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릉계의 소나무 숲에는 신라 제55대 경애왕릉이 있다. ‘후백제 견훤이 쳐들어 오늘 줄도 모르고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신라 멸망을 자초했다’는 경애왕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이 진실일까?
역사란 인류, 사회, 문화 등의 지나온 일 또는 기록을 말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사실과 다르게 기록될 수도 있다.
수나라의 중국통일에 일등공신이었던 진왕 광은 아버지(수문제)와 형(태자 용)을 죽이고 수문제가 되었지만, 개황율령을 합리적으로 수정하고, 통제거(회수-황하), 강남하(회수-양자강), 영제거(황하-북경)등 대운하 완성하여 중국경제(수송의 편리함)에 큰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여 나라를 멸명시킨 대폭군으로 역사기록 ‘수서’는 전한다.
그런데 역시 고구려 원정에 실패했고, 스스로 형(태자 건성)을 죽이고 아버지(당고조)를 감금하고 황제가 된 당태종(이세민)은 중국역사상 제일의 명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왜 그럴까? 수나라 역사기록인 ‘수서’는 당태종의 명을 받은 위징이 편찬했다. 이세민(태종)과 위징은 수나라에 반란하여 당나라를 세웠으니 그 명분으로 수양제에게 모든 역사적 책임을 뒤짚어 씌웠다고 본다.
조선창업의 일등공신인 이 방원이 아버지(이성계)를 감금하고 형제를 죽이고 임금자리(태종)에 올랐으나 역사적 기록에는 성군으로 묘사된 것도 중국의 예와 비슷하다.
갑신년(924) 8월에 임금이 된 경애왕은 9월에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고 음력10월엔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를 사면했다. 을유(925)년 10월엔 고울부(현 영천)장군 능문이 태조 왕건에게 투항했으나 왕건이 돌려보내는 등 이미 신라의 국력은 위축된 상태였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태조왕건의 사위가 되어 개경에서 살다 죽었다. 경순왕의 사촌(백부 억렴의 딸)과 왕건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현종의 아버지(안종)였다. 고려왕조는 신라왕실의 외손에 의해 이어졌고 경순왕은 태조왕건의 사위이자 사촌처남이므로 고려시대 만들어진 삼국사기 기록에 경순왕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호의적이다. 대신 왕건의 숙적이었던 견훤을 폭군으로 보았고 신라멸망의 책임으로 경애왕을 희생시켜 왜곡기록하지 않았나 싶다.
을유(925)년 11월에 견훤은 그의 조카 진호를 고려에 볼모로 보냈지만 5개월 뒤에 원인 모르게 죽게 된다. 이에 견훤은 고려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죽였다고 생각하고 고려를 공격하였고 그 과정에 고려를 돕는 신라는 견훤의 미움을 받았고 포석정까지 쳐들어와서 경애왕이 죽게 된다.
만약 고려에 볼모로 간 진호가 죽지만 않았어도 견훤이 신라의 수도까지 쳐들어오는 비극은 발생하지도 않았다고 본다. 볼모(진호)의 죽음에 대해 견훤에게 명쾌한 설명을 못한 고려왕실의 실수로 견훤이 화가 낫고, 견훤과 왕건의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왕건편을 돕던 경애왕은 견훤의 미움을 받아 억울하게 희생당하였다고 본다.
경애왕릉을 찾아 신라멸망에 관한 역사적 기록과 그 이면에 숨어있는 역사적 진실(사실)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고 고민하다 보면 한층 더 의미있는 문화재 산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