년의 시간을 지난 현재는 동해남부선과 중앙선의 복선화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올해 2021년 12월경(예정) 역이 신설 및 이설됨에 따라 기존 철로는 폐선이 되는 수순을 밟는다. 현재 경주시를 통과하는 열차는 중앙선과 동해남부선으로 17개의 역이 있다. 동해남부선 총 12개 역과 중앙선 5개역이다. 동해남부선 총 12개 역(부조역, 양자동역, 안강역, 사방역, 청령역, 나원역, 경주역, 동방역, 불국사역, 죽동역, 입실역, 모화역)중에선 현재 6개역이 운행되고 있으나 나원역은 화물만 취급하고 있다. 6개역은 폐역되었다. 한편, 중앙선 총 5개역(서경주역, 율동역, 모량역, 건천역, 아화역) 중 건천역과 서경주역만 운행 중이며 나머지는 여객취급이 중단된 상태다. 따라서 지역내 현재 여객을 운행중인 역은 동해남부선으로는 경주역, 불국사역, 안강역이 있으며 중앙선으로는 서경주역, 건천역으로 모두 5개소 역이다. 폐선이 되기 전 아직까지 운행중인 지역 내 5개소 역 탐방을 시작으로 경주 이외 동해남부선과 중앙선상에 있는 다른 도시의 역을 찾으며 각 역의 사계절 풍경도 담을 예정이다. 지난달부터 세 차례, 경주역과 서경주역에서 출발해 건천역, 안강역, 불국사역을 다녀왔다. -서경주역~건천역...시류도 잊은 채 준비해 간 커피와 삶은 계란, 사이다는 건천역 대합실에서 해결하고 건천5일장 찾아 시골 인심도 만끽 지난달 21일 첫 번째 기차 여행지는 서경주역에서 출발해 도착한 건천역이었다. 오후 12시18분 서경주역을 출발해 건천역 도착은 12시31분 이었다. 약 13분간의 짧은 시간이었다. 요금은 2600원. 현곡면 용담로에 있는 서경주역은 중앙선으로 단촐하고 작지만 단단해 보였다. 서경주역을 이용하는 일반철도 일일 승객 수는 2019년 기준 574명 정도다. 향후 현곡면 하구리로 이전함과 동시에 동해선 나원역과 통합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역은 현곡면 주거밀집지를 끼고 있어선지 이용객이 많아 보였다. 난방이 잘 된 역대합실에선 간간이 승객들이 문을 여닫고 있었다. 서경주역에서 만난 우리(동행자)는 대합실(맞이방)과 역명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건천역으로 향하는 기차에선 코로나로 거리두기를 시행하고 있어 차창 좌석만 가능했다. 자가용으로 익숙하게 다녔던 건천 국도를 멀리서 바라보니 작게만 보인다. 차창 밖으로 모량역을 바라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모량역을 지나며 바깥 풍경을 정신없이 찍어대다 보니 이내 건천역에 도착했다. 중앙선 건천역은 아화역과 모량역 사이에 있다. 대 여섯 명이 하차를 한 건천역을 이용하는 일일 승하차객은 2019년 기준 21명 정도라고 한다(철도통계연보). 1일 8회 무궁화호가 운행되며 건천역에 정차하는 모든 무궁화호는 동대구에서 포항까지만 운행한다. 복선전철화가 완료되면 모량역처럼 신호장으로 이전할 예정이라고 한다. 모량역과 흡사한 외관에선 신산함이 묻어났으나 한없이 다정스러웠다. 시류도 잊은 채 준비해 간 커피와 삶은 계란과 사이다는 건천역에 내려 대합실에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승객이 급격히 줄어든 탓일까. 텅 빈 대합실에서 커피와 계란으로 든든해진 우리는 마침 건천5일장이 서는 장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걸어간 시골장터에는 장이 한창이었다. 건천장 한 켠에 있는 ‘건천대장간’을 찾아 대장장이가 손수 만든 주방용 칼 한 자루씩을 샀다. 인심 좋고 손 재간이 뛰어난 주인장은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보기 드문 장인이다. 파격 할인가로 구입한 칼은 정말 손맛이 제대로인 작품 같았다. 건천맛집을 찾아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건천읍행정복지센터 바로 옆 카페서 커피 한 잔을 나눴다. 길을 잃어도 좋을, 익숙치 않은 곳에서의 배회는 즐거웠다. 너무 느긋하게 있었던가. 오후 3시48분 경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기 위해 급히 역으로 향했다. 간신히 기차 시각을 맞추긴 했는데 역으로 가는 길은 꽤 멀어 나중엔 뜀박질을 했다. 학창시절 버스를 타기 위해 ‘우다다’ 뛴 기억이 소환됐다. 시간이 정해져있는 기차를 타기 위해 서두는 모습이 생경했지만 마냥 유쾌했다. 관성처럼 자가용을 이용하고 쉽게 이동했던 습관에서 모처럼의 해방이었다. -경주역~ 불국사역...