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은 경주를 내륙도시로 알고 있는데 바다와 접해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란다. 경주의 자연해안선은 포항 호미곶을 지난 오류해변부터 시작해 약 25km구간인 연동, 오류, 척사, 감포, 전촌, 나정, 가곡, 대본, 봉길, 나아, 양남, 읍천, 하서, 진리, 지경까지인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2014년 6월 5일에 발표한 해양수산부 국립해양조사원 수로측량과의 통계에 의하면 경주시의 육지부와 도서부 해안선의 총길이는 44.51km이고 자연해안선만 25.53km에 달한다. 경주시청의 조직도를 보면 농림축산해양국 아래 해양수산과는 4번째로 해양수산과 아래에 수산행정, 수산진흥, 연안관리, 해양산업팀으로 구성되어 해양에 대한 경주에서 해양산업에 대한 비중이 매우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리적으로 보면 경주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인 감포로 가려면 토함산이 가로 막고 있다. 왕복 2차선 터널이 뚫리고 한수원이 들어와서 국도4호선이 포장되고 추령터널이 뚫렸지만 경주시내에서 감포로 가는 길은 여전히 멀다. 오히려 동경주IC에서 남포항으로 가는 게 훨씬 빠르다. 65번 고속도로가 경주와 연결되지 않고 포항이나 울산, 부산으로 빨려 들어가게 생겼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번영을 누렸던 것은 바다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나당연합군이 삼국통일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역사책에도 등장한다. 경덕왕 이후 신라 사람들이 당나라에 신라방을 만들어 거주하고 당, 일본과 해상무역활동을 했다. 당시 신라방은 지금의 산둥성 등주와 장쓰성에 걸쳐 존재 했다.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에는 많은 외국인이 등장한다. 처용은 그 한 예로 그가 아랍 사람이고 신라에 와서 지냈다는 사실을 처용가를 통해 배운다. 모두 해양장악력이 충만하고 해상무역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의 일이다. 그 정점에 해상왕 장보고가 있다. 장보고는 신라 흥덕왕 3년에 신라 사람들이 해적들에게 노예로 팔리는 참상을 전한 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더 이상 신라 사람들이 노예로 팔리지 않게 만들었다. 장보고가 해상권을 장악해 해상무역을 독점하면서 신라는 혼란기 마지막 번영을 누리는 듯 보였지만 장보고가 살해되고 청해진이 없어진 후 90년 만에 통일신라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서구열강들도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에 바다를 통해 식민지를 개척하고 활발한 해상무역으로 국력을 키웠다. 그러나 바다에서 벌어진 전쟁의 승자가 결정되면서 명암이 엇갈렸고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마지막 승리자가 되었다. 바다를 중시하며 발전하는 것은 지방자치 단체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수산업도 과학화되어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진화했고 어업가공 기술과 산업도 다양하게 성장하고 있다. 해운과 수산, 이를 기반으로 한 해양관광 등은 같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현격히 다르다. 그런 만큼 훨씬 다각적인 측면에서 바다를 연구하고 성장동력을 키워야 한다. 경주의 정치와 경제 리더들이 해양을 통해 산업을 성장시키겠다는 포부와 정책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 한 예로 코로나19 사태에서 해운업은 최고의 산업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해운항만은 수출입물동량의 99.7%를 차지한다. 이렇다 보니 해외로 나가는 컨테이너 운반비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해운업은 디지털 항만 관련산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일본의 경우 디지털을 매개로한 공항과 항만, 국가산업단지를 복합개발하고 있다. 세계적인 해양물류업체인 Maersk Line과 글로벌 IT기업인 IBM이 합자해 Tradelens라는 회사를 만들었는데 이는 기술적으로 AI를 기반으로 한 자동화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항만물류시스템을 결합한 결과다. 이웃한 포항과 울산, 부산도 신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항만을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런 한편 2019년 2월 21일 황진회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본부장이 NEAR 크루즈관광국제 포럼에서 “포항·경주를 가진 경북은 크루즈 산업을 유치할 자원과 좋은 시기를 맞고 있다. 이를 살리기 위해선 집중 투자와 치밀한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관광이 전멸했지만 백신의 보급과 함께 전염병은 조만간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바다는 다양한 해양산업, 관광산업의 새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바다를 개발해야 미래가 있다. 경주가 바다를 어떻게 이용하고 개발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4월 7일 서울, 부산 시장 보궐선거의 열기가 뜨겁다. 그러나 이는 전초전이다. 내년 3월 9일의 대통령선거가 메인 이벤트이다. 만약에 여권이 서울, 부산 시장 선거에서 모두 진다면, 그것은 여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다. 거꾸로 두 자리를 모두 얻는다면, 여권 그중에서도 친문세력은 지난 국회의원 총선에 이어 다시 한 번 탄력을 받으며 대통령 선거를 자신들의 의중대로 이끌어나갈 힘을 얻는다. 이 때문에 여권은 4월 7일의 선거에 마치 목숨을 걸고라도 해치우려는 듯이 덤벼들었다. 선거법 위반이고 뭐고 없다. 우선은 이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는 절박감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4월 7일 시장보선은 예선에 불과하다. 본선은 어디까지나 내년의 대통령 선거이다. 이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하지만 워낙 변수가 많아 1년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전망의 정확성은 보잘것없을 수 있다. 그런데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 3월 5일 퇴임함으로써 큰 불확실성의 하나가 제거되었다. 그는 유력한 대선주자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거듭 확인되었음에도 공직에 있었다. 또 그의 출마를 막으려고 하거나 그를 음해하는 여권의 공작이 워낙 집요하게 추진되어 와서 그라는 유력한 변수를 대선결과의 예측 산술에 제대로 넣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보다 큰 그림을 한 번 그려보자. 이 그림 속에서 우리는 대선의 전망을 조금은 뚜렷하게 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나 지금의 문재인 정부는 다른 것 같으면서도 아주 비슷하다. 그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문재인 대통령도 청와대에서 거의 ‘혼밥’을 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두 사람의 성향이 어쩌면 대단히 닮았을지 모른다. 그것은 가까운 측근에 휘둘리고, 소수의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외에는 믿지 못하는 폐쇄적 스타일이라 인사를 아주 좁은 영역 내에서 한다는 것이다. 물론 문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더 강한 팬덤을 갖고 있고, 그 팬덤을 적절히 이용하며, 감성정치의 달인이라고 평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박근혜 씨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으나 아무래도 문 대통령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런 성향은 정치의 실종을 낳았다. 무엇인가 제대로 국정이 굴러가지 않는다는 강한 불만이 제기되어왔다. 현실의 문제를 과감하게 정확히 분석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즉각 대처하지 못한 채 국정의 동력이 무척 약하였다. 그 결과 생겨난 유약하고 무능한 리더십이 낳는 여러 부작용이 군데군데 생겨났고, 이런 속에서 국민들은 ‘10년간의 리더십 위기현상’을 타파할 수 있는 강한 지도자를 희구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 현상을 바라보며 일찌감치 예측하였다. 윤석열 총장은 조만간 정계에 진출할 것이고 그와 이재명 지사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투 톱을 이루어 각축을 벌일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내 예측이 맞았던 셈이다. 그러나 권력에 흠뻑 취한 친문세력이 절대, 호락호락 두 사람 중의 하나가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가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여권의 강경파가 중수청의 설립 등으로 ‘검찰의 폐지’를 추진해온 것도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그 실체가 조금 더 뚜렷해진다. 더욱이 이번 4월 보선에서 서울, 부산 시장 선거에서 모두 이긴다면 그들은 막판 뒤집기를 강력하게 시도할 것이다. 그 반전의 시도는 내년 대선을 결정지을 국민의 의사를 왜곡, 변개하여 권력의 장악을 꾀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거처럼 총칼에 의한 것이 아니란 의미에서 현대판 ‘연성쿠데타’라고 할 수 있고, 집권세력 내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는 ‘친위쿠데타’라고 부를 수도 있다. 과연 친문세력이 마지막 벌일 정치투쟁은 성공할 것인가? 친문세력에서 내세울 수 있는 사람 중 이재명이나 윤석열에 필적할 수 있는 강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필사적인 시도는 난관에 부닥칠 수 있다. 또 최근 생긴 ‘LH사태’가 그들의 발목을 끈질기게 잡는 귀신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내년 대선에 관한 내 전망을 독자 여러분들이 가진 전망과 한 번 비교해보면 어떨까 한다. 그리고 여건 야건 강력한 개성을 가진 후보자들이 출현하여 국민을 위한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현상을 바라보며, 그들이 잘해나가도록 응원해주었으면 한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은 1572년(선조5) 자옥산 아래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선생을 모신 공간으로, 경주부윤 서간(西澗) 이제민(李齊閔,1528~1608.재임1571.08~1574.02)과 도내 유림들의 공의로 세워졌다. 1573년 서악의 향현사(鄕賢祠)에 임시 봉안된 위패를 옥산으로 모셔왔고, 사액(賜額)을 받았다. 