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첫 번째 궁궐 자리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기원전 33년, ‘금성’ 안에 궁궐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금성의 위치는 지금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창림사 자리로 알려진 터를 조사했지만 궁궐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최근에는 계림과 월성 북쪽 일대가 금성터로 추정된다는 새로운 학설도 제기됐다.
확실한 사실은 금성 이후의 궁궐은 지금의 월성이라는 점이다. 이곳은 경주 인왕동,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2대 왕 탈해가 왕이 되기 전 호공이라는 사람의 집을 빼앗아 살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당시 월성이 살기 좋은 위치였음을 암시한다.
월성은 초승달 모양의 흙으로 쌓은 토성이라 ‘월성’ 또는 ‘신월성’이라 불렸고, ‘재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이는 임금이 사는 성이라는 뜻으로 신라 후기에 주로 사용된 표현이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반월성’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쓰였지만 현재는 공식 명칭인 ‘경주 월성’이 맞다.
월성은 둘레가 약 2.3km에 이르는 큰 토성이다. 안에는 왕궁 건물터가 있었고 성 바깥에는 해자(성 주변의 물길)도 있었다. 하지만 이 궁궐은 점차 성벽 바깥으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7세기 중엽에는 선덕여왕이 건립한 천문 관측대 ‘첨성대’, 문무왕이 만든 인공 연못 ‘월지(안압지)’, 그 주변의 동궁(태자의 궁전)까지 포함되며 궁궐의 범위는 크게 넓어졌다.
실제로 1970년대에 월지 서편을 발굴한 결과 판석으로 만든 단 위에 중앙 기둥이 없는 독특한 구조의 세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돼 있었고, 이 건물들을 회랑(복도형 건물)으로 둘러싼 구조였다. 이는 왕이 머물던 정전(조원전)이나 잔치를 베풀던 임해전과 같은 주요 궁전으로 추정된다.
반면, 월지 동쪽 지역에서는 태자의 공간으로 보이는 조금 더 격이 낮은 건물들과 연못이 발견돼 왕과 태자의 공간이 명확히 구분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월성은 신라의 제4대 파사왕 때 본격적으로 성으로 쌓였으며, 7세기 후반엔 궁역이 성 밖으로 넓어지며 새로운 중심 궁궐로 자리 잡았다. 신라가 멸망하고 마지막 왕 경순왕이 수도를 떠난 이후에도 이곳은 한동안 행정 중심지로 사용됐다. 고려 현종 때까지도 주요 관청으로 기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월성은 오랜 세월 동안 신라의 정치·문화 중심지로 기능했던 신라 왕궁의 상징이다. 지금도 발굴과 연구가 이어지며 이 땅의 깊은 역사를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