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강의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가 TV를 통해서 ‘대통령 탄핵’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일개 국민의 한 사람인 내가 높으신 분들의 일에 섯불리 이러쿵 저러쿵 훈수를 둘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 무거운 마음을 싣고 대학 문을 나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남산 냉골로 향했다. 삼릉을 지나 300여 미터쯤 올랐더니 머리없는 석불좌상 부처님이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켰고, 북쪽을 바라보니 관세음보살입상이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띠고 나를 반겼다. 조금 야속한 기분이 들었다.
천년이상 남산 정기를 받아가며 우리 인간사를 다 내려다 보아왔으면, 오늘의 ‘탄핵정국에 대한 해법의 실마리’에 관해 단 한마디 설법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저렇게 변함없이 웃을 줄 밖에 모르는 부처님의 야속함을 뒤로하고 100여 미터쯤 계곡을 더 올라가 선각6존불 앞의 넓은 바위 방석위에 앉아 깊은 상념에 들어갔다. 남산 계 곡 중 가장 많은 불상 유적이 몰려있는 냉골.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자주 찾는 곳은 이 선각6존불이다. 윤경렬 선생님은 이 곳을 냉골 제2절터라 하셨다.
안타깝게도 신라인들은 조각품은 많이 남겼으나 그림은 거의 남기지 않아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천마총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를 비롯한 몇몇 문화유산을 통해서 신라시대 그림에 대한 단편적인 부분 맛이라도 볼 수가 있다. 이 남산 냉골 선각육존불은 조각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불상그림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 선각마애불이다.
서쪽 바위(높이 4미터, 너비 3.58미터)와 동쪽 바위(높이 4미터, 너비 7.27미터)에 아미타삼존불과 석가삼존불이 각각 새겨진 돌로 만든 큰 병풍 그림을 연상시킨다. 남산의 몇몇 선각불상 중 단연 돋보이는 불상이라고 생각된다. 인도에서 중국을 거친 불교를 한국과 일본이 전래받았으나, 우리나라 특히 신라는 화강암이 많아 돌부처님(石佛)을 많이 남겼고, 일본은 나무로 만든 부처님(木佛)을 많이 남겼다고 배웠다. 지난번 경주박물관대학에서 실시된 일본문화유적 답사시 교토 약사사에 있는 한 일본 스님의 “일본의 입장에서 불교문화유산에 관한한 중국은 아버님이고 한국은 형님의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는 참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직도 나의 귓가를 맴돈다. 그 스님은 일본은 중국과 한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목조건축과 목불상 분야에선 아주 독특한 문화를 꽃피워 왔다는 이야기도 빼지 않았었다. 그래! 비슷한 시기에 중국을 거쳐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일본은 목불상을 많이 만들고 신라는 돌(화강암)이 많아 주로 석불을 많이 만들었나 보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문화재 초보자들은 일본은 나무로 만든 목불은 많아도 우리 남산과 같이 바위에 부처를 새긴 마애석불은 거의 없을것이라는 상식을 가지고 일종의 야릇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나무로 불상을 조각하기는 쉽지만, 단단한 화강암에 부처님을 조각하기란 아주 높은 조각 기술의 난이도가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어리석은 편견은 지난 1월 경주박물관대학 일본문화답사시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4박5일간의 일정 중 마지막 날 저녁에 우연히 오사카 우메다 전철역 지하상가의 서점에서 구입한 ‘일본의 석불 200선’이란 책을 통해 ‘일본에도 석불이 많다’는 나로선 제법 큰 그러나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책에 나온 20O개의 석불상 중 130개가 나라, 교토, 오사까 부근의 긴끼(近畿)지방에 몰려 있었다. 특히 선각마애석불 중 가장 우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가사오끼야마(笠置山) 미륵보살마애불(彌勒菩薩磨崖佛) 사진을 보면 꼭 경주남산 냉골의 선각육존불 기법과 유사함에 큰 충격을 준다. 오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여원인으로 화려한 보관과 영락을 갖추고 연화좌대 위에 살포시 앉아있는 이 선각미륵마애불은 통일신라말이나 고려초에 상당하는 일본 헤이안(平安)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경주 남산 선각육존불과 그 조각기법이 너무나 비슷해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이 불상은 일본불교의 주류였던 밀교의 미륵불로 알려져 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혼란의 역사기엔 미륵불이 성행하였다. 기독교에서의 구원자(메시아)나 불교에서의 미륵불은 어쩌면 어지럽고 혼란한 현생을 살아가는 서민에겐 당연한 바램이 아닐까?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이 혼란한 탄핵정국의 묘수풀이를 위해서 수 천리 떨어진 일본 교토 가사오끼야마(笠置山)의 미륵보살마애불 부처님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은 소박한 소망을 안고 냉골 선각육존불에서의 상념을 마치고 산을 내려왔다. “일본에도 석불상이 많다” 특히 남산 냉골 선각육존불 조각가의 손길이 전해진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일본 교토 가사오끼야마 미륵보살마애불.
기회가 되면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일본석불과 신라석불의 닮은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