불국사역 내려 구정동과 진현동이 선사하는 여유로움과 낭만에 ‘흠뻑’ 두 번째 기차여행은 경주역에서 불국사역까지였다. 동해남부선 경주역을 이용하는 일반철도 일일 승객 수는 2019년 기준 2685명이다. 폐역 후 모든 업무를 신경주역으로 이관할 예정이며 지금은 새마을호도 명절임시열차를 제외하고는 운행하지 않는다. 경주역은 KTX중심 열차이용패턴 변화에도 불구하고 행락철, 휴가(방학)시즌 중에는 아직도 이용객이 폭증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경주역에서 오전 11시31분 기차로 불국사역에 도착한 시간은 11시42분. 10여 분 걸려 불국사역에 도착하다니! 절로 웃음이 났다. 경주역과 불국사역은 일요일이라 그런지 유난히 이용객이 많았다.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기차는 낮이건 밤이건 환하게 불을 켜고 들어온다. 대체로 노후화된 기차들은 경적소리도 늙어있는 듯 했다. 불국사역 대합실에서 이번엔 미리 쪄간 떡에 향긋한 커피를 곁들여 홀짝거렸다. 불국사역 맞이방을 볼때마다 매번 그 대합실의 작은 크기에 놀란다. 이렇게 작은 대합실에서 수많은 승객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냈을 것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동해남부선 불국사역을 이용하는 일반철도 일일 승객 수는 2019년 기준 391명이다. 불국사역에서 걸어서 인근 맛집을 찾았다. 밀면으로 유명한 이 집은 그날도 길게 줄을 서고 있어 놀라웠다. 거리두기를 준수한 이 식당에서 석쇠에 구운 돼지고기를 곁들인 밀면 한 그릇을 맛나게 먹고는 택시로 진현동으로 향했다. 이 동네에 하나둘씩 조심스레 입점하고 있는 상가 중 새로 입점한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이어 생활소품 등을 파는 잡화점을 둘러보고 골동품 가게도 들렀다. 문턱이 낮은 이 가게서 가성비 갑(?)이었던 한 점의 도자기와 등불조명을 구입했다. 돌아오는 기차에 실었던 도자기의 무게와 들고 이동하는 불편함도 잊은 채였다. 우리는 구정동과 진현동이 선사하는 여유로움과 낭만에 흠뻑 빠졌다. 열심히 살아 온 자신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고 위로였다. -경주역~안강역...새마을호가 운행되기도 했던 제법 규모 큰 안강역, 안강서 경주역으로 돌아오는 기차는 역방향으로 운행 지난 1일 경주역에서 안강역으로 출발한 시간은 오전 11시30분으로 안강역 도착은 11시48분이었다. 18분여. 경주 시내를 내려다보며 가는 기차에서는 경주 시내 건물과 골목의 속살과 민낯이 그대로 보인다. 기차여행의 참맛이다. 객차 안은 조용했다. 의외로 혼자서 기차를 이용하는 승객이 많았다. 안강역으로 가는 창 밖 풍경은 유난히 논이 많았는데 성급하게 봄이 머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얼음이 녹은 강에서, 포실포실해진 논흙들이 그랬다. 창 밖으로 나원역과 사방역의 모습도 스치듯 지나간다. 마을 건널목을 지날때마다 딸랑딸랑 신호음이 울렸고 ‘우리 열차 곧 안강역에 도착합니다’ 라는 안내방송에서의 ‘우리’는 정겹다. 동해남부선 안강역을 이용하는 일반철도 일일 승객 수는 2019년 기준 46명이다. 1918년 12월 경동선 협궤로 최초 영업을 시작한 안강역은 1966년 현 역사가 준공됐고 2015년 새마을호가 운행중지 되었다. 안강역은 비교적 읍내 끝자락에 위치해 주변 역세권이 잘 형성돼 있지 않았다. 역사는 생각보다 제법 규모가 컸고 일직선으로 뻗은 직선의 선로가 시원해 보인다. 역사 건너편 플랫폼에는 승객대기실이 아직 운영되고 있으나 텅 비어 있는 승객대기실은 미련하게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강역을 빠져나와 이어지는 비화원로 거리는 조용했다. ‘역전이용소’, ‘안강초등학교’ 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갑산한의원’이 보이는 큰 사거리를 지나니 안강읍행정복지센터가 보이는 다운타운으로 이어졌다. 안강 시내 골목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차 없이 걸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안강서 경주역으로 돌아오는 기차는 역방향으로 운행됐다. 기차 시각을 맞추려고 헐레벌떡 뛰어 본 기억이 언제쯤에서 멈춰 있을까. 기차가 떠나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계속 시계를 들여다본 기억은 또 언제였을까.
