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서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50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길을 외길이 아니라 ‘붓길’이라 부릅니다” 일흔일곱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정수암 선생은 매일 붓을 든다. 1975년 경주서도학원에 입문한 이래 거르지 않은 연습. 전직 초등학교 교장, 지금은 후학을 지도하는 서예 지도자. 교육자이자 예술가로 살아온 그의 시간이 ‘붓길 50년’이라는 이름으로 경주문화관1918에 펼쳐졌다.
그가 서예가가 된 계기는 어릴 적 국민학교 칠판 글씨를 보며 품은 질문 하나였다.
“선생님, 글씨를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좋아하면 잘하게 된다”는 단순한 답이 오히려 오래 남았다.
정수암 선생은 자신의 길을 ‘외길’이라 부르지 않는다. “외길은 한 직업에 몰두한 이들을 위한 말이죠. 저는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붓을 들었습니다. 제 길은 예술과 교육이 나란히 걸어온 ‘붓길’입니다”
교직 시절에도 그는 방과 후마다 학생들에게 서예를 가르쳤고 매 전근지마다 ‘가훈 써주기’ 행사를 이어가며 지역에 손글씨 문화를 퍼뜨렸다. 당시 써준 가훈은 1000가정을 넘는다. “글씨는 마음을 닮습니다. 반듯한 글씨는 반듯한 자세에서 나오죠. 서예는 인격을 다듬는 교육이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에서 정수암 선생은 “서예를 통해 내 삶을 돌아보는 자리이자 나누는 무대”라고 말했다. 전시는 세 개의 축으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는 한글서예의 현대적 재해석. 훈민정음 해례본 일부를 서예작으로 풀어내고, 손글씨 문화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다시 ‘쓰는 일’의 가치를 되새긴다. 두 번째는 우리 서체의 복원과 계승. 고운 최치원의 ‘진감선사비문’을 한지 족자에 온전히 옮긴 작품이 대표적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문, 임신서기석 등 고대 비문의 필체를 재현하며 중국 서체의 모방이 아닌 ‘한국적 필법’의 독립을 선언한것이다.
세 번째는 삶의 여백에 대한 성찰. 전시장 한편에는 덜 채워진 족자가 걸려 있다. 자서전의 일부 문장을 옮긴 이 족자엔 문장이 끝나지 않고 여백이 남아 있다.
그는 말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삶이 완성되지 않죠. 그래서 여백은 저 자신이 채워갈 공간입니다”
정수암 선생의 교육 철학은 서예에서 비롯됐다.
“교과서가 하지 못하는 일을 글씨가 해냈습니다. 아이들에게 조용한 자신감을 심어줬어요”
그의 글씨는 자유롭다. 기본을 지키되 틀에 갇히지 않는다. 정형과 파격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씨는 그가 살아온 방식과도 닮았다. 수십년간 학교에서 지금은 서실에서 그는 서예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봤다.
“서예는 도구가 삶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글씨를 통해 사람을 가르쳤고 함께 배웠죠. 저는 지금도 매일 배우는 중입니다”
디지털 시대, 손글씨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정수암 선생은 젊은 세대에게 서예를 낡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손글씨는 가장 개인적이고 순수한 표현 형식이자 정서 회복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최근 그는 ‘신천자문’을 바탕으로 한글 해설과 광개토대왕비문, 독립운동가들의 시문을 융합한 작품을 선보였다. 전통 서체를 오늘의 언어로 번역하는 이 작업은 서예가 곧 ‘역사적 기억을 쓰는 예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붓을 놓는 날까지, 나는 오늘도 배우는 사람입니다”
전시장 한켠 가리개에는 그가 오랜 세월 주고받은 연하장 그림들이 있다. 누군가는 선생이 써준 가훈을 아직도 거실에 걸어두고 있다고 전해왔다.
그는 말했다. “이 모든 시간은 나 혼자의 것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의 응원과 격려 덕분에 제가 계속 붓을 들 수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저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이 시대를 함께한 분들과의 시간입니다”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글씨도 마찬가지다.
그가 쓴 모든 글씨엔 마음이 있고, 시간이 있고, 무엇보다 배움이 있다.
그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붓길이다.
전시는 6월 1일까지.