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난 지 몇 달 후였다. 내 오래된 아일랜드 친구 레이몬드가 한국을 찾았다. 슬라이고(County Sligo)의 조그마한 섬(Coney Island)에서 태어나 미국계 회사에서 평생 샐러리맨으로 일하다 은퇴한 그는 TV로 평창 개막식을 보다가 그만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우리 가족을 통해 대한민국이 극동의 조그마한 나라쯤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토록 화려한 개막식을 열 정도였나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끝에 “이번 봄에 한국에 오고 싶나?”라고 물었더니 곧바로 “예스!”라는 답장이 왔다.
17박 19일의 한국 일본 투어 일정 중 경복궁, 진주성과 오사카성, 경주, 부산, 판문점 등을 방문하던 중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기대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그곳은 제주 4.3평화공원이었다. 수천 개의 이름이 새겨진 위령탑 앞에서 그는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데자뷰(deja vu)~”
레이몬드의 조국 아일랜드는 1916년 이스터 라이징(Easter Rising, 부활절에 즈음한 독립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영국 식민통치에 맞서 봉기했다. 무장투쟁은 실패했지만 민심은 움직였고 1921년 마침내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자치국이 탄생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자유국 설립을 위한 영국과의 조약을 놓고 독립파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난 것이다.
그 결과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1922년부터 1923년까지, 공화주의자와 자유국 지지자 사이의 무장 충돌은 약 2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숫자만 본다면 제주보다 훨씬 적지만 내전의 상처는 오래 지속되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모두 같은 편에서 싸웠던 ‘동지’였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마음을 찢어 놓았다. 아일랜드는 이 상처를 정치 체제 안으로 흡수했다. 내전을 겪은 양측은 훗날 피나 페일(Fianna Fáil, 아일랜드어로 “Soldiers of Destiny”)과 피나 게일(Fine Gael, 아일랜드어로 “Family of the Gaels”)이라는 정치 세력으로 발전해 의회민주주의 체제의 양대 축이 되었다.
제주와 아일랜드는 모두 ‘해방’ 직후 ‘분열’이라는 숙제를 마주했다. 그러나 그 분열의 성격은 달랐다. 제주 4.3은 냉전 질서 속에서 반공주의라는 거대한 프레임 아래 진행되었다. ‘좌익=위험분자’라는 이분법은 민간인의 생명을 정치적 희생물로 전락시켰다. 반면 아일랜드의 내전은 ‘누가 진정한 독립을 원하는가’라는 문제에서 출발했다. 조약에 찬성한 측은 실리를 택했고 반대한 측은 원칙을 고수했다. 이념보다 독립의 ‘형태’와 ‘주체성’이 갈등의 핵심이었다. 영국은 내전에서 한발 물러섰고, 싸움은 오롯이 아일랜드인들의 몫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기억은 남는다’. 그해 봄 4.3공원에서 레이몬드는 위령탑 앞에서 긴 침묵 끝에 이렇게 물었다. “왜 적군도 아닌데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많은 양민을 학살하였는가?” 나는 그의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건, 이 두 섬 모두 아직도 그날의 총성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일랜드는 비교적 빠르게 정치적 합의를 이루었지만, 제주는 그 진실을 이야기하는 데 무려 반세기 이상이 걸렸다. ‘빨갱이’라는 단어는 가족의 생계를 위협했고 묘비 하나 세우는 것조차 꿈꿀 수 없는 시대가 있었다.
우리가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기억하지 않으면 또다시 반복된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다. 아일랜드는 내전의 기억을 정당 체제로 녹여냈고 지금도 조약 반대파와 찬성파가 서로 다른 이름으로 정치를 한다. 그 이름들은 총 대신 토론을 선택했다. 제주는 이제야 그 첫걸음을 떼고 있다. ‘4.3 특별법’, ‘진상규명’, ‘대통령 사과’ 등이 이어졌지만, 여전히 완전한 화해로 가는 길은 멀다. 정치인이 영령탑 앞에서 항의받는 장면은 바로 그 길의 험난함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이념이 사람보다 앞설 수 있나?” 레이몬드가 나에게 한 물음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오늘의 우리 사회에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기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너무도 쉽게 사람보다 이념을 앞세워 왔던가.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 대가를 침묵으로 치러왔던가. 기억은 과거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복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