회재의 삶을 한마디로 일축하기는 어려움이 많지만, 무오사화(1498)·갑자사화(1504)·기묘사화(1519) 그리고 을사사화(1545)·정미사화(1547:양재역벽서사건) 등을 겪으며 정당의 처신과 사상과 학문에 많은 변화를 가졌다. 사실 정미사화의 직접적인 계기는 정언각(鄭彦慤)이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권력을 농단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를 서서 기다릴 것인가?’라는 벽서를 발견하면서, 권벌(權橃)·이언적·정자(鄭滋)·노수신(盧守愼)·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513~1577)·백인걸(白仁傑) 등 20여 명이 유배 당하였다. 그 가운데 유희춘은 하서 김인후 등과 교유하였고, 선조의 신임을 받은 인물로, 『회재집』 발문을 남겼다. 회재선생 사후 그의 행적을 담은 시문학 작품들이 아들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1516~1568)에 의해 수집되고, 1565년 퇴계 이황이 지은 행장(行狀)이 추가된 정고본(定稿本:필사본)이 제작된다. 1574년 잠계의 아들 구암(求庵) 이준(李浚,1540~1623)은 경주에서 부윤 이제민과 경상 감사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의 도움을 받아 회재집을 처음 간행하였고, 이후 옥산서원에서 1600·1624·1631·1641·1794·1864·1926년 등 여러 차례 개간되었다. 《이병훈, 「조선시대 경주 옥산서원의 위상 변화」,『한국서원학회』, 2020》학술논문에 의하면 “옥산서원은 문묘 종사 대현인 이언적을 제향하는 서원으로서 경주부윤과 향인, 후손, 문인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건립되었다.”언급하였고, 실상 후손들 가운데 구암 이준 등이 회재의 서적을 간행하고 서원건립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경주부윤 초당(草堂) 허엽(許曄,1517~1580.재임1564.09~1565.02)은 『회재집』 발문에서 “만력 계유년(1573, 선조6) 12월에 경주 이회재(李晦齋) 선생의 손자 이준이 찾아와서 경주 부윤 이제민의 편지와 선생의 유고집(遺稿集)을 꺼내 보여 주었다. 일찍이 이 문집은 퇴계 선생이 손수 교정하여 돌아가실 무렵에야 끝내셨다 하니, 반드시 정밀함을 다하여 한 글자도 온당하지 않은 부분이 없을 것이다. … 부윤 공이 또 나에게 서문과 발문을 요청하였는데, 내가 비록 글을 잘 못하지만 사양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며 회재집 학문연원의 깊이와 문집편찬의 과정 등을 설명하였다. 당시 경주부윤을 지낸 허엽과 이제민 등은 옥산서원 건립과 문집편찬에 많은 관심과 협조를 하였고, 지역 유림들과 공조해 서원운영에도 일부 동참하였다. 원래 서원은 당색이 분명한 공간으로 때로는 훼철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지만, 옥산서원은 서원훼철의 화살을 비껴나 지금도 온전함을 과시한다. 회재 이언적 선생 문집 발문 - 유희춘 영의정 회재 이언적선생의 도덕과 학문은 퇴계 이황이 자세히 말하였으니, 어찌 후생(後生)의 군더더기 말을 기다리겠는가? 다만 선생의 시문은 근엄하고 정확하여 한 글자도 구차한 것이 없어서 유림 가운데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전체의 문집(全集)을 보기를 원한 지가 오래되었다. 지금 계림 부윤 이제민(李齊閔)이 방백[경상 감사] 노진(盧禛)에게 청하여 목재를 모으고 목공을 모집하여 개판을 마치고 발문을 나[유희춘]에게 부탁하였다. 또 서원의 누(樓)ㆍ재(齋) 등의 이름을 지어주기를 요구하니 내 어찌 감히 담당하겠는가? 하지만 천 리 밖의 요청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삼가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선생의 아름다운 덕을 아는 자는 태산북두(泰山北斗)라 하고, 모르는 자라도 일시제일류(一時第一流)라 합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생은 일생동안 『소학(小學)』에 힘을 쏟아 『대학(大學)』에 나아가신 분으로, 그칠 데를 알아 정함이 있고 고요함을 지키려는 뜻이 많았을 것이니, 누와 재의 이름도 아마 반드시 이러한 뜻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또한 훌륭한 많은 선비들이 높은 산을 우러러보듯이 존경하니 이 재에 거처하고 이 누에 오르는 자는 진실로 인륜을 밝히고 몸을 공경히 하는 근본을 배양하고,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경지에 이름으로서 선생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선생께서 말을 세우고 모범을 드리운 것이 후학들에게 무궁한 은택이 될 것이요, 여러 선비들도 선생을 저버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문집을 간행하는 성대한 뜻입니다. 부윤께서도 어찌 이것으로써 여러 선비들을 격려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만력(萬曆) 갑술년(1574, 선조7) 2월 초, 가선대부 행 홍문관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동지성균관사 유희춘 삼가 발문을 쓰다.
지난해 봄은 악몽이었습니다. 코로나19의 시작이었으니까요. 올해 봄도 그리 사정이 나아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훨씬 희망에 부풀어 있는 것 같습니다. 더디게 꾸물거리며 봄이 다가오고 있어 맘에 들진 않지만 한겨울 시린 기운을 뚫고 피어오르는 이른 봄꽃들을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화들짝 성큼 다가온 봄 마중을 위해 꽃 나들이를 나갔습니다. 꽃마중 가는 내내 봄기운처럼 푸근해지고 느슨해져서일까요? 스프링처럼 쏙쏙 솟아오르는 봄꽃들 속에서 어김없이 약동하는 생명력을 보았습니다. 곧 꽃으로 뒤덮일 경주의 산야에는 봄이 물오르고 있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 곁에 찾아온 경주의 봄은 노랑색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칩이 지난 경주의 들과 산을 수놓는 복수초, 산수유, 영춘화 등은 모두 노랑색이고 봄의 대표적 전령들이죠. 그 중에는 노랑보다는 은은한 매화의 색채들이 경주 곳곳을 수놓기 시작합니다. 율동 두대리 성주암자에선 독특한 동백들과 매화가 이미 개화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기지개를 켜고 있는 봄꽃들의 근황 찾아 성주암에 들렀습니다. 율동 두대리는 서악동 태종무열왕릉에서 ‘소티고개’를 넘어 건천 방면으로 5분여 가다보면 만나는 유서깊은 마을입니다. 마을 주위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벽도산은 작지만 아늑하게 느껴집니다. 간이역이었던 율동역의 무인철도건널목을 지나고 마을회관 쪽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이 마을의 당산목을 만납니다. 거기서 곧장 좁고 구불한 길로 오르다보면 오래돼 보이지만 정갈한 작은 암자가 그윽하게 나타납니다. 암자 입구서부터 은은한 매화향이 전해졌습니다. 자주 찾아가는 암자지만 이 암자를 찾을 때 마다 설렙니다. 그것은 사계절 내내 각기 다른 풍경을 감상하는 즐거움 때문일 것입니다. 이 암자는 일명 ‘성주암’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바로 이 암자 뒤편 너른 바위에는 ‘경주율동마애여래삼존입상’ 석불이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서 있습니다. 8세기 후반의 마애불인 이 입상석불은 볼수록 정감이 가는 마애삼존석불 입상이지요. 암자 주위의 다양한 꽃들과 꽃길은 어느 한 스님의 발자취라고 하는데요, 마을 주민의 말에 의하면 오래전 지어졌던 이 암자에 1980년대 말에 스님 한 분이 오셨고 스님은 무척 꽃을 좋아해서 희귀한 동백 여러 종과 매화, 목련, 수국, 명자나무, 옥잠화, 녹차나무 등을 심고 지극정성으로 가꿔 사계절 꽃으로 둘러싸인 지금의 성주암을 즐길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야흐로 목련은 꽃봉우리가 부풀어있었고 매화향이 진동하는 가운데 흔히 볼 수 없는 분홍과 짓붉은 겹동백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경칩 지난 경주 야생의 들과 산에선 바람꽃, 복수초 등 봄의 전령들 ‘쏙쏙’ 피어나고 있습니다. 깊은 우울의 그림자를 떨치기엔 봄꽃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성주암의 봄을 즐겨보세요. 글=선애경 문화전문기자 그림=김호연 화백
오페라는 16세기 끝에 이탈리아에서 탄생하여 17~18세기에 온 유럽으로 확산되더니 19세기에 낭만주의와 함께 마침내 전성시대로 돌입한다.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는 오페라는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대략 100년 동안의 전성시대 작품들이다. 전성시대는 오페라마저도 잘 쓴 천재 모차르트(W.A.Mozart/1756-1791)가 열었다고 볼 수 있다. 모차르트 이전의 작곡가들이 쓴 오페라 중 지금까지 무대에 오르는 작품은 별로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이탈리아어로 된 다 폰테 3부작(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과 독일국민을 위해 독일어로 쓴 마술피리는 가히 불멸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은 오늘날 오페라 가수라면 누구나 서고 싶은 꿈의 무대다. 바로 이곳에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와 베르디, 이른 바 이탈리아 오페라 4대 천황의 동상이 놓여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극전성기를 이끈 인물들이다. 오페라 종주국 이탈리아는 19세기 중반까지도 오페라 권력의 중심이었다. 로시니(G.A.Rossini/1792-1868)를 수장으로, 그의 제자 도니체티(G.Donizetti/ 1797-1848)와 벨리니(V.Bellini/1801-35)가 서로 경쟁하며 19세기 초중반의 오페라를 이끌었다. 그들은 소위 벨칸토 3총사라 불린다. 특히 도니체티와 벨리니는 광란의 오페라로 프랑스혁명 이후의 혼란한 사회상을 무대에서 극적으로 표현했다. 이어서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왕 베르디(G.Verdi/1813-1901)의 보유국이 된다. 그는 바로크 오페라처럼 성악에 편향된 벨칸토 오페라를 극복하고, 독일의 바그너와 경쟁하며 오페라를 역사상 최고의 경지로 이끄는 저력을 발휘한다. 베르디와 동갑내기인 바그너(R.Wagner/1813-1883년)는 일생을 이탈리아 오페라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이는 음악극의 창시로 이어졌고, 음악극은 극과 음악이 조화를 이루는 종합예술이었다. 바그너의 음악극은 니벨룽의 반지에서 정점을 찍었고, 온 유럽을 풍미했다. 이는 오페라 종주국 이탈리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이때 이탈리아가 전략적으로 내세운 인물이 바로 푸치니(G.Puccini/1858-1924)다. 하지만 푸치니는 베르디를 계승하여 위기에 봉착한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구하는 임무만 수행하진 않았다. 그는 바그너까지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내공을 발휘하게 된다. 또한 푸치니의 상상력은 유럽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일본, 중국,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범세계주의적인 오페라를 만들어 냈다.
