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이후 1천 여년간 경주 공공기관으로의 중심적 기능을 감당했던 동경관(객사)이 남은 건물을 수리해 전통문화학습관으로 태어났다. 현재 경주시 동부동에 있는 이 동경관은 객사로 불렸는데 학계에서는 경주 객사가 정확히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객사는 사신이 오가며 유숙하는 곳으로 이용되었는데 경주의 경우 일본과 내왕하는 요충지에 있었기 때문에 사신행렬이 잦았으며 이들을 맞아 연회를 베풀고 위로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공무로 지나가던 관원이 묵었고 일반 사람들은 투숙할 수 없는 공공기관이었다. 조철제씨(51·경주고교사)는 경주객사는 고려 충렬왕 경신년(1320)에 화재로 객사의 대청 등 71간이 소실되었다는 최고의 기록이 있으며 그 후 중수하였다가 명종 7년(1552)에 다시 대형 화재가 발생해 의풍루와 대청 등 100여간이 불에 탔다고 밝혔다. 이 때 신라 때부터 전해오던 큰 청동화로가 불에 탔는데 그 무게만도 무려 325근15냥이었으며 얼마간 건물이 남아 있다가 임란 때 전화로 다시 폐허가 되었다고 전했다. 조씨는 1602년에 정청을 다시 짓고 1725년경에 중수하였고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786년에 부윤 김이용이 부임하여 지은 것이며 그는 이전의 제도에 따라 북쪽으로 겹집을 내면서 16개의 돌기둥을 세워 규모를 확장해 지었다고 했다. 구한말에 이르러 읍성의 변화에 따라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으며 1907년에 객사 대청과 동·서헌의 일부를 구조 변경하여 공립경주보통학교의 교사(校舍)로 사용하였고 1922년에 경주고적보존회에서 신라 때 유물 등을 수집 정리하여 전시 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 후 1952년에 경주교육청을 신축한다는 명목으로 객사의 대청과 동헌은 철거되었고 다행히 서헌 15간만이 철거되지 않고 본래 자리에서 동헌쪽으로 옮겨 지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철제씨는 “경주의 중심적 기능을 담당했던 객사의 주변 환경을 정비해 전주 등 다른 지역의 객사처럼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며 “다행히 이번에 경주시와 경주문화원이 헐리고 남은 서헌 건물을 수리하여 문화 교육의 장소로 개관한 것은 매우 시기 적절한 일이다”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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