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달 착륙과 케네디대통령의 결의 인류가 처음으로 달에 내려선 날 미국과 소련이 펼친 월면 도달 경쟁 아폴로 계획`을 중심으로 우주 진출을 노린 미국과 소련의 개발 경쟁을 알아본다. ?원생암 (原生巖)이라고 이름붙여졌다. 이어지는 16호의 비행사도 이제까지 아무도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없는 고지로 탐사의 손길을 뻗어, 케리 평원이 주변 지역에 비하여 5~10배의 자기를 띠고 있다는 것을 알아 냈다. 이것은 달이 예전에 는 지금보다도 빨리 회전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되고 있다. 또 데카르트 고지에서 가 지고 온 암석에서는 방사능이 검출되었다. 1972년 12월, 마침내 마지막으로 가장 긴 월면 착륙 비행이 된 아폴로 17호가 달을 향해 출발하였 다. 사넌과 슈미트 비행사는 ‘맑음(晴)의 바다’의 타우루스 리트로 지역주변에서 22시간에 걸쳐 선외 활동을 전개하였다. 슈미트는 아폴로 비행사 중에서 유일한 지질학자이다. 그는 16호가 가지고 온 것보다 1억 년 이상이 나 오래 된 현무암을 발견하고, 더욱이 40억 년 이전의 암석도 발견하였다. 또 크레이터의 가장자리 에서 발견된 오렌지 색깔의 토양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토양은 약 20만 년 전의 화산 폭발 로 산화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측되며, 이제까지 알려진 가장 새로운 달의 지질학상의 사건이 다. 이로써 세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 주고, 20세기 인류의 우주 진출에 강력한 컨센서스 (consensus), 즉 합의를 가져다 준 아폴로 계획은 조용히 막을 내렸다. 인류의 우주를 향한 진출은 계속된다 미?소의 지나친 월면 도달 경쟁은 양국에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지만, 우주 개발을 발전시키는 데는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69년의 사고로 소련이 우주 진출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 ‘인간의 우주 장기체재’라는 목 표를 향하여 전략적 전환을 꾀한 것이다. 1971년에 우주 스테이션 ‘살류트’를 발사하였고, 그 성 과는 1986년의 ‘미르’로 이어져 갔다. 아폴로 이후, 미국의 우주 계획은 침체되었다. 포스트 아폴로 계획으로서 발표된 장대한 우주 기지 계획과 유인 화성 비행 계획도, 아폴로와 같은 시기에 치열하게 전개된 베트남 전쟁으로 피폐해진 미국 국민들의 흥미를 끌지 못하였다. 우주 예산을 삭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미국 국민이 꿈을 잃지 않도록 한 프로젝트로서 제출된 우주 계획이 ‘재사용 가능한 우주 수송 시스템’, 즉 현재의 스페이스 셔틀(우주 왕복선)이었다. 그러나 계획의 진행이 늦어져 아폴로의 종료와 왕복선의 발진 사이를 메우는 다른 계획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떠오른 것이 미국 최초의 우주 스테이션 ‘스카이 랩(skylab)’이다. 중지된 아폴로의 상단 로켓을 이용하여 계획된 스카이 랩으로, 미국은 인간의 우주 생활에 대한 많은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1975년의 아폴로·소유즈 두 우주선의 도킹이라는 쇼를 끝으로, 1981년의 우주 왕복선 발진 까지 미국의 유인 비행은 중단되었다. Newton Korea 7월 호에서 기사 제공자: 김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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