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APEC 정상회의 개최지인 경주는 지난 2월 24일부터 3월 9일까지 제1차 고위관리회의(SOM1)를 시작으로, 오는 8월 ‘문화고위급대화(8.26~8.28)’와 10월 말~11월 초 정상회의를 앞두고 있다. 우리나라가 APEC 의장국으로서 외교적 리더십을 발휘할 이 중대한 시점은, 동시에 찬란한 신라 천년문화와 불교 예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분과 유적 등 경주의 풍부한 역사·문화 자산과 정신적 유산을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다.
현재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의 정상회의장과 정상이 사용할 최고급 객실(PRS)의 개·보수를 비롯해 국립경주박물관 중앙마당의 만찬장, HICO 야외 국제미디어센터, 그리고 경주엑스포대공원의 대한민국 산업 전시관 등 핵심 인프라가 새롭게 조성되고 있다. 특히 이번 APEC의 주제인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가능한 내일(Building a Sustainable Tomorrow)’은 경제뿐 아니라 문화·환경·사회 전반의 지속가능성을 강조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지난해 파리올림픽은 기존 시설의 재활용과 최소한의 신축을 통해 ‘가장 친환경적인 올림픽’을 지향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경주 역시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신규 시설 건립을 최소화하고 기존 공간을 재생·활용하며, 그 안에 의미 있는 문화 콘텐츠를 담는 방식으로 ‘기억에 남는 기념’을 만들어야 한다.
올 8월 APEC 역사상 처음 개최되는 ‘문화고위급대화’는 문화가 경제와 외교를 연결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민과 함께하는 문화 APEC’을 실현하기 위해 화랑도와 신라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창작 공연(8~11월), 지역·청년 예술인 중심의 전통공연(9~10월) 및 고분 콘서트(10월), 국제경주역사포럼(9월), 세계유산축전(9~10월) 등 경주의 정체성을 담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행사를 집약하고 확산할 상징적 공간으로, 기존 시설을 재활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바로 경주엑스포대공원이다. 이곳은 단순한 행사장이 아닌, 시민과 세계인이 함께 향유할 수 있는 열린 문화공간이자 ‘살아 있는 기념공간’으로 거듭나 APEC 이후에도 레거시(Legacy, 유산)로 지속될 수 있다.
2025 APEC 경주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APEC 기념공원을 새로 조성하기보다는, 기존 공간인 경주엑스포대공원을 개·보수하고 콘텐츠를 강화해 활용하는 것이 훨씬 더 지속가능하고 효과적이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경주 전체를 신라의 정신과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상징하는 공간으로 발전시켜야 하며, 지역 주도의 예술 프로그램과 청년예술인의 참여를 통해 APEC 이후에도 일상 속에서 문화를 체험하며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살아 숨 쉬는 기억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신규 공원 건립 대신 경주엑스포대공원 내 APEC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거나, 경주엑스포대공원을 ‘APEC 경주 기념공원(가칭)’으로 개명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더불어, APEC 정상회의 이후에는 공원을 무료 개방해 세계인과 지역민 모두가 쉽게 접근하고 향유할 수 있는 열린 문화 플랫폼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새로운 공원 조성에 투입될 예산과 자원은 오히려 지역 예술단체와 청년예술인 지원, 시민 참여형 프로그램 개발, 글로벌 콘텐츠 확충에 투자될 때 더 큰 사회적·문화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공공 공간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장기간의 사회적 거리두기와 외부 활동 제한은 ‘열린 공간’의 필요성과 사람들을 모으는 ‘구심적 장소’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경주엑스포대공원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충족할 대표 공간으로, 자연·역사·문화를 아우르는 세계적 문화공원으로 거듭나야 한다. APEC을 계기로 엑스포공원의 일부 공간을 상시 문화예술 전시·공연용 유료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동시에 ‘APEC 기념공원’으로서의 상징성과 정체성을 강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러한 접근은 단기 행사 효과에 그치지 않고, 지역 문화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세계 속 경주의 문화적 위상을 공고히 할 것이다.
2025 APEC 경주 정상회의는 일회성 국제행사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경주를 ‘살아 숨쉬는 문화 도시’로 재탄생시키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기존 공간을 창의적으로 활용하고, 문화 콘텐츠를 심화하며, 시민과 세계인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발전시킨다면, 그것이야말로 미래 세대에 남길 가장 큰 레거시가 될 것이다.
경주는 이제 과거를 보존하는 도시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와 소통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글로벌 문화도시’로 도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