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연방(소련)은 자국의 유명 발레단의 해외투어를 통해 체제를 미화하고 외화벌이를 도모했다. 발레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교묘하게 활용한 것이다. 소련은 서방세계에서 공연을 하는 동안, 무용수들에 대한 통제를 특별히 강화했다. 망명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투어를 통해 서방세계에 눈을 뜬 무용수의 목숨을 건 모험을 내내 막을 수는 없었다. 여러 무용수가 서방에 망명했지만, 아래에서 두 무용수만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이 한창이었던 1961년, 누레예프(Rudolf Nureyev, 1938-1993)는 파리 공연 후 전격적으로 프랑스에 망명한다. 누레예프는 당시 이미 유명 발레리노의 반열에 올라있었던 터라 그의 망명은 세계적인 차원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살벌한 이념대립 속에서 누레예프를 암살하려는 시도까지도 이어졌지만, 그는 이내 망명에 성공했고, 이후 망명 러쉬의 도화선이 되었다. 망명 후 누레예프는 영국이 자랑하는 발레리나 폰테인(Margot Fonteyn, 1919-1991)과 콤비를 이루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들은 각각 23세와 42세에 처음 만났다. 누레예프는 폰테인보다 19세 연하라 언뜻 보기엔 적절한 조합인지 의심이 든다. 하지만 당시 에이징 커브를 걷고 있던 폰테인은 젊은 누레예프를 만나면서 발레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되고, 환갑이 넘는 나이까지 무대에 서는 저력을 발휘한다. 그들은 17년간 700회 이상 함께 공연했다.    특히 1964년 ‘백조의 호수’ 공연에서의 커튼콜 89회는 누레예프와 폰테인이 보유하고 있는 불멸의 기록이다. 영혼의 단짝, 찰떡 콤비가 아닐 수 없다. 프랑스 영화감독 클로드 를루슈(Claude Lelouch, 1937-)의 대작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1981)는 누레예프를 오마주한 작품이며, 최근 제작된 ‘화이트 크로우(White Crow)’(2018)는 그의 일생을 소상히 다루었다. 다음 망명자는 바리시니코프(Mikhail Baryshnikov, 1948-)이다. 그는 단신이지만 자신의 키만큼 솟아오르는 도약력과 정확한 턴 구사로 당대 최고 인기를 얻고 있던 발레리노였다. 1974년, 그는 키로프 발레단의 캐나다 순회공연을 마치고, 불과 10여 년 후 본인이 주연이 된 영화 ‘백야’의 한 장면처럼 망명에 성공한다.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바리시니코프는 아메리칸 발레 씨어터(ABT: American Ballet Theatre)에서 먼저 망명한 자국의 발레리나 마카로바(Natalia Makarova, 1940-)와 함께 낭만 발레 ‘지젤’로 데뷔하며 미국에서의 성공시대를 열어갔다. 바리시니코프는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사업가였다. 그는 ‘터닝 포인트(The Turning Point)’(1977), ‘백야(White Nights)’(1985), ‘댄서즈(Dancers)’(1987) 등 무용을 소재로 한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우리나라의 현대무용가 김설진이 그를 벤치마킹하여 KBS드라마 ‘흑기사’에 출연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미샤’(바리시니코프의 애칭)라는 향수를 출시하는가 하면, 그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 판매하기도 했다.※ 2018년 10월에 연재를 시작한 ‘클래식수다’를 165회만에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열독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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