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황오·인왕동 일부 지역이 포합되어 있는 쪽샘마을은 4~5세기께 거대한 고분군으로 확인됐다. 지난 18일 경주시가 잊혀져 가는 쪽샘마을 주민들의 생활사를 남기기 위해 실시하고 있는 생활조사 연구를 맡은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가 밝힌 중간보고서에 따르면 23만5천㎡인 이 마을은 4~5세기에 이르러 거대한 고분군으로 조성됐고 통일신라시대까지 원형이 보존되었으나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고분군과 민가가 일부에 국한 지역이나마 혼재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 후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서서히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신라 왕경의 성립과 쪽샘지구=조사에 따르면 5세기말 시작된 경주분지내의 저습지개발은 왕경으로서의 기능을 가능케 한 대단위의 토목사업이었다. 대형고분인 적석목곽분과 소형의 적석목곽묘가 조성된 고분군지역을 둘러싸고 형성된 저습지를 개발하기 시작한 5세기 말부터 주거공간으로 변모한 경주분지는 이후 신라왕경으로 발전을 거듭했다고 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쪽샘지구로 불리는 황오·황남·인왕동 일부지역은 4~5세기 고분군 수 만기가 집단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됐고 고분군 위에는 당시의 건축물이 들어서지 않은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935년까지 신라인들은 고분군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또 월성로 서편의 구 교육청일대에서 출토된 건물지와 와당 그리고 수습된 봉성사 명문의 납석제 뚜껑의 존재는 사찰의 존재를 사찰의 존재를 가능케 하고 고분군과 사찰의 관련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고려시대 경주읍성과 남고루의 축조=고려 현종 3년(1012년)에 경주읍성과 함께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남고루는 북천에서부터 전랑지 서편을 지나 남쪽으로 650m 가량 이어지다가 다시 남서쪽으로 꺾어서 미추왕릉 앞까지 약 2.2km로 이어지는 성벽으로 외부는 냇돌과 가공석을 혼재하면서 쌓아 올렸으며 넓이 4m 가량의 내부는 흙으로 채운 것이다. 이로 인해 쪽샘마을의 절반 가량은 남고루내에 포함되어 마을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으나 남고루 밖은 상대적으로 마을의 형성이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남고루 내부에 형성된 마을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황오동으로 발전하게 됐다. ▶조선후기의 쪽샘지구와 팔우정=보고서는 19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양정기(高陽亭記)’에 의하면 ‘반월성 북편에 월성최씨들이 세를 이어 오랫 살았으니 마을의 이름은 황오동이다’라고 하는 모두의 표현이 있음과 조선말기에 이르러 최국준 팔형제의 우의를 기리기 위해 쪽샘마을의 동북단에 건립된 팔우정의 존재 역시 이 일대에 최씨일족을 중심으로 하는 세거지가 오랫동안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조선 정조 22년(1798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집경전구기도(集慶殿舊基圖)를 참고할 경우 민가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며 여전히 고분군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쪽샘마을=1900년대에 제작된 지도를 검토해보면 쪽샘지역은 대부분 지역은 민가가 형성되지 않은 채 고분군과 전답형태로 남아 있으나 현 쪽샘길을 중심으로 좌우로 가촌(街村)을 형성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완전하게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북쪽의 태종로와 서편의 계림로는 구체화되어 분명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으나 오늘날 쪽샘마을의 동쪽 경계선을 구획 짓는 월성로는 확인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노동동 경주시청의 서편도로인 현 중앙로를 이용하여 울산방면으로 이동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98호소분(황남대총)과 90호고분 사이로 안 도로인 현 계림로를 이용하였음을 알수 있고 경주읍성 동남지역에서 현 계림로를 따라 첨성대와 계림으로 이동하려고 할 경우 현 쪽샘길을 이용하여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소로였던 쪽샘길을 중심으로 좌우에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해방이후의 쪽샘마을=본격적인 쪽샘마을의 성립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며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 황룡사지구 민가철거 및 덕동댐으로 인한 암곡동 일대의 철거민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면서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시기 황오동은 오늘날처럼 몇몇 구획으로 나눠지기 이전에 해당되며 쪽샘지구 또는 쪽샘마을이라는 개념은 성립되기 이전에 해당한다. 1962년 현 팔우정로타리 중심부에 있던 황오리 4호분과 동편에 인접하여 있던 5호분이 홍사준과 김정기씨에 의해 발굴되면서 현 월성로가 새롭게 개설되었고 당시 현 팔우정로타리에서 선덕여중고 남서편의 사거리를 경유 인왕파출소에 이르는 월성로가 새롭게 열리면서 황오동은 동서로 양분돼 오늘에 이르렀다. 그 결과 쪽샘길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쪽샘마을이 광의의 개념으로 변하면서 오늘날과 같이 월성로 서편의 마을 전체를 일컫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팔우정 해장국골목의 형성=해방이후 전개된 가장 중요한 변화는 현 경주역을 중심으로 그 남쪽에 시외버스 터미널과 고속버스 터미널이 들어섰다. 당시 경주시 교통중심지가 원화로 동편의 경주역과 팔우정 주면인 현 대명약국 위치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운영되고 있어 팔우정 주변지역들에는 음식점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팔우정로타리의 동북편에는 한남고속버스터미널이 북서편 빈터에 동양고속버스터미널이 1871년경부터 1974년까지 운영되면서 해장국골목은 활기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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