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은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나서 일제의 침략과 탄압에 맞선 거국적 항일민족운동이었다. 3·1만세운동은 한말의 의병전쟁과 계몽운동, 그리고 1910년대 비밀결사적인 국권회복운동에서 축적되어 온 민족 역량의 표출이며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전환점이라는데 있다. 자료에 따르면 3·1만세운동은 약 1년간에 걸쳐 국내·외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됐으며 3월과 5월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각 지방에서는 대부분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5~10일 간격으로 되풀이 되었다. 경주지역에서의 만세시위는 서울의 시위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작되었으며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투사들이 광복회 사건과 기타 사건으로 투옥돼 어려움을 겪었지만 3월13일 장날을 맞아 성동시장 부근에서 만세시위를 했으며 5월초에도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두 번의 만세시위가 더 있었다. 3월13일 성동시장 부근에서 열린 만세시위에서는 주동자로 체포된 사람은 김철, 박문홍, 김성길, 최성렬, 최수창, 박영희, 박봉록, 김억근 등이며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 당했다. 이후에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기회를 보다가 5월초에 두 차례의 만세시위가 성동시장 부근에서 있었는데 이때에 1천여명에 달하는 군중이 참가했다고 한다. 당시 경주의 3·1운동은 대구 등지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중앙과 직접 연결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유는 만족대표 33인 중 최린, 백용성, 손병희 등 3인이 경주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린은 경주가 고향이었으며 손병희는 천도교의 최고 책임자로 천도교의 발상지인 경주에 잦은 왕래가 있었고 백용성은 사찰관계일로 경주를 자주 왕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운동 직전에 이들 3인이 경주에 내려와 김판기라는 사람의 집 뒷골방에 모여 독립운동에 대한 논의를 했다는 증언도 있다. 증언자의 집에서 최린의 친필 기미독립서가 여러장 나왔으며 증언자 본인이 직접 백용성의 심부름으로 독립선언서를 가가호호 돌렸다고 한다. 손병희의 친필이라고 하는 기미독립선언서도 역시 소장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위 3인은 모두 경주에서 내려왔다는 것이 신빙성이 있으며 또한 이들이 김판기의 집에서 독립운동을 논의하면서 경주 지방에서의 운동 전개에 대한 것도 계획했음이 확실시 된다’ 이 3·1만세운동을 전후로 해 경주지역 인사들의 국권회복운동은 많았다. 1915년 대구안일암에서 시회를 표방하고 조직 활동을 하다가 검거된 최준, 박상진, 편동현 등이 참가한 안일암사건. 박상진 우재룡 등을 중심으로 조직 활동을 하다가 1917년 검거된 광복단 사건, 우이견(일명 일명 김재주), 우재룡이 주동으로 이르켰다가 검거된 수비단사건. 상해임정에서 활동하다 죽은 손보창. 유림단군자금모집사건으로 검거된 정수기. 1922년 의용단 사건 및 군자금모집으로 검거된 허달. 이해에 군정서자금모집사건으로 검거된 박호진(박상진의 동생). 독립공채모집 및 화정회의독립청원서사건으로 검거된 최갑덕(일명 현순)이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을 했다. 다음은 당시 경주에서 불려졌던 것으로 알려진 ‘독립가’ 이 독립가는 경주지방에서 3·1운동 당시 민중들이 불렀던 노래로서 1979년 김동철 당시 동국대 강사(한국사)가 발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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