설 명절을 앞두고 대한노인회 경주시지회 박승석 부회장은 지난 2일 지역 23개 분회 어르신들께 전달해 달라며 쌀 23포(10kg들이)를 경주시지회에 기탁했다. <사진> 매년 쌀 나눔을 이어오고 있는 박승석 부회장은 “비록 작은 정성이지만 건강한 신체와 마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이렇게 지은 건강한 쌀을 조금이라도 나눠 우리 노인들이 함께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원한다”면서 “앞으로도 지속적인 나눔 활동으로 온기가 넘치는 지역사회 만들기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노창수 경주시지회장은 “코로나19와 한파 등 힘든 시기에 심리적으로 온정의 손길이 필요한 노인들을 위해 사랑을 전하며 나눔 활동에 앞장서는 마음에 감사하다”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 옛 전통을 이어가는 것은 기쁨이 두 배다. 나눔 활동 확산으로 모두가 희망을 품는 2021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가 검증된 정신건강 정보를 하나의 사이트에서 통합으로 제공하는 ‘국가정신건강정보포털’서비스를 시작했다. ‘국가 정신건강현황 보고서 2019’에 따르면 18세 이상 국민의 정신질환 평생 유병률이 25.4%로 국민 4명 중 1명이 정신과적 질환을 경험하고 있지만 정신건강 서비스 이용률은 22.2%로 상당히 저조하다. 이번에 개설된 국가정신건강정보포털은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 마련됐다. 생애주기별 자가검진과 질환별 자가검진(17종) 서비스를 제공한다. 포털 사용자들은 자가검진 결과에 따라 정신건강 서비스 이용에 도움이 되는 위치기반 정신건강 관련 기관 검색, 약 정보 등 필요한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고 부정적 인식의 개선을 위해 칼럼, 회복 수기, 카드 뉴스, 동영상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한다. 정신건강 관련 주요 통계정보, 책 정보, 앱 정보, 연구 동향 등의 정보를 주기적으로 제공하여 정신건강 최신 현황 및 관련 현안, 이슈도 한눈에 볼 수 있다. ‘국가정신건강정보포털’은 국립정신건강센터와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공동으로 개발에 참여하였고,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운영한다. 주요 질환별 정보, 자주 찾는 질문 등 정신건강 정보 콘텐츠 60여종에 대해서는 전문가 검증을 거쳐 국립정신건강센터와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인증 로고를 발급함으로써 정보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확보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정확한 정신건강 정보 제공을 통해 국민의 정보 접근성을 향상하고 자신과 가족의 정신건강을 스스로 지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경주시어린이급식관리지원센터(센터장 이인숙)는 지난달 26일부터 28일까지 원장대상 온라인 집합교육을 실시했다. <사진> 온라인 집합교육은 코로나19 감염병 예방 및 확산방지를 위하여 화상프로그램 줌(ZOOM)을 이용했다. 등록 시설의 원장들은 적극적인 분위기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순회방문지도 관련 교육은 방문지도계획, 지원물품 및 유통기간 표시와 올바른 달걀보관 등 식재료 위생관리에 대하여 동영상과 함께 전달했으며 올바른 식단사용에 대한 교육은 식단 감수와 관련된 소책자를 담당 직원이 설명했다. 이인숙 센터장은 “비대면 교육에 대비하여 체계적으로 다양한 컨텐츠를 개발해 지원할 계획이다”면서 “코로나19로 인해 올해도 급식위생안전을 위해 보다 철저히 관리할 계획이니 협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한편 2013년 12월에 개소한 경주시어린이급식관리지원센터는 위덕대(총장 장익) 산학협력단에서 위탁운영하고 있으며 관내 199개 어린이급식시설의 6000여명의 어린이를 위한 급식 영양·위생안전관리의 지도·점검 및 관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