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세계문화의 중심 파리에서 데뷔하며 일약 돌풍을 일으킨 러시아 발레단 ‘발레뤼스’는 수장 디아길레프의 사망(1929년)으로 딱 20년 만에 해체된다. 디아길레프는 발레뤼스 그 자체로 대체불가한 인물이었기에 이 단체는 그냥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이미 세계 최정상급 실력을 갖추고 있던 발레뤼스의 무용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전 세계로 뿔뿔이 훑어져 발레의 전도사가 되었다. 러시아혁명으로 정국이 불안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럽 체류나 미국행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리파르(Serge Lifar, 1905-1986)는 니진스킨(Vaslav Nijinsky, 1890-1950), 마신(Leonid Myasin, 1896-1979)의 계보(동성애자인 디아길레프의 애인의 계보이기도 하다)를 잇는 발레뤼스의 마지막 남성 스타 무용수이다. 그는 발레뤼스가 해체된 바로 그 해인 1929년에 파리오페라발레극장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하여 19세기 말 이래 계속 내리막길을 걷던 프랑스 발레를 혁신시켰다. 아일랜드 출신의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발루아(Ninette de Valois, 1898-2001)는 103살을 산 장수무용가로 유명하다. 그녀는 1931년 영국 런던에서 빅-웰스발레단(The Vic-Wells Ballet)을 설립한다. 이 단체는 1940년 새들러스웰스발레단(Sadler’s Wells Ballet)으로 개명되고, 1957년부터는 로열발레단(The Royal Ballet)이라는 지금의 명칭을 얻게 된다. 로열발레단은 폰테인(Margot Fonteyn, 1919-1991)이라는 걸출한 발레리나들을 배출한 오늘날 가장 유명한 발레단 중의 하나이다. 멀리 미국으로 건너간 무용수도 있다. 발레뤼스 후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안무가였던 발란신(George Balanchine, 1904-1983)이다. 그는 1934년 후원자 커스틴(Lincoln Kirstein, 1907-1996)을 초청을 받아 도미한 후 이듬해인 1935년 아메리칸 발레단을 공동 설립하는데, 이 단체는 1948년 뉴욕시티발레단으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른다. 미국에 발레가 알려진 건 18세기 후반이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미국발레가 독자적인 양식을 보일 만큼 발전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러시아인 발란신의 노력에 힘입었다.   오늘날 호두까기인형이 발레단의 연말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것은 뉴욕시티발레단의 공이 크다. 1954년 발란신이 뉴욕시티발레단의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호두까기인형을 크리스마스 시즌 작품으로 무대에 올린 것이다. 당시 자녀가 있는 뉴욕의 중산층 가정은 모두 뉴욕시티발레단에서 하는 호두까기인형을 관람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발란신 버전으로 뉴욕에서 초연한 호두까기인형은 지금도 이 버전을 고수하고 있다. 발레뤼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전 세계로 나간 발레의 전도사들 덕분에 발레뤼스가 현대발레에 가진 지분은 아직도 상당하다. 해체 후 약 100년이 지난 요즘, 발레뤼스, 디아길레프, 니진스키 등이 도서, 공연 등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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