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구불하게 패여 있는 길 하나 보인다
가고 있는 길 어딘지 모른 채
우주의 한가운데를 열심히 기어가고 있다
홈이 파인 둥근 길 접어놓아도
언제 벌린 사람의 입 속으로
들어갈지 알 수 없는
잦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잎사귀같이
불안에 잠기는 붉은 흙 위의 길에서
신발을 신어보기도 전에
저만치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날려가 버리고 마는
풀무치같이 가벼운 목숨을 놓아 버린다
참으로 묘한 삶이 여기 있다. 탐스런 복숭아 열매 속에서도 길을 내며 미래를 향해 가는 벌레가 있으니 말이다. 인간세상만이 길을 내고 터널을 뚫어 시원하게 통과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 벌레에게도 길이 있는 것이다.
이런 시를 두고 무릎을 쳐 볼 일 아닌가 싶다. 미세한 것에 또는 미물에게도 눈부신 생(生)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세계야말로 우리가 깜빡 잊고 지나칠 뻔하지 않았던가.
이 땅에 시인이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시인의 사명이라면 좀 뭣하지만 시인이 하는 일은 관찰자적 입장에서 보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사 속에서도 막무가내로 끌려가는 무의미한 존재가 아닌, 뭔가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인간만이 누리는 것이 아닌 것에 대해 애정을 쏟고, 거기서 새로운 발견을 제시해 주는 역할일 것이다.
``우주의 한가운데`` 즉, 둥근 복숭아 열매의 향기로운 살 속을 비집고 살아가는 벌레도 인간과 다름없는 그들만의 공유된 영토가 있는 것이다. 탄복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