자유로운 영혼들이 만든 노래들이 무지한 정권의 칼질로 인해 하루 아침에 금지곡이 되던 시대가 있었다. 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노래들이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금지되었고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정권의 감시 아래 암울한 세월을 살기도 했다. 가수들 중에서는 노래말 자체보다 정권에 영합해 활동하지 않아 눈엣가시가 되어 제재 당한 가수들이 더 많았다. 지금의 중년 세대라면 누구나 어렸을 적 즐겨 부르던 노래가 갑자기 세간에서 사라졌던 황당한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박귀룡 씨가 지난 3월 8일 ‘키덜트 뮤지엄’에서 전시중인 금지곡들을 포스팅해 눈길을 끈다. 포스팅을 중심으로 올라온 금지곡 부른 가수들과 금지된 곡, 이유들을 잠깐 살펴보면 그 시대의 살벌했던 순간이 불현 듯 떠오른다. 1.들국화 : 그것만이 내 세상 / 창법 미숙과 가사전달 불량 2.김추자 : 거짓말이야 / 불신조장의 여지가 있음 3.손인호 : 비내리는 호남선 / 사회를 비판적으로 풍자한다. 4.이애리수 : 황성옛터 / 망해버린 왕조의 옛 성터를 일부러 찾아가 우는 이유가 뭐냐? 5.고복수 : 타향 / 일제에 반하고 애국심을 말살한다 6.김민기 : 늙은 군인의 노래 / 군인들의 사기를 저하한다. 7.신중현 : 아름다운 강산 / 유신정권 찬양을 위한 노래제작을 거부 이 밖에도 송창식의 ‘왜 불러’는 반항적이고 노래 창법이 저속하다. 혜은이의 ‘제3한강교’는 어떻게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할 수 있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는 여자 가슴에 왜 멍이 드느냐? 등의 이유로 된 서리를 맞았다. 특히 금지곡 제조기라 할 수 있었던 이장희는 ‘그건 너’ / 책임을 전가한다. 불꺼진 창 / 불꺼진 창에서 뭐한다고?, 한잔의 추억 / 술 마시는 것을 조장한다는 핑계 등으로 금지곡이 되었다. 무지한 독재자들이 예술을 군화발로 짓밟을 수 있다 여겼고 국민을 세뇌하는 도구로만 알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우리나라 가수들이 한류의 이름을 달고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는 세상이 되었다. 그때 억눌린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들의 노래를 불렀던 가수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그들이 마음껏 기개를 펼 수 있다는 생각에 콧날이 시큰해진다. 마침 키덜트 뮤지엄에서는 그때 금지돼 부르지 못했던 노래들이 LP판을 통해 마음껏 울려 나오는 모양이다. 세대가 공감되는 신개념 박물관에서 아들과 손자 손을 잡고 권력의 횡포와 상관없이 자신만의 감성과 열정으로 노래 불렀던 가수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들을 들어보면 어떨까?
계절 없이 푸른 솔잎들이 꽃샘추위에 실핏줄을 돋운다. 천년을 둘러쳐온 솔향기가 소나무 숲길 따라 봄을 재촉하고 있다. 자취 모를 곳에서 그대가 걸어 나온다. 자취 모를 곳에서 내가 마중을 한다. 한걸음 또 한걸음 디딜 때 마다 흔적 모르게 다가오고 사라지던 천년을 옭아맨다. 홀로 그립고 쓸쓸했던 자국들을 소나무 뿌리 깊은 기억으로 박아둔다. 꽃샘바람에 휘청거리며 능의 품안에 안기는 하루가 천년숨결로 아득하다. 원성왕릉은 원형봉토분으로 봉분의 직경 2183㎝, 능묘의 높이 750㎝, 호석 높이 107㎝, ⌜신라왕릉 전기탐사와 구조해석⌟ 이진락 박사논문 기록이다. 원성왕릉은 신라의 능묘 중 석조물이 완벽한 유적지로 손꼽힌다.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빛바래지 않고 늠름한 소나무의 기백이 우렁차다. 왕릉의 완비된 능묘 모습은 왕위계승 관계가 부자상속 또는 형제상속과 연관이 깊다. 혈족으로 이어지는 안정적인 정치상황일 경우에 한하여 많이 나타나고 있다. 유구한 세월이 흘렀건만 나이 들수록 점잖고 근엄한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과 마주한다. 머리에 쓴 관모엔 곤충형상 장식이 조각되어져 있다. 김태식은 “괘릉 관검석인상은 무인(武人), 관(冠) 장식 곤충은 벌”이라 해석했다. 이진락은 “매미날개(翼蟬) 모양의 소각(小角) 2개가 위쪽을 향해 달려있는 익선관(翼蟬冠⦁翼善冠) 매미장식 관모”라 피력했다. 중국 현지 왕능들을 순회한 심층 있는 답사와, 해박한 지식의 학문적 근거자료를 제시했다. 문인석 또는 신라인으로 알려진 관검석인상은 기존의 주장을 부정하고 중국 북방자치국인 위구르인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제도상의 문무(文武)를 살펴보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702~737)조 ‘원년 9월에 문무관(文武官)에게 관작 한 급씩을 올려 주었다’라는 기록을 읽었다. 관검석인상을 관찰해 보면 전면은 대수장포(大袖長疱) 도포차림새다. 긴 홀(笏)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있다. 통이 넓은 소매 속에 잡은 홀이 양쪽 다리 사이에 나타난다. 대석 앞쪽 신발이 드러나고 뒷면에는 양당개라는 찰갑을 착용하고 있다. 1992년 발표한 권영필 논고에, ‘이 석인상 얼굴 윤곽은 각진 사각형이고 짙은 눈썹을 도드라지게 조각했다. 이마와 눈자위를 턱지게 하였으며 오뚝한 코와 꽉 다문 입 사이에 팔자형의 수염을 얹고 있다는 점, 또 양 귀밑에서부터 턱 전체를 가지런히 빗겨진 턱수염이 상당한 볼륨으로 덮고 있다. 가늘고 긴 눈은 한국적이라 다소 친근감이 있지만 악센트를 주고 있는 터럭들은 이례적인 점. 터럭들이 이란계와 같은 곱슬곱슬한 것이 아니라 직선형인 점 등은 위구르인들의 인상과 직결되는 요소들이다. 아울러 용강동 석실고분 출토의 문관상이 이에 해당된다고 하며 그들은 위구르인이다’라는 것이다. 신라의 능묘에 신라인 신하들을 도열하지 않고, 외국인 모습을 조각하여 배치하였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다양하다. 김원룡은 ‘신라인들은 당의 능묘제도를 숙지하고 있어서 능묘 앞에 문무인석과 객사를 도열시킬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와 당과의 관계가 대등한 관계에 처해 있지 못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제도에 대한 욕구는 당연히 당나라 제도의 축소 또는 자숙의 형태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乙亥: 795)에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 한 달을 머물다 돌아갔다. 하루가 지난 뒤에 두 여자가 대궐에 찾아와 아뢰었다. “저희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에 사는 용(龍)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 우물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마리를,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임금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을 호국용으로 여기에 다시 머무르게 해 주십시오”하니 왕이 직접 하양관까지 말을 타고 달려가서 친히 연회를 베풀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우리나라 호국용을 몰래 잡아 도망쳤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극형에 처할 것이다” 그제야 하서국 사람들이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주니 각각 물속에서 한 길이나 뛰고 기뻐했다. 이에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함에 감복했다’ 【삼국유사】 ‘어느 날 왕이 황룡사의 중 지해(智海)를 대궐 안으로 청하여 화엄경을 50일 동안 외게 했다. 사미 묘정이 매양 금광정(金光井) 우물가에서 바릿대를 씻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에 떴다가는 다시 가라앉곤 하므로 사미는 늘 먹다 남은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희롱했다. 법석(法席)이 끝나려 할 무렵 사미 묘정은 자라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 지가 오랜데 너는 무엇으로 갚으려느냐?” 했다. 그런지 며칠 후에 자라는 조그만 구슬 한 개를 입에서 토하더니 묘정에게 주려는 것같이 하므로 묘정은 그 구슬을 얻어 허리띠 끝에 달아놓았다. 그 후로부터 대왕은 묘정을 보면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대궐에 맞아들여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때 잡간(匝干) 한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그도 묘정을 사랑해 같이 가기를 청하자 왕이 허락했다. 당나라 황제도 묘정을 매우 사랑했다. 승상과 좌우신하들도 존경하고 신뢰했다. 관상 보는 이가 황제께 “사미 관상이 길(吉)한 상이 아닌데,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보배로운 물건을 지녔을 것입니다” 황제가 사람을 시켜 몸을 살펴보니 허리띠 끝에 작은 구슬이 달려있었다. 황제가 말하기를 “여의주 네 개가 있던 것을 지난해 한 개를 잃어버렸는데 내 구슬이라고 했다” 묘정은 구슬을 갖게 된 연유를 말했다. 황제가 구슬을 잃은 날과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이 일치했다. 황제가 구슬을 빼앗아 두고 묘정을 돌려보냈다 그 뒤로 아무도 묘정을 사랑하지 않고 신뢰하지도 않았다’
