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황남동, 교촌마을 인근에 자리한 숭문대. 커튼을 젖히고 들어서면 바닥에 하늘이 흐른다. 위에서 내려다본 경주가 천천히 내려앉고 왕궁 월성을 감싸던 해자의 물결이 되살아난다. 디지털로 재현된 신라의 풍경 안에서 아이들은 달리고 어른은 멈춰 선다. 천년 전 풍경이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해자의 진흙 속에서 건져올린 신라의 시간
숭문대(崇文臺)는 신라 왕궁이었던 월성의 북측 성벽 아래, 방어를 위해 조성된 해자의 퇴적층을 중심으로 유물 발굴, 연구, 전시, 체험이 이루어지는 복합문화공간이다.
‘학문을 숭상하던 신라의 정신’을 이름에 담은 이 공간은 신라왕경 복원사업의 핵심 거점으로 2023년 정식 개관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는 2015년부터 2021년까지 월성 해자의 퇴적층을 정밀 조사해 동물의 뼈, 식물 씨앗, 토우, 배모양 목제품, 목간 등 유기질 유물을 다량으로 확인했다.
물이 머물며 진흙이 쌓였고 산소가 차단된 환경은 유물 보존에 이상적인 조건을 만들었다. 썩지 않고 남은 씨앗과 나무조각, 동물뼈는 1500년 전 신라인의 일상과 식생활, 의례와 교류를 고스란히 담아 지금에 전한다.
실감 영상으로 복원된 신라의 사계절
숭문대 전시의 중심은 ‘실감 월성해자’ 전시다. 1전시실에서는 해자의 조성과 구조 변화, 수생식물의 생태와 신라의 사계절이 대형 4면 영상과 바닥 반응형 시스템을 통해 펼쳐진다.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영상이 반응하며 몰입감을 더한다. 관람 동선 중간에는 토우, 배모양 목제품, 씨앗, 곰 뼈를 모티프로 한 감각적 영상이 상영되며, 2전시실에서는 유물 기반 체험이 이어진다.
식물 씨앗은 원형보다 8~10배 크기로 확대됐고 동물뼈는 실제 크기로 복제됐다. 관람객이 가까이 다가가면 유물 명칭과 정보가 자동으로 나타나며 모든 구성은 실제 발굴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전시 말미에는 조사 현장 영상이 상영돼 체험의 근거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발굴에서 전시까지 한 자리에서 이어지는 유산 관리
숭문대 전시동 옆에는 고환경 연구동이 자리해있다. 그곳에서는 목재 유물의 수분 상태 유지, 씨앗의 미세 구조 분석, 토우의 흙 성분 조사 등 유물 보존과 과학적 분석이 함께 이루어진다. 발굴과 연구, 전시가 한 공간에서 이뤄지는 통합형 시스템인 것. 땅에서 나온 유물이 다시 빛을 보기까지 모든 과정이 이곳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또 숭문대는 시민과 유산이 만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시동 세미나실에서는 연중 상설 체험 프로그램과 인문학 강좌가 열린다. 대표 프로그램인 ‘월성이랑 발굴교실’은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4시 전 연령 대상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며, 수·금요일에는 ‘월성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화·목요일에는 ‘역사 품은 나무조각’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전시 연계 해설은 숭문대 로비에서 매일 다섯 차례(10시, 11시, 14시, 15시, 16시) 선착순 30명을 대상으로 별도 예약 없이 진행된다.
숭문대를 나서기 전 한켠에 조성된 포토존이 발길을 붙든다. 가시연꽃과 자라풀, 배모양 목제품이 어두운 바닥 위에 놓이고, 보랏빛 배경과 달이 공간을 감싼다. 해자에서 출토된 식물과 유물을 모티브로 재구성한 장식이지만 설명은 많지 않다.
관람을 마친 이들이 한 번쯤 멈춰 서는 이유는 그것이 신라 천 년의 흔적을 되새기는 마지막 장면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관람 정보]
장소 : 경주시 놋전2길 24-43 (교촌한옥마을 인근) 운영시간 : 09:30~17:30 (월요일, 설날, 추석 당일 휴관) / 관람료 : 무료전시 및 체험 : 실감 월성해자 반응형 미디어 구성(영상 23분), 출토 유물 기반 체험(동물 뼈, 식물 씨앗, 토우, 목제 배), 포토존, 월성이랑 교육 프로그램, 인문학 강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