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부끄러워라!
신 평
(대구가톨릭대 교수, 변호사, 법학박사)
본업이 교수라 대학이 직장이다. 정문을 들어서면서 전에 느끼지 못하던 서먹함과 계면쩍음이 몸을 감싸고 돈다. 법정대학 현관에 서 있는 학생들이 인사를 해도 허부적거리며 연구실로 올라가기 바쁘다. 강의를 하러 들어가서도 이 학생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격지심이 솟아올라 괴롭다. 지금의 내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나 꾸며보았다.
갑돌씨는 오래간만에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했다. 아마 결혼식 이후로 처음인 듯하다. 친구의 소개로 사업을 시작했다. 얼마 안되는 전답을 모두 팔아 마련한 돈으로 사무실도 구하고 운영자금도 마련해두었다.
사무실에 나가니 떡하니 버티고 있는 사장의자가 보기 좋았다. 출근길에 아이들에게도 한껏 힘을 주어 “아빠 다녀온다.”라고 가슴을 젖히며 호기롭게 말했다. 아이들은 자랑스런 아버지를 두었다는 행복감에 젖어 그를 배웅했다. “아유 저것들에게 이제서야 애비 행세를 하네.”라고 속으로 말하였으나, 아내와 애들에게 지금껏 무능한 가장인 자신이 해온 소위가 미안하기 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행복한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몇 사람이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당신이 갑돌씨요?”라고 소리쳤다. 심상찮은 기색에 “그런데요?”라고 의자에서 일어설까 말까 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대답했다. 그들은 다짜고짜 자신들의 돈을 돌려달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고함 속에 나오는 그들의 말을 들으니, 갑돌씨에게 사업을 소개한 친구가 갑돌씨가 금토란 알토란처럼 마련해둔 사업운영자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돈도 그 사업을 미끼로 사기쳐 달아났음을 알 수 있었다.
소주잔을 거푸 걸치니 정신이 아득했다. 힘없이 집으로 발길을 향하려니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아! 아내하고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할까?” 그의 심중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 흉악한 친구 이야기를 한들 사정이 만분의 일도 좋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는 걸음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막막하기도 하려니와 그의 입에서는 저절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이고 부끄러워라, 부끄러워.
나는 학생들에게 인생은 품앗이라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일이 생겨 남이 도와달라고 하면 손을 내어주는 것이 도리라고 가르쳤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활발한 사회참여는 그래도 남보다 더 배운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현실정치는 경원시했다. 그러다 슬쩍 현실정치에 발을 담구었다. 자기합리화를 위한 변명도 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으로는 제자들이 내 인격을 믿어줄 것으로 확신했다. 이 행위가 그들에게 개인적인 출세나 욕망달성을 위한 것으로 비쳐지지 않으리라고 애써 자위했다. 정치참여를 통해 얻어지는 힘을 진정코 이 사회를 위하여, 더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행사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한 흉악한 놈이 이 모든 일을 그르쳤다. 그는 내가 보기에는 미쳤지 않으면 인간쓰레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양아치라고 부르나 내가 그에게 당한 일을 떠올리면 도저히 우리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이는 인간말종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오랜 비정상적 생활을 거치며 미쳐버렸기 때문에 그런 일을 태연스레 저지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 놈은 그 놈이고, 그 놈의 간교한 술책에 완전히 케이오당한 내 처지는 어찌하랴. 학생들에게 힘주어 말한 모든 것들이 백면서생의 어리석은 잠꼬대로밖에는 끝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앞으로 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무슨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겠는가? 이 처절한 실패자가 말이다. 아이고 부끄러워라, 정말 부끄럽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