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則天武后) 야망”을 일깨워 준 전(傳) 진덕여왕릉을 찾아서
2004년 2월 27일 정오. 경주신문 김헌덕 사장과 함께 현곡면 오류리에 있는 신라 성골의 마지막 왕인 전(傳) 진덕여왕(신라28대왕)릉을 찾았다. 첨성대, 분황사, 황룡사 구층탑과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機三事) 등으로 선덕여왕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졌고, 사천왕사지 부근인 낭산의 선덕여왕릉에는 문화재 답사자들의 발길이 끊어질 날이 없다. 그러나 사촌인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여왕이 된 뒤 밖으로는 김춘추 등을 당나라에 보내 적극적인 외교술을 발휘하고, 안으로는 김유신 등 맹장들로 하여금 고구려군와 백제군을 잘 견제케하여 훗날 삼국통일의 큰 주춧돌을 다진 진덕여왕에 대해선 일반인들의 관심도가 낮은 편이다. 지름 14.4미터, 높이4미터의 원형봉토분 둘레에는 판석으로 병풍모양의 호석이 돌려졌고, 호석의 면석사이 탱석에는 12지신상이 약하게 새겨져 있다. 전(傳)선덕여왕(27대왕)릉, 전(傳) 태종무열왕(29대왕)릉과 전(傳) 신문왕릉(31대왕) 및 전(傳) 성덕왕(33대왕)릉 등과의 외관상 비교로는 미술사적 연대의 불연속등으로 인하여 이 능을 진덕여왕릉으로 보기는 어려워 그냥 ‘오류리능’으로 부르는 학자들도 있다. 왕릉의 진위여부는 제쳐두고 필자는 전(傳) 진덕여왕릉을 찾아 능 주위를 몇 바퀴나 돌아보면서 깊은 상념에 잠겨 보았다. 신라왕릉중 호석에 십이지신상이 처음으로 새겨진 릉이라는 점에서 미술사학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릉이다. 아마 이 능은 십이지신 환조상이 호석 둘레에 단순히 놓여진 전(傳) 성덕왕릉 보다는 후대에 조성된 것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각설하고 서두에 던진 화두 “측천무후의 야망의 씨앗”으로 가보자! 알다시피 신라는 진덕여왕 2년에 당태종에게 사신으로 보낸 김춘추를 통해 중국 황실의 예복을 받아들였고, 진덕여왕 즉위 4년(당 고종) 때부터 처음으로 중국의 영휘(永徽)란 연호(年號)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춘추가 당나라의 국학(國學)의 석존(釋尊)과 강론(講論)을 참관하는 등 중국의 황실행정의 깊숙한 정보를 많이 배우고 익히는 등 활발한 대당외교를 벌였다. 이 점이 중요하다. 진덕여왕시절 신라는 당나라 황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므로 신라가 당나라를 아는만큼 당나라 황실 또한 신라 왕실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았다는 것이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으로 이어지는 20 여년 동안 역대 어느 왕 못지않게 착실하게 성장하는 신라왕조를 바라보며 “대망(大望)을 불태운 여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중국 유일무이(唯一無二)의 여제(女帝) 측천무후(則天武后)”였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즉(則)은 “즉(곧)”과 “칙(법칙,본받다)”으로 발음된다. 그러나 “법칙,본받다”의 뜻일 경우 본래 음은 “측”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선 속음인 “칙”이 표준음으로 사용된다. 어찌되었던 중국의 여제 측천무후를 칭할 때는 즉(則)을 측으로 읽는다. 측천무후(624-705)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당 태종의 후궁으로 황실에 들어갔으나 성격이 거칠어 태종의 사랑을 받지못하여 자식을 한 명도 놓지 못하다가 649년에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중국 황실의 법도에 따라 감업사(感業寺)라는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태종)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후궁 무측천을 몰래 사랑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태종의 아들이자 태자였던 이치(李治)였다. 태종의 뒤를 이은 당 고종은 650년에 아버지 1년 제삿날 분향차 감업사를 찾았다가 산사에서 쓸쓸하게 지내는 무측천(武則天)을 보고 옛정에 사로잡혀 그만 사랑을 나누고 황실의 법도의 속박을 벗어던지고 그녀를 궁궐로 데리고 들어간다. 28세에 다시 황제의 후궁이 된 무측천은 뛰어난 지략과 음모(황후가 되기위해 자신이 낳은 친 딸을 자기 손으로 목졸라 죽이고 고종의 황후 왕씨에게 죄를 뒤집어 씌움)로 고종의 총애를 받던 소속비와 황후 왕씨를 차례로 몰아내고 654년에 드디어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무측천은 비록 심성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었다. 그녀는 일찍이 농업발전, 조세경감, 언론확대 등 비교적 완비된 치국정책이 포함된 ‘건언12사(建言十二事)’를 건의하여 고종으로 하여금 시행케 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무측천은 자신의 권력야망을 위해 방해가 되는 자신의 친아들까지도 독살하는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다가 고종이 사망한 뒤 중종과 예종을 차례대로 폐하고 690년에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미리 준비해 둔 낙양으로 천도를 하였다. 무측천이 여황제에 등극한 나이는 67세. 중국황제 중 즉위한 나이가 가장 많은 또한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황제로 역사에 회자 된다. 진평왕이 54년간 장기집권하는 바람에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사실상 50여세가 넘어서 왕이된 사실을 김춘추 등 신라의 사신들로부터 상세히 이야기 들은 무측천(武則天)은 이를 통해 대망을 불태웠는지도 모른다. 진덕여왕(647-654) 재임기간은 당태종의 후궁에서 태종사망(649)으로 감은사 비구니로 들어가는 비운(悲運) 속에서도 결코 대망의 꿈을 버리지 않다가 남편의 1년 제삿날 찾아온 당태종을 꼬셔 다시 입궁하는 화려한 재기를 펼치는 등 무측천과 중국 역사에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각설하고 진덕여왕은 신라진골의 마지막 왕이자 신라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짐과 동시에 중국 역사를 바꾸어버린 측천무후에게 대망을 씨앗을 싹트게한 훌륭한 여걸이었다 생각한다. 현곡면 오류리의 전(傳) 진덕여왕릉엔 아직도 따스한 햇살이 비추고 있을 것이다.
사진: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의 전(傳) 진덕여왕릉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