봄은 때론 느닷없이 찾아옵니다. 그 봄이 채 무르익기 전 ‘봄’ 이라는 시어를 유난히 즐겨 썼던 한 시인이자 학자가 고인이 되었습니다. 영원으로 이어진 봄날, 먼 길을 떠난 그의 별세 소식은 다소 느닷없어 우리를 깊이 슬프게 했습니다. ‘삼십 사년 반 동안 학생들에게 문학과 삶을 이야기하고 바른 세상을 위해 주위와 이웃에 최선을 다했다’라고 담담히 토로했던 그는 동국대 경주캠퍼스 국어국문학과 이임수 명예교수입니다. 그의 부고 소식은 마지막 시집의 제목인 ‘봄날의 사진 한 장’처럼 이 스산한 세상에서 그리움으로 펄럭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말 자유로워지셨을까요? 그 많은 인연과 윤회도 내려놓으셨을까요? 종신토록 ‘문학은 무엇이고 삶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물음에 자신이 없었다는 이임수 교수. 이제 바람에 날리는 꽃 잎 하나로, ‘봄꽃들 지고 보리밭 고랑 사이로 흘러가는 바람처럼’ 편하게 거하고 계시겠지요. 그랬습니다. ‘거미와 귀뚜라미들을 다치지 않게 장갑 낀 손안에 잡아 창밖으로 내보냈다’는 그는 항상 다정한 말씨와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진정한 ‘학자’셨습니다. 명징한 정신의 소유자로 학문에 대한 집념과 근성은 우리시대 보기 드문 선비의 기상을 가진 사표로 손색없었지요. 지역민들은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기여한 바가 큰 분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지역민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이였습니다. 그는 지난 1983년부터 동국대 국문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는 것은 물론, 여러 학문적 업적과 함께 특히 향가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그의 경주에 대한 사랑과 향가에 대한 집요한 연구가 없었다면 신라향가의 문학적 이해는 요원했을 것입니다. 신라향가의 독보적 연구자였습니다. 그는 또 생전 졸업생들에게 ‘국문학과에 시 쓰고 소설 쓰고 문학하는 게 좋아서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니 졸업하고 각자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살다가 삶이 힘들면 언제든지 고향처럼 여기 찾아오너라. 밥 한 끼 사줄게’ 하셨다죠. 참스승이 귀한 시절 늘 다정다감한 ‘선생’이었습니다.
1970년 대부터 1990년대까지 수석(壽石)이 전국적인 붐을 탄 적 있었다. 전국의 명산대천에는 돌 줍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어지간한 수석 하나에 그때 당시 금액으로 몇 십 만원부터 몇 천 만원 나가는 돌이 수시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심지어 자연석만을 수석으로 인정하는데도 불구하고 몰래 돌의 일부를 가공해 수석이라고 판매하는 사례도 생겼다. 그런 변칙 수석이 횡행하면서 수석열기가 급격히 꺼졌고 수석의 가치도 하락했다. 그러나 수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돌의 가치와 상관없이 꾸준히 수석생활을 지속해 왔고 인터넷 발달과 더불어 동호인을 중심으로 각종 커뮤니티도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2010년대 들어 수석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기 시작해 동호인의 수에서는 이전의 전성기를 뛰어넘을 만큼 수석 열정이 넘쳐난다. 그에 따라 유튜브상에는 수석을 전문으로 채널을 운영하는 전문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전의 인터넷 카페를 비롯해 수석 밴드들도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의 원류이자 수도라 할 수 있는 경주는 돌에서도 다른 고장에 비해 특별한 돌이 나는 명석산지로 유명하다. 봉계부터 서천에 이르기까지 분포하는 ‘혹돌’, 안강의 평원석, 남산 주변의 옥석 등이 전국 수석가들의 관심대상이다. 이렇다 보니 경주에도 수석에 관심 가진 사람들이 많고 수십 년 이상 취미생활해 온 수석가들도 여러 곳에서 활동한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한 인터넷 수석동호회 카페인 ‘무찰수석’ 카페를 만들고 관리하고 있는 윤병숙 선생이다. 옥룡암 근처 경상북도 임업시험장 주변 갯마을길에 자리잡은 윤선생의 집은 우선 담장부터 눈에 띈다. 한눈에 봐도 좌대위에 얹어 귀하게 대접할 법한 귀한 수석들로 담을 쳐놓았기 때문. 담 위에는 더 눈에 띄는 돌들이 우뚝 우뚝 솟아나 있어 누가 봐도 수석 고수의 집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무찰수석 카페는 3월 9일 현재 8042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고 전체적으로 9만6000개 글이 개시된,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수석카페다. 무찰수석이 시작된 것은 인터넷 카페가 활성화되기 이전부터다. 처음 경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동호인들을 중심으로 시작해 전국 각지역의 동호인들이 참여하며 동호회 홈페이지를 활성화 시켰다. 그러다 네이버에서 카페가 만들어지면서 2001년 4월부로 자연스럽게 네이버 카페 체계로 전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무찰수석 카페는 수석의 공간, 수석 나눔의 공간, 수석여행, 수석 전시회, 수석 자료실, 무찰 쉼터, 지역별 동호인 연락방 등 큰 카테고리 속에 80여개 작은 카테고리가 세분화 돼 있어 회원들의 다양한 수석 욕수를 만족시키고 있다. 무찰카페가 인상적인 것은 스마트폰 보급과 함께 인터넷 카페문화가 내리막길을 걷거나 대부분 회원들이 밴드로 옮겨가는 와중에도 굳건히 회원들의 활동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평일 하루 평균 올라오는 개시물이 30개 내외고 하루 평균 방문자 수가 천여 명에 이른다. 이렇게 카페가 활성환 된 이유는 초보자부터 고수까지 다양한 수석가들이 활동하고 특히 고수들을 통해 돌에 대한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것은 물론 전국 각지의 탐석지가 공유되기 때문이다. 돌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주워온다고 전부 수석이 될 수 없으므로 명석 산지의 정보 없이는 움직여봐야 헛고생이라는 사실이 지금도 초보부터 경력 있는 수석가들이 무찰카페를 찾는 이유다. 오랜 기간 탐석활동해온 수석 고수들은 돌 사진만 보고도 그 돌이 어느 지방에서 나온 돌인지 알 정도여서 초보자들을 지도하고 이끄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해주는 것이 이 카페의 매력이다.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열성적인 회원들이 자신의 정보를 나누어주고 탐석한 돌을 올려 좋은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초보자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전성기 때보다는 활동이 상당히 줄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주기적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주역들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게 돌에 대한 열정과 관계있을 겁니다” 지금도 꽤 활동적인데 윤병숙 선생의 말을 빌리면 지금보다 훨씬 활성화 되었다고 하니 그때의 카페는 오히려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카페 이력을 찾아보면 카페 출범 이후 전국규모 혹은 각 광역단체별 합동탐석활동이 꾸준히 진행되어왔고 수석전시회 역시 전국 혹은 지역별로 해마다 열리는 등 활발한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동호인 출품 수석으로 이루어진 ‘달력 만들기 행사’도 2016년까지 지속되었다. 무찰카페가 수석카페인 만큼 개시물 대다수는 단연 전국에서 채집되는 돌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의 여러 지류, 동해안 몽돌 밭, 거제도를 비롯한 남해안, 백령도와 선유도 등 서해 도서와 해안, 평창, 포천 등 전국의 토중석 산지에서 캐낸 이름 있는 수석들이 매일 3~40점씩 전시된다. 보고만 있어도 기묘한 전국의 수석들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꼴이다. “카페를 만든 것은 전국의 동호인들이 마음 놓고 활동하고 수석 생활을 통해 힐링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것에서 작은 보람을 느낍니다” 윤병숙 선생은 수석의 묘미는 수석 그 자체의 탐석활동에도 물론 있지만 그것보다는 수석활동을 통해 전국의 아름다운 풍광과 경치를 누리며 자연 속을 거니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며 수석의 보람을 설명한다. -카페 통해 나눔활동도 전개, 30만 원 이상 되면 유니세프에 자동 송금. 목공방 뜨락 운영하며 자연과 함께 삶 영위 여기에 카페를 통해 또 하나 의미 있는 실천을 병행해온 것이 윤병숙 선생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카페출발과 함께 전국의 동호회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독거노인, 불우한 외국인 근로자 등 소외된 사람들에게 꾸준히 나눔활동을 해온 것. 