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여긴다. 그래서 자중자애(自重自愛)라는 말이 예로부터 있었다.
사람은 어디가든 자기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자기도취, 자기모순 또는 자만을 뜻하기도 하는 나르시즘은 곧 잘 성숙치 못한 인격 또는 그런 정신적 상황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으로는 나르시스트라고 해야한다. 성인으로 추앙되는 사람들 말고 자기애(自己愛)를 갖지 않은 인간, 그것에 초연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인간 삶의 현실이란 어쩌면 모두 자기애에 빠진 나르시스트들의 투쟁과 갈등 인 듯하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나 아닌 남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남을 소중하게 여길 줄 모르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귀하면 남도 소중하고, 남이 귀하면 나도 소중하다.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남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자기가 낳은 자녀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바치고 희생해 가면서도 오히려 부족함을 느낀다.
사랑스럽고, 하고싶고, 즐거운 일은 아무리 많이 해도 권태로움이나 짜증, 심지어는 피곤함도 잊게 한다. 귀여운 자녀의 뒷치닥거리를 하는 어머니의 수고는 행복한 수고이며, 평생을 되풀이해도 조금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나르시시즘이란 말은 자기애(自己愛)라는 말인데 자기애는 결코 악덕이 아니다. 이 말의 유래는 지나가는 사람이 우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반하여 자기와 같은 이름의 꽃인 나르키소스, 즉 수선화(水仙花)가 된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와 연관지어, 독일의 정신과 의사 네테가 만든 말이다. 자기의 육체를 이성의 육체를 보듯하고, 또는 스스로 애무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예컨데 한 여성이 거울 앞에 오랫동안 서서 자기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황홀하게 바라보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나르시시즘이다. 그러나 이 말이 널리 알려진 것은 프로이트가 이를 정신 분석의 용어로서 도입한 뒤부터이다. 그에 의하면 자기의 육체, 자아, 자기의 정신적 특징이 리비도이다. 즉 자기 자신에게 리비도(성본능)가 쏠려 있는 상태이다. 리비도의 대상이 되는 것, 즉 자기 자신에게 리비도가 쏠려 있는 상태라서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옛부터 잘된 것은 자기 탓이고, 못된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리는 풍조 속에서 생활해 왔다. 남을 나처럼만 귀중하게 여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은 때때로 덧없이 흘러간 세월을 반성하며 정리의 시간을 갖는 동물 중 만물의 영장이다. 반성은 되풀이하여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한 마음의 매듭이다. 정월은 본격적으로 추위가 시작되는 때다.
그리고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노루 꼬리만큼 남아 바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우리 속담엔 ‘섣달은 둘이라도 시원치 않다.’고 말했다. 농가월령가는 이맘때를 “大雪 冬至 절기로다/ 바람불고 서리치고/ 눈오고 얼음언다”고 읊었다. 역시 빙화(氷花)처럼 얼음붙은 달을 묘사하고 있다.
한 해를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보낸 것 같아서 아쉽다. 늦게나마 모든 것 모든 잘못은 “내 탓이오”라는 스티커를 자동차에 붙이고 다니며 사회 신뢰 회복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은 정말로 “빛이요 소금이 되고자”하는 노력의 일단이라고 단연코 말할 수 있다. “당신 때문에”의 “탓”타령이 “당신 덕분에”로 바뀌어 가는 사회가 된다면 세상은 한결 살 맛나고 훈훈해 질 것이며 당신도 나만큼 소중한 분이라고 생각하면 참 좋은 관계가 이루어 질 것이다. 서로를 위하여 축배를 들고 잘되도록 축원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우리의 생활은 더 넉넉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