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읍면동 23곳을 따라가며 복지 현장을 들여다본 지난 몇 달간, 머릿속에 하나의 결론이 남았다. 복지는 제도나 정책이 아니라, 결국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공무원 한 명, 위원 한 명, 자원봉사자 한 명이 쌓아올린 현장의 기록은 숫자와 보고서로는 결코 다 담아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지역사회보장협의체는 각 읍면동마다 구성과 규모, 특화사업도 모두 달랐지만, 공통된 기조가 있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일을, 당장 할 수 있는 사람이 먼저 시작한다’는 것. 어떤 곳은 차량도 부족해 자전거에 반찬을 싣고 다녔고, 어떤 곳은 무거운 전기장판을 낡은 승합차에 실어 겨울철 고립가구를 찾았다. 겉으로는 소소한 일이지만, 누군가의 삶에 있어 그것은 생존에 가까운 의미였다. 예산은 빠듯했다. 어느 곳은 외부 후원이 끊겨 스스로 회비를 걷기 시작했고, 어느 곳은 형편이 어려운 이웃에게 쓰기 위해 몇 년째 모아온 비상금을 조심스레 꺼냈다. 행정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이들은 자기 발로 걸어가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한 민간위원장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우리가 아니면 아무도 안 하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황남동 다빈복지단의 정경자 공공위원장은 이렇게 전했다. “여기 위원님들은 다 오래전부터 이 지역을 지켜오신 분들이에요. 얼굴을 보면 누구 사정인지 바로 알아요. 그래서 단합도 잘 되고, 속도도 빨라요.” 그 말처럼, 이 조직의 핵심은 네트워크였다. 행정 문서를 거치지 않아도, 공식적인 절차를 밟지 않아도, 신뢰 하나로 연결된 작은 마을 단위의 복지망. 그것이 진짜 지역사회보장협의체의 힘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는 황남동에서 만난 박성진 민간위원장의 이야기였다. 부모 없이 장애를 가진 남매가 10년 넘게 쓰레기 더미 속에서 지냈던 가정을 발견하고, 일주일간 위원들과 청소를 해 트럭 7대 분량의 쓰레기를 치웠다는 일화. 아무도 나서지 않았던 문제를, 조용히 시작하고 끝낸 이들의 헌신은 어떤 뉴스보다 묵직했다. 이처럼 이번 취재를 통해 마주한 것은 ‘성과’나 ‘지표’가 아니라, 매일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자원봉사자라는 이름도, 복지담당이라는 직함도 필요 없이, 그저 ‘누군가를 돕고 싶어서’ 시작된 발걸음. 이들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지역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불을 켜고 있는 존재들이다. 물론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고령화는 심화되고, 복지수요는 늘어나는데 자원은 줄어들고 있다. 고독사 예방, 긴급 위기 발굴, 청년 참여 확대 등 해결해야 할 숙제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23개 지역 협의체의 현장을 통해 확인한 건, 복지는 여전히 가능하다는 희망이었다. 제도보다 앞서 실천하는 사람들, 정책보다 먼저 움직이는 연대의 힘이 지역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제 경주 전 지역의 협의체 취재는 끝났지만, 이 기록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복지는 결국 ‘누가 하느냐’의 문제이고, 경주에는 이미 그 역할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복지의 최전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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