수석카페답게 나눔과 봉사에 관심가진 수석가들이 자신의 돌을 ‘수석나눔방’에 올려 입찰을 붙여 기금을 조성하는 식이었다. 지금은 이전만 못해 직접적인 지원을 하는 대신 30만원이 차면 자동으로 유니세프에 후원금이 빠져나가도록 조치해 두고 있다. 다른 어지간한 동호회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데 무찰수석 카페가 자발적으로 이런 나눔활동을 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윤병숙 선생은 이런 활동이 가능하도록 실질적으로 카페 관리를 맡고 있는 운영진들에게 그 공을 돌린다. 윤병숙 선생은 최근 들어서는 수석활동보다 목공공방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편이다. ‘뜨락’이라 이름 붙인 목공방은 윤병숙 선생이 소일을 겸해 운영하는 창작공간이다. “수석이 자연이 만들어 놓은 것을 찾는 작업이듯이 목공은 거친 나무속에 숨은 아름다운 결과 문양을 찾는 작업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수석이나 목공이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지요. 다만 돌은 자연상태 그대로를 즐기지만 나무는 창작의 즐거움을 줍니다” 처음에는 수석을 위해 좌대를 깎고 수석 올리는 지판을 만들면서 목공예 작업을 시작했지만 작업하는 과정에서 목공예의 매력을 느껴 지금은 생활에 필요한 각종 목기와 가구까지 만드느라 오히려 목공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윤병숙 선생의 집 안쪽에는 꽤 넓은 목공방이 있고 각종 목공 기계와 연모들, 온갖 귀한 나무들이 즐비하다. 목공방 맞은 편에는 작은 규모의 전시장도 마련되어 있어 윤병숙 선생의 목공 작품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다. 한눈에 봐도 수석의 아름다운 문양처럼 나무판에 화려하게 새겨진 나뭇결과 문양에 눈이 즐겁다. 그런 한편 집 뒤 넓은 밭에는 감나와 소나무 복분자 나무 등을 가꾸며 전원생활의 맛을 즐긴다. 엉뚱하게도 자연이 주는 대로 거둔다는 생각에 농약을 치지 않아 넓은 감나무 밭에서 지난 해 고작 두 상자의 감을 수확했다고. 이렇듯 수석과 나무에 묻혀 사는 윤병숙 선생은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지만 정작 철학공부에 더 심취해 대학 졸업 후 한 때는 출가해 절에 들어간 적도 있을 만큼 관조적 삶을 추구하고 있으며 지금도 명상과 좌선을 통해 좀 더 바른 삶을 향해 묵묵히 정진 중이다. 경주시에서 공직자로 활동하는 윤병숙 선생은 자신의 닉네임인 ‘무찰’처럼 억지로 무언가를 꾸미지 않는 속에서 물과 모래가 돌을 씻어내고 바람과 햇볕이 나무를 키우듯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런 그가 만든 무찰수석 카페이기에 역시 모나지 않은 좋은 사람들이 어울려 물 흐르듯 자연을 탐닉하고 있지 않을까?
지난 달 경주 구 황남초 앞을 지나면서 깜짝 놀랐다. 학교 앞 넓은 부지가 대형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어서였다. 당시 시간이 토요일 오후 1시경. 겨울시즌인데다 코로나로 인해 외부 관광객 발걸음이 끊어진 상태였지만 대릉원 주차장 사거리에서 일차 교통체증을 경험했고 뒤이어 황남초등학교 앞 주차장에서 또 다시 주차장에 진입하려는 자동차들로 인해 거북이 운행을 해야 했다. 코로나이후 성수기를 상상하니 이 길로는 절대 차를 몰고 오면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본란을 통해 서울의 곳곳에서 자동차 흐름을 차단하고 걷기를 권장함으로써 얻는 경제적 이익과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교통 흐름이 좋아진다는 기사를 자주 내보냈다. 동대문로, 광화문로 등에 차도를 줄이고 인도를 늘린 사실, 인사동 휴일 차없는 거리 등의 기사는 첨성대와 대릉원, 지금 말한 구 황남초 앞길의 고질적 정체를 해소하기 위한 기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울의 인사동은 황남초 앞 대형 주차장과 완전히 대조적이다. 주말 그 북적이는 인사동에는 희한하게 주차장이 딱 한 곳뿐이다. 서인사 공영주차장이 그것인데 고작해야 30여대의 차를 주차할 정도의 손바닥만 한 주차장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공연히 차 가지고 오면 고생하니 아예 차 가지고 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인사 공영주차장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사동에서 전시회나 행사하는 실무차량들이 어쩔 수 없이 이용하는 주차장으로 인식된 지 오래다. 관광객이나 시민들은 지하철로 인사동에 와 편안히 즐기는 문화가 안착됐다. 경주시는 이점을 반드시 눈여겨봐야 한다. 서울시가 휴일 관광객이나 시민이 많이 몰리는 도로의 차로를 오히려 줄이는 것은 느리게 걷는 속에서 문화도 만끽하고 소비활동도 할 수 있다는 철저한 계산 때문이다. 심지어 그 길이 좁다는 이유로 회피하도록 하는 심리적 요인까지 계산했다. 대형 주차장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차가 몰리고 당연하게 심각한 교통체증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을 걷은 사람들은 매연과 불편에 시달릴 것이고 소비는 고사하고 짜증에 시달리다 나쁜 이미지를 안은 채 경주를 떠날 것이다. 문제는 시민이다. 관광객은 그렇게 잠시 있다고 떠나도 된다지만 그 교통체증에 시달릴 경주시민은 무슨 죄인가? 구 황남초 앞 대형주차장은 교통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관광이고 교통이고 이처럼 주먹구구가 되기도 힘들 것이다. 인사동의 작은 주차장을 답사하고 그 이유를 반드시 새겨 보기 바란다.
그윽한 전통에 작가 고유의 감각이 더해져 세상에 하나뿐인 예술작품이 만들어진다. 성인들의 글귀는 칼자루를 만나 마음을 울린다. 최두헌 작가<인물사진>의 두 번째 개인전 ‘篆篆兢兢, 2021’이 오는 23일부터 28일까지 경주예술의전당 알천미술관 갤러리 달에서 펼쳐진다. 최두헌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서(篆書)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며 삶의 순간마다 마주하는 오롯한 열정을 50여점의 전각 작품으로 풀어낸다. 작품의 대부분은 마음의 근본을 바로 보고자 하는 성인들의 수행 의지가 반영된 문구들로 채워진다. 당나라 선승 남악회양(677-744)이 좌선을 하는 마조도일(709-788)에게 무엇을 그리 열심히 하느냐고 물었다. 마조는 부처가 되기 위함이라고 하자 남악은 벽돌을 바위에 대고 갈기 시작했다. 마조가 무엇을 하려 벽돌을 가느냐고 여쭈니 거울을 만든다고 말한다. 이에 벽돌이 어떻게 거울이 되냐고 하니 남악은 좌선만 한다고 어찌 부처가 되겠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소가 수레를 끌고 가다 멈춘다면 수레를 때려야 하는지 소를 때려야 하는지에 비유했다. 마조선사와 그의 스승 남악 회양 선사와의 일화가 담긴 작품 ‘마전성경(磨磚成鏡)’은 마조어록에 수록된 내용 중 하나로 형식보다 실천을 중시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논어에 ‘채신음수 락재기중(採薪陰水 樂在基中)’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의 제자 안회는 한 소쿠리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곳에 거처하면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았다. 작품 ‘락재기중’은 인생의 즐거움은 어디에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승들의 법어와 성현들의 말씀을 돌에 새기며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점검해 나가는 작가. 오랜 기간 서예를 해왔던 작가는 글을 쓰는 가운데 전각에 매진했고 불교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문학과 선어록에 관심을 두게 됐다는 그다. 작가는 늘 새로운 도전으로 전각에 있어 전통과 현대성을 융합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그는 “첫 번째 개인전이 전각의 회화적 요소를 바탕으로 봉니(封泥)와 원주문인(元朱文印)이 주를 이뤘다면 이번 전시는 진한(秦漢) 시대의 전극을 기본으로 전각의 기초에 충실해지려 했다. 앞으로도 전서와 전각에 계속 긍긍하고자 한다”면서 “그런 의미로 제목에 2021이라는 시간적 의미를 부연해 과정을 스스로 점검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돌 위에 새겨진 문구들을 통해 코로나19로 힘든 시기, 많은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치유가 되길 바란다”면서 “글씨든 전각이든 서화 전각예술의 대중화와 특히 전각의 일상적 공유를 위해 여전히 긍긍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두헌 작가는 동국대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를, 부산대학교 한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호는 역시, 시현이며, 당호는 여약재다. 대한민국미술대전, 경기도전, 경북도전, 경인미전, 전국휘호대회 초대작가이자 한국서예가협회, 한국전각협회 회원이며, 현재 통도사 성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으로 있으며, 전각공방 석가를 운영하고 있다.
장기화된 코로나19 상황을 건강하게 이겨내려면 면역력 관리와 건강검진이 필요하다. -장기화된 코로나19 상황 속 면역력 2019년 12월 시작된 ‘코로나19’와의 전쟁 속 작은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코로나19 예방접종을 시작했으며, 증상 개선 효과를 보이는 코로나19 치료제 또한 개발되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19에 최적화된 치료제는 ‘아직’ 없는 상태이며, 국내의 백신 접종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장’의 공동면역을 기대할 수 없어 안심하기엔 이르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걱정도 좋지 않다. 코로나19 감염의 경우 특별한 치료제 없이 완치 사례가 나오고 있다. 이는 기존의 증세 완화를 위한 대증요법 치료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가 면역’의 힘 덕분에 완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노인 감염 군에서 사망이 집중된다는 점, 당뇨병 등 기저 질환자의 사망 비율이 높고, 세계의 저명 저널인 LANCET에서 ‘코로나 감염자 중 당뇨병 환자가 20% 수준으로 가장 많았다’는 점을 예시로 들었다는 것을 근거로 보았을 때, 면역 시스템만 ‘정상 작동’하면 경증 내지 무증상으로 완치될 수 있다. 코로나19에 감염되지 않으려면 우선 개인위생 관리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코로나19에 노출되어도 면역력이 잘 유지된다면 이 위험한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도 있다. -면역력을 강화하는 생활습관 면역은 생체 외부인자에 대하여 방어하는 현상 전반을 말한다. 우리 몸을 둘러싼 피부, 코, 기관지, 소화기관의 점막, 위산 등이 우리 몸을 외부로부터 단단히 방어해준다. 특히 무수히 많은 병원균을 일차적으로 80%가량 막아주는 것이 점막 면역으로 꾸준한 점막 면역 강화가 필요하다. 면역력을 올리기 위해서는 우선 개인위생을 철저히 해야 한다.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에는 손 씻기, 마스크 끼기를 더욱 열심히 하도록 한다.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을 막을 뿐 아니라 신체의 전체적인 면역도 지켜준다. 또한 앞서 설명한 ‘점막 면역’을 올리는 방법은 수분 섭취이다. 바이러스가 입과 호흡기를 통해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 15분마다, 하루 2L 이상 수분 섭취할 것을 권장한다. 단, 심장·신장 질환자는 전문의 상담이 필요하다. 이 외에도 우리 몸의 면역 세포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주요 단백질, 면역과 상관관계가 높은 비타민 D, 그리고 신체 면역력 강화 및 방어력을 더해주는 비타민 C를 음식으로 섭취하는 것이 좋다. 또한 운동을 하면 혈액순환을 촉진해 몸의 전반적인 세포 능력을 높이고 동시에 면역 세포 기능도 강화할 수 있다. 실제 근육량이 많이 감소하면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세균 감염에 취약해지기도 한다. 그 외에 7시간 이상의 숙면, 림프절 마사지, 소리 내며 웃기 등 면역력을 강화하는 생활습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코로나19 유행 시기의 현명한 건강검진 건강검진의 궁극적인 목적은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지키는 것이다. 요즘 ‘코로나 블루’, ‘확찐자’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등 우리의 건강은 위협받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건강 상태를 생각하면 체계적인 점검과 관리가 필요하지만, 2020년 건강검진 수검 인원은 오히려 급감했다. 전염성이 강한 코로나19 유행 시기에는 건강검진을 연기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코로나19가 장기화된 상황 속에서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다. 이에 정부에서는 2020년도의 국가건강검진을 못 받은 국민을 대상으로 올해 2021년 6월까지 국가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기간을 연장했다. 출입관리를 엄격하게 하는 검진센터를 이용하고, 상대적으로 한산한 1~4월 검진 비수기를 이용해서 건강검진을 하는 것이 더 안전하게 건강검진을 받는 방법이겠다. 또한 코로나19로 인해 마스크를 벗고 호흡을 세게 부는 폐 기능 검사는 호흡기 질환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생략할 수도 있다. 막연하게 건강검진을 미루기보다 현명한 방법을 선택하여 나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지켜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자료제공 : 한국건강관리협회 경상북도지부 (대구북부건강검진센터) 글 : 최준호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한국건강관리협회 건강소식2021년 2월호 발췌
최태호<인물사진> 수필집 ‘허수아비’가 지난달 도서출판 문학관에서 발간했다. 허수아비는 현직에서 물러난 작가를 빗댄 표현이다. 작가의 삶이 오롯이 녹아있는 수필집 ‘허수아비’는 전 세대 비슷한 경험과 기억을 가진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기 충분하다. 수필집은 △내 사랑 얼레지꽃 △아빠라 불러주던 아이들 △추억 속으로 날아간 새 △그건 오해였다 △다시 찾은 3번 △빈자리 △허수아비 등 총 7파트로 나눠 64편의 이야기를 담았다. 특히 최돌문 작가의 사진과 이정혜 작가의 문인화 작품, 그리고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외손녀의 허수아비 그림이 어우러져 수필의 감동을 더해주고 있다. 최태호 수필가는 학창 시절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라는 금아 피천득 선생의 글을 읽고 수필에 대한 동경이 시작됐지만, 작가에게 정작 수필은 노년의 꿈이 됐다. “수필과 함께한 제 삶의 후반부는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삶이 지루하거나 방황할 틈이 없었죠. 수필은 내 삶 속을 흐르는 맑은 개울물 같아 가끔 그 물가에 앉아 세파에 오염된 마음을 씻고, 옛 추억을 반추하며 그리움 속으로 드나들기도 했습니다” 지천명을 넘어선 어느 가을, 최태호 수필가가 늦은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오직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었다. 자신이 쓴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남기는 것이 바로 그것. “수필집 발간은 제 삶의 가장 보람된 일이요, 마지막 작업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제멋대로 생긴 못난 글들이지만, 길고 멀고 날이 저물어 더는 버려둘 수가 없었죠. 오랜 기간 방치해둔 글이라 한곳에 묶는 데 어려움도 많았지만, 한자리에 모아놓고 용서를 빌어봅니다” 경북 경주 출신인 최태호 수필가는 고교 교사를 역임했다. 1998년 월간문예사조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2011년 경주문협상 수상, 2014년 제3회 경주문학상을 받았다. 경주문인협회 사무국장 및 부지부장, 경주문예대학 동창회장, 행단문학회 초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신라문학대상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정미연 작가<인물사진>가 오는 24일부터 명동성당 갤러리 1898에서 ‘현존’이란 주제로 개인전을 개최한다. 서울대교구홍보위원회 후원하는 이번 전시에서 정미연 작가는 지난해 출간된 ‘그림으로 보는 복음 묵상’에 실린 성화작품과 ‘나 자신과 함께하는 십자가의 길’ 등 회화 200여점과 조각 16점을 선보인다. ‘그림으로 보는 복음 묵상’은 글과 그림으로 신약 성경 전체를 풀어낸 서적으로 최근 몇 년간 서울주보를 시작으로 대구, 전주, 원, 제주 등 여러 교구의 주보 표지에 실렸던 정 작가의 작품 200여점과 허영업 신부의 묵상 글을 통해 신앙고백으로서의 예술을 담은 책이다. 정미연 작가는 “코로나로 인해 나약해져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은 힘의 원천이다. 그것을 성찰하기 위해 천지창조를 그리게 됐다”면서 “하느님의 모든 창조사업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핵심인 것을 다시 한번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나 자신과 함께하는 십자가의 길은 비겁하고 나약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예수님과 화해하는 과정을 담았다”고 덧붙였다. 정미연 화백의 작업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춰 그려진 성화다.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십자가의 길을 조각으로 표현한 14개의 성상과 ‘천지창조’의 7일을 콘테를 이용해 작업한 작품들이 함께 전시될 예정이다. 이주헌 미술 평론가는 “정미연 작가는 신약성서의 주요 내용이 연재를 통해 그만의 감성과 스타일로 형상화됐다. 그 바탕에는 그녀의 기도와 명상, 고백이 깔려 있다. 그림으로 구사되는 그 신앙의 언어가 주보를 보는 다양한 연령과 지역, 삶의 배경을 가진 미사 참례자들에게 제대로 다가가도록,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감화까지 느낄 수 있도록 그녀는 많은 고민과 실험을 해왔다”면서 “나아가 지금껏 대부분의 성화가 서양 미술가들에 의해 그려진 서양적 감성의 산물인 까닭에 우리 고유의 미학이 우러나도록, 특히 의상이나 비례 같은 부분에서 우리다운 감성이 살아나도록 갖가지 시도를 해온 작가다”고 말했다. 한 아름 쌓아놓은 가을의 과일들처럼 다채롭고 풍성한 모자이크의 축제가 될 ‘현존’. 예술로서 예술이 아닌 신앙고백으로서 예술이 왜 소중하고 의미 있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이번 전시는 4월 5일까지 명동성당 갤러리 1898에서 만나볼 수 있다.
신라금관이 세상에 빛을 본지 어느덧 100여년, 우리 민족의 커다란 자부심이 됐지만 여전히 신라 금관의 자생설과 북방 전래설이 나뉘고 있다. 또 신라 금관의 상징을 두고도 ‘식물론’과 ‘사슴뿔’ 등 의견이 분분하다. 이에 지난 40년간 국내외 발굴현장과 유적지를 답사하며 문화재를 연구해온 상명대 김대환 석좌교수가 삼국시대의 실증유물을 증거로 ‘신라 금관의 기원과 상징, 실용 여부에 대해 실증 분석,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김대환 교수가 금관의 용도와 상징을 재정립한 ‘한국의 금관’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이 책은 앞서 저자가 발표한 논문 ‘삼국시대 금관의 재조명’(동아세아 역사문화논총, 2014)의 확장판이다. 김대환 교수는 금관의 상징에 대해 삼국시대 용에 주목했다. 고대사회 용이 나타내는 상징성은 매우 크다. 국가를 수호하고 제왕의 권력을 상징한다. 그래서 왕실의 건축물이나 제왕의 장신구, 의복, 무기, 마구 등 기물에는 용의 형상이 새겨져 있으며, 용안, 용상, 용좌, 용포 등의 용어도 만들어질 정도다. 그만큼 절대 권력자는 자신이 용처럼 보이길 원했다. 김 교수는 “용의 눈, 코, 입, 귀, 수염은 제왕의 신체로써 모두 대신할 수 있지만, 가장 상징적인 용의 뿔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몸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의 금관은 인간 스스로 갖추지 못한 용의 뿔을 형상화한 것이며, 이에 대한 근거는 신라 유물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라 금관의 세움장식(Y형, 出형)은 용의 뿔을 평면에서 바라본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주장에 앞서 김 교수는 먼저 신라시대 용 뿔의 형태를 설명했다. 그는 “조선시대 용의 뿔은 귀의 뒤쪽에서 나란히 두 개가 뻗어 나와 한 쌍을 이루지만,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중반까지 용의 뿔은 양미간의 중심부나 이마 위쪽에서 한 뿌리로 나와서 두세 갈래로 벌어지거나 처음부터 두세 갈래로 갈라져서 나오는 외뿔인 단각수(單角獸)”라면서 “실제 현존하는 금관을 통해 당대에 형상화 시킨 용 뿔의 생김새를 확인 할 수 있으며, 유물자료에서 입체적인 용, 용의 측면, 용의 정면을 면밀히 살펴보면 신라 금관 세움 장식의 용의 뿔을 상징화시킨 것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 세계 고대왕국에서 제작돼 현재까지 전해지는 금관은 대략 100여점에 불과하다. 그중에 현재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금관은 고구려 금관 1점과 가야 금관 2점, 신라 금관 7점으로 모두 10점의 금관이 있다. 외국에도 고대 그리스 미케네, 미노아, 마케도니아와 에트루리아의 금관, 히타이트 금관, 스키타이 금관, 고대 메소포타미아 우르 왕국의 금관,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금관, 중남미 콜롬비아의 고대 유적에서 발견된 마야, 잉카 금관 그리고 이집트 금관 등 세계 각지에 분포돼 있다. 고대에 제작된 금관은 전 세계에 분포돼 있지만 현존하는 고대 금관 중에 우리나라 금관의 조형미와 예술성이 가장 뛰어나다. ‘금관의 종주국’이란 별명이 붙을 만한 세계적인 작품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아직 발굴되지 않은 신라 고분에 부장돼 있을 금관과 그동안 발굴된 금관, 금동관, 동관까지 포함하면 금관은 한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문화재로 자리 잡고도 남는다. 김 교수는 “그동안 금관의 종주국에 걸맞은 금관의 연구는 매우 미진했다. 더구나 우리나라 금관을 제일 먼저 발굴하고 접한 일제 어용학자들의 눈높이를 벗어나지 못해 그동안 금관의 기원과 용도, 상징적 의미가 왜곡돼왔다”면서 “현재까지도 이에 대응해 자주적이고 객관적으로 금관의 기원과 상징, 의미의 논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한편 삼국시대의 실증유물을 증거로 신라 금관의 기원과 상징, 실용 여부에 대해 실증 분석된 ‘한국의 금관’은 고구려 금관의 실체를 규명해 그동안 ‘고구려에는 금관이 없다’는 동북공정의 논리를 반박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 등이 제시돼 있다. 저자 김대환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문화재보존학을 전공했으며, 지난 15년간 대학교 박물관과 국공립박물관에 신라금동불상, 고려청동탑, 고려청자, 고려도기, 조선백자, 고려와전, 벼루, 출토복식 등 5000여점의 유물을 무상기증 했다. 현재 상명대 석과교수, 문화재평론가, 두양문화재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는 ‘박물관에선 볼 수 없는 문화재 1, 2(2014, 2017)’, 문화재 칼럼 ‘김대환의 문향(교수신문, 2015~2018)’, ‘고구려 태화 9년명 비천문 금동광배의 신례(2016)’, ‘삼국시대 금관의 재조명(동아세아 역사문화논총, 2014)’ 등이 있다.
본편을 시작하기에 앞서 동국대에서 향가를 평생 연구하시다가 얼마 전 타계하신 고 이임수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왜국에 액전왕(額田王)이란 여인이 있었다. 미인이자 천재가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대의 일본인에게 역사상 닮고 싶은 인물을 물었을 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액전왕(額田王)이라고 한다. 그녀는 다수의 만엽가를 남기고 있으나 그녀의 신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 다만 제명천황(재위 655-661) 시대인 660년 경에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661년 그녀는 제명천황을 수행하고 있었다. 제명천황의 둘째 아들로 대해인(大海人)이 있었다. 그녀의 첫 남자가 둘째 아들 대해인이었다. 그와의 사이에 딸을 낳았다. 딸의 이름은 십시(十市)라고 하였다. 당시의 모든 정치적 실권은 대해인의 형이었던 중대형(中大兄)이 가지고 있었다. 액전왕의 남자, 대해인의 운명도 중대형(中大兄)에게 달려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중대형(中大兄)과 따끈따끈한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랬다. 그녀의 희망을 향가에 담았다. 9번가다. 莫囂圓隣之大相七兄爪湯氣吾瀨子之射立爲兼五可新何本 중대형님과 야단스럽게 떠들면서 원만하게 지내야지. 중대형님을 돕고 지키는 끓는 내 여울 속 남자. 겸하여 말하는데 이것 말고 새로 무엇을 근본으로 할 것인가. 이 때 역사가 요동을 쳤다. 황태자 중대형이 출병시킨 대규모의 병력이 백제의 백촌강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액전왕이 수행하던 제명천황이 사망하였고, 중대형 황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천지(天智)천황이다. 그는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수도를 오미(近江)로 옮겼다. 요즈음의 자유연애와 같았을까, 액전왕은 이 무렵 남자를 바꾸었다. 대해인을 버리고 천지천황의 여인으로 신분을 세탁했다. 오미(近江)로의 천도를 둘러싸고 민심이 갈라지자 천지천황은 천도 다음 해인 668년 포생야(蒲生野)라는 곳에서 신하들과 함께 대규모 사냥행사를 개최하였다. 액전왕의 옛 남자 대해인도 이 날의 행사에 참석하였다. 사냥터에서 비밀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밀애의 노래가 이 사실을 말한다. 20번가는 액전왕의 작품이다. 그녀는 형수이자 천황의 부인이 된 자신을 대해인이 무엄하게도 유혹하는 장면을 노래로 만들어 놓았다. 밀애는 동생 대해인이 형의 여자를 숲속으로 몰래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茜草指武良前野逝標野行野守者不見哉君之袖布流 꼭두서니 염색한 붉은 옷을 입은 그가 나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풀숲을 가리킨다. 그가 앞에서 들을 달려간다. 따라오라고 표시를 하며 들을 지나간다. 들을 지키는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할 수없이 그를 따라가 옷소매를 풀숲에 폈다. 액전왕은 들지기(野守)라도 있다면 핑계를 대고 따라가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마저 없으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어 야단이 났다고 한다. 따라가 옷소매를 땅에 깔았고, 두 남녀는 비밀리 통정을 하였다. 꺼졌던 숯불이 다시 타올랐다. 숨기기 마련인 자신의 밀애 사실을 만엽향가로 기록해 둔 점이 미스터리다. 또 지극히 사적인 이 문건이 유출된 경위도 궁금하다. 이어 나오는 21번가는 두 사람의 밀통을 더 확고히 한다. 21번가는 정부 대해인의 작품이다. 紫草能尒保敝類 妹乎尒苦久有者人嬬故尒吾戀 目八方 그녀의 자줏빛 옷을 풀숲에 감추었다. 사리에 어두운 여인(액전왕)이 말하기를 나를 못 잊어 괴로워 한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그녀가 다른 사람(天智천황)의 여자가 된 지 오래이다. 나도 너를 그리워했다. 이 노래는 간부의 독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액전왕이 그간 만나지 못해 괴롭다고 한 귓속말까지 기록하여 놓았다. 간부도 액전왕이 그리웠다고 한다. 간부와 간녀가 숲속에서 비밀리 주고 받은 말이 생생하고 노골적이다. 이러한 두 남녀는 밀통은 물론 역적음모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사냥 행사 3년 후 천지천황이 사망을 앞두었다. 천황이 동생 대해인을 제쳐두고 아들 대우(大友)를 후계자로 삼을 방침을 굳혔다. 이때 액전왕은 자신의 딸을 천지천황의 아들 대우(大友)에게 출가시키고 있었다. 모녀가 부자의 여자였던 것이다. 이윽고 천지천황이 사망하자 대우황자가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이어받아 집권하게 되었다. 대해인은 천황이 된 조카의 동정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비밀 정보가 들어왔다. 이어받은 조카가 숙부인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대해인은 모반을 결심하였다. 액전왕의 딸 십시황녀가 난이 발생하기 전에 남편 대우(大友)측의 동정을 빼내 어머니의 정부 대해인에게 통보하였다는 유력한 기록(부상략기, 扶桑略記)이 남아있다. 정보를 입수한 대해인이 기민하게 행동에 나서 난을 일으킨 것이다. 한달만에 도망할 곳이 없어진 대우가 목을 매어 자결하였고, 장군들이 그의 머리를 베어 대해인에게 바침으로써 난이 끝났다. 모녀는 비밀리 정보를 제공하였고, 이를 받은 대해인은 모반을 일으켜 성공하였다. 모반 성공 3년 후 딸 십시황녀가 이세신궁을 찾았다. 그 당시 만들어진 22번가에는 임신의 난에서 액전왕 모녀의 공적이 암시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河上乃湯都磐村二草武左受常丹毛冀名常處女煮手 다른 사람들은 포생야에서 사냥을 끝내고 강 위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있어도, 헤어지기 싫어 머뭇거리던 사람이 포생야에 둘(대해인과 액전왕)이 있었다. 풀숲에서 무사(대해인)께서 곁에 있어 주셨다. 붉은 깃발에 기록해 주신 공적. 이세(伊勢) 신궁에 머무르는 처녀가 손바닥을 치며 축원해 주고 있다. 위 세 작품은 ‘임신의 난’을 전후로 한 모녀의 이야기이다. 세 작품의 배치는 고의적임이 분명하고, 배치의 의도는 선명하다. 모녀가 임신의 난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혹시 이세신궁에 관광가실 기회가 있으면 향가 속에 남겨놓은 모녀의 족적을 기억해주시기 바란다. >>다음에 계속
신라공고(교장 서동욱) 졸업생 김연규(2021년 졸업) 군이 국제기능올림픽대회 한국위원회가 주최한 국가대표선발전 자동차정비 직종에 최종 선발됐다. 김 군은 신라공고 학창 시절 3년 동안 성실하게 기술을 갈고 닦아 2019년 경상북도 기능경기대회 자동차 정비 직종부문 동메달을 수상했다. 또한 부산광역시에서 개최한 전국기능경기대회 장려상, 2020년에는 경북도 기능경기대회 은메달, 전북도에서 개최한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은메달을 수상하는 등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이후 2021년 1월 25일부터 2월 26일까지 2차에 걸친 2022년 상하이 국제기능올림픽 자동차 정비 국가대표로 최종 선발됐다. 김 군은 “신라공고 입학 때부터 꿈꾸었던 목표를 이루게 되어 매우 기쁘다. 그동안 부모님같이 자신을 이끌어 주며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도록 늘 곁에서 지켜봐 주신 서상일 지도교사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신라공고는 1999년부터 지금까지 자동차, 기계, 전기 등의 분야에서 19명의 국가대표를 배출하며 지역사회를 너머 전국적으로 기능 기술 분야의 최고 학교로 인정받고 있다.
전정일 경주세무서장은 지난 10일 어린이 교통사고 예방 및 어린이 보호 최우선 문화 정착을 위한 ‘어린이 교통안전 릴레이 챌린지’에 동참했다. <사진> 이 챌린지는 행정안전부 주관 어린이 교통안전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참여자가 교통안전 슬로건을 SNS 등에 공유하고 다음 참여자를 지목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챌린지 슬로건인 ‘1단 멈춤, 2쪽 저쪽, 3초 동안, 4고 예방’은 어린이 교통사고 중 가장 많이 발생하는 횡단 중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행동 요령을 기억하기 쉽게 숫자에 맞춰 표현한 것으로 지난해 행정안전부의 국민 공모를 통해 선정됐다. 정창환 경주소방서장으로부터 지명을 받아 챌린지에 참여한 전정일 경주세무서장은 “경주세무서도 이번 챌린지를 통해 전 국민과 함께 어린이 교통안전 슬로건을 기억하고 실천하겠다”며 릴레이 챌린지에 참여했다. 전정일 세무서장은 다음 참여자로 대구지법 경주지원 조정위원회 김종원 회장, 대구지검 경주지청 범죄피해자 지원센터 이상춘 이사장, 세종대 경영학부 윤호정 교수를 지목했다.
(사)경주박물관회·경주박물관대학(총장 이광오)은 지난 6일 국립경주박물관 강당에서 기초반 46기, 연구반 45기 개강식을 가졌다. 국립경주박물관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1994년 경주박물관회를 발족해 오늘에 이르렀다. 개강식에 이어 영월 창령사터에서 발굴된 오백 나한상을 직접 기획 전시한 최선주 국립경주박물관장의 특강이 있었다. 나한(羅漢)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성자를 뜻한다. 부처의 제자 500명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흔히 ‘오백나한’이라 한다. 나한상은 일반적인 불교조각상보다는 소박하고 편안한 편이다. 그럼에도 전시에 나온 창령사터 나한들은 특별했다. 미소 띤 나한, 고개 들어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나한, 수줍어하는 나한, 합장하고 있는 나한, 바위 뒤에 숨어 살짝 고개만 내민 나한, 슬픈 표정의 나한, 입술을 꽉 다문 나한, 생각에 잠긴 나한 등 영상에 보여진 표정은 모두 달랐지만 하나같이 우리의 얼굴이었다. 창령사터 나한상들은 얼굴과 상체가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하체는 생략됐다. 최 관장은 “박물관의 특별전시와 함께 진행되는 연계 프로그램은 관람객의 주체적이고 능동족인 참여를 유도하는데 목적이 있다”며 “관람객들이 전시작품과 소통할 수 있는 이야기거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발견되는 배움의 즐거움, 문화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고취하는데 기여한다”고 말했다. 첫 강의에 참여한 김모 수강생은 “경주박물관대학에서 진행될 강의와 답사에 큰 기대를 가진다. 마치고 특별기획 한국고대유리전시회를 꼭 관람할 것이다. 매번 강의를 올 때마다 강의 전후 시간을 잘 활용해 박물관 곳곳을 탐방할 것입니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7일에는 경주박물관대학 46기 첫 답사가 84명이 참석한 가운데 손수협 지도교수의 해설로 시작됐다. 매주 토요일은 박물관에서 고고학·고대사·미술사 이해를 영상 강의로 이론을 습득하고 일요일은 일정에 따라 왕경지역을 시작으로 경주 금강산, 남산, 토함산, 월성 황용사, 암곡, 울산, 동해지역 등으로 24회 차의 답사를 진행한다. 박물관회 관계자는 “박물관의 특별전 등 많은 사람들의 관심으로 방문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방역수칙을 철저하게 준수해 코로나19 확산방지 및 예방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다”고 전했다.
경주소방서(서장 정창환)는 소방시설공사 분리발주 제도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행정지도를 강화한다고 밝혔다. 소방시설공사업법 개정(시행 2020.9.10.)으로 국민의 안전과 직결된 소방시설 공사를 건설·전기·기계 등 다른 업종의 공사와 분리해 발주하도록 의무화한 것으로, 소방 공사가 건설 분야의 일부로 종속된 하도급 병폐를 개선하고 소방 공정에 적정 공사금액 투입을 가능하게 만들어 소방시설 공사의 품질을 향상하기 위해 개정됐다. 개정 전에는 건축주 등이 소방시설공사를 건설공사에 묶어 발주하고 전문소방업체가 하도급을 받는 방식으로 저가 공사 수주가 부실 공사로 이어져 화재안전에 심각한 우려가 제기돼 왔다. 소방시설공사의 분리발주로 하도급에 따른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고 품질높은 시공과 하자보수 절차 간소화가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이를 위반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어 소방시설공사 분리발주 제도의 정착을 위한 지도·감독과 홍보를 강화할 계획이다. 이에 경주소방서는 6월까지 소방시설공사 분리발주 특별단속반을 운영한다. 중점 단속사항은 ▲소방시설공사를 다른 업종의 공사와 분리하지 아니하고 도급하는 행위 ▲분리발주한 것처럼 도급계약을 이중 또는 허위로 작성해 제출하는 행위 ▲분리발주 받은 소방공사업자의 직접 시공 여부 등이다. 단속을 통해 관계자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적발된 위반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조치할 계획이다. 단 공사의 성질이나 기술 관리상 분리발주가 곤란한 때에는 일괄 발주할 수 있는데 ▲연면적 1000제곱미터 이하인 특정소방대상물에 비상경보설비를 설치하는 공사 ▲재난 발생으로 긴급하게 착공해야 하는 공사 ▲국방·국가안보 등 기밀을 유지해야 하는 공사 ▲분리발주가 곤란하다고 소방청장이 인정한 문화재 수리와 재개발·재건축 등의 공사가 이에 해당된다. 경주소방서 홈페이지에서 ‘소방시설 품질시공 위반 신고센터’도 연중 운영한다. 신고가 접수되어 위반사항이 발견되면 적의 조치할 계획이며, 분리 발주 위반 시 300만원의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정창환 소방서장은 “지속적인 홍보와 특별단속반 운영을 통해 소방시설공사 분리발주 제도를 안정적으로 정착시켜 소방시설 공사의 품질을 향상하는 등 국민 안전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